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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염의 피닉스-403화 (403/1,497)

〈 403화 〉1부 17장 11

로마는 히드라가 제압한 땅의 일부였다. 히드라는 다른 정령들이 뭐라 반박을 하지 못하게 지구의 1/7만큼의 면적을 점령했고, 심지어 바다가 아닌 대륙만 점령했다.

아프리카와 지중해 일대, 그리고 서남아시아.

그 넓은 지역 전체가 히드라의 영향권이었고, 히드라가 마음만 먹으면 진도 9.0 이상가는 지진을 일으켜 전역을 쑥대밭으로 만들 수 있었다. 히드라는 수 개의 지각 판을 제 영향권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히드라는 러시아로부터 날아오는 비행기에서 이상한 기운을 감지했다.

애매하게 강한 이능력자. 하지만 왠지 모르게 다크 레기온의 기운이 느껴지는 자.

괴인인지 아닌지 판단하기 위해 히드라는 미리 공항에서 대기하고 있었고, 상대가 땅에 발을 디디는 순간부터 히드라는 그가 누군지 파악했다.

'어머, 잘생겼네.'

얼굴을 보자마자 히드라는 자신의 주책을 숨길 수 없었다. 전형적인 서양인의 얼굴상에 시원시원한 이목구비는 유려함마저 느껴지게 했다. 눈매는 서글서글하여 눈웃음을 치는게 인자한 것 같기도 하고 히드라를 유혹하려는 것 같기도 했다.

-정말 난리죠?

언제나처럼 히드라는 스스로를 <케레스>라는 이름으로 그에게 접근했다. 상대의 정체를 꼬치꼬치 캐물으려하니, 화제를 돌리며 자기 소개를 하더라.

-시안이라고 합니다.

스스로를 시안이라 소개한 미청년은 은은한 미소와 함께 공손한 손길로 명함을 내밀었다. 아지다하카 게이트 이후 친절한 미남이 아지다하카의 주요 타깃이라는 설이 팽배함에도, 시안은 전혀 신경쓰지 않는 다는 듯 케레스를 배려했다.

여자 혼자 여행을 다니는 것에 위험하냐고 묻지도 않았다. 케레스가 어쩌면 이능력자인지 아닌지 판단하여 배려한 게 아닐까 싶었다.

케레스가 본색을 드러낸 순간부터 시안은 케레스와 거리를 벌리면서도 깔보지 않았다. 케레스는 진짜 스폰을 받고 여행을 다니는 여대생이 된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고, 시안은 진짜 스폰을 해주는 것 마냥 툴툴거리면서도 케레스의 부탁을 전부 들어주었다.

엉뚱한 것 같기는 하지만 중요한 순간순간에 매너를 지킨다. 그러면서도 적당히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싶으면 허리에 손을 올리며 끌어안는 식으로 자신을 강하게 어필했다. 케레스는 그 순간 아주 잠깐 코어가 부르르 떨렸다.

재력은 또 어떠한가.

성적 취향은 조금 독특하기는 하지만 착의 플레이는 케레스의 수비범위 내였다. 안그래도 미청년인 그를 더욱 매력적이게 만들었다. 직원의 신속한 일처리 덕분에 케레스는 그냥 명품도 아닌 히어로 슈트 재질의 온갖 의류를 선물로 받았다. 마음 같아서는 개인적으로 가져가고 싶을 정도였다.

같은 침대에서 잠을 잔다면서도 행위는 하지 않는다는 소리에 케레스는 진심으로 이 또라이같은 남자가 마음에 들었다.

줘도 못 먹는게 아니라, 케레스를, 지륜의 히드라와 하고싶어하지 않는 것 같았다. 아니 확신했다.

'감히 나를?'

욕정을 품고 그 자리에서 덮쳐도 모자라건만, 시안은 케레스를 걸렀다. 펑펑써도 남아나겠다 싶은 돈은 팍팍 쓰면서, 정작 몸을 취하지는 않았다.

굴욕이었다. 그리고 자존심이 상했다. 그것이 인간 시안과 인간 케레스 사이에서의 관계.

그렇다면 괴인과 괴인의 관계에서는 어떨까.

히드라의 속에서는 열불이 끓어올랐다.

고작 B급 정도로 되어 보이는 놈이 돈 좀 있다고 행동하는게 아주 건방지기 짝이 없다. 히드라가 일부러 본색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마음만 먹으면 바로 땅속에 파묻어 버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

아무리 싸구려 창녀처럼 유혹하더라도 남자가 스스로 안달이 나서 자신을 덮치게 만들어야했다. 여자가 먼저 좋다고 가랑이를 벌리며 달려들다니, 히드라로서는 결코 행할 수 없는 짓이었다.

사락.

갑자기 시안이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히드라는 잠을 자는 척 조용히 눈을 감았다.

"......."

시안은 잠든 히드라의 헝클어진 머리칼을 쓸며 정말 천천히 시트에서 일어났다. 푹 꺼졌던 침대 매트리스가 거의 변화가 없을 정도로, 시안은 조용히 침대 매트리스에서 일어났다. 자고 있었다면 나간지도 몰랐을 정도.

"......."

시안은 발코니로 나갔다. 차가운 9월의 밤공기가 방안으로 스며들어왔지만, 시안은 나가면서 히드라의 위로 이불을 덮어주고 나갔다.

이 신사같은 또라이는 뭐지? 히드라는 슬슬 미쳐버리겠다 싶었다.

어디서 누구의 명령을 받고 온 괴인인가 싶기도 했고, 히어로 측에서 괴인 하나를 포섭해 로마로 보낸 정보요원인 것 같기도 했고, 그도 아니면 진짜로 괴인인데 스튜디오의 프로듀서로서 활동하는 미친 놈일 수도 있다.

'이 새끼 머리색깔부터 마음에 안 드는데, 혹시 피닉스의 자객 아니야?'

그의 말에 따르면 피닉스-의 대외 활동형인 청화는 멕시코로 떠났다고 들었다. 실제로 그러했고, 피닉스는 아주 방방곡곡 자신의 멕시코행을 알리고 있었다. 만약 멕시코에 다른 간부들이 없으면 어쩌려나 싶었지만, 히드라는 피닉스의 멕시코 행의 의도를 읽어냈다.

'큐브를 찾으러 간 거야. 그리고 시위하는 거지. 올테면 와봐라.'

싸구려만도 못한 도발이었다. 안 오면 큐브를 불태워버릴 것이다. 피닉스인지, 아니면 피닉스 안에 깃든 또다른 정령인지는 확신할 수 없어도 어느쪽이든 똑같이 미친 년이라는 생각을 떨쳐낼 수는 없었다.

아직도 등허리가 쑤시다. 큐브까지 동원해 본체가 되어 폭주했던 날, 괴인형의 전투에서 피닉스는 기어이 자신만 노리며 모가지를 뽑아댔다. 그 날의 굴욕을 떠올리면 여전히 이가 갈렸다.

삐. 삐삐삐.

히드라기 피닉스에 분노를 토하는 사이, 시안은 스마트 워치로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응, 나야. 통화 가능해? 다행이다."

"......."

히드라를 상대로 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상냥한 목소리였다. 상대를 존중하고 아끼는 감정이 히드라의 귀를 간질였다. 여자일까? 그럼 상대는 시안이 자신과 여기서 같은 침대에 누워있었다는 걸 알고 있을까? 히드라는 배덕감에 속으로 실실 웃었다.

"응. 계획대로야. P는 멕시코로 움직였어."

흠칫. 히드라는 숨을 죽였다. 상대의 목소리는 전혀 들려오지 않았다.

"아마도 멕시코에 있는 큐브를 찾으러 간 것 같아. 아직 시간이 있으니까 빠르게 움직이려하겠지. 그 사이에 우리는 우리 할 일을 하자. 다행히 뇌절은 아직 뇌절 안했어."

무슨 말일까. 분명 무슨 은어가 틀림없다. 누구의 괴인일까? 변절한 간부들의 괴인?

"됐고. 알아보라고 했던 건 알아봤어? ...가웨인이 와? 세상에. 괜찮아. 어차피 걔도 타깃이잖아. 거기 확 움켜쥐면 꼼짝 못하는 건 똑같아. 그건 네가 제일 잘 알잖아? 큥큥."

"........"

확신이 들었다. 시안이라는 괴인은 결코 평범한 여행객이 아니었다. 출장이라는 것도 교묘히 신분을 속이려는 위장술의 일환일 것이다.

"응, 그래. 뇌절을 뇌절시키려면 우선 큥큥부터 해야하니까, 물건 이쪽으로 보내줘. 가웨인은...나는 무리야. 지금 나 조금 개인적으로 작업하는 게 있어서. 뭐? 야, 내가 태양을 두고 고개 돌리는 거 봤어? 나 한 번 마음 정하면 끝까지 가는 사람이야. 너무한다니. 알잖아. 나 원래 이런 사람인 걸."

히드라는 슬슬 미쳐버릴 지경이었다. 하필 태양이라는 비유가 꼭 피닉스-청화를 가리키는 것 같아 짜증과 질투가 났다.

"아, 그래. 너도 로마 올래? 모처럼 기회잖아. 너라면 나도 편하게 대할 수 있잖아. …...알았어, 미안. 내가 잘못했어. 응. 나중에 따로 한 번 찾아갈게."

자신에게 하던 것과 달리 시안은 절절 멨다. 도대체 누구일까. 히드라의 궁금증이 격해지는 가운데.

"우선 내일 오는 VVIP들 면면을 확인하고 움직일 거야. 진짜로 그 쪽 VVIP라면 신경을 아예 안 쓸 수는 없으니까. 그래. 걱정마. 완벽하게 처리할게. 나 세계 최고인 거 알면서 진짜 왜 그래."

뭐가 세계 최고라는 건가. 얼굴? 재력? 그도 아니면 호구력과 병신력?

"일부러 총도 그걸로 골라왔잖아."

총?

"응. 내일 모레 무조건 끝낼 거야."

끝낸다?

"오더 확인. 아돌프 빌헬름. 추기경. 응, 그래. 걱정마. 지금 근처에 들을 사람 없어. 인간은 못 듣는 거 알잖아. 괴인만 들을 수 있는 거."

들을 사람은 없어도 듣고 있는 괴인은 있다. 히드라는 뭔가 이상하면서도 재미있게 돌아가는 상황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상대의 정체가 어렴풋이 예상되었다.

"그래. 안부 전해줘. 그럼 나도 이만 자러갈게. ...옆에 여자는 무슨."

마지막에 가서야 시안의 목소리가 떨렸다. 히드라는 무슨 변명을 할까 가슴이 두근거렸다.

"알았어, 조심할게. 내가 내 사랑두고 누구랑 몸 섞고 마음 주고 그러겠어. 그럴 일은 절대로 없을 거야. 그럼…."

시안이 자세를 바꾸었다. 전화를 끄고 금방 침대로 돌아올 것만 같았다. 히드라는 부스럭거리며 몸을 뒤척이는 척 다리를 비볐

"하일 루살카."

** *

아침이 되었다. 나는 간단하게 샤워를 하고 케레스가 잠에서 깨기를 기다렸다. 소리는 작게. 전기 포트는 별다른 소음없이 물을 따뜻하게 데웠다. 향긋한 인스턴트 커피 냄새가 코를 간질였다.

"...아침부터 커피야?"

"깨웠어? 미안."

"누가 밤새 건드리나 안 건드리나 콩닥콩닥 하고 있었거든."

"그거 미안하네. 나는 편하게 잤는데. 내가 옆에 사람이 없으면 잠이 안 와서."

나는 호텔 룸서비스를 통해 특별히 주문했던 율무차를 따뜻하게 태워 히, 아니 케레스에게 건넸다. 케레스는 이불을 두르고 머그잔을 받았다.

"......이거 뭐야?"

"율무차."

케레스는 율무차를 아무말없이 계속 내려다봤다. 고민이 될 테지, 처음보는 건데 마시고 싶어서 정수리의 바보털이 쫑긋 서기 시작한게 눈에 훤히 들어왔다.

"잘 마실, 읍. 입이 텁텁하잖아."

"그 맛으로 먹는 거야."

"희한한 인간이야 정말."

"칭찬으로 받아들일게."

나는 커피를 한 모금 홀짝이고 화장실을 가리켰다. 아직 시간은 7시 정도였지만 간단히 씻고 움직일 때였다.

"씻고 아침 먹자. 오늘은 일하러 가야하거든. 여기 호텔 조식 맛있어."

"그걸 어떻게 알아? 전에 누구랑 같이 와보셨나봐?"

"......."

나는 대답을 회피했다. 케레스는 능글맞은 얼굴로 나를 떠보기 시작했다.

"누구랑 와봤어? 전여친? 아니면 현아내? 그도 아니면-"

"너."

"......진짜 제정신이 아니네."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 나는 그저 어깨를 으쓱이며 발코니의 문을 열었다. 따스한 아침 햇살이 실내로 들어왔다.

"올."

마침, 아침부터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호텔 방을 전부 다 차지했다고 하는 VVIP 3을 호위하듯 요원들이 하나 둘 주변을 차지하기 시작했다.

"케레스 양, 지금 두 시간 내로 빠져나가지 않으면 오늘 호텔 안에서 바캉스하게 될 거야. 그리고 나는 오늘 꼭 나가야 해."

"음…. 씻기 귀찮은데. 씻겨주기라도 할래?"

케레스는 음흉하게 웃으며 손가락을 입술에 붙여 내게 날렸다. 나는 바로 커피를 내려놓고 침대로 걸어가 이불을 붙잡았다.

촤---악!

"......."

진보라색의 속옷만 입은 케레스는 벙찐 얼굴로 나를 올려다봤다. 그러면서도 컵은 끝까지 사수하고 있었다. 나는 이불을 침대 옆으로 밀어버리고 케레스를 공주님 안기로 들어올렸다.

"잠깐만, 지금 뭐하는 거야?"

"씻겨달라며?"

나는 케레스를 바로 샤워실로 안고 들어갔다. 샤워 부스의 거울에는 하얀 가운을 입은 청발의 남자가 갈색 단발의 여인을 속옷만 입힌 채 샤워 부스 안으로 안고 들어가는 모습이 선명했다.

"잠깐만. 물 온도 맞춰줄게."

"...됐어! 내가 직접 씻을 거야."

케레스는 씩씩거리며 나를 밀쳐냈다. 나는 케레스가 떠넘기듯 던진 컵을 받아들고 남은 율무차를 홀짝였다. 케레스가 입술을 댄 바로 옆에 입꼬리가 스쳤다.

호록.

나는 문을 닫고 옷장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가운을 슬쩍 좌우로 펼쳤다.

"......어우, 혼났네."

원작이었으면 바로 샤워부스에서 뜨거운 물 켜고 물맞으면서 했을텐데. 괜히 옛 기억이 떠올라 혼이 났다. 나도 지금 이런 상황인데 케레스, 히드라는 과연 어떨까.

'자빠뜨리고 싶어서 아주 미쳐버리겠지.'

내 시선이 케레스의 가슴부터 골반까지 훑은 것 처럼, 케레스도 가운 아래의 내 몸을 훑었다. 그리고 백청화는 많은 플레이어들이 신세를 진 남자답게 그곳도 SS급이었다.

'히드라 녀석, 지금 샤워하면서도 속내가 복잡할 거야.'

나는 옷을 갈아입으며 밤에 통화를 했던 이에게 다시 한 번 더 육성으로 미안하다는 말을 전했다.

[지륜 각성시키고 북경 꼭 들려라. 꼭 들려. 안 들리면 파업할테다.]

들려'라'. 명령이었다.

"얘는 예전에 봐놓고도 이러네."

창염의 기억 속에서 직접 행위까지 겪어봤을텐데. 아. 설마 창염, 그 기억만 쏙 빼서 보여준 걸까. 분명 했다는 건 아는데 한 기억만 편집해서 보여줬다거나.

"......커피 맛있네."

나는 한가득 채워진 옷장에서 케레스에게 입힐 옷을 고르며 케레스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무 슨 옷 을 입 힐 까

'인형놀이 복수다.'

속에 있는 창염이 깔깔대며 기뻐해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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