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2화 〉1부 18장 4
"지금까지 정말 많은 일이 있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래. 우리 만난 지 고작 반 년 조금 넘었을 뿐인데 말이야."
"그리고 이제 남은 시간은 고작 40일 조금 남았죠."
"...하고 싶은 말이 뭐야?"
가을은 역시 눈치가 빨랐다. 나는 가을을 위해 본론부터 꺼냈다.
"더이상 청화를 연기할 필요가 없다는 말을 하려고요. 천가을로 사셔도 된다, <팬텀>임을 드러내도 된다, 대중들의 앞에 서서 진실을 드러내도 된다. 그 말을 하려고요."
"그럼 청화는?"
"제가."
나는 가을에게 원래의 신분을 돌려줄 생각이었다. 남은 시간 동안만이라도 창염의 피닉스의 대외 활동체인 청화라는 타인으로 살 수 있도록.
"갑자기 무슨 심경의 변화야?"
"혹시나 모든 작전의 실패했을 경우, 그리고 제 입장으로서는 최악의 상황이 발생했을 경우를 대비하여 미련을 남기지 말라는 거죠."
"그럼 내가 지금 가진 소망을 들어줄 생각이라도 있어?"
"...그건 불가능한지라."
그것만큼은 할 수 없었다. 가을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 네가 그러면 그렇지.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야?"
"그쪽으로는 궁금해하지 않아요? ...남성체."
"보고 싶기는 한데, 나는 이쪽이 더 좋네. 익숙해져서 그런가, 아니면 우는 걸 눈으로 봐서 그런가."
"...남 부끄러운 이야기를."
사람 부끄럽게 만드는데는 아주 도사다. 나는 괜히 가을이 나를 더 부끄럽게 만들기 전에 화제를 돌렸다. 지금 내 유일한 관심사인 '싱크로'에 대하여.
"가을.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물어볼게요. 진짜 후회하지는 않죠?"
"물론이야. 계속 얘기했잖아. 나는 할 생각이 없다고."
"...한 번 정해지면 되돌릴 수 없어요. 그래도 정말로 괜찮죠?"
"얘, 사이트 회원 탈퇴도 이거보다는 간단하겠다. 마음 정했다니까. 너도 내 주인이라면 알 거 아냐. 내가 지금 어떤 마음인지."
"아니까 더 그러죠."
가을은 내 어깨에 더 무거운 짐을 싣고 있었다. 나는 가을이 상황을 진짜로 이해하고 있는지 다시금 확인했다.
"당신, 나 죽으면 같이 죽는 거 알죠?"
"물론이야. 간부가 죽으면 아래에 있는 괴인도 죽는다며? 사도니 뭐니 해도 결국에는 다 똑같은 괴인이지."
"예. ......그리고 저는 제 아래의 괴인들을 다른 정령들에게 이양할 생각이죠."
설령 내가 죽더라도 괴인들만큼은 살아남을 수 있도록, 다른 간부들이나 정령들에게로 넘길 생각이었다. 캘리펠라나 라스푸틴을 환룡과 공유했던 것 처럼, 각 속성에 맞는 간부들에게 괴인들을 넘겨줄 생각이었다.
모든 괴인들, 심지어 푸른 깃털의 괴인들 마저도 하나하나 불러 상황을 설명했고, 그들은 모두 보험을 들기를 바랐다. 그리고 유이하게 보험을 거부한 두 명 중 한 명이 바로 천가을이었다.
천가을은 내가 실패하여 소멸하는 순간, 함께 소멸하는 것을 택하기로 했다.
"만약에 제가 실패한다면 어쩌시려고요?"
"그러면 그냥 같이 소멸하는 거지. 어차피 나는 지금 여의도에서 죽은 이후로, 플러스 알파 인생을 살아간다고 생각하고 있는 걸."
"싱크로한 대상의 사도가 되면 영생을 살아갈 수 있을텐데?"
"영생도 누구랑 같이 살아가느냐가 중요하겠지?"
공감한다. 공감을 하기에 더욱 안타까웠다. 나는 가을에게 다가가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다. 가을은 내 등을 톡톡 두드렸다.
"실패해도 사과 안할 거예요."
"성공하면 되잖아. 싱크로 성공하고, 성주도 죽이고, 세계 평화도 얻고, 그러면 너도 불로불사가 될테니 나도 불로불사가 가능하고."
"상장폐지 할지도 모르는 주식에 전재산 꼴아박는 거라고요."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이지. 어차피 잃어봐야 목숨말고 더 있겠니."
"한 번 죽었다고 너무 막나가시네."
"죽기 직전인데 꼴리는 대로 해야지. 아, 너무 표현이 상스러웠나? 나는 내 맘대로 할 거야."
가을은 막무가내였다. 애초에 내가 명령으로 강제할 수도 없었고, 말릴 수도 없었다.
"...혹시나 생각 바뀌면 마음대로 하세요. 제 허락없이 환룡한테 가서 환룡의 사도가 되어도 원망 안 할게요."
"그래. 혹시 죽기 싫어지면 그렇게 할게. 그런데 얘."
가을은 등 뒤로 펼쳐진 내 날개를 붙잡았다.
"너 지금 나 데리고 어디로 가려고 그러니?"
"중국이요. 환룡한테."
"...나 환룡 밑으로 안 들어간다니까? 그리고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가을은 엄한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싱크로도 안 해. 이미 정해졌잖아. 환룡이 누구랑 싱크로 할지."
"네. 결국에는 샤오린이랑 하기로 했죠. 그걸 눈으로 직접 보러 가자고 하는 거예요."
"이건 악취미라고 봐야하나. 좋아, 나도 마침 궁금하던 참이었거든. 그럼 맡길게? 이대로 가도 되지?"
가을은 떨어지지 않겠다는 듯 나를 꽉 끌어안았다. 언제나처럼 가슴 앞에 안고 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얼굴을 가을의 가슴에 파묻고 서로 허리를 끌어안는 자세였다. 상당히 민망하기는 했지만, 이게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나는 가을을 잡고 유리창으로 걸었다.
"오늘만이에요. 앞으로는...끝일 테니까."
"그래. 그럼 오늘밤만 허락할게. 마음껏 응석부려. 후후."
"...누가 응석을 부린다는 건지."
나는 유리창을 깨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어둠이 짙게 깔린 밤하늘에는 별빛이 반짝이고 있었고, 나는 가을의 푸근함에 파묻혀 북경으로 날아갔다.
가을의 가슴은 끝내주게 푹신했다. 그리고 날아가는 동안 다시금 마음을 다잡았다.
'이런 멋진 가슴이 소멸하게 할 수는 없지.'
대머리 하나 사라지는 거라면 몰라도, 가을이 나 때문에 소멸하는 건 세상이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이제 방황은 끝내고, 마음을 다잡자. 피해다니는 건 이걸로 끝이다.
'설마 히로인들한테 레이프 당하기야 하겠어.'
아무리 그래도 다들 그 정도 상식은 있지 않겠는가.
"......흐흐흐."
...있겠지?
* * *
<북경, 환룡의 장원.>
"좋아, 오늘은 4P 각인가?"
"만나자마자 무슨 개소리."
환룡은 시작부터 이상한 말을 내뱉었다. 행여나 5P라고 했으면 진짜로 따로 어디 데려가서 라스푸틴 맛을 보게 했을지도 몰랐다. 환룡은 장난스럽게 내게 윙크했다.
"말이 그렇다는 거지. 네 모습 알려지고 난 이후로 지금 샤오린이 어떤 상황인지 아니? 나도 감당못할 정도야. 지금 히어로 생활 하면서 벌어들인 돈으로 벌써부터 온갖 최고급 카메라로 방 하나 만들었다고."
"......."
사도 샤오린의 성벽이야 이미 익히 알고 있지만, 아무래도 그 방향성이 상당히 문란한 방향으로 직행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 성벽이 무엇인지 나는 알고 있었다.
'가면캠방.'
오마케 씬에 그게 있었지. 훈련을 하다가 달아올라서 얼굴에 가면 쓰고 위에는 옷입고 떡치던 씬이.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자신의 몸을 노출하는 것에 대해 흥분하는 성벽을 지닌 샤오린의 기행에 있어서 정점을 찍는 씬이었다.
...지금도 실시간으로 그 정점을 갱신하고 있지만.
"샤오린까지 4P라.... 나쁠 건 없어 보이는데."
"가을?"
"그냥 하는 말이 그렇다는 거지. 샤오린 빼고는 다 가능하잖아. 아니다, 샤오린도 가능한가? 후후."
"...왜 자꾸 화제가 그쪽으로 가는 거예요. 우리 건전하게 이야기를 합시다. 건전한 주제로. 싱크로!"
나는 내가 북경을 방문한 이유를 꺼내들었다. 그게 본론이었고, 굳이 북경까지 가을을 데려와 4자 대면을 하게 된 이유였다.
"샤오린, 슬슬 나와요."
"저는 처음부터 여기서 있었습니다만."
"이상한 짓 하지 말고 모습을 비추라는 말이에요. 또 무슨 옷을 입고 있는 거예요?"
"별 거 아닙니다."
회색 안개와 함께 샤오린은 모습을 드러냈다. 가을이 입고 있는 코트와 비슷한 디자인으로, 샤오린은 진회색의 코트를 입고 있었다. 맨다리를 보니 코트만 입고있었다. 이게 바바리걸이 아니고서야 무엇이란 말인가.
"왜 어딜 가도 변태가 있는 건지."
"그 변태의 정점께서 하실 말씀은 아닌 것 같은데."
"우리 싱크로에 대해 얘기하죠. 환룡, 샤오린. 그래서 둘이 싱크로에는 진전이 있나요?"
"말 돌리는 거 봐. ...없어."
환룡은 딱 잘라 말했다. 샤오린도 고개를 끄덕였다. 뉴클리언 전투에서 둘은 함께 싸웠지만, 여전히 제대로 된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무언가 하나라도 서로 통할만한 소재가 있다면 그걸 계기로 싱크로를 하면 될텐데, 둘의 성향은 은근히 잘 맞지 않았다.
"같이 게임도 해보고, 대련도 해보고, 여러 가지를 해봤는데 확실히 느꼈어. 나랑 샤오린은 상당히 달라."
"제가 정공법으로 깨뜨리는 걸 선호한다면, 주군께서는 전략과 계략으로 적을 깨뜨리는 타입이셨습니다."
"누군가 한쪽에 일방적으로 따르기는 쉽지 않죠."
정신계열의 정점인 환룡과 무인계열의 최고봉이라 할 수 있는 샤오린이 싱크로를 하기에는 여러모로 난감했다. 괜히 환영술사인 천가을이 환룡 최고의 파트너가 아니다.
"가을. 직접 와서 보니까 어때요? 생각 바꿀 생각 있어요? 둘이 안 될 수도 있는데."
"글쎄. 아직까지 40일 남았잖아? 딱히 없어."
하지만 가을은 싱크로의 우선권을 샤오린에게 넘겼다. 환룡과 싱크로를 하게 되면 환룡의 사도가 되는 것처럼, 가을은 설령 내가 죽더라도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러나 가을은 샤오린에게 환룡과의 싱크로를 양보했다.
"만약에 직전까지도 못하게 된다면, 그리고 내가 죽는게 두려워진다면 그 때는 도와줘. 알겠지?"
"물론이야, 가을. 나는 얼마든지 환영해. 우리는 한 팀인 걸."
환룡 또한 가을의 선택을 존중했다. 더군다나 둘 다 싱크로의 가장 쉬운 길이라고 할 수 있는 성행위를 서로 함에 있어서 거리낄 게 없는 존재들이었다.
"나는 가을이라면 촉수 플레이도 환영이야! 피닉스도 거기에 같이 하면 더 좋고!"
"...하아, 그냥 포기할게요. 아, 이거 그걸 하겠다는 건 아녜요."
멸망이 다가올수록 사람들의 본성이 드러난다고 하던 말이 거짓이 아닌 모양이다. 특히 정령들이 더욱 그러했고, 어딜가든 나를 노리거나 그에 준하는 성욕에 충실한 이들이 수두룩했다.
"알겠어요. 그럼 남은 기간동안 둘이서 싱크로를 하는데 집중해주세요. 그럼 다음 문제."
나는 마력을 실어 손가락을 튕겼다. 벽에 놓여있던 흑사갈의 코어가 내 손으로 들어왔다. 낳은지 얼마 지나지 않은 건지 따끈따근했다.
"히드라도 그랬지만, 대부분의 괴인들이 흑사갈 소동에서 생긴 흑전갈의 코어를 핵으로 삼고 있었어요. 환룡, 암시장에서 유통되던 거는 다 찾았어요?"
"물론이야. 샤오린이 지금 그거 때문에 바쁘니까."
"정치관료들부터 시작해 조폭 무리까지 넘쳐납니다. 괴인들이 전부 꽁꽁 숨어도 소용이 없죠. 돈과 마력의 흐름은 숨길 수 없으니까요."
코어를 구입하면서 세탁했던 자금이라거나, 샤오린이 직접 사방을 훑고다니며 느끼는 마력의 흐름에는 항상 괴인들이 있었다. 중국 대륙이 넓기는 했어도, 그 넓은 대륙 전체에 퍼져나간 코어 수 천개 정도는 금방 찾아낼 수 있었다.
"그렇게 역추적해나가다보면, 언젠가 도달할 수 있을 거예요."
"아지다하카의 본체, 마암룡에게."
환룡은 상당한 의욕을 보였다. 똑같이 용(龍)의 이름을 가진 존재로서, 환룡은 마암룡의 확보에 대해 상당한 의욕을 보이고 있었다.
"너도 찾으면 바로 얘기해줘. 나도 구하는데 한 몫 거들테니까."
"네. 그동안 사로잡은 괴인들이 아지다하카 하지 못하게 잘 막아줘요. 일단 죽이고 봐도 좋으니까."
"괴인들 코어 수감에 관해서는 걱정 안해도 돼. 봉효가 철저히 관리하고 있으니까. 설령 아지다하카가 봉효를 노리고 있다고 하더라도...."
"오히려 아지다하카가 학을 떼고 도망치겠죠?"
나나 환룡이 따로 요청하지 않는 이상, 대 정령 특수병기 <라스푸틴>의 보관은 봉효가 책임을 지고 있다. 아지다하카가 나타나면 분명 봉효는 라스푸틴을 꺼내들 것이고, 아주 손쉽게 분신을 처치할 것이다.
"솔직한 심정으로 빨리 아지다하카가 튀어나왔으면 좋겠네요. 차라리 모두 싱크로 시키고 그냥 하나에만 집중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아요. 하아."
중요한 이야기는 끝났다. 우리는 넷이서 차를 마시며 사담을 나누었다.
"아참. 나 궁금한 거 생겼어. 미래에서는 환룡이랑 나랑 싱크로한댔잖아. 그럼 그 이명은 뭐야?"
"<할리퀸>?"
Harlequin. 피에로와 비슷한, 광대를 부르는 또다른 이름. 물론 아무리 생각해도 노린 이명이나 마찬가지였지만, 단순히 변신을 넘어 빙의능력까지 갖추게 된 그 능력은 환술계열에 있어서 가히 압도적인 성능을 자랑했다.
모든 정신계열의 이능을 보고 흡수할 수 있는 최강자. 그게 천가을과 환룡의 콤비였다.
"그럼 나랑 샤오린이 하게 되면?"
"......그건 기출범위 밖인데요."
애초에 샤오린이 환룡의 괴인이 되었던 순간 내가 당황했던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그 때도 그랬지만, 설마 둘이 싱크로를 하게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럼 이명 없어? 스포일러해봐. 뭔데?"
"......그냥 새로 지어드릴까요?"
"너 작명센스도 있어?"
"아뇨. 그냥 엄청 강해보일 것 같은 이름으로다가."
나는 머릿속에 떠오른 아무 말이나 지껄였다.
"샤오린 환속성 특징이 마력의 투명화니까, <투명환룡>어때요?"
"......."
봉효만 채택하였고, 결국 투명환룡은 기각되었다.
왜지.
이계신도 쌈싸먹을 것 같은 이명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