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7화 〉1부 17장 15
시안과 히드라가 꽁냥대고 있는 사이.
모처럼 빌헴름 추기경의 단골 레스토랑을 소개받아 식사를 하러 온 영국 왕가 일행은 흥미진진하고 불편한 상황에 놓였다.
"여왕님. <뇌절>님이 여왕님을 뵙기를 바란다고 합니다. 만나시겠어요?"
'어머니, 아무래도 저 여자분이 추기경님의 그녀가 아닐까요?'
"그래요, 공주. 이런 때일수록 인류는 하나로 뭉쳐야 하는 법이랍니다. 비록 그가 지금 괴인 의혹을 받고 있는 도중이라고 할지라도."
'못난 남자가 자기가 좋아하던 여자를 호스트한테 빼앗기는 같아서 질투하는 것 같은데. 그나저나 저 남자 잘생겼네. 씁, 여왕만 아니었어도.'
두 모녀는 남들 들리지 않게 스마트 워치를 통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입으로는 공적인 대화를, 테이블 아래 손은 한손으로 가상 키보드를 빛처럼 두드리며 이야기를 나눴다.
"끄응…."
추기경은 주문한 음식이 나왔지만 먹는둥 마는둥하며 옆 테이블을 대놓고 신경쓰기 시작했다. 히드라는 포크에 돌돌만 파스타를 직접 시안에게 먹여주기까지 했다.
"......."
가웨인은 가웨인대로 불편해했다. 자신이 봐도 제법 그럴싸한 남자였지만, 여왕과 공주가 동시에 한 남자를 바라보는 것에 영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 특히 남자의 모발 색이 마음에 걸렸다.
'꼭 피닉스같네.'
피닉스가 남자가 되면 저런 모습이 아닐까. 하지만 당사자는 현재 멕시코에 있다. 고로 신경 쓸 필요가 없다.
그렇다면 두 남녀가 온 레스토랑에 추기경이 굳이 따라들어왔다고 보는게 맞았다. 가웨인은 두 모녀의 대화에는 직접 참여하고 있지는 않지만, 눈치껏 대화의 흐름을 이해하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두 남녀는 추기경과 뭔가 관계가 있다. 불편한 식사 자리가 계속 되는 가운데, 오직 시안만이 즐겁게 밥을 먹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요기를 한 뒤, 우리는 바티칸 내부를 계속 돌아다니며 이야기를 나눴다. 히드라가 먼저 화제를 꺼내지 않았기에, 나는 틈틈이 멕시코의 상황을 확인했다.
본래는 야황이어야했을 누리는 수속성의 이능력자로서 마약왕을 체포했다. 나는 히드라가 생각에 잠긴 사이 그 뉴스를 잠깐잠깐 확인했다.
"뭘 봐?"
그럴 때마다 히드라는 귀신같이 내 관심을 끌려했다. 자신에게서 내 시선이 잠깐 떨어지는 것에 대해 눈치 하나는 기가 막혔다.
"<세이렌>이 어떻게 마약왕을 체포했는지 보고 있었어."
누리는 마약왕을 잡은 업적으로 세이렌이라는 이명을 얻었다. 원작 그대로의 이명이기는 했지만, 그 등급이 확연히 달랐다. 누리는 그 사이에 벌써 B급으로 성장해버렸다.
"아까 보던 거 아니었어?"
"구체적인 과정이 궁금했거든. 세이렌이라는 S급 이능력자가 체포한 사람, 마약 카르텔의 우두머리잖아? 어쩌면 괴인일지도 모르는."
"괴인이면 뭐 어때? ...빌런이라서 좀 그런가? 어차피 다 같이 죽을 운명인데 좀 그렇다."
"...그러게. 괴인도 결국에는 사람인데 말이야. 결국에는 나도...아니다."
내가 뒷말을 흘리자 히드라는 게슴츠레 웃었다. 나는 은근슬쩍 정보를 흘리며 미끼를 던졌다. 히드라는 그걸 바로 물었다.
"나도 뭐?"
"아무것도 아니야."
"그럼 됐어."
히드라는 쉽게 걸려들지는 않았다. 애초에 쉬운 상대가 아니었다. 그래서 화제를 돌렸다. 노골적인 화제로.
"케레스 양은 괴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딱히 별 생각없는데. 어차피 사람이잖아. 빌런이랑 다를 게 없지."
"그런 시각은 신기하네. 나도 비슷한 생각이거든."
"정말? 일부러 내 환심사려는 건 아니고?"
"...후후."
나는 히드라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골목으로 들어왔다.
남들의 눈에 잘 띄지 않는 으슥한 골목이었고, 무슨 범죄가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을 공간이었다. 히드라는 전혀 꿀리지 않는, 그러면서도 은근히 기대하는 눈빛으로 나를 올려다봤다.
"케레스 양, 이능력자라고 했지. 그래서 그렇게 자신감 넘치는 걸지도 모르지만…."
나는 이를 보이며 히드라를 위협했다.
"언제 어딜 가서도 남자 조심해. 지나가다 만난 호구가 실은 아무 여자나 잡아먹는 괴인일지도 모르니까."
"지금 내가 신고하면 되는 걸까?"
"...케레스 양, 내가 지금까지 왜 그쪽을 같이 데리고 다녔다고 생각해?"
나는 히드라의 밀짚모자와 머릿결을 간단히 정리하며 귓가에 속삭였다.
"원래 이런 임무중에는 혼자 다니는 것보다 연애하듯 다니는게 눈에 안 띄는 법이거든."
"하하, 이용한 거네?"
"케레스 양도 나를 이용하기는 했잖아? 서로 윈윈인 거지. 하지만 이제부터는 위험해서 그래."
나는 검지를 세워 총처럼 흔들었다.
"지금부터는 내 본업을 시작할 거라, 케레스 양의 도움이 필요없거든."
"어머. 갑자기? 근데 당신 잊었어? 내가 어떤 사람인지?"
히드라는 아주 미약하게 마력을 일으켰다. 그리고 나는 히드라의 눈빛을 읽어, 히드라가 나에 대해 가진 생각을 예상했다. 히드라가 내 정체에 관해 과연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냥 정신이 이상한 또라이 호스트?
아지다하카의 명령을 받고 괴인을 폭주시키러 온 고위급 간부?
아니면 간신히 살아남은 설야의 루살카가 보낸 자객?
'<창염의 피닉스>의 괴인.'
히드라는 상당히 심려가 깊다. 그러므로 판단을 함에 있어서 명확한 근거와 정보를 바탕으로 움직인다. 히드라는 내가 자는 사이 나의 마력을 한 번 스캔했을 것이다. 여러가지 정보를 통해 내 정체를 파악했을 터.
내가 괴인인 척 흘린 것이 히드라가 확신을 하는 계기가 됐을 것이다.
찰나의 순간. 히드라는 내 넥타이를 붙잡으며 몸을 앞으로 붙였다.
"나 이능력자라고 했던 것 같은데, 히어로라고는 안 했다? 후후, 빌런이라면 어쩔래?"
"그럼 케레스 양에게 모처럼 제안을 하나 하려고 해."
나는 히드라의 얼굴을 붙잡고 시선을 맞췄다. 히드라는 굳은 표정으로 내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혹시 본드걸 해 볼 생각있어?"
"......?"
"다른 게 아니고 세계 평화를 위해 나랑 합을 맞춰볼 생각 있냐 이거야."
나는 히드라에게 걸쳐놓은 자켓 안주머니에서 발터 PPK를 꺼내 히드라의 손에 쥐어줬다.
"내가 출장을 온 이유가 이거거든. 암살."
"...누구를 죽이려고?"
"아돌프 빌헬름. 추기경."
"왜?"
이유를 물었으니 대답해주는 게 인지상정. 고로, 나는 히드라의 머리를 더 복잡하게 만들기 위해 진실을 교묘히 섞었다.
"우리 회사 사장님의 말씀에 따르면 말이야, 추기경님은 꼭 죽여야 하는 대상이거든."
"이유를 말해봐. 설마 협력을 구하려고 하면서 이유도 얘기하지 않고 죽이자는 거야? 한 종교의 추기경일 뿐인 사람을?"
"그 사람, 미래에 괴인이 될 거야."
"......하아?"
히드라는 입으로 소리까지 내며 당황했다. 나는 히드라가 쥔 총의 색깔, 검정을 가리켰다. 손은 어깨 너머로 뻗고, 다른 손으로 검지를 인중에 붙였다. 전형적인 네오나치식 경례였다.
"미래, 아지다하카를 찬양하는 사이비 종교를 만들어서 유럽 전체에 제 3차 세계대전을 일으킬 장본인이라고 하셨어. 그래. 히틀러의 재림이라고 하시더라."
"...아지다하카를 찬양해?"
"어. 잠깐만."
나는 기억을 떠올렸다. 원작 아르엘 루트, 제 3차 세계대전을 일으키며 빌헬름 추기경이 외쳤던 말이 분명….
"아지다하카 후 아크바르."
"......."
"그게 그 사람이 미래에 남길 말이거든. ...혹시 모르잖아? 이미 아지다하카의 괴인이 되었을 수도. 그러니까 나는 그를 죽이러 온 거야. 케레스 양."
나는 히드라가 쥔 권총을 붙잡고 내 심장을 겨눴다.
"나랑 화끈하게 불장난 한 번 해볼래, 아니면 여기서 '괴인'을 죽일래?"
"당신 괴인이야?"
"응. 괴인 잡으러 온 괴인. 악당, 나쁜 남자지."
나는 히드라의 볼을 쓰다듬으며 목숨을 걸고 제안했다. 히드라는 방아쇠만 당기면 내 심장, 그리고 코어를 쏠 수 있었다. 과연 히드라는 미래 아지다하카의 괴인을 상대로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그를 죽이는데 도움을 줄까, 아니면 나를 여기서 쏠까.
어느쪽이든 관계없었다.
"...시안 씨."
"응."
"플라스틱 모델건으로 무슨 암살을 하겠다는 거야?"
"들켰는 걸."
내가 품안에 넣어둔 발터 PPK에는 탄환조차 들어있지 않았다. 히드라는 어이없어하면서도 총을 내게 건넸다. 나는 총을 받아들고 물었다.
"신고 안 해?"
"됐어. 내가 신고를 왜 해? 히어로도 아닌데."
"추기경 암살 미수범 잡아다가 협회에 바치면 현상금 쏠쏠할텐데."
"그 현상금으로 히어로 슈트 수십 벌을 사다가 코스프레 시킬만큼의 돈이 나와?"
"...그냥 복권 정도겠지?"
"그럼 됐어. 좋아. 해볼게. 그 본드걸이라는 거."
히드라는 골목 너머를 가리켰다.
"그래서 계획은 뭐야?"
"따라와주는 거야? 잘못되면 너 평생 범죄자로 살 수 있는데."
"상관없어. 어차피 3개월 뒤면 세계 다 멸망할 거. 아, 시안 씨. 최선을 다해서 도와줄게. 당신 최고의 파트너를 고른 거야."
히드라는 내 넥타이를 잡아당기며 귓가에 속삭였다.
"내가 괴인이거든."
"......뭐?"
"지륜의 히드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신의 괴인이야."
히드라는 내 볼에 입술을 맞추며 나를 비웃었다.
"만나서 반가워, 피닉스의 괴인님. 설마 이런 곳에서 나같은 이를 만날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겠지?"
히드라는 내 손목을 붙잡았다. 스마트 워치 위로 두꺼운 무쇠 밴드가 채워졌다. 히드라는 아주 짧은 시간에 나를 구속하고 벽에 밀치며,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보수는 키스로 받을게."
히드라의 말에 정령 네트워크가 시끄럽게 울렸다. 루살카는 흥미진진한 목소리로 히드라를 조져버리라고 외치고 있고, 환룡은 비명을 지르며 주변 집기들을 부숴대고 있었다.
키스라.
히드라는 자신의 입술 위를 톡톡 건드렸다. 어지간한 버드 키스로는 히드라를 고용하는 건 불가능했다.
"......."
아주 잠깐, 내 의식이 암전되었다. 그리고 나는 금방 눈을 떴다.
"케레스 양."
나는 히드라의 허리를 붙잡고 뒷목을 붙잡았다. 히드라의 표정이 흠칫 굳었다.
"중간에 빼면 죽여버린다?"
...내 안의 창염이 울부짖었다.
- 딥키스로 혼내주는 것이에요.
'...일단 하라는 대로 해야지.'
나는 놀라 벙찐 히드라의 입속에 혀부터 집어넣었다.
* * *
"가웨인 경. 굳이 안 따라오셔도 된다니까요?"
"공주님. 이게 제 임무입니다."
"여왕님을 지키시는 게 더 낫지 않을까요?"
"여왕폐하는 로열 가드들이 지키고 있습니다. 제 임무는 공주님을 지키는 것입니다."
아르엘은 자꾸만 뒤따라오는 가웨인을 당장에라도 떨쳐버리고 싶었다. 혼자서 돌아다니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난 가웨인은 물러서지 않았다. 결국 아르엘은 소리없이 가웨인에게 애교를 떨었다.
아 빠 ?
"공주님."
가웨인의 표정은 매섭기 짝이 없었다. 아르엘은 자신의 필살 애교가 통하지 않는 것에 시무룩해졌다. 매번 이 애교를 통해 가웨인의 묵시적 허가에 따른 외출을 감행했건만, 아무래도 지난 번 한국 가출이 가웨인의 경종을 울린 듯 했다.
"포기하십시오."
"힝."
"언제 그런 경지에 오르셨는지 모르지만 공주님께서는 이제 진정한 영웅이십니다. 이 시국에 또다시 잠적하시면 본국 뿐만 아니라 세계가 혼란에 빠질 것입니다."
"알아요, 안다구요. 칫."
"...양해해주십시오."
아르엘은 툴툴거리며 바티칸의 도로를 빠르게 걸었다. 가웨인은 아르엘의 뒤에 딱 달라붙어 뒤를 잡았고, 아르엘은 마력을 써도 도망칠 수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한국에 짱박히는 건데. 아르엘은 자신의 어리석은 선택을 후회했다.
츄릅, 츕, 츄읍.
어디선가 물고 핥는 소리가 들렸다. 아르엘의 귀가 쫑긋 섰다.
"......."
아르엘은 서서히 걷는 속도를 늦췄다. 점점 더 소리는 짙어졌고, 아르엘은 떨리는 눈으로 주변의 공기 흐름을 훑었다. 마침 바로 옆 조용한 카페에서 골목 안이 보이는 각도가 있었다.
"흠흠. 가웨인 경. 디저트 먹을래요. 같이 들어가요. 안 들어가면 저 도망칠 거예요."
"......공주님. 저기."
가웨인은 얼굴을 붉히며 메뉴판을 가리켰다.
"저걸로 주문해도 되겠습니까?"
"얼마든지요."
가웨인이 민트초코를 주문하건 말건, 아르엘은 골목 안이 잘 보이는 자리에 앉아 창 너머를 예의주시했다.
'어우야.'
그곳에는 뱀과 뱀이 서로를 잡아먹고 있었다. 하드한 포르노 배우들의 영상물보다 더 진하게 두 남녀는 딥키스를 나누고 있었다. 아르엘은 손으로 입을 가리며 창밖을 주시했다.
'남자 키스 엄청 잘 하네.'
아르엘은 침을 꿀꺽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