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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염의 피닉스-411화 (411/1,497)

〈 411화 〉1부 17장 19

성천사성(산탄젤로성)은 난리가 났다.

영국 여왕과 가웨인 경의 방문일에 불미스러운 일이 생긴 것도 모자라, 그 불미스러운 일이 알고보니 바티칸 교황청에 잠입한 괴인이 암살당한 일이더라.

누가, 어떻게, 왜?

혹자는 가웨인 경이 움직이지 않았을까 의구심을 품었지만 그럴 가능성은 낮았다. 가웨인 경은 아르엘 공주나 여왕과 항시 붙어다니며 그들을 호위했다.

그렇다면 누가 아무런 조짐도 없이 바티칸에 숨어있던 괴인을 죽인걸까. 사람들의 걱정이 태산처럼 쌓여가는 가운데, 사람들은 괴한의 의도를 발견하고 말았다.

추기경 암살.

빌헬름 아돌프 추기경은 살해되었다.

그는 괴인이었다.

* * *

바티칸에 대혼란이 일어난 가운데, 영국에서 온 공주 아르엘은 성큼성큼 성천사성을 드나들며 범인의 흔적을 찾았다. 긴급히 협회에서 파견된 히어로, <뇌절> 유피테르는 아르엘을 제지하려 들었다.

"공주님, 이 이상은 위험합니다."

상황이 상황인 만큼 유피테르가 상황을 관리하는게 맞았다. 이국에 출장을 가있던 교황은 소식을 듣고 급히 바티칸으로 귀환하고 있었고, 현재 현장의 책임자는 유테르였다.

"비켜주세요."

하지만 아르엘은 물러서지 않았다.

"제가 다 단서 찾고 있는데 뭐가 문제죠?"

"그렇지만."

"흉수...라고 표현하기는 그렇지만 흉수라고 할게요. 2인 1조. 보폭을 봐선 제법 큰 키의 남자와 평균 이상 키의 여자. 이능력자로 추정. 누가 먼지 쌓인 창고부터 이어진 발자국을 발견했죠?"

"공주님이십니다. 하지만 공주님."

유피테르는 창고 너머, 금방이라도 무너질것만 같은 고대의 비상 통로를 가리켰다. 이미 천장 전체가 무너져내렸고, 협회의 히어로들이 급히 잔해를 옮기고 천장을 복구하며 길을 만들고 있었다.

"저희가 확인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공주님께서 굳이 나서실 것 까지는…."

"흉수가 진짜 이름없는 히어로인지, 아니면 그냥 추기경을 암살하러 왔다가 얻어걸린 건지 알아야하지 않겠어요? 도대체 그자들이 어떻게 이런 비밀 통로를 발견했는지도."

"그거야 그렇습니다만."

"...어쩌면 추기경님께서 다크 레기온의-"

"공주님."

뒤에서 굳은 얼굴로 가만히 있던 가웨인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아르엘의 말을 끊었다.

"듣는 귀가 많습니다."

"다크 레기온의 괴인일지 모르잖아요?"

"공주님?"

가웨인은 당황했다. 아르엘이 자신의 말을 돌려 듣지 못할만큼 어리석은 존재는 아니었다. 그렇다는 건 자신의 경고를 알면서도 무시했다는 것.

-추기경님이 다크 레기온의 괴인이라고?

-역시 착한 남자가 타락하기 쉽다는 설은 사실인가?

-바티칸 한 가운데에 차원문이...으으, 생각만해도 싫다.

주변에 모인 히어로들의 마력에서 혼란과 공포가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가웨인은 이런 상황이 생길까봐, 방금 전에 파악한 추기경의 정체를 퍼뜨리기를 꺼렸다. 적어도 그가 받은 '사도 리스트'에는 추기경은 없었다.

자신도 불과 낮에 함께 식사를 했던 자가 괴인이었다는 것이 혼란스러운데, 하물며 바티칸의 사람들과 사제들은 어떠겠는가? 이래서야 교황까지 괴인이 아닐까 의심될 정도였다.

가웨인은 그런 혼란이 일어나기를 바라지 않았지만, 아르엘은 오히려 그런 혼란을 폭발시켰다. 가웨인은 아르엘의 체면을 생각해 나지막하게 나무라려 했지만, 오히려 아르엘이 가웨인을 나무라기 시작했다.

"가웨인 경, 항상 그렇게 비밀로 숨기려고 하니까 이 사단이 나는 거라고요! 괜히 추기경의 정체를 숨기려 했다가 퍼지기라도 하면? 또 신뢰를 잃으시려고요? 알면서 왜 말 안 했냐고?"

"......."

아르엘의 말에 가웨인은 침묵했다.

"오라클의 예언도 숨기고 있다가 지금 난리가 난 거잖아요. 물론 예언이 5년 일찍 일어나는 건 당황스러운 일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제는 더 숨기시면 안 되는 거예요. 오히려 모두에게 진실을 알리고 함께 대처해야죠."

"......크게 성장하셨군요, 공주님."

아르엘의 말에 가웨인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세계는 혼란의 도가니였고, 거기에 추기경이 사실은 괴인이었다는 것 정도가 더해진다고 해도 큰 차이는 없을 것이다.

"알겠습니다. 공주님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교황 예하와 연락을 취해 공식적으로 발표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해요."

공과 사를 철저히 구분하던 가웨인이 자신의 의견을 들어주었다. 아르엘은 싱숭생숭한 마음이 들어 괜히 코가 찡했다.

킁킁.

코를 훌쩍이니 갑자기 어디선가 익숙한 듯 이상한 향기가 흘렀다. 그곳에는 화장실 앞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한 갈색 단발의 여인이 초조한 기색으로 서있었다.

'저 사람은?'

분명 점심 때 미친듯이 키스를 주고받던 그 여자. 허리까지 올라오는 치마 위로 흰 블라우스 차림은 공주인 자신보다 기품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모두의 이목이 쏠릴만한 외모였지만, 이상하게 사람들은 여자를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

의심의 싹이 트기 시작하니 뭔가 이상하다. 추기경과 같은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나누고 추기경이 암살된 장소에 다시 나타난게 과연 우연일까? 인과관계는 전혀 없었지만 아르엘의 직감은 이상을 부르짖고 있었다.

저 여자, 분명히 뭔가 있다. 아르엘은 성큼성큼 여인에게 다가갔다.

"실례합니다. 신원확인을 좀 해도 될까요?"

"......무슨 근거로?"

여자의 대답은 퉁명스러웠다. 하지만 누구시냐 묻기도 전에 근거를 물었다. 어딘가 켕기는게 아닐까 싶었다. 아르엘은 고개를 숙이며 예의주시했다.

"죄송합니다. 저는 협회의 히어로 <프린세스>라고 합니다."

"...영국의 공주? 그런 공주님이 저한테는 왜-"

여자가 아르엘의 뒤에 선 가웨인을 보고 흠칫 놀랐다. 찰나의 순간이지만 가웨인과 아르엘은 둘을 상대로 한 여자의 경계를 눈치챘다. 역시 수상쩍었다.

"신분증을 잠시 보여주시겠습니까?"

"......모처럼 데이트 중에 이런 일을 겪어서 엄청 당황스러운데."

여자는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스마트 워치에서 홀로그램 신분증을 꺼냈다. 여자는 A급 헌터 <케레스>. 히어로가 아닌 헌터였다. 가웨인이 먼저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헌터분이셨군요. 혹시 뭔가 이상한 걸 본 적 없으십니까? 수상한 행동을 하는 자라거나."

"전혀요. 저는 지금 관광 중이었단 말이에요."

"이런 시기에 관광을?"

"세계가 멸망할 지도 모른다면 죽기 전에 조금이라도 더 많은 곳을 눈에 담고 가려고 하는데요. 왜요?"

"아, 아닙니다."

케레스의 말투는 쌀쌀맞았고, 가웨인은 머리를 긁적이며 물러섰다. 하지만 아르엘은 물러서지 않았다.

"혼자 오신 선 아니시죠? 아까 저희 밥 먹을 때 본 것 같은데. 점심 때, 미슐랭 2스타 레스토랑에서."

"......뭔가 취조받는 기분이라 불쾌하네요."

"불쾌하셨다면 죄송합니다. 하지만 저희도 단서를 잡아야하는 상황이라서요. 괴인을 처치한 이름모를 '히어로'분께 사례라도 해야하지 않겠어요?"

"......."

아르엘의 말에 케레스는 인상을 찌푸렸다. 명백히 둘로부터 벗어나고 싶어하는 눈치였고, 가웨인 마저도 미심쩍은 눈으로 케레스를 바라봤다.

"저기 혹시…."

"기다리게해서 죄송해요, 누나."

케레스의 옆에 백발의 소년이 나타나 케레스의 손을 잡았다. 푸른 멜빵바지에 흰 셔츠, 갈색 빵모자 차림의 소년에 아르엘은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누구…?"

"저희 형 동생인데요?"

소년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케레스의 뒤로 물러섰다. 케레스는 소년의 손을 꼭 잡으며 앞을 막아섰다.

"...보시다시피 기다리고 있던 처지야."

케레스는 뒤를 가리켰다. 남자화장실. 소년은 민망한 얼굴로 케레스의 뒤에 완전히 숨었다.

"누, 누나. 무슨 일 있어요? 혹시 또 지난 번처럼….

"아냐. 아무것도 아냐."

케레스는 백발의 소년을 꼭 끌어안으며 다독였다. 창백해진 소년은 케레스의 가슴에 얼굴이 파묻혔고, 케레스는 소년을 안아들며 난처한 얼굴로 웃었다.

"실례합니다만 숙소로 떠나도 될까요? 약혼자 동생인데, 조금 많이 놀란 것 같네요."

"아, 네."

"혹시 무슨 일 있으면 명함의 메일로 연락주세요. 아니면 기억 나는대로 협회에 소상히 말씀드릴게요."

"아,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가웨인이 먼저 나서서 소년을 다독였다. 소년의 푸른 눈동자가 잠시 빛났고, 가웨인은 품에서 사탕을 하나 꺼내 소년에게 건넸다.

"미안해. 아저씨가 가진게 이거밖에 없어서."

"고마워요, 형."

"......아니 뭐 형이라고 할 것 까지야."

가웨인은 머쓱한 얼굴로 머리를 긁적이며 물러섰다. 케레스는 둘에게 양해를 구하고 자리를 벗어났다.

"...가웨인 경, 이상하지 않아요?"

"무엇이 말입니까?"

"약혼자 동생을 저렇게 사랑스럽게 데리고 갈 수 있을까요?"

아르엘의 의심이 깊어지는 가운데, 가웨인은 다시 품에서 사탕을 꺼내 아르엘에게 건넸다.

"이거 드시고 마음 편안히 하십시오. 이제부터는 제 일이 된 것 같습니다."

"...무슨 말이죠?"

"하하, 간단히 말해서…."

가웨인의 마도기어가 금빛으로 반짝였다.

"...제가 나서야 할 때가 있을 지 모른다는 얘기죠."

"......무게 잡지 말고 그냥 구체적으로 얘기해주실래요? 6하 원칙에 의해서."

가웨인은 한 번 더 혼났다.

* * *

"케레스 양, 언제부터 내가 당신 약혼자가 됐지?"

"......."

히드라는 묵묵부답이었다. 케레스는 굳이 스포츠카 한 대를 대여하여-사려고 했는데 절차가 복잡해서 때려치웠다-드라이브를 나서기를 바랐고, 직접 운전대를 잡고 시외곽으로 빠져나왔다. 나는 조수석에 앉아 딸기우유를 홀짝였다.

"케레스 양?"

"......."

"케레스 누나?"

"그래, 시안아. 왜 그래?"

누나 소리 듣는게 그리도 좋을까. 나는 차가 완전히 시외로 밖으로 빠져나가는 풍경으로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이제는 누나 동생 플레이 안 해도 되지 않을까?"

"안 돼. 끝까지 가야해."

히드라는 미소를 짓고있었다.

그 미소는 꼭 복학생 선배가 새내기 대학생을 상대로 짓는 음흉한 미소와 다를 바가 없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나는 분명 어떻게 될 게 뻔했지만, 점점 히드라를 공략하기 위한 끝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원작에서도 어린 아이 모습으로 변할 때가 있었지.'

히드라를 정령으로 각성시키기 위한 정령전. 그건 히카리가 만든 약에 의해 주인공이 어린 아이의 모습이 되면서 발생한 서브 이벤트가 계기가되었다.

몸매나 행동이나 정숙한 누님계라는 건 모든 플레이어가 일견에 알았지만, 엄청난 절제력을 가진 중증의 쇼타콘이라는 건 히드라 루트를 탄 이들만 아는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케레스 누나, 점점 호텔에서 멀리 빠져나가는데?"

"괜찮아. 사람들 눈에 띄면 여러모로 곤란해지니까."

"그럼 내가 곤란해지는 상황이 발생할 것 같은데."

"시안, 다 알면서 왜 그래? 내가 시안이 임무까지 도와줬는데. 설마 바로 한국으로 돌아가겠다거나 하는 건 아니지?"

"......그거야 그렇지."

애초에 이곳에 온 이유가 히드라를 각성시키는게 제 3, 마지막 궁극적인 목적이었다. 나는 유럽으로 올 때부터 크게 세 가지 목표를 가지고 있었고, 어쩌다보니 히드라의 도움을 받아 아돌프를 처치한 것으로 임무를 하나 끝냈다.

히드라에게는 내가 임무를 완수한 것처럼 보이리라. 그래서 나는 선수를 쳤다.

"아직 못 돌아가. 아직 임무가 남아있거든."

"또? 뭔데?"

"뇌절."

"...걔도 설마 괴인이야?"

"아마도. 높은 확률로."

바티칸에는 추기경이, 로마에는 <뇌절> 유피테르가 있다.

여러모로 라스푸틴과 마찬가지로 내게 있어서는 문제의 소지가 많은, 제 3차 세계대전의 중심에 있었던 S+급 괴인 <뇌신> 이었다. 괴인이 된 걸 까발려진 순간부터, 그는 스스로를 제우스라고 천명하며 제우스처럼 행동하기 시작했다.

'설정 상 가장 많은 여자를 겁탈한 빌런.'

아무리 그래도 너무한 것 아니냐는 반응도 있었지만, 신화 속 제우스가 한 짓을 생각해보면 완벽한 원전고증이었다. 나는 온김에 그도 처리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케레스 누나. 지금 어디로 가는 거야?"

"그리스, 아테네."

"...우연치고는 좀 심한데."

"왜?"

"...거기에 뇌절 아지트가 있거든."

"...흥, 그래? 꼭 뇌절의 아지트만 있을까?"

끼이익.

히드라가 갓길에 차를 대고 멈춰섰다. 손을 내 어깨 너머로 뻗은 히드라는 나를 향해 상체를 숙이며 요염하게 웃었다. 나는 의식이 잠시 날아갔다.

"시안, 너 이제 도망 못간다? 내가 너 가지기로 마음 먹었거든."

"......내 주인은 따로 있는데, 주인한테 가서 먼저 물어보지 그래? 아니, 일단 네 주인한테 가서."

"......."

"...누나 주인이 허락하겠어? 잊었어? 나 창염의 것인 걸."

"창염?"

굳이 따지자면 창염은 정령에 가까웠다. 이건 나의 실책. 나는 재빨리 변명거리를 생각해냈다.

"일일이 창염의 피닉스의 괴인이라고 부르기는 힘들잖아."

"그런가. 뭐 상관없어. 어차피 이제는 히드라의 괴인이 될테니까."

"그럼 아테네가 아니라 멕시코로 가야하는 거 아냐? 내 사장님 만나러 가려면."

"아니. 너를 내가 가지면 그 년 열받아서 알아서 올 걸?"

히드라는 내 고개를 돌리고 입술을 맞췄다. 입술을 먹어치웠다는 표현이 더 올바르겠지만, 히드라의 공격에 나는 미처 반응하지 못했다.

[어머어머어머 히드라 쟤 완전 적극적이다 어머어머.]

[아아악! 어린 피닉스 첫키스가아아아아!!]

네트워크가 시끄러워서 차라리 히드라가 손목에 다시 족쇄를 채워주기를 바랄 정도였다. 나는 히드라의 손을 잡고 깍지를 꼈다.

"피지컬을 줄어들었어도 클라스는-"

"내가 히드라거든. 그러니까 너, 나한테 도장찍힌 거야."

히드라는 히밍아웃과 함께, 내 입술을 즈큐웅 했다.

내 의식은 다시 암전되었고, 입에서는 생크림 맛이 났다.

* * *

"푸흐흐, 첫키스 아닌데."

창염은 푸른 구슬을 던졌다 잡으며 피닉스와 히드라가 차안에서 물고빠는 걸 즐겁게 구경했다.

"후후후, 지륜…."

창염은 손가락으로 입술을 쓸며 요염히 웃었다. 창염의 입술에는 온기가 남아있었다.

"미안해요. 저는."

창염은 딸기 쇼트케이크의 딸기를 손가락으로 집어들었다.

"제일 맛있는 거 마지막으로 남겨뒀을 때 빼앗아 먹는 타입이라. 푸흐흐."

창염은 딸기를 한입에 쏙 넣었다. 입술에는 닿지 않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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