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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염의 피닉스-409화 (409/1,497)

〈 409화 〉1부 17장 17

히드라는 시안을 뒤따르며 미쳐버릴 지경이었다.

이제 해가 뉘엿뉘엿 산너머로 넘어가고 있는 시기, 그림자가 길게 지는 시간에 호텔에서 공원까지 활보하는 두 명의 수영복 커플은 이래저래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두근, 두근.

하지만 그 누구도 둘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다. 공원을 가로질러 올 때부터 수많은 이들을 눈에 담았지만, 시안은 히드라를 딱 붙잡고 사람들의 이목을 정확히 피해다녔다.

"정지."

시안은 히드라의 머리를 누르며 고개를 숙였다.

공원에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지만 아예 없는 건 아니었고, 약 1분에 1, 2명 꼴로 둘의 옆을 지나갔다. 마침 시안은 수풀에 몸을 숙였고, 그 앞을 젊은 남녀가 지나가고 있었다.

두근, 두근.

커플처럼 보이는 둘은 쌀쌀한 저녁 날씨에 간절기 차림으로 지나가고 있었다. 히드라는 그들과는 완전히 대조되는 자신의 수영복 차림에 심장이 떨렸다.

'내가 미쳤지.'

땅을 통해 슬쩍 자신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살폈다. 쪼그려앉는 바람에 안그래도 사이즈가 맞지 않은 수영복이 더욱 살집을 파고들었고, 아래에는 부끄럽게도 도끼자국마저 깊게 파여있었다.

열받는 건 시안이 그에 전혀 시선조차 주지 않는다는 것.

시안은 그 누구에게도 걸리지 않겠다는 각오로 주변을 주시했다. 히드라는 진심으로 사고를 쳐볼까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예를 들어 당장 시안을 데리고 공원 한복판에 나가서 광란의 살사라도 추는-

'아냐. 진정하자. 아무에게도 안 들켰다는 건 시안이 그만큼 유능하다는 거야.'

히드라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역설적으로 시안의 이동 루트는 너무나도 완벽했기에, 이런 딴생각을 할 여유까지 있을 정도였다. 히드라는 마력으로 주변을 살피며 누군가 자신을 눈치채지 않았을까 살폈지만 역시 아무도 없었다.

"가자."

시안은 히드라의 팔을 잡아당기며 수풀을 돌아나갔다. 성큼성큼 걸어가는 시안의 움직임은 거침이 없었고, 그 누구도 공원을 빠져나간 걸 보지 못했다.

"도착."

시안은 성천사성이 멀리서 보이는 주택가의 골목에 히드라를 데리고 들어왔다. 히드라는 주변 마력을 훑고 속으로 깜짝 놀랐다.

"여긴…?"

"비밀 통로지. 유서깊은 비밀통로."

끼이익. 시안은 오래된 보도블럭을 뒤집어 엎으며 지하로 통하는 계단을 가리켰다. 먼지가 가득한 통로는 족히 수백년 이상 사람이 지나간 흔적이 없어보였다.

"원래 성천사성이 로마 황제의 무덤이었거든."

"시안 씨 도굴꾼이었어?"

"진시황릉 털렸다고 혹시 뉴스에 나오잖아? 그럼 그거 난 줄 알아."

"...세상에."

시안은 손을 휘저으며 먼저 나아갔다. 불빛 하나 없이 성큼성큼 걸어가는 시안의 발걸음에 히드라는 괜히 두려워졌다. 세상 그 어떤 존재도 땅에 발을 디디고 있는 자신을 해할 수 없는 걸 알면서도 괜히 뭔가 튀어나올까 무서웠다.

'장난 좀 쳐볼까.'

히드라는 시안이 위기 상황에 어떻게 대응할 수 있을까 궁금했다. 긴급대피소로 보이는 길은 함정따위는 없었고, 시안은 주변을 예의주시하며 대피로의 중앙을 따라 걸었다.

과연 위기상황에 이 남자는 어떻게 행동할까. 히드라는 마력을 살짝 흘려 천장을 일부 무너뜨렸다. 시안이 발을 내딛는 순간.

투두둑-쾅!!

천장이 무너져내렸다. 자갈과 모래는 둘의 위를 덮쳤다. 옷을 여미고 와도 문제가 되는 상황에서 수영복까지 입었으니 적어도 생채기는 날 터.

"흠."

시안은 시큰둥한 헛기침과 함께 히드라를 번쩍 안아들었다. 소위 말하는 공주님 안기였고, 히드라는 아무 망설임없이 자신을 이런 식으로 안는 것에 어이가 없어 아무 반항도 못했다.

물컹.

시안은 허벅지와 윗가슴 언저리를 꽉 붙잡고 앞으로 내달렸다. 그리고 그 순간.

구구구구.

"엑."

"천장 전체가 연결된 구조야. 벌써부터 무너질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지만."

"그걸 어떻게 알아?"

"내가 좀 잘나서."

시안은 전방만 주시하며 앞으로 달렸다. 허벅지와 겨드랑이 사이를 잡는 그의 손길은 단단해서 도저히 떨어질 것 같지 않았다. 시안은 아래로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

통로는 아직 한참 남아있었다. 히드라는 은근슬쩍 팔을 뻗어 시안의 목에 휘감았다. 옆가슴이 시안의 가슴에 짓눌렸고, 히드라는 시안을 올려다보며 시안의 상태를 주시했다.

'독한 새끼.'

어제부터 대놓고 섹스 어필을 해도 전혀 반응이 없었다.

아니, 반응은 있어도 그걸로 자신을 전혀 덮치려하지 않았다. 키스도 사실상 반농담 반억지로 얻어낸 것이었지, 시안은 결코 제 스스로 히드라를 건드리지 않았다. 서로 괴인인 걸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이 새끼 혹시 발기부전인가?'

발기부전-혹은 고자가 아니고서야 이렇게 밀착하고 있는데도, 심지어 본인도 아는데도 생까고 있을 리가 없다. 고로 시안은 고자다.

'불쌍한 녀석.'

그제서야 모든게 이해가 갔다. 데이트를 즐길 듯 하면서도 정작 본방은 들어가지 않는 이유도 이제서야 알 것 같았다. 모든걸 다 가졌지만 남성성은 거세당한 남자. 그러니 혀는 그렇게 잘 써도 아랫도리는 전혀 사용하지 않지.

'그냥 손절해버릴까.'

아무리 애무를 잘해도 결국 본방을 들어가지 못하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시안에 대한 히드라의 지배욕이 점점 꺼지기 시작했다. 시안의 목에 휘감은 팔의 힘이 점점 풀리기 시작했고, 당장 내려버리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다 도착했어."

마침 무너지는 통로를 빠져나왔다. 히드라는 잽싸게 바닥에 착지했고, 시안은 잠시 무너진 통로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째선지 시안은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고 싶은 듯 보였다.

"뭐야? 시간 없다면서 안 가?"

"......잠깐 릴렉스 타임."

"풋."

시안은 히드라를 등지고 선 채 뒤돌아보지 않았다. 마치 앞을 보이지 않겠다는 듯 하는 모습에 히드라는 얼척이 없고 화가 치밀었다.

자신은 이꼬라지로 만들어놓고 즐길 건 즐기면서 여유를 부리는 척 하는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히드라는 저질러버리기로했다.

"흐흥, 발기했어? 얼마나 작길래 그렇게...핫!"

히드라는 시안의 골반을 잡고 뒤집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히드라의 예상대로 실뱀이-

"흐끅."

시안의 히드라가 아래를 향해 잔뜩 성나있었다. 그리고 하필이면 히드라가 시안의 하의를 잡고 아래로 내려버리는 바람에-

철썩!

히드라는 시안의 히드라에 이마를 얻어맞았다.

***

그 시각.

빌헬름 아돌프 추기경은 성천사성의 상층부, 관광객 유치를 위해 전시된 미술품들을 구경하며 심신의 불안을 달랬다.

"......."

하루 일과의 마지막을 미술품을 보며 심신을 달래는 건 그의 오랜 취미생활이었다. 종교에 귀의하기 전부터 그는 미술에 흥미가 있었다. 비록 미술대학에는 입시에 실패했지만, 아직까지 미술은 그의 취미로 남아있었다.

"......까드득."

하지만 그런 미술품을 봐도 아무런 진정이 되지 않는다. 정오 미사를 나선 순간부터 지금까지, 자신의 주인은 보란듯이 왠 남자와 데이트를 하며 사랑을 과시했다.

'했을까? 했겠지? 하셨을 거다.'

추기경의 분노는 질투에서 시작되었다.

아직 추기경은 주인과 본방은 커녕 유사 행위도 하지 못했다.

주인을 만난지 무려 5년 만에 간신히 그 미려한 몸에 손을 댈 기회를 가졌다. 주인이 정말로 기뻐하던 날에는 추기경의 비루한 물건을 직접 만져주고 발로 능욕하는 것도 그저 기쁘기 그지 없었다.

'피닉스는 어디 6민트 테러 같은 거 다시 안 하나?'

그 날. 창염의 피닉스가 빅 벤 위에서 6민트 테러를 일으킨 날. 침대 위에 누워 추기경의 마사지를 받던 주인은 깜짝 놀라며 땅으로 꺼졌다.

그리고 그 날, 꺄르르 웃으며 기뻐하던 주인은 환희를 주체하지 못하고 아무 부탁이든 들어주겠다 말했다. 추기경은 감히 자신의 물건을 만져달라고 간청했고, 이후로 주인은 아주 가끔 추기경에게 은총을 내렸다.

"......신이시여."

이미 추기경에게 있어서 신은 곧 주인이었다. 늙고 비루한 지금의 몸과는 다른, 어린 소년의 몸으로 회춘까지 시켜주신 주인은 추기경에게 신이나 다름 없었다.

"후우."

추기경은 미술관에 새로 들인 천사상 앞에 무릎을 꿇었다.

하얀 원피스를 입은 성인 여성은 베일을 두르고 있음에도 그 몸매가 여실히 드러났다. 추기경이 비밀리에 직접 주문하여 전시한 대리석 천사상은 꼭 누군가를 닮아있었다.

"하아, 하아."

지금 이 시간에는 그 누구도 들어올 수 없다. 추기경은 천사가 살짝 들어올린 발바닥 아래에 머리를 조아렸다. 오늘 밤은 주인이 제발 거처로 돌아오시어 자신을 즈려밟아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삐비빅.

어디선가 연락이 들어왔다. 추기경은 급히 고개를 들어올렸다.

"무슨 일인가."

[실례했습니다, 어르신. 관람중이셨습니까?]

스크린 너머에는 난처한 얼굴의 집정관 유영호가 비쳤다. 추기경은 근엄하고 인자한 얼굴로 은은하게 미소지었다.

"신께 기도를 드리는 중이었네."

[실례가 많았습니다. 다음에 전화드리겠습니다.]

"아니야, 괜찮네. 무슨 일인가?"

[...그, 멕시코에 간 B급 헌터 <세이렌> 김누리 말입니다만.]

"그 아가씨? 자네 고국은 정말로 좋겠군, 그 어린 나이에도 활약하는 이능력자가 있으니. 껄껄."

추기경은 사람 좋은 얼굴로 웃었다. 유영호는 난처한 얼굴로 볼을 긁적였다.

[...새로 하나 더 만들어야 할 것 같습니다.]

"왜? 혹시 본인이 완강히 거부하던가? 그러길래 내 얘기했지 않았나. 세이렌은 그 소녀에게 어울리는 이명이 아닌-"

[방금 S급 괴수 <케찰코아틀> 레이드에서 A급으로 각성했습니다.]

"......?"

추기경은 시간을 떠올렸다. 나이를 고려하여 B급임에도 원로원에서 직접 의논하여 세이렌이라는 이명이 통과된게 불과 반나절도 지나기 전인데, 벌써부터 A급을 달았다고?

"아니 무슨 성장 속도가…."

[대모께서는 미리 S급까지 이참에 정해버리자고 하십니다만.]

"설레발일세. ...끄응, 미안하지만 내가 지금 거기까지 신경쓸 수 있는 상황이 아니야. 미안하지만 자네가 알아서 처리해주시게."

[...정말로 바쁘신 모양이군요. 알겠습니다. 나중에 직접 말씀드리겠습니다.]

뚝.

유영호와의 통화가 끊어졌다. 추기경은 다시 마음을 다잡고 천사상을 향해 기도했다.

"스으, 스으, 크흡."

추기경 혼자만의 전시관에 옷깃 스치는 소리만이 울리기 시작했다.

***

"미안해, 시안 씨."

히드라는 벌게진 얼굴로 내게 고개를 숙였다. 케레스로서 사과를 하는 것도 있지만, 지륜의 히드라로서도 진짜로 무안하고 미안해서 고개를 숙인 것이다.

"케레스 양, 아무리 그래도 남자 바지 벗기고 그러는 거 아니야. 입장바꿔서 생각해보라고. 내가 케레스 양 강제로 벗겨버리면 어떻게 되겠어?"

"...그렇게라도 하면 사과 받아줄래?"

히드라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내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히드라의 역공에 오히려 내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진심에 진심으로 들어오니 상당히 위험했다.

"워, 원하면 언제든지 말해. 지, 지금 당장이라도 하고 싶으면 해. 아니면 내가 직접 벗을까? 아니, 네 손 좀 빌려줘. 그럼 내가 옷 벗을 테니까…."

히드라는 횡설수설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 모습에서 지륜의 모습이 떠올랐고, 반가움과 안타까움에 정신이 말똥말똥해졌다. 히드라는 자책하며 혼자 삽질을 하기 시작했다.

"네가 손 주기만 하면 내가 바로 옷을-"

따-악.

나는 손가락으로 히드라의 이마를 튕겼다. 히드라는 나를 향해 뻗으려던 손 그대로 굳어버렸다.

"정신 들어?"

"......."

히드라는 멍한 얼굴로 내가 때린 이마를 만지작거렸다. 하필이면 튕겨맞았던 부분이라 민망하기는 했지만 나는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 잘못은 히드라가 했으니까.

"케레스 양."

"......응."

"그래서 직접 확인해보니까 어땠어? 발기부전?"

"...진짜로 미안."

결국 히드라는 내 것을 직접 확인해보는데 성공했다.

창염를 제외하고는 아직까지 그 누구도 보지 못한 주인공의 상반신 누드를 보는 것도 모자라, 이제는 주인공이 가진 최강의 무기까지 두 눈에 담아버렸다. 고개를 숙여 아래로 떨어진 앞머리 사이로, 히드라의 시선이 자꾸만 내 아래로 내려가고 있었다.

'아무렴 발기 안 하는게 미친 거지.'

대놓고 몸을 붙여오는데 발기 안하면 백청화의 몸이 이상한 거다. 평소에 천가을의 어택에서 단련한 보람을 여기서 느끼다니, 참 세상 일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아무튼 아까 있었던 일은 사고같은 걸로. 사과는 받겠어. 오케이?"

"...그래주면 나야 고마운데, 그래도 진짜 괜찮아?"

"케레스 양."

나는 히드라의 앞에 서서 허리 뒤로 손을 뻗으며 장골 위를 손으로 쓸었다. 잘빠진 몸매는 흰 레오타드 덕분에 훤히 드러나는 것도 모자라 살결이 손에 그대로 느껴졌다. 나는 히드라의 엉덩이를 한 번 꽉 쥐었다가 토닥였다.

"나중에 침대에서 벗기는 걸로 퉁치자."

"뭐? 당신 지금 뭐라고 한 거야?"

"사과는 받아들일게. 단, 네가 말한 대로. 남의 걸 벗겼으면 자기도 벗겨지기를 각오해야겠지?"

"......시안 씨, 변화구만 던지는 줄 알았는데 이럴 때는 직구 꽂는 스타일이구나?"

"그래서 싫어? 나는 싫다고 하는 사람이랑은 강제로 안 해. 대신…."

나는 히드라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히드라가 조금만 앞으로 다가오면 중요 부위가 닿을락 말락 하는 위치까지. 히드라는 굳은 표정으로 내 가슴 위에 손을 올리며 눈을 찌푸렸다.

"시안 씨, 자꾸 이렇게 장난 칠거야?"

"장난이라니? 케레스 양, 이게 지금 내 상태야. 지금 임무만 아니면 당장 호텔로 달려가서 광란의 밤을 지내고 싶은 심정이라고."

창염이랑.

"정말?"

"왜? 안 믿겨? 지금부터 사람들 있는 곳으로 잠입할텐데, 어디 한 번 사람들한테 들키지 않게 해볼래?"

"...아주 대담하네. 여기 문화유적지야. 그런 곳에서 하겠다는 거야?"

"원한다면. 그래. 원한다면, 나는 전세계 사람들의 앞에서 생중계로도 할 수 있어."

창염이랑.

히드라는 떨리는 손으로 나를 밀어냈다. 순간 혹했다. 게임은 끝났다.

"세, 세상에 그런 사람이 누가 있어?! 이런 곳에서 음란행위를 하는 사람이 있으면 나와보라고 해! 그럼 내가 바로 네 노예 하겠-"

"말 실수는 좋지 않아, 케레스 양."

나는 히드라의 턱을 들어올리고 검지로 히드라의 입술을 눌렀다.

"나는 너를 노예로 받아들일 생각은 추호도 없거든."

"......말이 그렇다는 거야."

히드라는 내 손을 떼어내며 입술을 오물거렸다.

"...진짜로 그런 사람 있으면, 내가 진짜 네 부탁 뭐든지 하나는 들어줄게."

끝났다.

나는 고마운 마음에 히드라를 와락 끌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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