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10화 〉1부 17장 18
시안은 한차례 강한 허그를 한 이후, 싱글벙글 웃으며 비밀 통로의 끝에서 장치를 해제하여 바깥으로 빠져나갔다. 히드라는 시안에게서 한 발자국 떨어져서 아랫배를 만지며 그 뒤를 따랐다. 비밀통로의 끝은 예상외로 성천사성 안에 있는 기자재 창고의 벽이었다.
"사람 온다. 잠깐만."
여전히 시안의 잠입은 과감하면서도 철저했다. 짐이 한가득 쌓인 상자 뒤에 숨어 사제복을 입은 이들이 떠나기를 기다렸다. 히드라는 시안의 옆에 따라붙으면서도 시안의 행동을 하나하나 의식할 수밖에 없었다.
허리에 닿은 손을 레오타드 안으로 밀어넣지 않을까?
엉덩이 골 사이에 뜨겁고 단단한 물건을 올려 비비적거리지 않을까?
그도 아니면 수영복을 옆으로 밀어버리고 거기에 불을….
두근, 두근.
막상 부탁은 들어주겠다고 했지만 시안은 과연 무슨 부탁을 할까. 히드라는 진심으로 덮쳐버릴까 샌각을 해봤지만, 역시 조금만 더 어필하면 참지 못하고 이 자리에서도 덮칠 것 같았다.
"가자. 지금이야."
시안은 히드라의 손을 잡고 창고 문을 향해 성큼성큼 걸었다. 종교적 색체가 강한 온갖 미술품 한 가운데에서 수영복만 입고 걷는 것에 대해 히드라는 깊은 배덕감을 느꼈다.
만약 여기서 하게 된다면-
"누구십니까?"
"흡?!"
히드라는 헛숨을 들이켰다. 결국 들키고 말았다. 문을 열고 나가려던 순간 사제복을 입은 누군가가 창고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누군가는 히드라가 빌헬름을 옆에서 보좌하도록 만든 괴인이었다.
"......!!"
사제 괴인은 시안과 히드라의 모습을 보며 소리없이 경악했다. 여신이나 다름없는 히드라가 음란한 복장에 남자와 손을 잡고 데이트를 하듯 다니는 것에 정신적 충격을 느끼고 있었다.
"히ㄷ-"
타-앙.
발터가 불을 뿜었다. 시안은 어디서 꺼냈는지도 모를 발터가 사제 괴인의 심장에 바람 구멍을 만들었다. 사제 괴인은 말을 잇지 못하고 앞으로 고꾸라졌다.
"......."
히드라는 부하 괴인이 시안에게 살해당했다는 것 보다 자신의 정체가 드러나지 않았다는 것에 안도했다. 그리고 히드라는 내심 이 미묘하고 아슬아슬한 관계가 끝나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는 걸 자각했다.
"...시안 씨, 걸렸잖아. 이제 어쩔 거야?"
히드라는 능글맞은 얼굴로 시안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툭툭 쳤다. 상대는 비록 괴인이었지만, 어쨌든 시안은 호언장담과는 달리 발각되고 말았다.
"케레스 양. 누가 봤다는 거야?"
시안은 죽은 괴인을 구석까지 끌고들어가 머리에 대고 총구를 겨눴다.
"여기에 누구, 우리를 발견한 살아있는 사람 있어?"
탕.
시안의 발터는 소음기라도 달린 것 마냥 조용했다. 보자마자 심장에 탄환을 갈긴 것도 모자라 정수리에까지 확인 사살을 하다니. 히드라는 시안의 과격함에 침을 꼴깍 삼켰다.
'역시 괴인은 괴인이네.'
사람을 죽이는데 망설임이 없다. 다크 레기온의 간부적으로, 사람을 죽이는데 망설이거나 기절시켰다면 히드라로서는 큰 실망을 했을 것이다. 지금 당장은 기절했더라도 나중에 의식을 되찾으면 결국에는 그들의 잠입을 본 사람이 될테니.
"본 사람 없지?"
"...그렇네."
죽은 자는 말이 없다. 시안은 싱글벙글 웃으며 플라스틱 모델건 방아쇠에 검지를 걸고 빙그르르 돌렸다.
"그럼 계속 가자. 갑자기 튀어나와서 깜짝 놀라기는 했는데, 이제는 괜찮을 거야."
"시안 씨, 방금 총성 울렸는데 태연하네?"
"이능력자만 들을 수 있는 총성이거든."
시안은 총을 다시 히드라에게 건넸다. 이전에 확인한 플라스틱 모델건이었고 탄창은 비어있었지만 분명 사제 괴인은 죽었다. 히드라는 피닉스가 한국 내에서 인간들을 상대로 실험 부대를 운용하던 것을 상기했다.
"물총부대?"
"그것도 알아?"
"알다마다. 약한 이능력자들을 상대로 마도구를 쥐여서 전력으로 삼는 거, 제법 유효한 전술이라고 생각은 하고 있어."
"그럼 설명하기는 쉽겠네. 맞아. 그 물총부대의 일환이지."
시안은 히드라의 손에 총을 올렸다. 뒤에서 백허그를 하며 전방을 향해 총구를 겨눴고, 히드라는 급히 모퉁이 너머를 마력으로 훑었다.
"총에 마력만 불어넣으면 돼. 조준은 내가 해줄테니까 마음대로 한 번 쏴 봐."
'이런.'
하필 모퉁이 너머에는 히드라의 사제 괴인이 이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히드라는 망설였지만, 시안이 검지 위에 자신의 검지를 올리는 통에 멈출 수 없었다.
"이대로 한 발 쏘면 돼."
시안의 낮은 목소리가 히드라의 귓가를 간질였다. 하지만 히드라가 쏴죽여야하는 상대인 괴인은 제법 강한 괴인이었다. 쏴죽이기에는 아까운 존재. 하지만 안 쏘면 자신의 모습이 들킨다.
"안 쏘면 들킨다? 보여지게 될 거야?"
시안의 목소리는 악마의 유혹과도 같았다. 결국 히드라는 눈을 질끈 감았다.
'미안해, 부활시켜줄게!'
탕.
마탄이 조용히 총구에서 뿜어져 모퉁이를 저격했다. 막 몸을 돌리려던 사제 괴인은 그대로 히드라의 마탄을 맞고 절명했다.
"잘했어요. 케레스 양."
"사람을 죽여놓고 잘했다니, 시안 씨 보기보다 뒤틀렸네."
"사람이 아니잖아. 괴인이지."
시안은 심장에 바람구멍이 난 사제 괴인을 벽 한 구석에 밀어넣으며 스마트 워치를 확인했다.
"쯧. 시간 없겠다. 케레스 양, 총 꼭잡아."
"왜?"
"숏컷으로 가려고. 지금 위치는...전시관이네."
시안은 다시 히드라를 공주님 안기로 안아들었다. 마음만 먹으면 히드라가 바로 시안의 가슴에 총구를 들이밀 수 있는 자세였지만, 시안은 아무렇지 않게 복도를 훑었다.
"그럼 간다?"
"잠깐만. 어디로 간다는-"
"지름길!"
시안은 히드라를 안고 유리창을 발로 걷어찼다.
와장창---!!
"......?"
지금 잠입액션 하고 있는 중 아니었나? 이렇게 시끄럽게 소리를 내면 걸릴텐데? 히드라가 상식적인 판단을 내리는 사이, 시안은 비상식적인 행동으로 답했다.
"헛차--!!"
시안은 죽인 사제 괴인의 시체를 발로 들어올려 강하게 걷어찼다. 남아있던 유리창 조각 일부는 사제 괴인과 함께 창 너머로 날아갔다.
"눈 감아!"
히드라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시안이 달려가는 곳을 눈치채고 입을 꾹 다물었다. 만약 모두에게 노출이 된다면, 그걸 빌미 삼아 시안을 제 기둥서방으로 만들리라.
타-앗!
시안은 깨진 유리창의 난간을 밟고 수직으로 높이 뛰어올랐다. 각력만으로 한 층을 뛰어넘은 그의 신체능력은 분명 괴인이었고, 괴인임을 대놓고 밝히는 셈이었다.
암살이고 뭐고 당장 정체가 탄로나게 생겼다. 히드라는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이래서야-
탁, 탁탁!
시안은 빛처럼 빠른 속도로 외벽의 튀어나온 부분을 발로차고 올라 다른 유리창을 깨뜨렸다. 그들이 빠져나온 창고 앞 복도보다 훨씬 높은 곳까지 도착한데 걸린 시간은 불과 3초도 지나지 않았다.
"시선 돌리기에 이만한게 없지. 그래서 케레스 양, 누구 하나라도 우리를 봤을까?"
"......없는 것 같은데."
사람들의 시선은 빛처럼 유리창을 빠져나온 시안과 히드라가 아닌, '철푸덕'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진 사제 괴인으로 집중되어있었다.
처음 유리창이 깨지며 사람들의 시선이 일부 모이고, 유리창에서 사람이 떨어진다면 당연히 시선은 무의식적으로나마 떨어지는 대상으로 내려가기 마련. 히드라는 그 짧은 순간에 임기응변을 부린 시안의 행동에 넋이 나갔다.
"행여나라도 본 사람이 있으면 어쩌려고 그랬어?!"
"그러면 그 사람은 눈요기 하는 거지. 괜찮아."
시안은 최대한 자신의 안쪽으로 접은 히드라의 몸을 눈으로 가리켰다. 그게 히드라의 가슴을 내려다보는 것 같아 히드라는 총든 손으로 가슴을 가렸다.
"너 절대 안 보이게 했거든. 그리고 이제 끝이야. 여기가 빌헬름 아돌프 추기경이 있는 전시실-"
"씨발?"
히드라는 유리창 너머의 장면을 보고 쌍욕을 내뱉었다.
퍽퍽퍽퍽.
그곳에는 빌헬름 추기경이 천사상을 강간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천사상은 히드라의 얼굴을 빼다박아 있었다.
"......거 취향 참."
"......."
시안은 난감한듯 웃었다.
"케레스 양, 일단 둘이 무슨 관계인지는 모르지만 저거 내 타깃이거든? 총 좀 빌려줄-"
탕-----!
발터 PPK가 황색의 마력을 뿜었다. 히드라를 닮은 듯한 천사상이 박살이났다. 눈이 풀린 추기경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리다가-
탕탕탕!!
마탄이 두 눈과 발기한 볼품없는 물건을 꿰뚫었다.
***
사실 이게 정상적인 반응이었다.
창염의 모습을 본뜬 존재들은 수도 없이 많았다. 가루라, 흑염룡, 바이오로이드 가루다, 청화로 변신한 가을. 앞으로도 그건 늘어날 것이며, 내가 손쓰고 싶어도 손쓰기 어려울 것이다. 세상 그 누가 자기 모습을 본뜬 것을 추악한 욕망을 펼치기를 좋아할까.
탕, 탕탕탕!
유리창을 깨고 전시장으로 들어간 히드라는 발터 PPK가 망가지기 직전까지 마탄을 쏘았다. 히드라는 그걸로도 모자라 설치미술로 악마를 향해 든 대리석 창을 뽑아 빌헬름 추기경을 때려 패고 있었다.
퍽, 푸욱, 퍽퍽!
창으로 때려 패고 있었다. 그 스윙은 감히 내가 덕배트를 휘두르는 것에 견줄만했다. 나는 히드라의 등 뒤로 다가가 백허그하며 손을 잡았다.
"이거 놔!"
"이렇게 때리면 더 아프게 팰 수 있어."
나는 히드라의 뒤에서 골프채 스윙 강습을 하는 것 마냥 손을 움직였다. 매타작을 하던 히드라의 움직임은 아돌프를 상대로 홀인원을 날렸다. 히드라가 저리 격하게 후두려패는데 내구성이 단단한 걸 보니 이미 괴인이었다.
'발키리 작전 성공.'
나는 정령 네트워크를 통해 1의 작전이 성공했음을 둘에게 알렸다. 네오 나치의 화신이자 히틀러의 망령은 다른 누구도 아닌 다크 레기온 간부의 분노에 소멸했다. 아지다하카가 직접 오지 않으면 부활도 쉽지 않을 터.
"하아, 하아."
히드라는 씩씩거리며 부서진 창대를 내리찍었다. 빌헬름 추기경의 창대도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만큼 부러져있었다. 나는 히드라를 진정시키기 위해 뒤에서 등을 토닥였다.
"진정해. 이미 죽었어."
"부활시키고 다시 죽여버릴까보다."
"...그게 가능해?"
"마음이 그렇다는 거야. 씨이."
히드라는 내 신창에 이마를 맞았던 순간보다 더 열을 올리고 있었다. 나는 히드라에게서 총을 빼앗았다.
"왜?"
"확인사살."
탕.
그 어느때보다도 강해진 내 탄환이 아돌프의 심장-코어를 깨뜨렸다. 유리 깨지는 소리와 함께 아돌프의 몸은 잿더미가 되어 바스라졌다. 역시 예상대로 아돌프의 코어는 검은색-흑전갈의 코어였다.
"쯧."
"......."
히드라는 망연한 얼굴로 재가되어 흩어진 아돌프를 내려다봤다. 괴인으로서 완전히 죽어버렸고, 나는 망가진 PPK를 아돌프의 재 위에 던졌다.
"이러면 사람들이 알게 되겠지. 누군가가 빌헬름 아돌프를 암살했다. 알고보니 그는 괴인이더라. 훗."
"......잠깐만."
히드라가 내 손목을 붙잡았다. 도망치지 못하게 하려는듯 내 손목 희어질 정도로 꽉 붙잡았다.
"총에 내 지문 묻었잖아. 나를 암살자로 만들…. 시안 씨, 설마?"
"그 생각도 재미있을 것 같은데 내 계획은 아니야. 저건 10초 뒤에 폭발할 예정이지. 그리고 우리는 여기서 도망을 칠 거야."
"...장난해?"
애애애애애앵-----
현재, 바깥에는 온갖 사이렌과 경보가 울리고 있었다. 나는 바로 스마트 워치를 통해 주변 상황을 확인했다. 성천사성에서 살인사건 발생. 살펴보니 괴인. 히어로 출동 중.
나는 손으로 바지끈을 살짝 건드린 뒤, 히드라의 등 뒤를 톡톡 두드렸다.
"조금 간지러울 거야."
"뭐? 꺄악?!"
레오타드 수영복이 히드라의 전신을 좀먹어들어가기 시작했다. 히드라는 마력을 일으키면서 나를 위협하려했지만, 내 몸을 보며 마력을 잠재웠다.
"...뭐야?"
"가변형 히어로 슈트지. 흐흐, 인간들의 과학은 참으로 대단하단 말이야."
뻥이다. 사실은 내 마력이 잔뜩 들어간 슈트로, 나는 언제나처럼 흰코트의 디폴트 백청화 모습이 되었다. 히드라 또한 모습이 바뀌었다.
"심혈을 기울여 골랐어. 어때?"
"......."
히드라는 자신에게 입혀진 스킨을 눈으로 훑으며 기가 막힌 얼굴로 나를 쏘아붙였다.
"...그러니까 이런 기능이 있으면서도 나를 굳이 수영복 차림으로 데리고 온 이유가 뭐야?"
"이유를 설명하기 전에, 이런 곳에서 이상한 짓 하던 놈이 하나 있었잖아? 부탁은 꼭 들어줘야 해. 그럼 이유 말 해줄게."
"......후-우-"
히드라는 깊게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선수를 치지 않았으면 반쯤 죽였을 기세였다.
"그래. 시안 씨, 이유부터 말해봐. 내 인내심이 끊어지기 전에."
"어제는 속옷만 입고 내 몸에 부비적거리던 케레스 양이 수영복 입었다고 부끄러워하는게 섹시하고 귀여워서."
"......."
히드라는 침묵했다.
그리고 나의 턴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럼 케레스 양, 지금부터 우리가 곱게 여기를 탈출하려면 연기를 해야해. 도와줄 수 있어?"
"너 진짜 죽을-"
"케레스 누나?"
내 시야가 천천히 낮아지기 시작했고, 히드라는 나를 따라 고개를 숙이며 표정이 굳었다.
"지금부터 누나는 나랑 여기 놀러온 거야, 알았지?"
창염이 내게 백청화의 몸을 준 이유는 이것밖에 없었다.
대 지륜의 히드라 전용 결전병기.
백청화. 10세.
"케레스 누나, 왜 그래? 어디 아파? 내가 호 해줄까? 쿡쿡."
지륜이든 히드라든 둘 다 중증의 쇼타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