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3화 〉1부 18장 5
가을은 환속성 콤비와 함께 하룻밤을 보낸다고 했다. 여러모로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했고, 가을도 이제 어엿한 S급이니 바다쯤은 알아서 넘어올 수 있으리라.
'여차하면 전용기를 보내도 되고.'
가을의 가슴에 파묻혀 서해와 중국 대륙을 날아간 건 여러모로 쑥쓰러운 일이었다. 다시 그러기에는 많이 그랬으니, 다음에는 가루라를 보내도록 해야겠다.
"그래서 큰 맘 먹고 밤에 찾아왔는데...."
하필 둘이 동시에 있을 줄이야. 나는 우리 청화단의 아지트 옆, 유성 호텔의 펜트하우스에 있던 두 명에게 딱 걸리고 말았다. 참새를 노려보는 구렁이처럼, 둘은 내게 손을 흔들었다.
"......신서울이랑 부산에 있어야 할 사람들이 왜 여기있대요."
나는 순순히 창을 타고 넘어갔다. 둘은 아무렇지 않게 맥주를 홀짝이고 있었다. 둘이 친한 건 알지만, 이렇게 술을 마시는 건 처음 보는 일이었다.
"내사 이제는 서울에서 살게 됐다 아이가. 고향 사람들 난리나기야 했지만, 그래도 한반도 중심이라 카면 서울이지."
"서울에 출장 나온 김에 잠깐 놀러온 거예요. 이렇게 여기서 뵙네요."
석하랑, 그리고 은유하. 심지어 은유하는 본체로 올라왔다. 나는 은유하의 귀에 걸린 금빛 귀걸이에 숨이 턱 막혔다.
"......무슨 싱크로 바겐 세일도 아니고."
"이제 저희도 고객님이랑 같은 격이라는 거죠. 후후. 뿌듯하지 않으세요? 고객님 덕분에 그냥 악덕상인이었던 은유하가, 지금 광속성 최강자가 된 것에 대해서."
"네. 뿌듯하네요. ...일단 대화에 앞서 하나만 물어볼게요."
나는 둘이 자연스레 건넨 얼음컵을 들어올렸다. 석하랑이 얼음컵을 만들고, 은유하가 생맥주 기계에서 맥주를 내렸다. 나는 컵에 든 맥주를 들어올렸다.
"약 탄 거 아니죠?"
"........"
"......."
둘은 침묵했다. 나는 그걸 밑에 버려버릴까 생각도 해봤지만, 모처럼 호의이니 잔만 받기로 했다.
"아니, 그, 뭐시냐. 내나 언니야나 나름 응원한다셈치고 넣은건데...."
"피라도 넣으셨나?"
"마력을 조금 넣었어요. 이거 마시면 고객님 싱크로하시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해서."
마력이라면 다행이다. 나는 잔을 들어올렸고, 우리 셋은 얼음잔을 짠 부딪혔다. 목을 타고 넘어가는 생맥주는 시원하고 청량했다.
"당신들 마력 먹는다고 달라질 건 없어요. 예를 들어서 반한다거나. 그러니까 그런 기대하는 눈빛으로 바라봐도 아무런 변화 없습니다."
둘은 진심으로 아쉬워했다. 나는 유하의 컵을 잡고 기계에서 맥주를 내렸다.
"축하해요. 둘이서 싱크로하기 여러모로 힘들었을텐데."
"고객님께서 말씀 다 해주셨잖아요. 싱크로의 조건들. 성행위라면 저희끼리 미리 연습하고 있었으니까, 아무 문제 없습니다. 후후."
유하는 손으로 입을 가리며 낮게 웃었다. 졸지에 유하의 은밀한 행위에 대해 알게된 하랑은 떫은 얼굴이었지만, 그 은밀한 행위의 정도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그.... 언니야 그러면 카르나랑 그?"
"응. 비볐어."
"......."
하랑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시뻘게졌다. 역시 하랑은 그쪽으로는 내성이 없었다. 물론, 지금 유하는 하랑을 상대로 장난을 치고 있었다.
'남자 인형이랑 카르나가 했다거나, 카르나 남성형이랑 여자 인형이 했겠지. 아니면 청화 페이스인 바이오로이드 상대로 집단으로 했거나.'
안봐도 눈에 훤하다. 나는 기가 차서 맥주를 홀짝였다.
"언니야, 그러면 어떻게 한 건데...?"
"......훗."
유하는 조용히 검지를 입술위에 붙였다. 안물어보는게 신상에 나을 것 같았다. 그 순간, 마도기어에 문자가 날아왔다.
[YU☆HA : 고객님 생각하면서 손장난만 쳤어요. 후후.]
"하아."
절로 한숨이 나왔다. 아무래도 내가 더 음란마귀가 머릿속에 든 것 같아 자괴감이 들었다. 그리고 나는 유하가 민망하지 않도록 마도기어를 두드렸다.
"이거 마력으로 전해지는 거죠?"
"네."
"석하랑 문자로 오가는 거 다 스캔 가능해요."
"......헙."
유하는 입을 막으며 고개를 숙였다. 얼굴이 시뻘게졌던 하랑은 무표정한 얼굴로 몸을 슬쩍 뒤로 당겼다.
"...하랑아."
"응, 언니야."
"하랑이는 언니 이해하지?"
"세계 평화를 위해 카르나랑 그렇게 했다고 이해는 할게."
하랑은 두 손을 들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쪽으로는 전혀 관심없는 척 하는게 살짝 영악스러워 보였지만, 나는 하랑에게 당분간은 설설 기어야 하는 입장이었다.
아직까지 전력으로 붙으면 내가 이긴다. 하지만 적당히 손을 봐주거나 하면 내가 불리하다. 진심으로 죽일 정도가 아니면 내가 질 정도로, 석하랑은 강해졌다.
'괜히 이긴 거 가지고 나를 덮치려 들면 어떡해.'
...또다시 걱정하고 말았다. 석하랑은 히어로다. 설마 나라의, 아니 세계의 얼굴이라고 할 수 있는 여인이 나를 이겼다고 그 자리에서 덮치려 들까.
"......."
보라. 마력까지 풀어놓고 알코올에 취해서 나를 게슴츠레 바라보는 눈빛을. 은은한 미소로 나를 바라보는 저 여인은 선녀지, 색녀가 아니다.
...아닐 것이다. 나는 선녀 석하랑 설을 지지하며 화두를 던졌다.
"그래서 은유하 아가씨, 카르나랑 싱크로한 이후에는 어떻게 되나요?"
"능력 발현의 얘기죠? 어느쪽이 주가 되느냐에 따라 다른데, 카르나가 주가 되면 그냥 엄청 강해져요. 안 그래도 강했던 정령이 더 강해지죠. 고객님도 쉽게 이기지는 못할 걸요?"
"호오."
확실히 술에 취해서 그런지, 평소에는 하지 않던 도발까지 하고 있다. 그만큼 유하가 카르나와의 싱크로에 자신감이 붙었다는 말이기도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 정도로는 나를 이기지 못한다.
"저도 숨겨둔 한 수가 있으니까 괜찮아요."
"에이, 그래도."
"은유하 아가씨. 카르나가 저 이길 수 있다고 판단했으면 바로 달려들어서 이긴다음에 덮쳤을 걸요?"
"......그건 그렇네요."
싱크로에는 도달했어도 아직 부족하다고 판단하고 있는 것이다. 확실히 유하는 전투 쪽에 있어서 남들보다 떨어지는 부분은 분명했다.
"그리고 하나 더. 카르나의 강화 말고도 하나가 더 있을텐데. 그 쪽으로는 실험 안해봤어요?"
"또 있어요?"
"네. 안해봤구나. 어떤 거냐면-"
"스톱."
유하는 내 입술을 자신의 손가락으로 눌렀다. 히카리부터 그렇고 유독 입술에 터치하려는 애들이 하나 둘 늘어나고 있다. 나는 유하의 성정을 알기에, 그냥 손가락을 얼음잔으로 치우며 말을 이었다.
"X로이드와 바이오 로이드에 연동시킬 수 있어요. 백만 카르나. X로이드 하나하나가 A급 전력의 카르나가 되는 거죠. 대신 그 어떤 카르나도 S급 이상의 출력을 내지 못하지만."
"...스포당했다. 하아."
유하는 좌절했다. 아마도 자기 스스로 알아내지 못한 또다른 이능을 발견해내려고 했겠지만, 시간이 부족하지 않은가.
"너무 상심하지마요. 이미 싱크로가 이루어진 이상, 어차피 늦든 빠르든 며칠 안가서 금방 깨달았을테니까."
"이명은요?"
"개천광."
본인의 이름에 대해서 자랑스러워하는 만큼, 개천광은 싱크로 하고 나서도 개천광이었다. 그에 하랑이 헛웃음을 지었다.
"뭐야. 정령 이름이 그대로 이명이야? 지금이랑 다를게 없는데?"
"네 다음 <설야>."
"언제는 내보고 설령화라더니!"
"따질 거면 원로원에 들어간 집정관 유영호를 탓해요. 그 남자가 당신의 이명을 지었으니까. 잊었어요? 운사, 우사, 풍백, 화권, 기타 등등. 그의 입을 거친 이명은 전부 한자로 두 글자라는 걸."
그래서 석하랑은 <설야>가 되었다. 세계의 제반 상황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집정관인 만큼, 100% 노리고 지은 이명이리라.
그리하여 설화령은 사라지고 석하랑은 진정으로 설야가 되었다. 원래의 설야인 <루살카>는 딸이 자신의 이름을 이어받은 것에 기뻐하며 남편을 쥐어짰다고 전해들었다.
그리하여 현재.
나는 <설야>와 <개천광>을 동료로 들였다. 얄다바오트까지 이걸로 세 명의 신이 확보되었다. 잠정적으로 싱크로 하게 될 환룡 콤비를 제외하면, 이제 남은 정령은 셋.
마암룡.
절풍.
...그리고 창염.
"원로원의 한 명이었던 아돌프 빌헬름 추기경이 괴인으로 밝혀지면서, 기존 원로원의 년놈들은 상당히 입김이 줄어들었어요. 그래서 유영호가 사실상 원로원을 장악했죠. 문제는."
술마시면서 일 이야기를 하면 술맛 떨어진다고 하지만, 그래도 모처럼 화제가 나온 김에 잠깐 진지한 이야기를 할 필요가 있었다.
"집정관조차도 지금 아지다하카의 위치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거예요. 완전히, 그야말로 제대로 꽁꽁 숨어있어요. 마치 뭔가를 준비하는 것처럼."
"폭풍전야네."
"그럼 고객님, 이런 건 아닐까요?"
유하나 하랑이나 술기운을 마력으로 날려버리고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히드라처럼 완전히 숨어버릴 의도라거나."
"아지다하카는 관종이라서 못 참을 걸요."
"아니면 한 방 크게 때리려고 노리는 거 아이가? 요즘 아지다하카 찾을라고 사람들이 조금 난리가."
"그럴 수도."
크게 한 방을 노릴 가능성이 높다. 아지다하카의 성정을 생각하면 무슨 짓을 저지를 지 모른다. 상상 그 이상의 짓까지도.
"...갑자기 우울한 얘기를 해서 미안해요. 여러모로 지금 신경을 쓰고 있는 지라."
"마암룡만 찾으면 사실상 할 수 있는 모든게 끝나니까요. 신경을 안 쓸 수가 없죠."
"그래. 근데 니 그냥 마음 편안하게 생각해라. 괜히 급하게 뭐 할라카다가 초치지 말고. 막말로 이제 찾으면 끝 아이가?"
하랑은 자신만만한 얼굴로 허리를 활짝 폈다.
"어디 니가 편 먹은 애들이 한 둘이가? 그 사람들 전부 다 합치면 어디 세계도 정복하고 남겠구만."
"틀린 말은 아니긴 하네요. 세계를 정복한다라. 지금 전력이면 테라도 정복 가능할테니까요."
"오호, 그 얘기는 조금 흥미가 도는데요."
유하는 새로운 땅에 대해 상당히 관심이 많아보였다. 하지만 나는 곧장 손가락으로 X자를 그렸다.
"남의 땅 넘보지 마요. 거기 제가 우주방어해서 막아낸 제 땅이니까. 최종 소유권자는 저라고요."
"고객님, 혹시 성주 잡으려고 하는 게 행성 주인자리 되찾으려고 하는 건 아니죠?"
"그냥 농담으로 하는 말이에요. 당신, 제가 이렇게 얘기 안하면 테라 행성의 크기는 얼마니, 사람이 살 수 있는 세상이니, 온갖 걸 물으면서 테라포밍 시도하려 할테니까. 그리고 별 이름을 '유성'으로 짓겠죠."
"아뇨."
은유하는 손을 턱밑에 두고 고개를 치켜들었다.
"당연히 행성 이름은 '은유하'가 되어야죠. 그거 얘기 못들었어요? 천체관찰이 취미인 고등학생이 자기가 처음으로 발견한 별에 자기 이름 붙인 거."
"하여튼 이름욕심은."
히카리가 궤도 엘레베이터를 만든다면 분명 그 엘레베이터에 큼지막하게 은유하라고 박을 위인이다. 이제는 실제로 그걸 할 수 있는 자본금을 가지고 있는게 무서웠다.
"아무튼 테라 문제는 성주부터 처리하고 난 다음입니다."
직접 마주앉아서 대화를 주고받으니 여러모로 머리가 개운해진 느낌이다. 나는 눈을 감은 채 의자에 몸을 눕혔고, 곧 이상한 기운을 직감했다.
"......잠깐만."
쌔하다. 그리고 나의 감은 아직 살아있었다.
"왜 둘이서 뭔가 작당모의를 한듯한 움직임이죠?"
"......."
"아니, 그냥 뭐."
둘은 막 일어서려다가 엉거주춤 자리에 앉았다. 둘이 동시에 일어날만한 일이 무엇 있다는 말인가. 그래서 나는 미리 선수를 쳤다.
"저 덮치려는 건 아니겠죠? 설마 그러겠어요? 히어로인 분이, 그리고 대 유성 그룹의 회장님이."
"...에이, 내가 말라꼬 니를 덮치는데? 걱정도 팔자다."
"고객님. 겨우 그런 걸로 저희 피해다니신 거예요? 실망인데요."
"......."
둘 다 신화에 이르러서 그런지 마력 스캔을 통한 감정이 잘 읽히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두 명의 루트를 밟았던 경험을 되살려, 둘의 표정을 찬찬히 살폈다.
"그렇게 바라보면 부끄러운데."
"석하랑은 진짜로 싸워서 이기면 덮치려고 하고...."
"헉."
하랑은 입을 쩍 벌리며 놀랐다. 유하는 그 사이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하지만 안 봐도 안다.
"은유하는 나한테 변신해달라고 요청한 다음 바로 스캔해서 바이오로이드로 찍어내서 연습할테고."
"연습? 무슨 연습?"
"하랑아. 이거 이간질이야. 고객님이 파놓은 함정에 우리가 말려드는 거라고."
유하는 표정까지 굳히며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다. 하지만 나는 잘 알고 있다. 내가 말한 케이스는 어디까지나 은유하의 수많은 플랜 중 하나라는 것을.
은유하라면 그럴 것이다. 그리고 유하는 실제로 그런 생각을 한 듯 했다. 그러니까 저렇게 찔린 것처럼 행동하지.
"어휴. 신들이라는 것들이 불쌍한 새 하나 덮치려고 아주 정말...."
말세로다. 말세야.
"지금 각자 계획을 말하면, 적어도 정상참작은 해줄게요. 어디 한 번 말해봐요. 나중에 제가 여러모로 가능해졌을 때, 제가 들어줄 수 있는 곳 까지는 들어줄테니까."
"진짜?"
"......잠깐만요."
둘은 이런저런 작전회의를 한 끝에, 내게 자신들의 욕망을 하나도 남김없이 털어놓았다.
나는 아주 손쉽게 삼각동맹의 실체를 파악해냈다.
성주를 이기기 전까지는 덮치지 말자는게 동맹의 제 1규칙이라니.
...
싱크로를 할 이유가 하나 더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