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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염의 피닉스-417화 (417/1,497)

〈 417화 〉1부 17장 25

"역시 괴도 저지. 벌써부터 지속성 S급을 찍었을 줄이야."

나는 로마에 성천사성의 옥상에서 히드라의 토벽속에 숨어 전장을 살폈다. 수 십 미터의 콘크리트 방패로 마룡들의 브레스를 받아내며 역으로 반사시키는 아르엘의 반격은 몹시 매서웠다.

"그리고 가웨인은…. 아지다하카랑 싸우고 있고. 케레스. 당신이 보기에 지금 저거 본체인 것 같아요, 아니면 분신인 것 같아요?"

"...본체인 척 하는 분신?"

"역시 눈썰미가 좋네요. 맞아요. 아지다하카는 쫄보라서 본체로 나올 리가 없죠."

"그건 그 미래의 지식이라는 거야?"

나는 히드라에게 간단히 내 설정을 설명했다. 이미 지륜이 내가 정령 창염이 아니라고 까발린 순간부터 히드라는 내 정체에 대해 상당히 궁금해하는 눈치였다.

정령 창염과는 별개의 존재인 피닉스. 그렇게 소개를 했었다.

"그런 셈이죠. 문제는 지금 어느쪽이든 열세라는 건데."

아르엘이 본래의 힘-지속성 S급의 힘을 드러냈지만 마룡 두 마리를 동시에 상대하기는 역부족이었다. 심지어 도시를 지키면서 싸워야하니 그건 더더욱 힘들었다.

하물며 가웨인은 중상. 등대는 경상이라고 파악하고 있었지만, 실제로 와서 보니 상황은 심각했다. 마룡의 독기가 가웨인을 좀먹어들어가고 있었고, 이대로 계속 시간이 흐르면 가웨인의 마력이 오염될지도 몰랐다.

'B급 이하는 물리면 바로 괴인이었는데.'

가웨인이라서 버티는 걸테지만, 아지다하카가 저렇게 시간을 끄는 이유까지는 모르는 듯 했다. 어둠으로 여왕의 얼굴을 빚어 모욕하는 것에 가웨인은 홀라당 넘어가고 말았다.

"뭔가 분위기 전환이 필요한데."

"네가 나서면 그만...은 아니겠네. 피닉스는 한국에 갇혀있으니까. 그러면 나보고 나서라는 거지?"

"역시 케레스 양과는 말이 잘 통해서 좋네요."

"하여튼 바깥에 나왔다고 철저하게 숨기려고 하는 꼴이란. 으휴, 알았어."

히드라는 마력을 끌어올려 땅을 조종할 준비를 마쳤다. 아지다하카를 공격하는 건 명백히 성주에 대한 반역이었지만, 히드라는 자신의 생존과 다가올 쾌락을 위해 배신하기로 정했다. 한 번 하기로 한 이상 철저히 하는 타입이니, 적어도 성주를 죽이기 전까지는 나를 배신하지 않을 터.

"후우. …정말로 이거 안 보이는 거 맞지?"

"물론이죠. 저 못 믿어요?"

"믿고 안 믿고를 떠나서 네 센스에 대해 여러모로 혼란스러우니까 그렇지."

히드라는 자신의 위로 입혀진 옷-스킨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원작에서 가장 많이 팔린 전투복 스킨을 마력으로 짜내어 입혔건만, 히드라가 왜 저런 표정을 짓는지 의아했다.

"왜요?"

"성천사성 잠입할 때는 수영복 입고 대로를 활보하더니, 이제 사람들 앞에 설 때는 이렇게 꽁꽁 싸매고 나가라는 거잖아. 뭐 케레스 알몸은 나만 볼 수 있다 그거야?"

"꼭 그런 건 아닌데…."

나는 히드라의 복장을 위아래로 살폈다. 베이지와 아이보리가 적절히 섞인 드레스는 정숙한 고대 그리스의 여신상을 보는 것 같았다.

물론 통으로 된 롱 원피스라 바람이 불면 몸이 다 드러난다거나, 밑가슴 아래에 묶은 끈 때문에 가슴이 도드라지기는 하지만 나는 아무런 죄가 없었다. 죄가 있다면 이런 스킨을 만든 제작자 놈들이지.

"마음에 안 들어요?"

"마음에 들어서 문제야."

히드라는 내가 사줬던 밀짚모자를 챙겨 머리에 눌러썼다. 나는 히드라의 어깨에 아이보리 색 얇은 숄을 둘렀다. 훤히 드러난 어깨가 숄에 가려졌다. 역시 숄까지 걸쳐야만이 히드라의, 지륜에게 가장 어울리는 복장이 될 수 있었다.

"이건 또 무슨 의미람."

"투 머치 아이템?"

"됐어. 쯧. ...하아, 그럼 다녀올게."

히드라는 흙벽에 손을 올리고 성천사성의 위로 올라갔다. 나는 히드라의 토벽 속에 숨어 전장을 구경했다.

"게임 끝났네요."

싱크로는 아니더라도, 히드라는 나와의 계약을 통해 한단계 더 강한 힘을 자각하게 되었다.

바로 지륜.

지륜은 히드라에게 자신이 가지고 있던 정령의 힘을 넘겨줬다. 카르나처럼 융합하지는 않고 별개의 존재로서 있게 되었으나, 지륜은 분명히 자아를 유지하고 있었다.

지륜이 히드라에게 동정심을 느껴 내게 반기를 든게 히드라의 감정을 자극했던 모양이었다. 이른바 쇼타동맹. 나로서는 여러모로 소름끼치는 동맹이었다.

'그리고 이제 지륜도 전면에 나선다.'

나는 마도기어를 통해 구축된 정령 네트워크를 꺼내들었다. 마침 그곳에는 막 내 초대를 받은 지륜이 천방지축으로 날뛰고 있었다.

[지륜 등장! 오랜만이야, 모두. 일단 시안은 내 거다?]

[ㅗㅗㅗㅗㅗㅗㅗㅗㅗㅗㅗ]

[맘대로 하렴. 그런데 우리 딸이 쟤 먹으려고 하면 그 때는 너 가만히 안 놔둔다? 저건 내 사위란다. 잊지 마렴.]

...현재, 지륜은 정령 네트워크에 화려하게 가입했다. 히드라가 내가 준 마도기어를 참과 동시에 정령 네트워크에 접근할 수 있었다. 애초에 이 네트워크는 카톡방 같은 것이라, 카르나를 초대하면 모든 정령들이 참가하는 셈이었다.

'히드라가 지륜이랑 같이 지내면서 미운 정이라도 들었나.'

히드라가 지륜과 일시 공존을 택하면서, 지륜은 이런식으로나마 제 존재감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피닉스는 맘대로 해! 하지만 내가 상회 입찰한 쇼타시안에 침 바르기만 해봐. 아주 그냥 너죽고 나죽는 거야. 알겠어? 나 농담하는 거 아니다?]

"......에휴."

절대로 어린 백청화만큼은 남들 앞에 꺼내선 안 되겠다 싶었다. 지륜의 얀데레성은 상상을 초월하니까.

'싱크로 잘못하면 게임오버 당하지.'

히드라는 괜찮지만 지륜은 진짜로 히로인을 살해하고 나이스 보트를 타는 정령이다. 히드라가 좋은 억제책이 되어주기를 바라며, 나는 전장으로 고개를 돌렸다.

지저 왕국의 여왕 '케레스'의 화려한 데뷔 장면으로.

***

콰----앙!!

땅에서 거대한 지룡이 솟아났다. 드래곤의 머리를 한 아홉 마리의 뱀은 어지간한 건물만한 크기였고, 길이는 무한히 솟아나고 있었다.

"뭐, 뭐야?!"

"공주님, 혹시?!"

콘크리트 방패 아래의 히어로들이 아르엘에게로 고개가 돌아갔다. 하지만 아르엘 또한 갑자기 튀어나온 아홉 마리의 지룡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자신은 땅의 힘으로 방패를 세우는게 고작일 뿐이었다.

마룡의 브레스로부터 도시 하나를 온전히 지켜내는 힘도 힘이었지만, 로마 전체를 멸망시킬듯한 거대 지룡들의 등장에 도시 전체가 절망에 빠졌다.

"이런 젠장!"

가웨인은 평소에 잘 하지도 않는 욕지기까지 내뱉으며 검을 들어올렸다. 막 가웨인을 향해 손톱을 휘갈키려던 아지다하카가 두 팔을 벌리며 활짝 웃었다.

"꺄하하! 말하지 않아도 역시 통하는 게 있다니까!"

세계에서 이 정도로 땅을 이용하는 권능을 가진 존재가 누가 있을까. 아지다하카는 하늘로 높이 날아올라 로마 전체를 훑었다. 정확히 아홉 마리의 뱀은 도시를 원으로 감싸며 다이아몬드처럼 단단한 이빨을 날카롭게 세우고 있었다.

"후후, 그냥 가만히 잠적한 줄 알았는데. 어디서 뭘-"

아지다하카는 성천사성의 꼭대기에 서있는 여인을 눈으로 확인했다. 이전에 만났을 때와는 확연히 다른 옷차림의 히드라는 자신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아지다하카 또한 반가운 마음에 손을 흔들었지만, 뭔가 낌새가 이상-

콰득.

지룡 하나가 아지다하카를 집어삼켰다.

"뭐야---!!"

아지다하카의 분신이 지룡의 입을 위아래로 벌리며 상체를 밖으로 빼냈다.

"너, 너 왜 나를 공격해?!!"

"이유를 몰라서 물어?"

히드라는 손을 쭉 펼치며 아래를 가리켰다. 이미 모든 히어로, 헌터, 민간인들의 시선이 성천사성 꼭대기에 선 히드라를 바라보고 있었다.

"여긴 내 땅이야."

콰드득!

지룡이 다시금 아지다하카를 깨물었다. 분신은 지룡의 이빨 사이에 찢겨져 검은 안개가 되었고, 아지다하카는 금방 사라지고 말았다. 사람들의 시선은 여전히 히드라에게 꽂혀있었다.

"도대체 누구-"

"헙."

오직 가웨인만이 히드라의 모습을 보고 그 정체를 깨달았다. 듣던 모습보다 조금 더 세련되면서도 정숙한 모습이었으나, 인간들을 아래로 깔보는 그 얼굴에 가웨인은 가슴이 철렁내려앉았다.

"실패...한 건가?"

눈으로만 봐서는 알 수 없었다. 마력은 여전히 간부들 특유의 이질적인 기운이 느껴졌다. 피닉스는 히드라에게 패배한건가?

"......이런!"

가웨인은 클레이모어를 집어던지려 했다. 하지만 손에는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이미 그는 아지다하카를 상대하느라 너무나도 많은 힘을 사용했기도 했고, 너무 많은 피를 흘렸다. 그는 당장 치료가 필요했다.

♪♩♬

어디선가, 새가 지저귀는 소리가 울려퍼졌다. 가웨인은 고개를 돌렸고, 골목에서 푸른 카나리아가 종종걸음으로 무언가를 입에 물고 가웨인의 앞까지 걸어왔다.

퉤.

카나리아는 무언가를 가웨인의 앞에 던져놓고 불꽃이 되어 사그라들었다. 가웨인은 카나리아가 남기고 간 작은 병을 집어들었다. 안에는 피닉스 특유의 마력이 들어있었다.

"이건...?"

설마 패배한 피닉스가 자신에게 마력을 남겨준 것인가? 가웨인의 표정이 핼쓱해진 순간.

카아아아아악!!!

아지다하카를 잡아먹고 땅속으로 돌아간 머리를 제외한 여덟 마리의 지룡들이 마룡들을 습격했다. 암마룡의 사지를 머리로 휘감고, 지마룡의 세 머리와 서로 물어뜯으려 입을 벌리고, 나머지 하나의 입으로는 암마룡 본체를 상대로 물어뜯으려 했다.

히드라는 마룡들을 죽이려했다.

"......왜?"

가웨인은 충격과 공포에 빠졌다. 사람들은 멍하니 괴수들이 서로 물어뜯는 진귀한 광경을 감상했다. 왠지 모르게 지룡에게서는 자신들을 구해주고 있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끝낼 시간이야."

히드라의 목소리가 나지막하게 울렸다. 로마 전체로 퍼져나간 히드라의 목소리에는 마력이 실려있었고, 땅 전체가 고요히 울리기 시작하며 도로에서 흙으로 된 가시 덩굴이 솟아나기 시작했다.

그 모든 가시 덩굴은 사람들에게는 아무 피해 없이 마룡을 향해 하늘로 뻗어올랐고, 가시 덩굴은 지룡들과 함께 두 마리의 마룡을 동시에 꿰뚫었다.

■■■■■!!!

마룡들은 고통스러운 비명과 함께 몸을 떨었다. 지룡과 덩굴을 통해 전해지는 마룡들의 몸부림이 땅에 고스란히 전해지며 미약한 지진이 일었다. 하지만 그 지진은 점차 그 강도가 줄어들었고, 사람들은 그에 따라 상황을 직감했다.

저벅, 저벅.

지룡 한 마리의 몸통을 밟고 하늘로 걸어올라가는 저 여인은 마룡을 죽이기 위해 본색을 드러냈음을. 그리고 몇몇 사람들은 히드라의 얼굴을 보고 기시감을 느꼈다.

"설마...?"

바티칸 광장에서 추기경 미사를 들으며 데이트를 즐기던 젊은 남녀 커플. 그 중에서도 여자가 바로 지금 지룡의 머리 위에 서서 손을 번쩍 들어올리는 자였다.

"끝이야."

히드라는 하늘로 뻗은 손을 쫙 펼쳤다. 지룡과 덩굴에서 뻗어나가는 흙더미가 두 마리의 마룡을 동시에 에워싸기 시작했다. 마룡들은 전신을 비틀며 히드라가 만드는 흙무덤에서 벗어나려고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남의 땅에서 시끄럽게 떠들면 이렇게 된단다?"

히드라는 싱긋 웃으며 서서히 주먹을 움켜쥐었다. 지룡들의 몸이 흙의 구체를 휘감았고, 구체는 서서히 중심을 향해 압축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줄어들었다 싶은 때.

우두둑. 우두두둑.

찌그러지는 소리와 함께 고통스러운 마룡들의 비명이 울렸다. 사람들은 침을 꿀꺽 삼키며 히드라의 손을 주시했다. 여전히 구체는 느리지만 그 크기가 줄어들고 있었고, 히드라는 아직도 주먹을 완전히 움켜쥐지 않았다.

"훗."

히드라는 짧게 웃은 뒤, 주먹 쥔 손을 뒤집어 아래를 향해 펼쳤다. 마치 손에 쥔 작은 공을 떨어뜨리듯.

구구구구.

지룡들이 구체를 히드라가 서있는 성천사성의 공원에 살포시 내려놓았다. 지룡들과 가시덩굴들은 다시 원래 튀어나온 곳으로 돌아갔다. 그들이 아래에서 튀어나오며 망가진 도로들은 다시 원래대로 원상복구 되었다.

"......하암."

히드라는 하품을 하며 몸을 돌렸다. 금방이라도 떠날 것 같은 기색이었고, 히어로 하나가 급히 나서서 소리쳤다.

"당신, 도대체 누구야?!"

"......케레스."

히드라는 손가락을 입술에 붙여 손가락 키스를 날리며 꼭대기에서 몸을 던졌다.

"시안의 아내."

그 말을 끝으로 케레스는 사라졌다. 사람들은 어안이 벙벙해졌지만, 그들은 단 하나만큼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케레스라고 하는 시안의 아내, 이능력자는 두 마리의 마룡을 한 번에 제압할 강한 이능력자인 것을.

* * *

"그렇게 말하고 바로 쪽팔려서 여기로 들어온 거예요?"

"...간부 일 때는 몰랐는데 이거 개쪽팔려!!"

히드라는 구석에 쪼그려 앉아 두 손으로 얼굴을 덮고 있었다.

나는 히드라에게 마법의 주문을 외웠다.

"괄목하라! 천지개벽의 힘을, 그라운드 제로-"

"......."

아.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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