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창염의 피닉스-400화 (400/1,497)

〈 400화 〉1부 17장 8

그리하야.

백씨 가문의 음모에 의해 피닉스는 사랑에 빠진 악역 이미지가 붙어버렸고, 이 이미지 메이킹에는 여러 사람들의 음습한 의도가 뒤섞여 들어갔다.

가령 피닉스가 사랑에 빠진 대상을 연기해야할 모 배우 출신 이능력자라거나.

가령 피닉스와 오래전부터 라이벌 관계를 가졌다가 이제 승리를 한 것으로 알려진 지구 최강이라거나.

가령 <피닉스>는 화속성 이능력자를 각성시킬 수 있다는 정보를 은연중에 퍼뜨림으로써, 콩고물이라도 조금 주워먹을게 있을까 기웃거릴 외국인들이 방문하도록 유도하여 관광 수입과 세수를 늘리려는 국수주의와 자본주의의 콜라보라거나.

하여튼 그리하여 밤새 커뮤니티에서는 피닉스의 진의에 대하여 왈가왈부가 이루어지는 가운데.

피닉스와 대화를 한 이후 집행관이 굳이 '멕시코행'을 선택한 이유에 대해 찾는 이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사실 별로 의미는 없었다.

내 진짜 목적지는 로마이니까.

나는 로마행의 마지막 준비를 위해 히카리의 연구실을 찾았다.

"그래서 나초에 딸기잼 찍어먹으시니까 맛있으세요?"

히카리는 출국 전 내 마지막 식사에 질색을 했다. 나도 딱히 좋아하지는 않지만, 안에서 맛있게 드시고 있을 분을 위해서는 얼마든지 입에 넣고 먹을 수 있었다.

"드셔보실?"

"됐어요. 저는 괴식 별로 안 좋아해요."

"김치 초밥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단장님, 저 한국으로 귀화하려던 계획을 조금 고민해봐야 할 것 같은데요."

히카리는 진심으로 질색했다. 일본을 탈출하기는 했지만 식성은 여전히 전형적인 일본인인만큼, 히카리는 퓨전 초밥에 대해 여러모로 난해한 입장에 처하고 말았다.

"농담이예요."

"단장님. 혹시 딸기초밥 같은거 드시는 건 아니죠?"

"......히카리."

나는 갑자기 속이 메스꺼워졌다. 그리고 과거의 악몽이 떠올랐다.

"밥 지을 때 식초 대신에 딸기과즙 넣고 밥 지으면 맛이 어떻게 되는지 아나요?"

"윽."

히카리는 진심으로 혐오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나도 입꼬리가 비틀렸지만, 내 안의 주인은 그걸 좋다고 한 번에 두 개씩 먹어치웠다. 아직도 그 맛과 향이 위에서 올라오는 기분이 들어 속이 거북해졌다. 나는 나초에 한 번 더 딸기잼을 찍어먹었다.

"단장님, 안 그래도 며칠은 유럽에서 지내야하는데 그냥 밥 드시고 가시지."

"괜찮아요. 거기서는 딸기 파스타 먹으면 되니까."

히카리는 또다시 질색했다.

"저 괴롭히시는 거죠?"

"...? 진짜로 있는데요, 딸기 파스타는."

"말을 말죠. 자요, 조정 끝났어요. 가져가세요."

히카리는 내게 작은 케이스 하나를 건넸다. 나는 내가 들고온 007 케이스를 들어올려 비밀번호를 맞췄다. 1225. 케이스가 열리고, 내가 굳이 안에 보관한 TAT가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케이스에서 TAT를 꺼내 히카리에게 넘겼다.

"이건 당분간 반환."

"네. 조정해둘게요. 리볼버 타입으로."

더이상 TAT라고 부르기 힘든, 6탄창의 핸드캐논으로 마개조가 되겠지만 어쩔 수 없었다. TAT는 화력이 좋은 만큼 소리도 화끈했기 때문에, 조용히 다녀야 하는 이번 임무에서는 최악의 파트너였다.

"그리고 여기, 단장님이 원하신 소형 권총이요. 회장님이 좋은 제품을 미국에서 공수해주셔서 크게 바꾼 건 없어요. 안에 소재들 좀 갈아넣어서 튼튼할 거예요."

나는 히카리가 건넨 케이스를 열어젖혔다. 마찬가지로 1225라는 비밀번호였고, 그 안에는 내 작은 한 손에 딱 맞게 들어갈 사이즈의 권총이 두 정 들어있었다. 나는 조심스레 두 총을 들어올렸다.

"그거 아세요? 원래는 베레타 쓰다가 이걸로 바꾼 요원이 있답니다."

"...? 제원 찾아볼 때 그런 얘기는 없었는데요?"

"원래 이 케이스랑 세트거든요."

히카리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아쉽게도 그 시리즈는 이 세계에 없는 모양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손뼉을 쳐서 내 옷을 바꾸었다.

몸에 딱 맞는 남성형 정장. 흰 와이셔츠. 그리고 007 케이스.

"준비 끝!"

"......진짜 그러고 가실 거예요?"

"물론이죠. 여기에 장소가 장소인 만큼 두 개 더 추가."

짝.

손뼉을 침과 동시에 내 머리에는 하늘성과 똑같은 스타일의 신사용 중절모, 그리고 정장위를 덮는 검은 코트가 나타났다. 히카리는 눈썹을 찌푸리며 나를 위아래로 훑었다.

"......?"

"왜요?"

"아뇨. 뭔가 기시감같은게."

"착각이겠죠."

주인공의 옷을 검은색으로 칠했을 뿐인 것을. 모자와 넥타이에 포인트로 들어간 청색만이 창염의 색을 가리키고 있었다. 나는 권총 하나는 품에,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케이스에 다시 집어넣고 닫았다.

"아무튼 밤늦게까지 만들어주느라 고생했어요. 이제 주무세요. 안 그러면 키 안커요."

"그 키가 크려면 일단 세계가 살아있어야 되잖아요. 한 3개월 정도 잠 적게 자도 돼요. ...하암."

히카리는 눈을 깜빡이며 하품을 했다. 그리고 부끄러워하며 고개를 숙였다. 나는 히카리의 머리를 톡톡 쓰다듬으고 침대를 가리켰다.

"가서 자요. 이제 출발 얼마 안 남았으니까."

"...백나로 호 출격하면 바로 떠나시죠?"

"물론."

멕시코 출격 자체가 히드라를 속이기 위함이다. 그러니 백나로 호에 소란이 생긴 틈을 타, 나는 한국에서 빠져나갈 계획이었다.

"단장님. 백나로 호 있잖아요. 지난번에 개조하신다고 하셨잖아요."

"네. 안 그래도 그거 때문에 물어볼 게 있기는 한데, 나중에 얘기하도록 해요. 오늘은 이만 자고."

더이상 못자게 방해하면 질풍객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전세계를 돌며 괴인을 베고 다니다 유럽에서 나를 만나 칼질을 해댈 수 도 있을테고.

"돌아오면 얘기하도록 하죠."

"그러면 하나만 말씀해주시면 안 될까요? 그...진짜 단장님이 말씀하신 거, 가칭 <데스디나스 호>의 디자인이 그걸로 해도 돼요?"

"물론."

안 될게 무어 있단 말인가. 히카리 입장에서는 조금 꺼려질 수 있는 디자인이기는 하지만, 어차피 배와 동기화 하는 사람의 의견이 가장 중요했다.

"백희아 의견을 최대한 수용하세요. 그 사람의 의지가 더 많이 반영될수록 더 동기화가 잘 될 테니까."

"그, 그럼 진짜로 그런 걸로 알고 만듭니다? 나중에 다른 말 하시기 없기예요?"

"네. 나중에 제가 다른 말 하면 제가 히토미랑 결혼합니다. 됐죠?"

"방금 녹음 땄어요! 진짜 약속!"

나는 연거푸 내게 확약을 언급하는 히카리에 손가락을 걸고 도장을 찍고 나중에는 서면으로 서명까지 하는 과정까지 거쳤다. 아무리 최종전의 장소인 달까지 날아갈 로켓으로 전세계에 생중계된다고 해도, 굳이 이렇게까지 디자인 문제로 왈가왈부 해야하나 싶었다.

"그럼 저 유럽 가있는 동안 은하대학교 잘 부탁합니다, 히카리."

"네! 단장님이 주신 데이터로 더 훈련 프로그램 빡시게 만들어놓을게요. 돌아오시면 전부다 S급 달아놨을 걸요? 히히."

"...일주일 안에 무조건 돌아올 거예요."

일주일이나 걸려도 히드라를 잡지 못한다는 건 사실상 영원히 히드라를 잡지 못한다는 말이나 다름 없었다. 그러니 일주일 안에 나는 무조건 한국으로 돌아와야했다. 지륜을 데리고.

"아, 단장님. 마지막으로 진짜로 하나만 질문할게요."

"뭐죠?"

"왜 하필 쌍권총을 그걸로 정하셨어요?"

"아. 이거요?"

나는 품안에서 소형 자동 권총, 발터 PPK를 꺼냈다.

"간김에 시간이 나면, 독일 네오나치 머리에도 한 발 먹여주려고요."

아돌프 빌헬름.

높으신 분-<원로원>의 일원인 동시에, 차원문 연구를 통해 테라로의 침공을 획책하는 <테라 엑소더스>를 일으키려는 장본인 중 한 명이기도 했다.

* * *

새벽이 되었다.

이미 인천 영종도에는 많은 관계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집행관 백희아를 중심으로 하여 화권, 운사, 풍백, 우사 등 온갖 히어로들이 참가하였고, 청화단의 단장 등대를 위시한 청화단의 헌터들이 영종도로 집결했다.

공식적인 참가 인원 수가 약 200명.

중국 흑사갈 레이드를 갔을 때보다도 더 많은 수의 히어로와 헌터들이 멕시코 행 백나로 호에 승선했고, 전력의 양과 질은 압도적으로 늘어났다.

사실상 석하랑을 제외한 모든 이능력자들이 배에 올랐다. 백희아는 이례적으로 멕시코로 떠나는 발표를 함과 동시에 명단을 빠르게 배포했고, 밤동안 사람들은 그 명단을 분석하는 것으로 백희아의 의도를 추측하고자 했다.

그리고 그 명단에는 예상외라고도 볼 수 있고, 당연하다고도 볼 수 있는 이름이 올라갔다.

청화. 흑염룡.

혹자는 청화가 멕시코로 가는 것에 대하여 피닉스가 난동을 부리지 않을까 걱정하는 이들도 생겼지만, 그 바람에 피닉스에게는 팔불출 이미지가 덧씌워지고 말았다.

그리고 나는 남들의 눈에 띄지 않게 몰래 펜트 하우스에 돌아왔다. 간부들은 모두 회의장에 대기를 하고 있었고, 나는 히카리를 재우고 난 모습 그대로 간부들의 앞에 섰다.

"마피아야?"

"해외 출장을 가는 거니까요. 코트는 그냥 멋."

"완전 본격적이네."

가을은 이미 청화로 변신하여 렌즈를 끼고 있었다. 창염과 똑같은 여인이 가을의 스타일로 옷을 입고 있으니 뭔가 새로운 느낌이 들었다. 나는 모여 앉은 간부들을 쭉 눈으로 훑었다.

등대, 궁성, 아키택트, 팬텀, 하늘성, 흑염룡, 그리고 영종도에서 대기하고 있을 서해무기까지.

"등대. 푸른 깃털에 대한 관리는 당신에게 맡깁니다. 서해무기를 팀장으로 하고, 휘하 깃털들을 지휘하세요."

모스크바에서 내게 반기를 든 철표를 제외하고 모든 괴인들을 부활시켰다. 백희아와 1:1 면담을 거친 그들은 다시금 푸른 깃털이 되거나 석하랑이 만든 결계에 수감되었다. 전자는 선의철에 의해 조작된 정치범이나 미등록 이능력자들이었다면, 후자는 민간인을 학살한 진성 빌런들이었다.

철컥.

나는 품안의 지포 라이터를 열었다 닫았다. 돌로 된 지포 라이터가 된 조덕배를 제외하면 사실상 헌터 길드 청화단의 모든 전력이 멕시코로 향하는 셈이었다.

"가서 최대한 날뛰세요. 당신들이 시선을 더 많이 끌수록 제가 움직이는 게 더 편해질테니까."

"워낙에 눈에 띄눈 모습이라서 오히려 적에게 걸리지 않겠습니까?"

"햇빛에 숨어서 가도 마력을 쓰는 거니까 걸릴 수 있고, 뭣보다 요즘 로마 날씨가 별로 안좋다고 하던데."

"후후, 그건 걱정마요. 제게 다 계획이 있으니까."

"보스 입에서 계획이라는 게 튀어나오니까 더럽게 걱정되는데."

나는 할 말을 잃었다. 무슨 계획인지 그들에게 오픈을 하지 않았으니, 내가 청화단을 걱정하는 만큼 그들도 나를 걱정하고 있었다.

"조심하세요. 그리고 진짜 조심하고. 특히 당신. 예?"

"울 엄빠보다 더 잔소리 심한 것 같은데. 단장님 원래 그럼?"

헌터 길드 청화단의 새로운 간부, 급식헌터 김누리는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다 내게 걸렸다. 다들 누리에 대해 불편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누리는 제 스마트폰을 들어올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 지금 단장님 주의사항 메모하는 건데요. 멍청이도 아니고 이걸 밖에 퍼뜨리겠음? 걱정마요."

"저거 히카리가 다 해킹해서 검열하고 있으니까 걱정마요."

"헐. 대박사건."

"다 히카리를 믿으니까 쓰는 거죠. 걱정마요. 히카리가 프로그램만 돌려서 검열하지 실제로는 보지도 않아요. 자기 연구하는데 바빠서."

신뢰가 없으면 하지 못할 짓이었다. 제법 대인원이 상황을 알고 있지만 그 누구에게도 유출되지 않는 다는 전제하에 이루어지는 작전이었으니, 딱 한 명만 주의하면 될 일이었다.

"이승형은 모르니까 절대로 알려주지 말아요. 알겠죠?"

"내가 옆에서 철저하게 관리할게. 뭣하면 가루라랑...아니지. 걔는 카르나랑 같이 움직여야하니까. 얘, 아영아. 너 이승형이랑 한 떡 할래?"

"미친 년."

곽아영, 아니 흑염룡 곽용우는 대놓고 가을에게 쌍욕을 퍼부었다. 그리고 나는 바로 흑염룡에게 주의를 줬다.

"누리 듣잖아요."

"...죄송합니다, 신이시여."

"내가 미친 년이라고 욕 먹은 건 문제 안 돼?"

"그거야 당연하죠."

본인이 원하면 모를까.

잠시 뒤.

간부들은 흑염룡을 타고 서울에서 떠났다. 나는 텅빈 우리의 아지트에서 홀로 펜트하우스에 남았다. 그리고 나는 전신 거울의 앞에서 손가락을 튕겼다.

딱!

나의 육체가 변했다. 내 앞에는 푸른 머리칼에 검은 코트를 입은 백청화가 모습을 드러냈다.

"슬슬 나와도 되는데."

"기다리다 지쳤어. ...처음만나서 반갑다고 해야할까?"

"편한대로 해도 돼. 나도 편한대로 말할테니까."

"...말투 순한 거 봐. 자, 그럼 시간 없으니까 당장 날아가자."

커튼 뒤에 숨어있던 루살카가 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나는 루살카와 손을 잡고 눈을 감았다.

세상이 변하고, 나는 루살카의 별궁에 도착했다. 루살카는 품안에서 흰 봉투를 꺼내 내게 건넸다.

"가는데 조심해. 괜히 이상한 일에 엮이지 말고."

"당신에게 이런 걸 받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는 걸."

"나도 네가 이런 모습일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단다. ...흠, 역시 누가 내 딸 아니랄까봐 미래의 하랑이도 남자보는 눈이 제법...."

"여성형으로 유혹해서 자빠뜨렸다면 믿으시려나?"

루살카의 눈은 더할나위없이 흔들렸다. 나는 손사레를 치며 봉투를 받아 내 안주머니에 넣었다. 9월 말임에도 날씨는 제법 쌀쌀했다.

"반쯤 농담이야. 그럼 루살카, 금방 가서 지륜을 데려올게. 얼마 안 걸릴 거야."

"아니, 너 진짜 말투 왜 그래? 왜 그렇게 갑자기 살갑게 구니?"

"......이건 이게 디폴트라서."

이후.

나는 백나로 호가 영종도에서 멕시코로 날아오르는 것과 동시에, 모스크바에서 로마로 향하는 비행기에 올라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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