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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염의 피닉스-404화 (404/1,497)

〈 404화 〉1부 17장 12

히드라는 벽에 머리를 이고 화를 삭혔다. 종잡을 수 없는 또라이같은 행동도 한 두 번이지, 그게 계속 반복되면 사람의 짜증을 불러일으키기 마련이다.

그래서 진지하게 시안의 정체에 대해 판단을 내리고 움직여야 했다. 그리고 히드라가 내린 결론은 단 하나.

-이 새끼 피닉스가 보낸 첩자 아닌가?

밤새 가슴을 딱 붙여 마력을 아주 천천히 스캔한 보람이 있었다. 시안은 히드라를 속옷만 입히고-심지어 속옷도 히어로 슈트 재질이었다-, 털끝하나 건드리지 않은 채 깊게 잠들었다.

자고 있는 사이 볼을 건드려보거나 근육을 만져보거나 그곳을 슬쩍 들쳐보거나 하는 행위는 전혀 들키지 않았다. 시안의 마력을 스캔하던 것 보다도 더 심혈을 기울였다.

"......하아, 좀만 못 생겼어도."

정정. 다르게 생겼어도. 히드라는 그리도 싫어하는 뜨거운 물을 뒤집어쓰며 마음을 다잡았다.

'그래, 저 놈은 피닉스의 괴인이야. 피닉스가 나나 아지다하카, 펜릴을 찾으려고 전세계로 보낸 괴인일 거다.'

그게 합당했다. 피닉스 본인은 청화로서 멕시코에 간 이유는 큐브, 또는 자신도 종잡을 수 없는 펜릴이 있다거나 하는 이유일 게 분명했다. 그게 밤새 잠 한 숨도 제대로 못자고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결론이었다.

피닉스가 멕시코로 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정체불명의 괴인이 로마로 온 것.

괴인에게서 느껴지는 마력이 화속성인 것.

그리고 괴인 시안이 전화의 마무리로 한 정체불명의 단어.

'하일 루살카.'

루살카라는 단어를 알만한 존재는 그리 많지 않다. 그리고 굳이 '하일'이라는 단어를 쓴 걸로 보아, 그는 일부러 독일어를 썼다고 밖에 생각할 수 없다.

그런데 그가 신원불상의 누군가와 통화를 하는 건 분명 일반인은 듣지 못할 목소리였다. 괴인의 마력이 담긴 목소리. 만약 케레스가 히드라가 아니었다면 전혀 듣지 못했을 목소리.

굳이 남들이 듣지 못하도록 한 이유가 뭘까. 히드라가 자는지 확인까지 하고 기를 쓰고 깨우지 않고 나간 이유와 함께 생각해보면 역시 정답은 '피닉스의 첩자'가 타당했다.

'루살카의 이름을 빌린 거야. 그리고 추기경을 죽이니 뭐니 하는 건 일종의 은어일 거야. 그렇겠지?'

그러니 지금부터 확인을 하자. 히드라는 몸에 달라붙은 수분을 그대로 둔 채, 타월로 몸을 닦고 가운을 걸쳤다. 한 번 입은 속옷은 굳이 다시 입기 찝찝하니 다른 속옷을 입기를 바랐다. 히드라는 문을 열고 타월로 머리를 모으며 방으로 돌아갔다.

"...지금 뭐해?"

"주인공 기다리는 중."

시안은 헤어드라이기를 들고 히드라를 기다리고 있었다. 히드라는 그제서야 아차싶었다. 하지만 여유를 가장해 마력으로 머리의 물기를 날려버렸다.

"나는 이능력자라서 드라이 안해도 되는데?"

"세팅해줄려고."

"......뭐?"

시안은 빗과 드라이기를 들고 거울 앞에 서있었다.

"케레스 양."

시안은 해바라기처럼 환한 얼굴로 화장대에 놓인 온갖 장비들을 가리켰다.

"컬 넣어도 돼? 아니, 넣게 해줘. 아니다, 넣을 거야. 당장 앉아."

"......."

히드라는 마치 헤어샵의 실습인형마냥 시안의 손길에 머리칼을 희롱당했다.

* * *

역시 히드라는 중단발 C컬이 가장 어울렸다. 카르나, 라온과 마찬가지로 누님계임에도 불구하고, 얼굴이 예쁘니 충분히 아름다웠다.

'지륜으로 각성하면 선택할 수 있지.'

간부가 아닌 정령으로 각성하면 머리카락 바꾸는 것 쯤은 일도 아니다. 카르나는 당장 성별부터 바꿔대는데, 하물며 지륜도 그걸 못할까.

문제는 진갈색의 생머리인가 중단발인가. 뭇 많은 이들의 결정 장애를 일으키게 만든 분란 조장의 대명사였다.

초등학생을 방불케 하는 140cm 김누리와 SS급으로 폭발적인 성장을 보인 모델 체형의 167cm 김누리.

데스디나스 호의 함장인 마망계 백희아와 피가 섞이지 않은 여동생 계열의 백희아.

그리고 긴생머리의 지륜과 펌이 들어간 단발의 지륜.

원작 게임 3대 난제였고, 나는 어느쪽이든 문제가 없었다. 어차피 둘 다 한 번씩 루트를 밟으면 그만이었으니까.

'그래도 역시 히드라는 C컬이지.'

숏컷은 라온의 전유물 같은 스타일이다. 비록 지금은 조금 다르기는 하지만, 적어도 히드라가 그냥 단발을 하고 있는 건 여러모로 나의 불편함을 자아냈다. 나는 창염을 위해 배운 스타일링 스킬을 마음껏 발휘하여 히드라를 꾸몄다. 아니 케레스.

"......짜증나."

케레스는 토스트를 나이프로 퍽퍽 자르며 심통을 부렸다. 발목까지 가리는 롱원피스는 외출하기에 딱 좋은 복장이었다. 니트 재질이라 소매부터 발목까지 전신을 가렸지만, 슬림한 롱원피스는 케레스의 몸매를 여실히 드러내기도 했다. 이미 호텔 조식을 먹으로 온 이들은 나와 케레스를 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왜?"

나는 딸기잼을 바른 구운 토스트를 물었다. 케레스는 식사하며 이야기를 나누는 걸 좋아했다. 입에 있는 것을 다 삼키고 말하기만 하면 케레스는 상관하지 않았다.

"예뻐서."

"네가?"

"응."

케레스는 나이프를 잡으려던 손을 컬이 살짝 들어간 머리칼을 건드렸다. 나는 행여나 손질을 다시해야하나 싶어서 가슴이 철렁내려앉았지만, 케레스는 은근슬쩍 마력까지 써서 머리의 형태를 고정했다.

"이러면 이제 이 디자인밖에 하지 못하게 됐잖아. 짜증나."

"원판이 워낙에 좋아서 어떤 머리를 해도 좋을 거야."

"아첨은."

"내가 너한테 아첨해봐야 뭐가 나오겠어? 이미 같은 침대에서 누워 잔 사이인데."

케레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신경질적으로 치아바타를 생크림에 찍어먹을 뿐이었다. 나 또한 케레스가 뜯고 남긴 치아바타 한 조각에 딸기잼과 치즈를 펴발라 먹었다.

"하여튼 예쁜 건 알아가지고. 시안 씨, 여자만 보면 다 이래?"

"아니? 예쁜 여자한테만 이러지. 아, 고마워요. 좀 있다가 같이 치워주세요. 지금 같이 먹는 중이라서."

"...세상에 어느 서버가 한 접시 비자마자 치우러 와? 방금 쟤 시안 씨한테 일부러 와서 치우고 간 거 몰라? 그게 다 꼬리치는 거라고."

"꼬리치면 뭐해.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람만도 못한걸."

"......칭찬인데 왜 이리 기쁘지 않지?"

"사실이니까."

아무리 5성급 호텔의 서버로 외모가 어느정도 받쳐준다고 하더라도, 정령-히로인들에게 비비기에는 여러모로 부족한 감이 많았다. 외모만 따지고 본다면 창염과 유일하게 같은 언덕에서 비벼볼 수 있는게 히드라였다.

'그래도 창염에게는 안 되지만.'

태양은 언제나 땅의 위에 있으니까. 그건 만고 불변의 진리다.

"시안 씨, 지금 나를 두고 엄청 불쾌한 생각을 하는 듯 한데."

"아니. 내 와이프랑 비교해봤어. 너도 예쁘긴 한데, 역시 내 와이프가 전 우주에서 제일 예뻐."

"단정이야? 세상에. 시안 씨, 언제까지 허상의 존재를 좇을 거야? 그 사람이 당신 이름 불러준 적 한 번이라도 있어?"

"......."

이름을 빼앗겼으니 맨날 당신이니 그쪽이니 2인칭으로만 지칭되었다. 내가 대답을 못하고 가만히 있자, 케레스는 손에 든 빵나이프를 휘휘 저으며 나를 조롱했다.

"그 사람이 한 번이라도 키스해준 적은 있어?"

"아, 그거라면."

정동진에서 햇살을 받으며 키스했다. 케레스의 표정이 굳었다.

"...첫키스는 액정맛이다 뭐 그런 거지? 응, 나 다 알아. 그럼 그 사람이 한 번이라도 해봤어?"

"어."

비록 본방은 했는지 안했는지 긴가민가하지만, 적어도 유사행위까지는 이르렀다. 케레스의 표정이 정말 묘사하기 힘들 정도로 일그러졌다.

"......시안 씨, 진짜 청화 씨 남편이야?"

"에이. 아직은 아니야, 아직은. 됐으면 좋겠지만."

싱크로 해야만이 진정한 남편이자 삶의 동반자라고 할 수 있겠지만, 아직 창염과의 관계는 한 단계 모자랐다. 케레스는 나를 비웃으며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흥, 그러면 아직 확정 아니네. 시안 씨도 대단해. 이 분이랑 그런 관계도 되고. 그럼 나 아직 가능성 있는 건가?"

케레스는 아직도 생방송으로 아침부터 날뛰고 있는 청화의 영상을 재생했다. 아침부터 선글라스로 눈을 가린 청화는 객실마다 몰래 급습하여 자고 있는 히어로나 헌터들을 카메라에 담았다. 노메이크업의 양춘자가 비명을 지르며 문을 닫았다.

"그건 아닌데? 나 쟤랑은 그런 관계는 아니야."

"......? 아까는 남편 됐으면 좋겠다며?"

케레스는 빵칼로 다시 청화를 가리켰다. 가을에게는 미안하지만, 가을은 창염이 아니다.

"응. 내가 사랑하는 이는 따로 있지.'

"...하아, 됐어. 당신이랑 이 얘기하면 머릿속이 터져버릴 거야. 됐어. 오늘 일정이나 말해봐. 굳이 나 샤워실에 집어던져놓고 아침부터 씻게 한 이유나 들어봐야겠어."

"내 일은 간단해. 인간관찰이야."

"......뭐라고?"

나는 케레스가 나이프와 포크를 한쪽으로 놓는 것을 보고 손을 들어올렸다. 케레스는 내 인도에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고, 우리는 방으로 돌아와 간단하게 준비를 한 뒤 호텔을 나섰다.

"어디 가는 건데?"

"바티칸."

나는 철체 케이스를 들어올리며 택시를 가리켰다.

"성 베드로 광장."

"...거기는 왜?"

케레스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나는 그의 머릿속에서 온갖 상념이 떠오르는 것에 속에서 절로 웃음이 나왔고, 그 웃음을 인자한 미소로 바꾸어 철제 케이스를 손가락으로 튕겼다.

텅--

케레스는 케이스 안에 든 물건이 무엇인지 소리만으로 깨달았을 것이다. 당연이 케이스 안에는 내가 직접 공수해 온 발터 PPK가 잠들어있었다.

"아참. 혹시 오늘 시간 있어?"

"시간이야 많지."

"그럼 그 시간, 나한테 전부 다 넘겨줄래?"

나는 케레스에게 손을 뻗었다.

"오늘 하루, 네 소중한 시간을 좀 사고 싶은데."

"......내 시간은 엄청 비싸. 아무리 시안 씨가 돈이 많다고 해도 돈으로는 택도 없을 걸?"

"괜찮아. 그만큼의 값어치를 치를테니까."

"뭘로?"

나는 관자놀이를 검지로 톡톡 건드렸다. 케레스는 전혀 감이 오지 않는 눈치였고, 나는 바로 정답을 얘기해줬다.

"흔적, 기억, 추억."

"뭐?"

"네가 앞으로 살아가는 인생 전체에 있어서, 나와 함께 하는 이 시간이 가장 즐겁고 행복한 순간이었다고 기억하게 만들어줄게."

내 손은 여전히 케레스를, 히드라를, 지륜을 향해 뻗어있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나를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보다가 손을 붙잡았다.

"멘트 개구려. 너 아무한테나 이러고 다니지?"

"아무나한테 안 그래."

나는 상체를 숙여 케레스의 귀에 속삭였다.

"너니까 이러는 거야."

케레스의 손에 힘이들어갔다. 나는 케레스와 손을 잡고 바티칸으로 이동했다.

* * *

"......."

케레스, 히드라는 양손에 젤라또를 든 채 멍하니 앉아있었다. 왼손에는 자신이 선택한 호밀맛 젤라또가, 오른손에는 딸기맛 젤라또가 콘에 들려있었다. 어제부터 은근히 깨달은 사실인데, 참 딸기 좋아한다 싶었다.

"......풋."

히드라는 절로 웃음이 나왔다. 젤라또 아이스크림 하나를 고르는 것도 서로 하나씩 골라주기로 장난을 치는 바람에, 히드라는 시안에게 딸기맛을 골라줬다. 히드라는 그 정도 눈썰미가 있었다.

'원래는 민트초코 맛 골라주려고 했는데.'

절풍의 펜릴이 오랫동안 터를 잡았던 곳. 그곳에서 넘어온 민트초코가 바티칸까지 상륙해버렸다. 히드라는 그걸 시안에게 먹일까했지만 같은 괴인의 입장으로서 참았다.

'언제 밝히지?'

타이밍을 계속 놓쳤다. 성당을 구경할 때도, 광장을 산책할 때도, 트램을 타고 돌아다닐 때도 대화는 끊어지지 않았다. 마치 로마와 바티칸 전체에서의 흔적이 시안의 것으로 채워지는, 기존의 것이 덮어지는 기분에 히드라는 마음이 쿡쿡 쑤셨다.

"하필이면 여기를...."

히드라로서는 불편하기 짝이 없는 곳이기도 했다. 왠지 모를 죄악감에 히드라는 자신의 상태를 자각하고 입꼬리가 비틀렸다.

"미친년, 지금 데이트 하는 줄 아네."

히드라는 마음을 다잡았다. 시안이 자신을 이리저리 끌고다니는 이유도 사실은 모두 암살을 위한 저격 포인트를 잡으려고 하는 짓이었다. 왜 굳이 피닉스의 첩자가 추기경을 암살하려 드는가 생각을 해보니, 아지다하카 게이트가 좋은 근거가 되었다.

피닉스는 아지다하카의 하수인으로 예상되는 아돌프 빌헬름 추기경을 제거하기 위해 히트맨으로 시안을 파견한 건 아닐까.

'헛다리 제대로 짚었네.'

추기경은 아지다하카의 괴인이 아니다.

'내 괴인인데.'

히드라의 심복이었다. 그래서 히드라는 제 심복을 죽이려고 드는 시안의 행동에 대해 어떻게 대해야할 지 감이 오지 않았다.

'괴인...잘하면 빼앗을 수 있을까?'

B급이라고 하더라도 조금만 자신이 신경을 쓰면 멸망의 날까지는 재미를 볼 수 있을 터. 적어도 히드라의 대딸 한 번 받아보고자 오체투지하는 늙은이보다야 훨씬 더 나앗다.

"끙."

언제 오는 거야. 히드라가 따스한 태양빛에 인상을 찌푸리기 무섭게, 머리 위로 누군가가 무언가를 씌워 눌렀다. 눈을 치켜뜨니, 그곳에는 노점에서 금방 사온 것만 같은 밀짚모자가 씌워져 있었다.

"피부 탈까봐."

"...나 이능력자라니까. 피부가 왜 타?"

"그럼 정정. 얼굴 좀 태양에서 가리시라고. 너무 밝아서 쳐다보고 있거든."

시안은 하늘을 가리키며 능글맞게 웃었다. 왠지 모르게 오늘따라 햇빛은 더 따사했다. 시간은 어느덧 정오에 가까워졌다.

"좋아. 시안 씨, 그럼 이제부터 인간관찰 시작하는 거야?"

"그런 셈이지. 이 자리...."

시안은 벤치에 앉으며 손을 안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쏘기 딱 좋은 위치거든."

"...햇빛을 쐰다는 말이지?"

"......글쎄?"

시안은 검지를 입술에 붙이며 윙크했다. 히드라는 불안한 마음에 전전긍긍해졌다.

로맨틱한 건 로맨틱 한 거고, 진짜로 히트맨이라면?

"...정오 미사 시작하네."

바티칸 광장 한 가운데. 머리가 반쯤 벗겨진 아돌프 빌헬름 추기경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입가에는 인중에만 콧수염이 남아있었다.

"케레스 양."

시안은 한 손으로는 케레스의 허리를 잡아당기며 몸을 붙였다.

"중간에 혹시 무슨 큰 일이 생겨도 내 옆에 붙어있어. 알았지?"

"......."

히드라는 직감했다.

'이 새끼 혹시 나를 인질로 이용해먹으려는 건가?'

히드라의 속내가 복잡해지는 가운데, 추기경의 정오 미사가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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