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8화 〉1부 17장 16
분패.
히드라는 나의 무자비한 키스에 패배했다. 중간에는 자신이 리드하며 역공을 펼쳤지만, 내가 히드라의 약점을 공략하자 히드라는 맥없이 무너졌다.
"하아, 하아, 하아…."
히드라는 숨을 헐떡이며 고개를 떨구었다. 오금이 떨려서 제대로 숨을 쉴 수 없는 듯 했다. 히드라의 얼굴에는 쾌감과 굴욕에 짙은 패배감이 서려있었다.
"케레스 양. 지륜의 히드라의 괴인 이라고?"
나는 손목에 만들어지다 만 히드라의 구속을 탈탈 털어냈다. 히드라가 딱 적당한 수준으로 나를 구속했기에 족쇄를 풀어내는 건 쉬운 일이었다.
"그럼 괴인끼리 잘 지내보자. 잘됐네."
"...당신 도대체 무슨 생각이야?"
히드라는 히드라의 부하 괴인을 자처했다. 그리고 히드라는 피닉스와 적대 관계에 있는 존재였다. 나나 히드라나 이리 친하게 지낼 수 없는 존재였다.
"히드라는 피닉스의 적이야. 그걸 몰라?"
"적이지. 하지만 그건 윗분들 얘기고, 아랫 사람들은 무슨 문제가 있겠어? 막말로…."
나는 히드라의 손목을 붙잡았다. 히드라 또한 마찬가지로 스마트 워치 자체는 차고 있었지만, 나는 히드라처럼 워치를 마력으로 감싸며 연락을 못하게 하는 짓은 하지 않았다. 그저 손목을 간질이듯 만지작거릴 뿐.
"들키지만 않으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잖아?"
"너 아주 미쳤구나?"
"예쁜 사람 보면 아주 미쳐버리지. 그런데 그게 괴인이네? 그럼 더 말 할 필요 없지."
"......하아."
히드라는 결국 포기했다. 나에 대한 판단 자체를 포기한 듯한 한숨이었다. 히드라는 자신의 입술을 가리켰다. 립스틱을 바르지 않은 선홍빛 입술은 나와 히드라의 침으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이렇게 잘 하는 사람이 왜 어제는 안 건드린 거야?"
"그거야 괴인인지 몰랐으니까. 인간이랑은 안 해. 괴인의 피지컬로 몰아붙이면 여러모로 미안해지거든."
"이상한데서 이상한 신경을 쓰네. 그럼 괴인이랑은 본방까지가도 괜찮다는 거야?"
"글쎄."
거기까지는 허락을 받지 못했다. 허락을 받았어도, 설령 명령을 내린다고 하더라도 나는 그런 짓은 하지 않을 것이다. 창염이 내거는 싱크로의 조건이 히드라에게 박고 싸서 히드라의 마음을 훔치는 거라면 모를까.
그건 또 히드라에게 미안한 짓이긴 한데, 창염이 명령을 내린 이상 어쩔 수 없었다. 창염은 히드라에 대해 상당히 호의적이었다. 예상외로.
"그러니까 전혀 신경쓸 필요 없어. 케레스 양은 히드라 님께 보고할 생각인가? 응?"
"...아니, 히드라 님께서는 보고를 받지 않아. 나도 지금 휴가 중이고."
"그런가? 뭐 나야 상관없지. 나도 우리 사장님 뜻대로 주어진 명령만 처리하면 그만이니까. 내 임무는 콧수염을 저격하는 거지, 로마에서 마주친 미인 괴인을 발견해서 찾아 죽이라는 게 아니라서."
"진짜 또라이네. 걸리면 어쩌려고 그래?"
"얘기했잖아. 안 걸리면 그만이라고. 그리고 걸리면 뭐 어때?"
나는 히드라의 손을 깍지꼈다. 이제 슬슬 다시 밖으로 나설 차례였다.
"인생의 마지막을 불태우고 가는 거지."
"...하아, 난 모르겠다."
히드라는 진심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흐흐, 그냥 흐름에 몸을 맡겨. 마음 편히 생각해. 너도 얘기했잖아? 남은 3개월 동안 마음껏 놀고 먹겠다고."
"그런 식으로 얘기는 안 했는데…. 틀린 말은 아닌가."
"그런 거지. 전혀 고민할 필요 없어. 이번에 나와 지내는 시간이 끝나고 나면 이제 고민은 하나밖에 없을 걸?"
지륜으로 각성하면 모든 고민은 하나로 귀결될테니. 나야 환룡과 석하랑, 카르나에 이르러 나를 노리는 또다른 사냥꾼 정령이 생기겠지만 어쩔 수 없다.
"무슨 고민?"
"다음 데이트 어디로 떠날지."
"......벌써부터 다음을 언급하다니. 내가 너랑 또 어디로 갈 거라고 생각해?"
"응."
나는 히드라와 깍지를 끼고 골목을 빠져나왔다. 히드라는 내가 인도하는대로 따라오면서도 나를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오늘 움직인 동선도 다 그걸 위한 사전 작업이었어? 그 콧수염 추기경은 어떻게 죽일 거야? 오늘 식당에서 기회를 본 것 같은데, 지금 이 도시에는 원탁의 영웅인 가웨인이 있어. 너 날짜 잘못 잡아도 한참 잘못 잡았다고. 추기경을 죽여도 가웨인이 너를 잡으러 올 걸?"
"다 방법이 있으니까 걱정 안해도 돼. 너한테 피해가 가는 일은 일절 없을 거야."
"불안한데."
"나는 네가 나 버리고 도망갈까봐 불안한데."
히드라는 손톱을 세워 내 손등을 찔렀다. 피는 나지 않지만 따끔한게 개소리 하지 말라는 신호였다.
"헛소리말고 빨리 방법이나 말해봐. 타당한 계획인지 아닌지부터 알아야 뭘 돕든 말든 할 거 아니야."
"잠입해서 쏘고 튄다. 끝!"
"미친 새끼. 그럴 능력은 있고?"
"케레스 양. 거꾸로 생각해봐."
나는 히드라가 한 번에 수긍할만한 답을 내놓았다.
"내가 그만한 능력이 없었으면 사장님께서 나를 혼자 로마 한복판에서 활동하도록 하셨겠어?"
"......그건 그렇네?"
히드라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어느정도 수긍하는 눈치였다. 적을 판단함에 있어 상대를 결코 과소평가하지 않기에, 자신이라면 충분히 하겠다 싶은 일을 상대도 한다는 가능성을 아예 닫거나 하지는 않았다.
피닉스가 적어도 나를 가만히 혼자 보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내가 한가닥 하거나, 또다른 동료가 오거나, 아니면 뭔가 다른 방법이 있거나. 히드라는 나를 옆에서 직접 지켜보며 어떻게 암살을 저지를 지 기대하는 눈치였다.
"좋아. 그럼 어디 보여줘봐. 시안 씨 능력 한 번 직접 보여줘."
"당연하지. 그럼 케레스 양. 우선 제일 먼저 하러 갈게 있는데."
나는 도로변의 택시를 잡고 문을 열었다.
"호텔에서 잠깐 쉬고 가자."
"......."
나는 히드라가 '그린 라이트….'하면서 중얼거리는 걸 상큼하게 무시했다.
* * *
.
시안과 함께 잠시 호텔로 돌아온 히드라는 다시 샤워실로 직행했다.
쾅쾅!
대리석 벽이 울렸다. 히드라는 주먹을 쥐고 대리석 벽을 때렸다. 당연히 마력으로 소리를 줄였기에 전혀 소음은 없었다. 시안은 이미 진작에 간단히 샤워를 한 뒤 작전 결행을 위한 준비에 한창이었다.
'서로 괴인이라는 걸 밝혔는데 어떻게 저리 태연한 거지?'
상식적으로 피닉스와 히드라가 적이라면 당연히 그 아래에 있는 부하들도 적이 되어야하는게 아닌가. 히드라는 스스로를 직접 히드라라 자칭하려다가 격을 생각하여 히드라의 괴인 케레스라 자칭했건만, 시안은 그저 자신을 키스하고 싶은 미인 케레스 양으로만 생각했다.
"또라이 새끼."
얼굴은 반반하고 몸매는 멋진게 행동은 또라이라는 말로도 부족할 정도로 제정신이 아니었다. 여기서 더 얼마나 미친 짓을 저지를 지 도저히 감이 오지 않았다.
'피닉스는 도대체 왜 저런 미친 놈을 부하로 들인 거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생각하면 할수록 머리만 더 아파왔고, 히드라는 결국 생각하기를 포기했다.
'그래. 어차피 이미 서로 괴인인 거는 까발렸어.'
시안은 자신이 괴인이라는 것을 알자마자 노골적으로 행동을 바꾸었다. 마치 의식적으로 브레이크 페달을 밟고 있다가 괴인이라는 걸 알자마자 풀악셀을 밟는 것 처럼 급발진했다.
진짜로 괴인의 피지컬은 되어야만이 자신을 받아낼 수 있다는 것 처럼.
"......."
히드라는 손을 입술 위에 올렸다. 아직까지고 설육이 오가던 그 감각이 혀와 입에 남아있다. 시안이 마지막에 삼켰던 딸기 아포가토 향이 은은하게 남아있었다.
'키스는 더럽게 잘하네.'
나름 혀 놀리는 거에는 자신있던 히드라가 꼼짝도 힘을 못쓰고 당했다. 시안은 자신의 약점을 파악하자마자 바로 찌르고 핥으며 히드라를 가볍게 보내버렸다. 호텔로 돌아온 이유도 히드라의 니트 롱원피스가 조금 젖었기 때문이었다.
무엇에 젖었는지는 굳이 말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 히드라가 샤워를 하는 이유는 굳이 말할 필요는 없었다.
'내가 미쳤지....'
히드라는 이미 보수를 받아버렸다. 그리고 그에 따라 시안에게 일시적으로 협력하기로 했다.
아지다하카의 괴인이 될 지도 모르는 존재를 히드라의 괴인이 제거한다는 건 어불성설같기는 했지만, 제 3차 세계대전을 일으킬지도 모른다는 존재라는 건 히드라에게도 문제였다. 히드라는 온전한 지구를 성주에게 바칠 생각이었지, 포화가 가득한 세계를 그대로 넘겨줄 생각이 없었다.
그리고 이번 기회에 늙고 추악하고 질투심만 가득한 노인네를 치워버릴 생각이었다. 권력자라고 자신의 괴인으로 만들었더니, 이제는 감히 수음을 해달라고 간청해대고 있었다. 히드라는 겉으로는 아껴주는 척 하면서 속으로는 수십번을 마음속으로 죽여버렸다.
그러니까 이번에 시안에게 겉으로는 협력해보자. 시안이 임무에 성공하면 시안을 피닉스에게서 강제로 빼앗아 버리고, 임무에 실패하면 그냥 한 번 먹고 버리는 것이다. 아무리 그쪽으로 잘 한다고 하더라도 일단 능력이 중요했다.
- 샤워 끝났어?
"응. 잠깐만. ...아, 나 옷 안가져왔는데."
- 걱정마. 타월 안에 넣어놨어.
히드라는 손을 휘저으며 물기를 전부 날려버렸다. 시안이 고이 접어둔 타월 안에는 라텍스같은 흰 옷이 모셔져 있었다. 고작 흰 옷 하나.
"......시안 씨? 뭔가 부족한 것 같은데."
- 그거 맞아. 그거 입고 나오면 돼.
"......장난쳐?! 지금 나보고 이걸 입으라고?! 당신, 도대체 어떤 옷을 입고 있길래 나보고 이딴 걸 입으라는 거야!!"
히드라는 샤워 부스의 커튼을 몸에 두르고 바깥으로 뛰쳐나갔다. 그리고 히드라는 보고말았다.
"준비 끝났는데."
시안은 몸에 착 달라붙는 트렁크 타입의 수영 팬티를 입고있었다.
수영 팬티만 입고있었다.
"어, 싫어? 그럼 어쩔 수 없지. 나 혼자 다녀올게. 침대에서 쉬고 있어."
"......."
결국 히드라가 화장실로 걸어가 옷을 입기까지 무려 두 시간이 지나버렸다.
* * *
시간은 제법 흘렀고, 해가 뉘엿뉘엿 지기 시작했다. 바티칸을 들린 여왕은 전세계를 향해 하나로 단합하여 다크 레기온을 무찌르자 천명했다. 나는 호텔방의 TV를 끄고 고개를 돌렸다.
"말은 쉽지. 그치?"
"......."
히드라는 아무 말 없이 내 뒤에 서있었다. 손은 아래로 뻗어 치골을 가리고 있었지만 손을 앞으로 모으는 바람에 살집이 잡힌게 훤히 보였다.
"왜 그래?"
"...진짜 이런 옷 입히고 나서려고?"
"네가 괴밍아웃만 안했어도 얌전한 복장 입혔지. 괴인이면 이런 옷 정도는 입어줘야한다고. 어제는 속옷만 입고 같이 자놓고 왜그래?"
"그거랑 지금이랑 같아?! 지금은 다른 사람들한테 들킬 수 있는 거잖아?!"
히드라는 빽 소리를 지르며 복장에 대해 성토했다. 히드라는 흰색의 레오타드 하이레그 수영복 말고는 아무것도 입지 않은 상태였다. 가슴은 적절히 가리고 있지만 고간에서 올라오는 천옷의 선은 허리너머로 올라갈 정도로 깊게 패여있었다.
손을 치우면 도끼자국이 보일 정도. 히드라는 자신의 복장에 상당히 부끄러워했다.
"무슨 문제야? 복장이 우리를 규정하는 건 아니잖아?"
"수치심을 가지라고!!"
"수치스러워할 이유가 뭐있어. 너도 지금 내 몸에 눈을 떼지 못하고 있으면서. 서로서로 어디 내놓기 부끄럽지 않은 몸 아니야?"
"이러고 지금 암살하러 가겠다는 거잖아!"
히드라는 거울을 가리키며 분통을 터뜨렸다. 그곳에는 래쉬가드 하의만 입은 백청화가 서있었다. 손에는 검은 모델건만이 들려있었다. 나였다.
"케레스 양. 이러고 바티칸에 잠입하는게 부끄러워?"
"그럼 당연히 부끄럽지!"
"그러니까 안 걸리면 그만 아니겠어. 그래, 아무도 본 사람이 없으면 그만이라고. 걸리면 끝장이라는 마음가짐으로 잠입하는 거야."
나는 히드라에게 윙크하며 총을 흔들었다. 히드라의 시선은 격하게 흔들렸다. 히드라가 레오타드 수영복만 입듯, 나또한 딱 달라붙는 래쉬가드 수영복이었다.
"팬티만 입어놓고 부끄럽지도 않아?!"
"팬티가 아니니까 부끄럽지 않은 걸!"
"시안 씨, 진짜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냐?"
"틀린 말 했어? 수영복이 부끄러운 거면 여름날 백사장에서 뭐하러 입고다니겠어? 케레스 양은 수영복 잘 안 입나봐?"
"윽…."
히드라는 정곡이 찔린 얼굴이었다. 산과 바다를 선택하면 활화산이라도 산을 선택할 정도로 히드라는 물을 싫어했다. 카운터 속성이면서.
"그럼 가자. 석양이 이제 질 때야."
"잠깐만! 완전히 해가 진 것도 아니고, 지금 이러고 나간다고?"
나는 발코니의 문을 열다가 히드라의 완강한 저항에 멈춰서야했다. 히드라는 마지막 순간에도 완강히 저항했다. 결국 나는 최후의 수단을 사용했다.
"케레스 양, 우리 이 임무가 끝나면 어디 전망 좋은 곳 놀러가자."
"어디로?"
"글쎄. 어디든."
나는 스마트 워치를 가리키며 발코니의 문을 열었다.
"돈과 마력만 있으면 어디든지 갈 수 있어."
나는 과감하게 발코니에서 호텔 옥상으로 벽을 타고 오르기 시작했고, 결국 히드라 또한 내 뒤를 따라 벽을 수직으로 달려왔다. 히드라의 가슴이 크게 흔들렸지만, 히드라는 그보다 자신의 몸이 노출되는 걸 더 신경썼다.
"진짜 제정신이 아니야…."
"케레스 양."
나는 옥상에서 히드라의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원래 수영복 스킨은 빠요엔의 상징인 거야."
"뭐?"
"가자!"
나는 낮동안 살펴둔 잠입루트의 시작지점-공원을 향해 히드라를 안고 뛰어내렸다.
석양이 지기까지, 남은 시간 30분.
우리가 가야할 곳은 추기경이 방문할 곳, 성천사성이었다.
* * *
"나 신경 쓰느라 혀만쓰고 손은 안쓴다라.... 풉. 안 그래도 되는데, 진짜."
창염은 느긋한 얼굴로 자리에 누워, 피닉스의 앞에서 엉덩이를 가리며 걷는 히드라를 보며 깔깔댔다. 래쉬가드는 창염의 선택이었다.
"지륜 각성하고 나면...푸흐흐."
창염은 웃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