소설리스트

창염의 피닉스-427화 (427/1,497)

〈 427화 〉1부 18장 9

집행관 백희아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번에는 기자회견과는 사뭇 다른 형태의 공식 발표였다. 회견장에 기자를 따로 부르지 않았고, 집행관의 발표를 듣고자 하는 이들은 발표가 진행될 영상의 주소를 입력했다.

그리고 전국 곳곳에 설치된 설치형 마도 기어에서 집행관이 모습을 드러냈다. 언제나처럼 베레모와 제복 차림으로 나타난 집행관은 홀로그램으로서 대중의 앞에 섰다.

- 반갑습니다, 여러분. 집행관 백희아입니다.

기자들의 앞에 서있을 때와는 확연히 다른 편안한 얼굴에 사람들은 속으로 안도했다. 항상 비장한 각오를 내비치며 말할 때는 갑자기 멕시코로 간다거나, 평양을 공략한다거나 하는 말을 내뱉기 일쑤였다.

- 여러분의 앞에 선 이유는 다름이 아니오라, 익일 10시 00분에 있을 외국으로의 원정을 말씀드리고자 이 자리에 섰습니다.

예상외였다. 집행관이 원정 얘기를 꺼낼 거라고 사람들이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 뜸을 들이며 길게 이야기하는 적은 처음이었다. 집행관은 주머니에서 종이를 꺼내들었고, 그 종이는 바로 사람들이 볼 수 있게 확대되었다.

- 이번 원정은 소수인원으로 전세계 여러 곳에 히어로들과 헌터들을 파견하고자 하는 광역 파견입니다. 명단은 보시는 바와 같이 이러합니다.

멕시코 원정에 참여했던 이들, 그리고 한국에서 대기를 하고 있던 이들이 모두 뒤섞여 해외 곳곳으로 원정을 나가기로 정해졌다. 브라질, 아르헨티나, 남아공, 가나, 파리, 사우디아라비아, 카자흐스탄 등등 그야말로 전세계에 히어로들을 뿌리는 셈이나 다름 없었다.

- 인도네시아에 우사를 필두로 한 M팀이 갑니다. 명단은 아래에 보시는 바와 같으며, 다음 N팀으로는....

집행관이 처음으로 말을 머뭇거렸다.

- 저, 그리고 청화, 그리고 이승형. 이상 3인은 N팀으로 편성하여 터기, 이스탄불로 갈 예정입니다.

설마하던 이름의 등장. 사람들은 집행관이나 청화의 이동보다 이승형이 오랜 칩거를 깨고 전면에 나선다는 사실에 경악했다. 그는 도대체 어떤 멘탈을 가지고 있길래 벌써부터 대외적으로 활동을 하기 시작하는 건가. 혹시 다시 관계가 잘 수습되었을까?

- ...그리고 행여나 오해를 살까봐 미리 말씀드리자면.

집행관이 처음으로 한숨을 내쉬며 씁쓸하게 웃었다.

- 가루라는 이번 원정에 참여하지 않습니다.

수습은 커녕, 확인 사살이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승형의 SNS에는 애도의 물결이 솟구쳤다.

* * *

<밤 10시, 백나로 호 회의장.>

"저 아직 안 죽었는데 사람들이 왜 자꾸 이러는 걸까요."

"마음이 죽었다고 생각하는 거죠. 마음이. 특히 다들 이런 고통을 겪은 사람들이 있으면 더더욱."

전세계적으로 이승형에 대한 동정 여론이 들끓는 가운데, 동시에 금태양에 대한 비난 여론도 확산되기 시작했다. 그 여론의 분화를 통해 사람들의 성적 취향이 여실히 드러나게 되었지만, 적어도 화권의 슬픈 연애사에 대한 사람들의 동정 여론은 끊임없이 확산되고 있었다.

"계획대로 잘 되고 있어서 좋네요. 벌써 화권의 SNS에 물린 여자들만 족히 수 천이 넘어요. 심지어 그중에 B, A급 이능력자를 추려봐도 수 백명에 이르죠."

백희아는 이승형의 SNS를 분석하며 희열을 느끼고 있었다. 중간중간 이승형이 연인을 빼앗긴 것에 조롱하는 자들도 있기는 했지만, 이승형을 위로하며 자신의 나라로 오기를 간절히 바라는 자들이 많았다.

"설마 그 몰카 비디오가 널리 퍼진게 이런 식으로 될 줄이야."

"상황을 잘 이용한 거죠. 어차피 퍼진 건 퍼진거고, 그걸 가지고 세계 평화를 위한 방향으로 잘 활용한다면 되는 거 아닐까요?"

"글쎄요. 피닉스 님, 만약에 피닉스 님이 같은 상황이 되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누구냐에 따라 달라지겠죠."

만약 내가 창염과 타임스퀘어 광장에서 사랑을 나눌 수만 있다면, 나는 타임스퀘어의 포토존에 직접 창염을 데리고 가서 허리를 흔들 것이다. 설령 창염이 부끄러워서 제 몸을 태양빛에 숨긴다고 할지라도.

"익숙해지세요. 미래에는 결계치지 않는 이상, 사실상 히어로나 헌터들의 행위는 전세계에 퍼지기 마련이에요."

"그게 가능합니까? 그...제 상황 같은게 저만의 일이 아니란 말씀이십니까?"

"미래에서 이런 일은 일상이랍니다. 세상에 이능력을 자기 욕망을 충족하는데 쓰는 파파라치가 너무나도 많죠. 투명화 능력을 가진 놈들부터 시작해서, 시간 정지 능력, 최면 능력, 심지어 세뇌 능력까지. 걔들이 다 뭐에 쓰겠어요? 다 그짓 하는데 쓰지."

"말 그대로 빌런이군요."

"괴인이기도 하고."

그리고 그 괴인들은 전세계로 퍼져나가는 청화단에 의해서 퇴치될 것이다. 그리고 괴인 전용 수용소에 들어가 죗값을 치르기 전에, 퇴치 직전 '아지다하카 만세'라고 외치며 죽는 건 모두 똑같을 것이다. 아지다하카를 향한 치욕. 그것이 괴인들이 죽기 직전에 아지다하카를 찬양하는 이유였다. 실제로는 아니지만.

"그러니까 화권, 당신은 무조건 이번 일을 성공시켜야 합니다. 당신의 명예를 위해서, 가루라의 명예를 위해서, 세계의 평화를 위해서."

"정말로 이런 작전으로 세계의 평화를 가져올 수 있는 겁니까...?"

이승형은 자신에게 주어진 각본을 두고 진심으로 걱정했다.

"걱정마요. 승률 10할이니까."

하지만 나와 정령들, 그리고 청화단 모든 간부들이 머리를 맞대어 만든 작전이니 결코 틀릴 리가 없었다. 아무리 변수가 많이 생겨나도 무조건 성공한다. 나는 이승형을 향해 엄지를 척 들어올렸다.

"당신은 그냥 현지에서 적당히 방탕한 생활을 즐기면 돼요."

"방탕한 생활이라고 해도.... 제가 그런 쪽으로는 잘 몰라서."

이승형은 누구 조카 답지 않게 바른생활 사나이였다. 오히려 선의철에 대한 반감 때문에 반듯한 생활을 살아온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제는 그 바른 생활 이미지를 과감히 벗어던질 필요가 있었다.

"사랑하는 연인이 고무신 거꾸로 신었고, 남자는 술에 취해 비틀거리고, 그리고 목적을 가진 여자가 접근. 크, 얼마나 멋진 작전이에요?"

"......그러니까 제가 일과 시간 이외에는 클럽에서 문란하게 지내는게 작전의 요지란 말씀이잖습니까."

"합법적으로 일탈을 즐길 수 있는데 왜 그래요?"

"그게, 여러모로 가루라에게 미안해서."

이승형은 아무 여자와 손을 잡고 헬렐레 노는 것을 꺼려했다. 하지만 나는 그 진실을 알고 있다.

"가루라가 좀 잘하죠? 당신 피지컬 받아내는 사람 거의 없었고, 가루라 즈음은 되어야 맞상대가 가능하니까."

"......스승님?"

"솔직히 얘기해서 이제 가루라 없으면 못 사는 몸이 되어버렸잖아요. 푸흐흐."

"...그, 지금 집행관 님도 듣고 계신데 그런 말씀은."

이승형은 상당히 민망해했다. 나야 이미 성별을 초월해 종족이 다르니 그렇다 치더라도, 옆에서 가만히 정보를 찾는 백희아는 아무 내색도 없이 이야기를 듣고만 있었다.

"화권, 걱정마십시오."

백희아는 뜨뜻한 미소로 이승형에게 고개를 숙였다.

"인간과 사도간의 혼인 관계에 관하여 법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도록 조치를 취해두겠습니다. 아, 사도 뿐만 아니라 정령도."

"백희아 아가씨?"

"피닉스 님, 오해마세요. 저는 어디까지나 각계각층에서 전해져오는 여론을 수렴하여 법안이 만들어졌으면 좋겠다, 이런 의중을 전달할 뿐입니다."

각계각층이 어디 사는 누구누구인지 안 봐도 훤했다. 정말로 지독하다 싶었지만 나도 나쁠 건 없었다. 결과적으로 내가 바라는 이상도 그쪽이었으니.

"좋아요. 나중에 청화 이름이 필요하면 쓰도록 하세요."

"그야 당연하지요, 지금 일반 대중들이 가장 신경쓰고 있는 여론은 화권과 가루라도 그렇지만 누구보다도 청화와 피닉스인 걸요. 지금 두 커플의 관계가 성별만 다르지 워낙 비슷한데, 행여나 화권같은 일이 청화에게도 일어날까봐 얼마나 전전긍긍하고 있다고요."

"우웩."

절로 헛구역질이 튀어나왔다. 화권조차도 표정이 일그러졌다. 나나 화권이나 서로를 엮어대는 건 생리적으로 거부감이 들었다.

"스승님이 누군가에게 홀린다는 건.... 음.... 그럴 가능성도 있군요?"

"뭐요?"

"주변에 여성분들이 많지 않으십니까. 정령이시니 성별을 딱히 따지시지는 않으실테고."

"......뭐, 틀린 말은 아니긴 한데."

나는 섣불리 대답하지 못했다. 이승형만 있으면 모를까, 백희아가 저렇게 초롱초롱 눈을 빛내며 듣고있으니 쉽게 대답하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화제를 바로 돌려버렸다.

"그렇죠. 저도 홀릴 수 있는 것처럼, 당신도 아지다하카에게 홀릴 수 있죠. 당신은 남 걱정을 하기 전에 자기 걱정이나 하세요."

"결국 또 제 문제로 돌아왔군요. ...하지만 일탈이라는 거 그리 쉬운게 아니잖습니까."

"걱정마요. 그걸 위해 제가 특별한 주문을 준비했으니까."

나는 화권에게 임무에 열성을 다하지 않고는 베기지 못할 마법의 주문을 읊었다.

"이번 임무에 실패하면 당신의 가루라, 흑염룡으로 대체될 겁니다."

"......의욕을 내게하시는 말씀 맞으시죠?"

"물론."

맞겠지...?

* * *

이번 원정은 대부분의 인원이 3인 1조로 편성되었다. 그들은 전부 각자 파견된 국가, 그리고 그 국가와 인접한 국가에서 괴인들을 처치할 것이다.

빻빻괴인.

나는 그냥 자연 발생체라고 원작 그대로 부르고 싶었지만, 그들의 행동을 본 몇몇 간부들이 은어로 이름을 붙여버렸다.

"이름 부르는 것도 힘들지 않아요?"

"어떻게 부르든 뭔 상관이냐."

"그건 그렇죠."

나는 덕배와 함께 유동인구가 많은 신서울에 잠입했다. 사람들이 전혀 눈치채지 못하게 결계까지 펼쳤고, 우리는 케밥을 먹으며 사람들의 반응을 살폈다.

"여전히 히어로들 원정 나간다 하면 불안해하네요."

"석하랑이 그렇게까지 믿음을 주지는 못하고 있는 거지. 원래 부산에서만 처박혀 있었잖냐."

"솔직히 한반도 크기면 석하랑 혼자서도 감당하는 걸 넘어서, 동아시아 전체를 커버 가능하거든요? 애가 지금 그렇게까지 나설 일이 없어서 그렇지."

세계에서 가장 깊숙한 바다까지 갔다가 왔는데 아무렴 동아시아 정도는 감당해내지 못하겠는가. 결국 석하랑은 이번에도 집을 지키게 되었지만, 딱히 본인도 밖에 나가기를 바라지는 않았다.

"집순이가 집 지킨다는데 응원이나 해야죠. 집 잘 지킬 거예요. 최대 난적인 히드라가 빠져버렸으니까."

"......그래. 이번에는 아지다하카가 적이지. 썰이나 풀어봐. 히어로들 분산시키는 이유가 뭔데?"

덕배는 케밥을 한입에 씹어삼키며 말을 이었다.

"마암룡 본체 찾으면 땡 아니냐. 그거 본체 어디있는지 찾으라고 지금 퍼뜨리는 거냐? 히카리도 지금 찾지 못하고 있는데?"

"네. 그래서 스캔 반경을 조금 더 넓혀보려고요. 히카리가 만든 간부 탐지기랑 정령 탐지기, 모든 팀의 팀장들에게 탐지기가 지급되었죠."

전체 A팀부터 Z팀까지 편성이 되었고, 그중 N팀부터 R팀까지가 청화단을 비롯한 핵심 멤버들이 들어가있는 팀이었다. 간부나 정령에 관한 제반 사항을 알고있는 이들은 전부 탐지기를 들고 전세계를 누비며 아지다하카와 마암룡의 흔적을 찾을 것이다.

"비단 청화단 뿐만 아니라, 카르나나 다른 전세계의 이들도 움직일 거예요. 히어로들이 대외적으로 움직이는 동안, 우리 괴인들은 아주 조용한 곳에서 함정을 파놓는 거죠."

나는 로브의 허리춤에 체인처럼 감아놓은 코어 다발을 가리켰다. 나중에 터키행 백나로 호에 오르면 자연히 숨기게 되겠지만, 형형색색의 코어는 이번 작전에서 아지다하카를 엿먹일 최후의 수단이었다.

"아지다하카가 이승형을 홀리려고 터키로 오는게 가장 베스트겠지만, 다른 애들을 건드릴 수도 있는 거 아녜요? 그러니까 제 괴인들을 각 팀마다 하나씩 몰래 파견하는 거죠. 이런 형태로."

나는 녹색의 구슬을 하나 꺼내들어 마력을 흘렸다. 터뷸러스의 힘을 담은 녹색의 코어는 이전보다 훨씬 날카롭고 세련된 디자인으로 나를 반겼다.

"떠나기 직전에 팀장들에게 괴인의 코어 웨폰을 지급할 거예요. 유성의 전용기에 오르고 나면 수령할 수 있게끔."

"그게 애들 지키는 수단이라 이거지? 혹시나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네가 뛰쳐나가게."

"물론이죠. 본체 위치가 특정되는 순간 바로 날아갈 거예요. 아지다하카의 분신이 나타난다거나. 물론 문제의 자연발생체들이 어딘가에 숨어있는 경우라면...."

나는 활이 된 유이신을 들어올려 활 시위를 당겼다. 조준따위 필요없이, 대충 마력만 실어 날린 '푸른' 바람의 화살은 막 터미널을 빠져나가려던 금발 태닝 양아치의 스마트 워치를 조준했다.

- 아지다하카 반자이--!!

"으아악?!"

양아치의 스마트 워치에서 아지다하카를 찬양하는 외침과 함께 사람들이 남자로부터 물러났다. 손목이 날아간 남자를 중심으로 히어로들이 포위망을 펼쳤고, 남자는 몸이 뒤틀리며 괴인이 되었다. 그 모습은 마치 폐사한 복어를 연상케했다.

"이렇게 그 모습이 바로 드러날 수 있도록, 제가 힘 좀 불어넣었죠. 푸흐흐."

"뱀파이어들을 죽이려면 은제 무기로 죽여야 한다 뭐 그런 거냐?"

"그쵸."

서해무기, 유이신, 푸른깃털, 시황제, 흑사갈, 캘리펠라, ...그리고 라스푸틴 등등.

내가 지금까지 사도로 만든 이들에게 나의 불꽃을 일부 집어넣었다. 이제 이 괴인들을 무기로 사용하는 자는 이런 식으로 괴인의 정체를 만천하에 탄로나게 만들 수 있을 터.

"그거 때문에 애들마다 정령석 박느라 얼마나 개고생을 했는데요."

오직 창염만이 괴인들의 위장막을 벗겨낼 수 있었다.

잠시 뒤.

복어 괴인은 금방 히어로들에게 제압당했고, 나는 남은 케밥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슬슬 이동하죠? 한국에 있는 괴인들 완전히 뿌리를 뽑아버리게."

백나로 호가 출발하기까지 12시간.

나는 한반도 전체를 누비며 정말 알찬 시간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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