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창염의 피닉스-401화 (401/1,497)

〈 401화 〉1부 17장 9

<태평양 상공, 백나로 호.>

"예, 알겠습니다. 지금 청화 님이 생방으로 영상켜서 백나로 호 여기저기를 소개하고 다니고 있으니, 자연스레 이목도 이쪽으로 쏠릴 겁니다."

[그렇게 해주시오. 나는 피닉스 님에 대한 서포트에 집중할 터이니, 부디 최선을 다해주시게. 나라의 미래를 위해서, 세계의 미래를 위해서.]

뚝. 전화가 끊어졌다. 백희아는 신경쓸만한 이들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정말 피곤한 전화네요...."

"어깨 주물러드리겠습니다."

"아뇨, 그런 피곤함이 아니라 정신적으로요."

"집행관께서도 피곤하신 분이 있으십니까?"

운사 박라온은 함장석 뒤에서 백희아의 어깨를 주물렀다. 허락도 없는 행위였지만 이미 백희아는 박라온의 마사지 기술에 함락되고 말았다.

"흐읏, 유성의 회장님이에요."

"과연. 아무리 수전노라도 세계의 멸망앞에서는 정의의 편에 선다는 겁니까? 어쩐이 유성 회장의 심경 변화에는 그런 이유가. 그럼 저는 그 분께 또 감사할 일이 생기고 말았습니다."

"왜요?"

"덕분에 가성비 좋은 제품군에 유성의 물건들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아시다시피 예전에는 속된 말로 후려치는 메이커 아니었습니까."

"많이 싸구려기는 했죠."

한국 내부의 모든 제품들에 발을 뻗어놓은 유성은 편의점 사업까지 진출하여 그 세를 과시했다. 지난 수 년간 유성은 강짜 사업을 벌였던 유성은 최근들어 제품군의 질적 향상과 서비스 개선 등 소비자 중심적인 경영 전략을 펼치고 있었다.

그 변화는 유성을 불매하던 라온 조차도 일부 제품을 구매했을 정도. 라온의 손목에는 마도 기어가 채워져있었다.

"유성의 회장마저도 협조하는데, 만약 비협조적으로 나오는 자가 있다면 그 자는 분명."

"괴인이거나, 빌런이거나. 아니면 세계 멸망을 옹호하는 자거나."

지극히 간단한 논리였다. 세계를 구하자는 대의 앞에 직접적으로 돕거나 응원은 하지 못할 망정, 어차피 망할 세계니 트롤 짓이나 하자는 자들에 대해서는 둘 다 용납하지 못했다.

그리고 현재.

멕시코는 그 트롤링의 온상이라고 할 수 있는 국가였다. 이미 마약 카르텔이 정부와 깊게 연관이 되어있는 만큼 트롤러들도 판을 치고 있었다.

"운사. 누리 양을 잘 부탁드립니다."

"물론입니다. 어린이는 국가의 미래. 하물며 잠재력이 S인 분이 주변에 휩쓸리지 않도록 잘 제어하겠습니다."

등대의 말에 따르면 피닉스는 누리가 멕시코에 따라가는 것에 걱정과 주의로 신신당부를 했다고 했다. 특히 특정 인물을 지정하며 주의를 주면, 그곳에서는 그 대상을 상대로 뭔가 분명 큰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예언이기도 했다.

아니면 누구의 말마따나, 미래에 일어났던 일에 대하여 과거에서 노파심을 부린다거나.

"부디 무사히 잘 다녀올 수 있기를."

백희아의 걱정 또한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의 어깨에는 200여명의 히어로 뿐만 아니라, 전세계 인들의 목숨이 걸려있었다.

"아참, 운사. 축하드립니다."

"...별말씀을."

표정없이 가만히 있던 박라온이 처음으로 살포시 미소지었다.

"세계의 멸망이 눈앞에 있는데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아마 그게 제 성장의 원천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마침 궁성도 배에 올랐으니, 멕시코에 가서도 좋은 페이스 메이커가 될 겁니다."

"그래서 운사 님. 아니 라온 님."

백희아는 주변에 누군가가 없는 틈을 타서 은근슬쩍 물었다.

"...중간에 헌터로 빠지시면 안 됩니다? 히어로 계속 하실 거죠?"

"집행관 님."

박라온이 처음으로 백희아에게 동정을 표했다.

"지금 이렇게 한 명 한 명 잡아서 상담하는 거, 혹시 히어로들이 청화단이나 헌터 길드로 빠질까봐 걱정되서 하시는 겁니까?"

"......."

백희아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렇다면 걱정마십시오. 협회에서 저를 제명하지 않는 이상, 제가 먼저 히어로 일을 그만 둘 일은 없기 때문입니다."

"...라온은 왜 히어로가 되기를 선택했나요?"

"어렸을 때, 저를 구해준 사람처럼 저도 사람들을 구해주고 싶기 때문입니다."

흔한 이유였다.

"누가 구해주던가요? 광검? 아니면 화권?"

"무화 님께서 구해주셨습니다."

"...무궁화 보이?"

박라온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무화(武火)라고 불러주시길 바랍니다. 그런 이상한 이름의 히어로 저는 모릅니다."

"지금 국화(國花)인 무궁화를 무시하시는 건가요?"

"그게 아니지않습니까? 집정관께서도 선의철이 명명한 무궁화 보이에 대해서는 대놓고 스스로 무화라고 부르셨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공식 명칭은 무궁화 보이라고요!"

두 여인은 복잡한 자존심 대결을 펼쳤다. 백나로 호는 아주 평안하게 태평양 상공을 나아가고 있었다.

* * *

"엣취."

갑자기 꽃가루가 코에 스며들어 기침이 나왔다. 나는 코트 안의 손수건을 꺼내 기침이 튀어나오지 못하도록 막았다. 약 4시간 정도 걸려 도착한 로마는 공항에서 내리자마자 꽃가루가 휘날렸다.

"난리네, 난리."

공항은 수많은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로마에 들어오는 사람들보다 공항을 통해 국외로 빠져나가려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태극 마크와 이탈리아 국기가 함께 달린 머리띠를 두르고 있었다.

[정부는 한국행 비행기를 늘려라!]

"진짜 난리네."

안전한 곳을 찾아가려는 사람들의 심정이 그러하듯, 전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국가를 꼽으라면 단연 한국이 될 것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다크 레기온의 간부 피닉스를 쓰러뜨린 석하랑이 있는 곳이니.

"정말 난리죠?"

"......?"

짙은 갈색 머리칼의 여인이 내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키는 170을 훌쩍 넘기는데 볼륨감이 상당했다. 수녀복같은 스타일의 정숙한 옷차림에도 그 선이 한 눈에 들어왔다.

그 전신을 스캔하는데까지 걸린 시간은 찰나. 나는 살포시 미소를 지으며 선글라스를 벗었다.

"출장을 왔는데 이런 난리가 생길 거라고는 전혀 상상도 못했습니다. 만나서 반가워요. 현지인이신가요?"

"아뇨, 저도 여행중이랍니다."

"이런 시기에?"

"세계가 멸망하기 전에 조금이라도 더 많은 나라를 구경하고 싶어서요. 가는 곳마다 다 저런 걸 봐서 조금 슬프네요. 어딜가도 한국, 한국. 덕분에 한국에 가고 싶어도 못 가게 되었거든요."

여인은 안내 전광판을 가리켰다. 한국, 중국, 그리고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 공항으로 가는 비행기편은 모두 표가 매진되고 말았다. 내일도, 모레도.

"저래서는 동아시아 여행은 포기하셔야겠는 걸요? 아니면 기차타고 가셔야 할텐데."

"대신 다른 비행기 편은 널널하답니다. 후후. 출장은 뭣 때문에 오신 건가요?"

"...회사의 일 때문에. 실례지만 저희 먼저 이것부터 해야하지 않겠습니까?"

나는 코트 안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냈다. 종이로 된 명함을 공손히 건네며 은은하게 미소지었다.

"<오라클 스튜디오> 국제영업본부장, 시안이라고 합니다."

"...시안?"

"예. Cyan. 제 모발이 날 때부터 이런 색이라."

"아. 특이한 이름이네요. 블루가 아니라니."

"양친께서 흔한 사람이 되기보다 어떤 곳에서든 특이한 존재가 되기를 바라셨거든요."

지금은 청록색이기는 하지만. 여인은 내 명함을 한참동안 쳐다보며 핸드백에 집어넣었다.

"확실히 특이한 이름이기는 하시네요. 만나서 반가워요. 저는 케레스(Ceres)라고 해요."

"...본명?"

"이명입니다."

"아, 히어로세요?"

여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가명이죠. 죄송하지만 저는 지금 명함 같은 건 가지고 있지 않은 처지라, 본명을 직접 말씀드리기는 좀 그렇거든요."

"이해합니다."

굳이 나는 더 캐묻지는 않았다. 나는 검은 케이스를 들고 모자를 눌러썼다.

"그러면 좋은 만남이었습니다. 로마에 오자마자 좋은 인연이 생긴 것 같아 기쁘군요. 부디 안전한 여행길 되시길 바랍니다."

"저기요?"

"네?"

"지금 그냥 가시려는 거 아니시죠?"

여인, 케레스는 허탈하면서도 짜증이 서린 얼굴로 나를 노려봤다. 하지만 나는 바쁜 몸인 만큼, 여기서 시간을 허비할 수 없었다.

"어...죄송합니다. 지금 제가 출장으로 일하러 와서요. 여행으로 왔으면 모를까, 저도 샐러리맨이거든요."

"아니, 세계가 멸망할지도 모르는 이 시국에 일을 한다는 거예요? 진심?"

"세계가 멸망할지 안 할지는 모르는 거 아닙니까? 막말로 사표쓰고 탱자탱자 놀았는데 세계가 멸망하지 않으면?"

"그러다가 진짜로 세계가 멸망한다면요?"

"...음. 그렇군요. 일만하다 죽으면 조금 아쉽겠네요."

케레스는 그제서야 살포시 미소지었다. 나는 스마트 워치의 시계를 확인하고 택시 승강장을 가리켰다.

"조언 감사드립니다. 호텔에 짐을 풀고 하루 정도는 쉬면 적절하겠군요."

"아니. 진짜, 벽창호예요?"

"공과 사를 구분하는 거라고 해주시지요."

"......그렇게 말하니까 내가 할 말이 없어지네. 좋아요, 그럼 신사분. 어느 호텔로 가세요? 혹시 위치아세요?"

"...이 호텔입니다만."

나는 봉투를 꺼내들었다. 이미 2주 전부터 체크인 예약을 해둔 서류는 하나의 오류도 없었다. 케레스는 종이를 훌쩍 훑더니 활짝 웃었다.

"어머나. 이런 우연이. 마침 저도 이 호텔에서 숙박할 예정이었는데."

"우연이네요. 하하."

나는 슬쩍 옆으로 걸으며 자리를 피했다. 하지만 케레스는 내 옆으로 다가오며 거리를 좁혔다.

"저기요. 지금 저 무시하시는 거예요?"

"죄송합니다만 저는 토끼같은 마누라가 있는 사람이라."

"아, 그러세요? 반지 없어서 그만."

케레스는 내숭을 지우고 본색을 드러냈다.

"...그럼 모처럼 로마에서 이렇게 인연이 생겼는데, 하룻밤-아니 몇 밤 재워주시지 않으시겠어요?"

"......처음부터 이럴 목적으로 접근하셨습니까?"

"돈 없는 여대생이 세계 여행을 할 돈이 어디있겠어요? 어차피 멸망할 세계라면 즐기는 게 낫지."

나는 대놓고 한숨을 내쉬었다. 케레스는 연신 웃으며 내 팔을 붙잡으려 했다. 이명이라는 것에서 눈치를 채기도 했지만, 케레스는 자신이 이능력자임을 숨기지 않았다.

"후후, 혼자서 출장오시면 이런 일이 있을 거라고 예상 못하셨어요?"

"혼자서 이렇게 다가오신 것도 상당히 대담하다고 생각하는데요. 혹시나 제가 엄한 생각 하면 어쩌시려고요?"

"그럼 모처럼 몸보신 하는 거죠. 저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요."

케레스는 대놓고 제 속셈을 드러냈다. 설마 로마에 도착하자마자 이런 일이 발생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나는 슬쩍 케레스에게서 팔을 빼냈다.

"제가 문제가 생기거든요. 와이프가 지켜보고 있는지라."

"에이, 거짓말. 결혼한 것 같지 않은데요?"

"안 믿으시네. 잠시만요. 제가 제 아내 사진 보여드릴게요."

나는 스마트 워치에서 내가 사랑하는 이의 사진을 꺼냈다. 케레스의 눈에는 아주 잠시 경멸이 스쳐지나갔다.

"예쁘죠? 아름답죠? 여신같죠?"

"...비스트 테이머잖아요."

"네. 와이프입니다."

"아, 그 와이푸(Waifu)? 당신, 그 말로만 듣던 태양교단인가보네요. 비스트 테이머 얼굴에 혹해서 덕질한다는 광신도 집단."

케레스는 노골적으로 나를 까내려가기 시작했다. 내가 청화의 광신도라는 걸 알자마자 나를 낚으려던 마음이 사라진 것처럼 보였다. 나는 케레스의 오해를 정정했다.

"농담이에요. 사실 부적같은 겁니다. 세계를 구하기 위해 불철주야 노력하는 분이잖아요? 지금도 뭔지는 모르겠지만 멕시코로 가고 있고."

"...진짜요?"

케레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나는 스마트워치를 통해 청화의 스트리밍 생방송 영상을 켰다.

[네! 자금 소개할 분은 한국의 S급 히어로, <화권>이승형입니다! ...채팅방 동결! 그거 저 아녜요! 가루라라고요! 얼굴은 닮았지만 몸이 다르거든요! 보세요!]

"......아니."

케레스는 질색을 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나또한 비슷한 감정이었지만, 출장중인 만큼 영상을 정지시켰다.

"멕시코에는 무슨 일로 가시는 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세계 평화를 위해 뭔가 하시는 거겠죠?"

"멕시코…? …….?"

"혹시 가보셨나요?"

"아뇨. 아메리카쪽은 아직 안 가봤는데…."

케레스는 혼란스러운 얼굴이었다. 그 사이 주변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한국행 비행기를 늘려달라는 사람들이 좌우로 갈라지고, 금발에 수염이 덥수룩한 남자가 시위대의 앞에 섰다.

"로마의 시민 여러분! 부디 진정하여 주십시오!"

중년의 남자는 공항 전체를 울리듯 소리를 질러 시위대를 진정시켰다. 목소리에는 분명 마력이 담겨있었고, 상당히 높은 등급의 이능력자였다. 그리고 나는 그의 마력에서 익숙한 기운을 느꼈다.

"......뇌절?"

"뇌절이라뇨?"

"저 이능력자의 이명입니다. 이명."

나는 열심히 시위대를 진정시키기 위해 일장 연설을 하는 그리스 출신 S급 히어로, <뇌절>을 두 눈으로 훑었다. 어째 시작부터 이런 식으로 만남이 이루어질 거라고는 전혀 예상 못했다.

"별명이 제우스라고도 불리우는 그리스의 히어로입니다."

"그런 남자가 왜…. 아. 그렇군요."

케레스는 뭔가 스스로 자문자답을 하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시위대를 진정시키려고 온 걸까요?"

"그러기는 한데 역효과네요. 지금 용의선상에 오른 남자기도 하니까."

아지다하카의 괴인.

뇌절은 열심히 시민들을 진정시키려 했고, 시민들은 두려움에 빠져 피켓을 바닥에 떨어뜨리며 도망치기 시작했다.

"으아악! 남자 S급이다!"

"모두 도망쳐! 저 놈, 분명 아지다하카 할 거야!!"

"여기서 암마룡에게 죽기는 싫어!!"

시민들은 도망쳤다. 시위대를 진정시킨다는 뇌절의 의도는 시위대를 해산시키는 것으로 나타났다.

"......."

뇌절은 주섬주섬 피켓을 주워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의 뒷모습은 너무나 쓸쓸해 보였다.

"......."

하지만 나는 그 모습이 가증스러웠다.

"왜 그러세요?"

"아뇨. 그냥. ...진짜로 아지다하카 할 지 모르니까 저도 공항에서 빨리 떠나야겠습니다."

나는 부리나케 공항을 빠져나가 택시를 잡았다. 케레스가 잡으려는 속도보다 더 빠르게.

"기사님, 여기로 빨리 가주십시오."

"빨리? 신호 걸리는데."

"여기도 통하려나? 따블."

"이제야 좀 말이 통하는 손님이군."

역시 돈은 위대했다.

...그러나 케레스는 내 바로 뒤의 택시를 잡아 뒤따라왔고, 나는 결국 일반 택시 요금의 네 배를 물어야했다.

"후후, 예쁜 외국인 여대생이랑 데이트 하는 값이라고 생각하세요~"

"......."

이래서 내가 백청화 모습이 싫었다.

잘생긴 호구.

나의 로마 여행길의 시작은 시작부터 호구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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