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2화 〉1부 17장 10
원작 주인공.
지금은 시안이라는 이름을 대고 있지만, 이 백청화라는 놈은 잘생기고 순한 호구상이었다. 아무리 인상을 찌푸리거나 굳은 표정을 지어도 어린 아이를 상대로 엄한 표정을 짓는 마음 여린 어른 정도가 한계였다.
"흥흥~ 좋네요. 역시 내가 사람 보는 눈은 제대로라니까~"
케레스는 호텔방의 문을 들어가자마자 침대위에 대자로 누웠다. 원피스가 짓눌렸지만 전혀 개의치 않는 듯 했다. 나는 테이블 앞 의자에 앉았다.
"케레스 양. 자꾸 이러면 곤란해."
"왜요?"
"알면서 뭘 물어. 나는 임자 있는 몸이라니까."
"그치만 지금은 같이 안 왔잖아요? 2인실 혼자 이용한다고 한 거 아까 봤는데."
"지독하네, 정말."
어떻게든 내게서 돈을 뽑아내겠다는 욕망이 가득해보였다.
"케레스 양, 내가 그렇게 돈이 많아보여?"
"네. 엄청. 떼부자 일 듯? 당장 옷만 봐도 명품으로 줄줄 두르고 계신 분이 그런 말 하셔봐야 안 속거든요? 데이트하러가요, 데이트. 아니면...후훗."
케레스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선반을 열었다. 5성 호텔임에도, 남자 한 명이 투숙하는 걸로 예약을 해뒀더니 굳이 안해도 될 서비스까지 넣어뒀다. 케레스는 금박 비닐에 들어간 콘돔을 손가락 사이에 끼웠다.
"혹시 벌써부터 달아오르셨나요? 저 씻고 와요?"
"정말 노골적이네, 케레스 양. 미안하지만 오늘 나 좀 바빠. 내일 미팅 준비를 하긴 해야하거든. 그리고 케레스 양 제대로 봤어. 나 돈은 많아."
나는 앉았던 그대로 몸을 일으켰다. 케레스는 코트를 벗지도 않는 내 행동에 당황했다.
"돈 많다고 혹시 다른 여자 구하러 가시는 건 아니죠? 이렇게 예쁘고 새끈한 영계가 있는데? 혹시 뭐 더럽다거나 그런거 피하시는 타입? 아니면 동정?"
"동정도 아니고 여자 가리지는 않는데 지조와 절개는 지키는 남자라서."
나는 문 밖으로 나서며 카드키를 두드렸다.
"이 호텔에 케레스 양 방 하나 따로 구해줄테니까 그걸로 끝내자. 일주일이면 되지? 그 이상은 안 돼."
"......."
"인생이 그렇게 자기 뜻대로 되기만 할 거하면 오산이야."
케레스는 허탈한 듯 침대에 주저앉았다. 나는 절로 올라가는 입꼬리를 내리지 못하고 엘레베이터를 타고 로비로 내려왔다. 제복을 갖춰입은 지배인은 왠지 모르게 난감해보였다.
"실례합니다. 방을 하나 더 예약하고 싶은데요. 아무 방이나 남는 거 있나요?"
"아…."
지배인은 곤란한 얼굴로 내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실례합니다, 고객님. 그, 10분 전에 방이 그만."
"...전부 다?"
"예."
"혹시 여분으로 남겨둔 방도 없나요?"
"그렇습니다. 그 방 까지 모두 나갔습니다."
호텔의 임시 공실까지 내어줘야할만큼 방이 다 차버리다니 이해할 수 없었다. 지배인은 정말로 송구한 얼굴로 내게 상황을 설명했다.
"그…. 부디 어디 말씀을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영국 왕실에서 내일부터 방문을 하신다고 하시는데, 층 전체를 몇 개 빌리시고도 모자라서 사용인들의 방까지 빌리셨습니다."
"헐."
아니, 갑자기 왜? 지배인은 아주 조용한 목소리로 말하려다 자신의 스마트 기어에 문자로 제 말을 전했다.
[VVIP, 3.]
"......알겠습니다."
나는 결국 아무런 소득도 없이 방으로 돌아왔다. 심지어 카드키를 뽑고 내려가지도 않아서 케레스에게 문을 열어달라고 얘기까지 해야했다.
[한 20분만 기다려주세요~]
느긋한 케레스의 목소리에 나는 청승맞게 밖에서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정확히 20분 뒤, 방 문이 열렸다.
"죄송해요. 씻느라."
케레스는 달랑 흰 목욕 가운만 입은 채 나를 맞이했다. 케레스에게서는 곡물같은 바디워시 향기가 풍겼다.
"그래서 케레스 양. ...내가 지금 염치없는 상황이긴한데."
"???"
"...방 다 나갔다고 하더라. 나 내려가기 직전에."
"......아하하하!!"
케레스는 배를 잡고 폭소하기 시작했다. 나는 무안함과 쪽팔림에 면이 서지 않았다.
***
잠시 뒤.
룸서비스를 통해 2인분의 식사를 주문-지배인이 상황을 이해해주는 대신 추가요금은 받지 않기로 했다-했다. 케레스는 크림 리조또를, 그리고 나는 딸기잼이 들어간 토스트와 커피를 주문했다.
"몸 관리해? 그것만 먹어서 어디 밤에 힘 쓸 수 있겠어?"
"이걸로 충분해. 그보다 자꾸 내가 밤에 너랑 할 거라는 생각은 버려줬으면 해."
"이래도?"
케레스는 노골적으로 가운의 허리띠를 풀었다. 일자 복근이 탄탄히 자리잡은 배가 훤히 드러났다. 나는 확 커피를 끼얹어버리고 싶은 생각이 문득 들었지만 간신히 참았다.
"임자있는 몸이라니까."
"출장지에서 스폰하는 여대생이랑 하룻밤 정도는 모를텐데."
우리는 서로 편하게 말을 하기로 했다. 나로서도 존대보다는 그냥 편하게 말하는 쪽이 편했다.
"대놓고 바람을 피우라고 조장하는구만. 안 돼. 그리고 계속 가운 입지말고 옷 갈아입고."
"......흐흥."
케레스는 선반 위에 아무렇게나 벗어던져놓은 원피스와 속옷을 가리켰다. 작은 손가방 하나 말고는 케레스에게 다른 짐이 없었다.
"나 옷 사줘."
"내가 진짜 험한 말 안 하려고 했는데 너 정말 염치가 없구나?"
"그게 험한 말이야? 나 아는 누구는 갈보년이니 뭐니 쌍욕을 퍼부었는데."
속으로는 그보다 더 심한말이 튀어나왔지만 자동으로 필터링이 되었다. 그런 내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케레스는 꾸덕꾸덕한 리조또를 입술 한가득 묻히며 혀로 크게 핥았다.
"음식 가지고 장난치지 마."
"더럽다고 뭐라하는 사람은 있어도 그런 식으로 뭐라하는 경우는 처음이야."
"크림도 일부러 시킨 거지?"
"응. 이왕 리조또 먹을 거였는데 좋잖아? 당신, 좋은 것도 보고. 아, 크림 파이도 주문해도 돼?"
진짜 커피를 컵 째로 던져버릴까보다. 나는 토스트를 한 입에 털어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화장대 앞에 있는 작은 세면대에서 손을 가볍게 씻고 코트를 다시 챙겼다.
"어디가?"
"옷 사러."
"흐흥, 사이즈는 알고?"
"대충 눈 대중이면 충분해."
"직접만져봐야 알지 않을까나?"
"92."
나는 옷걸이에 걸어둔 모자를 눌러썼다.
"58, 75."
"...당신 도대체 뭐야?"
"프로듀서?"
나는 지갑안에서 명함을 다시 꺼내들었다.
"세계 돌아다니면서 모델이나 배우 될만한 사람 영입하는게 내 일이라서 말이야."
나는 케레스를 혼자 방에 내버려둔 채 먼저 문을 나왔다. 안에서 허겁지겁 옷을 챙겨입는 소리가 문너머까지 들렸다.
"......."
두 가지 선택지. 같이 가야하나, 아니면 따로 가야하나. 어느쪽이든 위험한 것은 마찬가지. 그렇다면 차라리 곁에 두는게 나을지도 모른다. 나는 코트를 벗어 옆으로 비켜섰고, 투다닥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벌컥 열렸다.
"기다-"
"왁!"
케레스는 내 기습에 까무라치며 놀랐다. 너무 놀라서 현관에 엉덩방아까지 찧었고, 나는 모자를 벗어 고리에 던진 뒤 케레스에게 손을 뻗었다.
"너무 급하게 뛰지 말라는 의미에서."
"...병주고 약주는 거야 뭐야?"
"혼자서 안 가니까 천천히 나오라는 말이었지."
나는 케레스가 뻗은 손을 조심스레 잡아당겼다. 케레스는 이능력자면서도 내 부축을 받아 몸을 일으켰다.
"씨이, 옷 구겨졌잖아."
"미안하네. 날씨 쌀쌀하니까 이거 걸치고."
나는 코트를 케레스의 어깨 위로 덮었다. 케레스는 순순히 내 코트를 어깨에 걸치며 헛기침을 했다.
"따뜻하고 좋네. 흠흠. 좋아, 어디로 갈 생각이야?"
"원하는 대로?"
"하. 백화점 가서 막 긁는다?"
"어. 원하는 대로 긁는데, 대신 조건이 있어."
나는 케레스가 걸친 코트의 태그 부분을 만지작거렸다.
"메이커는 정해져있다? 유성이야. US."
"뭐...라고…."
케레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거기 옷 엄청 구린데?"
"어. 옷은 구리지. 근데 의류매장 말고 다른 곳 옷은 진짜 좋거든."
"????"
나는 케레스의 옆구리에 손을 얹으며 내게로 당겼다.
"흥. 점잖은 척 하더니 결국에는. 흥흥."
"지금 엄청 점잖게 대하고 있는 거야. 내가 옛날 같았으면…. 아니다. 말을 말자."
"예전에는 엄청 날아다니셨나봐?"
"지금도 날아다니지. 내가 일만 아니었어도 말이야. 응? 그러니까 케레스 양. 딱 여기까지만 하자고."
"......이상한 사람이네 정말."
케레스는 요염히 웃으며 자신의 몸을 다시 내 옆구리에 붙였다.
"뭐, 나야 사주기만 하면 얼마든지 좋지만."
케레스는 뱀처럼 혀를 입술로 핥았다.
***
옷을 사러 온다고 했지만 우리가 택시를 타고 도착한 곳은 백화점이나 의류매장이 아니었다.
로마 어귀에 있는 전자상가. 그 중에서도 큼지막한 문구로 [US STORE]라는 이름의 4층짜리 대형 매장이었다. 늦은 밤임에도 불은 환하게 켜져있었고, 안에는 손님은 없지만 정장을 갖춰입은 직원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이런 곳이 있는 지도 몰랐는데."
"그럴 법도 하지. 겉으로는 그냥 전자매장이니까."
케레스는 의아한 눈으로 나를 올려다봤다. 나는 케레스의 허리에 감은 손으로 허리를 톡톡 건드리며 안쪽으로 모셨다.
"그냥 따라와봐."
위이잉.
자동문이 좌우로 열리며 미소를 만면에 머금은 금발의 남자가 허리를 숙였다.
"US 스토어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찾으시는 제품이 있으신지요?"
"이 친구한테 입혀줄 옷을 사러 왔는데요."
"...손님. 죄송하지만 저희는 의류 매장이 아닙니다."
직원이 난처하게 웃고, 케레스는 눈을 흘기며 내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하지만 여기에는 분명히 옷을 팔고있다. 정확히는 옷이 입혀진 어떤 제품을 팔고 있다.
"별을 보러 왔는데요."
"......? 아, 아! 죄송합니다! 너무 오랫동안 찾으시는 분들이 없으셔서 그만. 후후, 제가 VIP께 실수를 했습니다. 이해해주십시오."
"괜찮습니다."
직원의 태도가 삽시간에 변했다. 케레스는 VIP라는 말에 놀란 듯 입을 살짝 벌렸고, 나는 케레스를 데리고 직원이 안내하는 지하로 이동했다. 관계자가 아니면 모를 지하통로로 들어와 한참을 이동했다.
그리고 우리는 도착했다. 의류 매장.
"......이거 완전 변태 아니야?"
"옷 사달라며? 그러면 사주는 사람 취향 정도는 반영해줘야지."
"요즘 점잖은 얼굴한 히어로들이 실은 아지다하카랑 도착적인 플레이하기 일쑤라더니. 시안 씨가 딱 그 모양이네."
"내가 이능력자였으면 아마 그렇게 됬겠지. 케레스 양, 그런데 이런 거 다 각오하고 나한테 접근한 거 아니야? 이 정도면 충분히 점잖은 것 같은데."
나는 매장에 전시되어있는 X로이드들을 가리켰다. 벽에 늘어진 X로이드들은 온갖 복장으로 대기모드 상태에 들어가 있었다.
"야한 속옷부터 수영복은 기본에, 간호사, 승무원, 여비서…. 어우, 진짜 온갖게 다 있네."
"어. 마음껏 골라. 평상복도 일부있으니까 그거 골라도 되고."
"내 치수랑 다른데?"
"저거 다 히어로 슈트야. 찢어져도 복구되도록 만들어졌어. 수치만 입력하면 바로 조정이 가능하지."
"와…."
케레스는 질린 얼굴로 유리벽에 손을 짚었다. 나는 케레스가 마음껏 옷-이라는 슈트를 고르는 동안 나를 지하까지 안내한 직원을 따로 호출했다.
"찾으시는 제품 있으십니까?"
"바이오로이드는 아직 이쪽에 안 들어왔나봐요?"
"...그건 발주를 넣고 있는데 아직 본사에서도 워낙 물건이 적어서. 죄송합니다."
"아뇨, 괜찮아요. 대신 부탁 좀 하나 할게요."
나는 케레스가 듣지 못하게 작게 속삭였다.
"저 아가씨가 사는 X로이드, 옷만 벗겨서 여기로 내일 아침까지 배송 좀 해주세요. 구입한 X로이드들은 알아서 처분해주시고."
"...고객님?"
직원의 눈에 당혹과 공포가 서렸다. 슈트도 나름 비싼 물품이었지만, X로이드는 유럽 프리미엄으로 한 대에 고급 승용차 값을 하는 물건이었다. 그걸 슈트만 챙겨가겠다고 하니 놀랄 법도 했지만, 나는 그를 한 번에 이해시킬 마법의 문장을 알고 있다.
"저 아가씨, 이능력자거든요."
"......와, 부럽습니다. 이능력자 분이랑 하는게 그렇게 좋다고 하던데."
"네. 흠흠. 그런데 말입니다."
나는 스마트 워치 아래의 마도기어를 슬쩍 비쳤다.
"이걸로 좀. 30떼드릴게요."
"......20만 떼주셔도 되는데. 예. 오늘 밤까지 보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톡.
나는 마도기어에서 돈덩어리를 직원의 스마트 워치에 집어던졌다. 이제 직원이 알아서 모두 처리해줄 터.
"...고객님?"
"후후, 기다려보세요."
"시안 씨! 정했어!"
케레스는 두 팔을 쭉 펼치며 소리쳤다.
"나, 여기 있는 거 다 살게!!"
"......."
직원은 케레스와 나를 번갈아보며 입을 쩍 벌렸다. 케레스는 의기양양한 얼굴로 고개를 치켜들었다.
"왜 그래? 갑자기 쫄려? 돈 많다며?"
"속옷이랑 갈 때 입을 거 하나만 골라봐."
"후후, 알았어. 내가 시안 씨 생각해서 두 개만 고를게."
"아니, 갈 때 입을 거 얘기하는 거였어. 나머지는 직원 분이 배송해줄 거야.
"......지금 내 눈에만 거의 30대인데?"
"해주실 거죠?"
"물론입니다. 고르시는 즉시 나머지는 바로 작업에 착수하겠습니다."
"......."
케레스는 결국 무난한 비서 정장을 선택했다.
***
"진짜 안 할 거야?"
"어. 내일 중요한 약속 있거든."
"그럼 나야 좋기는 한데…."
나는 케레스의 정수리를 간질이며 재웠다. 실제 행위는 하지 않고 함께 누워 잔다는 것에 케레스는 상당히 의아해하는 듯 했다.
"...나 진짜로 잔다? 잘 거야? 후회 안 하지? 자는 사이에 뭐 하는 거 아니야?"
"안 그래."
나는 한참동안 케레스에게 확약을 하고 나서야 잠들 수 있었다.
역시, 주인공 버프.
설마 시작부터 거물을 낚을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그리고 백청화로 와서 정말로 다행이었다.
'만나서 반갑다.'
히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