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9화 〉1부 17장 7
대통령 백세준이 피닉스와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그 날 저녁.
백세준의 손녀이자 한국 협회의 지휘관이기도 한 집행관 백희아가 급히 멕시코로 날아가겠다는 의지를 천명했다.
전세계의 시선이 멕시코로 쏠렸다.
아지다하카 게이트가 있기 전부터 S급 쓰러뜨려오던 한국 협회와 청화단이 슬슬 움직일 때가 되었기는 했지만, 세계가 멸망에 이를지도 모르는 이 시국에 또다시 외국으로 나설 줄은 그 누구도 예상치 못했다.
당연히, 백희아는 '내일 멕시코로 간다'는 말만 하고 다시 잠적해버렸다.
이미 백희아가 잠적하는 실력은 평양 사태 당시 그 누구도 백희아의 털끝하나 발견하지 못한 걸로 유명했고, 결국 사람들은 잠적할 수 없는 이를 대상으로 궁금증을 해소하고자 했다.
당시 자리에 함께 동석한 이.
설화령 석하랑.
하지만 석하랑도 쉽게 건드릴 수 없는 존재였다. 그러니 사람들은, 국민들은, 세계 각국에서는 모든 공식 비공식 루트를 통해 정보를 구걸했다.
- 대통령은 모든 걸 알고 있다.
실제로 백세준 대통령은 모든 걸 알게되었다. 이제 세간에 알려지는 정보는 백세준 대통령에 의해 철저히 통제되어 흘러나갈 것이다.
그리고 오늘 밤 10시.
백세준 대통령이 직접 카메라 앞에 나와서 말하는 브리핑이 있을 예정이었다.
* * *
<21시 30분, 신서울 유성일가 저택.>
"준비는 끝났어요."
은유하는 내게 철제 케이스를 넘겼다. 007가방같은 검은 케이스 위에는 현지에서 사용 가능한 미개통 스마트 워치가 있었다.
철컥.
나는 마도기어를 마력으로 형태를 변환하여 팔찌로 만들었다. 그리고 그 위에 손목시계 스타일의 구형 스마트 워치가 채워졌다.
"유로화 얼마나 채워놨어요?"
"2천만 유로요. 사용하시는데 큰 문제는 없을 거예요. 조부가 생전에 유럽에 몰래 만들어놓은 차명계좌니까요."
"...일주일도 안 걸릴텐데?"
"일주일이 걸릴 지 하루가 걸릴 지, 그도 아니면 한 달이 걸릴 지 모르잖아요. 가시는 길 넉넉히 넣어드린 거니까 다 쓰셔도 돼요."
은유하의 덕분에 유럽에서의 활동 자금은 충분히 마련되었다. 피닉스의 계좌를 사용했다가는 금방 추적을 당할 터이니, 진작에 유로화로 바꿔놓은 계좌를 사용해야만 했다.
유럽 한복판에서 거액의 한화를 결제하는 자가 있다면 누가 있겠는가. 그러니 오래전부터 거액의 유로화로 바꾸어 놓은 계좌가 있으면 금상천화였고, 마침 은유하에게는 그런 계좌가 수두룩했다.
다만 이 스마트 워치는 받기가 좀 그랬다. 제법 오랫동안 사용한 흔적이 있는, 생활 기스까지 난 1세대 구형 스마트 워치의 주인이 누군지 나는 안다.
"제가 이걸 받아도 될까요?"
"네. 돌아가신 선친께서도 기뻐하실 거예요."
은하수.
은유하의 부친이자 유성 그룹의 회장. 이 스마트 워치는 그가 유하에게 남긴 유일한 재산이며 흔적이었고, 생전에 유하 본인에게 직접 넘겨준 유품이었다.
"혹시 한국에서 살지 못하게 되면 해외로 도피하여 이 비자금으로 살아가라."
분명 그렇게 말하며 이걸 넘기고 죽었다. 은유하는 내 말에 잠깐 벙찐 얼굴이 되었다.
"미래의 제가 이것까지 줬나요? 세상에."
"여러모로 큰 도움이 되었죠."
은유하 루트에서만 개방되는 자금 치트. 황금 옥좌의 유산이 내 손목에 채워졌다. 이 스마트 워치에 남은 유전정보와 온갖 데이터들로 전세계에 뿌려진 비자금을 모으면 아마 현금으로만 20조에 이를 것이다.
"다행이네요. 미래의 저도 사람을 잘 본 것 같아서."
그런 비자금을 유하는 선뜻 내게 내어주었다. 당장 겉으로 사용할 수 있는 돈이 2천만 유로라서 그렇지, 자금 흐름을 들킬 각오를 하고 펑펑 쓰는 순간 저 모든 돈을 탕진하는 건 일도 아닐 것이다.
사실상 은유하의 모든 것이 담긴 물건이었다. 유성 그룹의 모든 데이터가 담긴 유일한 물건.
"망가지거나 잃어버리면 어떻게 하죠?"
"고객님이 제 인생 책임지셔야죠. 결혼이면 제일 좋고, 꼭 결혼은 아니더라도 저 한 명 인생은 건사하도록 해주세요. 이제는 내숭 떠실 필요 없으시잖아요? 아니면 저랑 혼인하시고 유성 물려받으실래요? 후후.."
은유하는 마도기어를 두드려 영상을 재생했다. 벌써 고화질로 클립을 따놓은 건지, 화질부터 소리까지 몹시나 생생했다.
- 나는 창염의 피닉스라고 한다.
"......목소리 까지 말 걸. 그거 원본이죠? 등대 이 놈이."
"지금 10시간째 듣고 있는 중이랍니다. 고객님, 목소리 바꿔주실래요? 저 이 목소리 ASMR로 들으면서 커피 마시게."
"변태같은 소리하지 마시고."
전세계에 피닉스의 남성형 목소리가 울려퍼지는 바람에 피닉스는 졸지에 이상한 인기를 얻고 말았다. 목소리만으로 임신을 할 것 같다나 뭐라나.
"저는 지금까지 숨겨온게 더 이해가 안 가는데요. 진작에 이런 목소리 내셨으면 저나 천가을이나 여러모로 마음을 더 빨리 열었을 걸요?"
"양쪽 다 전데요."
"같은 성을 사랑하기 까지에는 정말 많은 용기가 필요했답니다. 이제는 상관없지만요. 후후, 저는 맞춰드릴게요. 고객님 원하시는대로. 남자여도 좋고~ 여자여도 좋고."
"......어휴."
절로 한숨이 나온다. 세계 멸망이 다가와서 그런지, 다들 어프로치가 너무나도 적극적이었다.
이러다가 성주가 오기도 전에 내가 다른 히로인에게 빠져버리게 생겼다. 나는 박수를 쳐서 은유하의 정신을 되돌렸다.
"유성의 주인이 될 생각은 없어요. 유성의 주인은 당신이니까. 이건 고이 쓰고 돌려줄게요. 은유하 회장님."
"......어머나, 마지막 테스트였는데. 컨닝하신 거죠?"
"물론."
은유하가 미쳤다고 유성의 주인 자리를 내어주겠는가. 아무리 사랑하는 이라고 하더라도, 그게 주인공이었어도 은유하는 주인공을 꽉 붙잡고 살았다.
"그리고 피닉스도 다른 사람이랑 결혼하거나 그럴 일도 없고요."
"이미 한 번씩 다 결혼해서 애까지 낳아보셨으니까?"
"그런 말이 아니잖아요?"
방글거리며 독설을 내뱉는 것에 나는 반박을 하기가 어려웠다. 나는 회귀에 관하여 말할 타이밍을 놓쳤지만, 이미 은유하는 스스로 취합한 정보를 통해 내 정체를 완벽에 가깝게 추론해내고 있었다.
"세계를 구하고, 저랑 일곱 쌍둥이도 낳고, 그러셨던 분이 왜 또 과거로 돌아오신 걸까요. 아, 저 이유 드디어 알아낸 것 같은데."
은유하는 능글거리는 웃음으로 작게 속삭였다.
"당신을 세뇌에서 풀어주고 과거로 보내준 사람이 있죠? 그 사람을 위해서 모든 걸 걸고 이렇게 열심히 하시는 거고. 아, 남자일 거예요. 왜냐면 고객님은 여성체로 지내고 있으니까. 어머, 그러면 이거 설마 남자들의 뜨거운 사랑-"
"나 여자 좋아한다니까."
"여기 여자 하나 있습니다!"
은유하는 두 팔을 벌리며 활짝 웃었다. 결국 자신을 어필하려는 계책이었고, 나는 더이상 휘둘리지 않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 은유하에게 다가갔다.
"어, 어?"
와락.
나는 은유하를 끌어안았다. 허리를 휘감고, 가슴을 붙여, 정면에서 은유하와 눈을 맞췄다. 굽이 높은 슬리퍼를 신고 있는 덕분에 나는 은유하를 살짝만 올려다봐도 충분했다.
"자, 잠깐만요. 고객님? 이거 장난치는 거죠?"
"항상 고마워서요. 비즈니스 파트너로서도, 그리고 동료로서도. 다른 누구도 아닌 당신을 가장 먼저 동료로 삼으려고 했던 거, 제 최고의 선택이었어요."
두근, 두근. 가슴을 통해 은유하의 심장이 전해졌다. 은유하는 가슴이 콩닥거리는 그대로 내 허리 뒤로 손을 포개었다.
"저도 고객님을 상대로 직접 만나러 갔던 게 최고의 선택이었어요."
은유하는 공격에 공격으로 맞받아쳤다. 우리는 한참동안 서로의 허리를 휘감은 채 시선을 마주했다. 은유하는 단 한순간도 시선을 피하지 않았고, 먼저 움직이지도 않았다.
"후후, 천가을이었으면 바로 키스하려고 달려들었을 걸요?"
"...가을 상대였으면 이런 짓도 안했죠."
"그건 제가 먼저 안 덮칠 거라는 가정하에 말씀하시는 거죠? 와, 나쁘다. 죄질이 나쁩니다, 고객님. 이건 신고해야겠어요."
"무슨 신고?"
"혼인 신고."
"그 말 나올 줄 알았지."
나는 결국 내가 먼저 은유하에게서 떨어졌다. 밀고 당기기를 함에 있어서 은유하는 이런 식으로 결국 상대가 먼저 안달나게 하는데에는 도사였다.
"고객님. 천가을은 당신을 먼저 덮칠지 몰라도, 저는 고객님이 먼저 덮치신다면 언제든지 환영합니다."
"은유하 아가씨, 만약에 내가 전세계가 보는 앞에서 당신을 덮치면 그 때도 오케이 할 거예요?"
"그건 괴인형일 때? 아니면 청화 님일 때? 그도 아니면 고객님이 꽁꽁 숨기고 있는 남성형일 때?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데 말씀 좀 해주시겠어요?"
"남성형? 그게 무슨 소리일까."
"에이, 목소리 나왔으면 당연히 남성형 있는게 당연하죠. 카르나 님도 있는데 고객님이 설마 없을까봐요?"
"......."
남자 목소리가 있으니 남자 외형이 있을 것이다. 쉬운 추론이기는 했다. 지금은 괴인형이 남성형이라고 사기를 치고 있지만, 은유하는 별개의 인간 남자 모습이 있다는 추측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
"셋 중에 어느 경우냐 차이가 있어요. 후후, 한 가지 힌트 드리자면 하나는 얼마든지 환영합니다. 맞추시면 얼마든지 호응해드릴게요."
"전세계인들 앞에서 빼도박도 못하게 도장을 찍게 만드시겠다?"
"당연하죠."
"...그럼 일단 괴인형은 빼시고."
어느덧 시간이 되었다. 나는 회견장에 나타난 백세준을 가리켰다.
"괴인형, 피닉스의 임자는 따로 있기로 정했거든요."
* * *
22시 00분.
백세준은 하얗게 샌 머리로 마이크 앞에 섰다. 그의 얼굴은 이전보다 한껏 수척해보였고, 주름이 이전보다 깊게 패여져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대통령 백세준입니다.
백세준은 화두를 소개로 던졌다. 취임 이후 그럴싸한 취임식 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든 그가 전국에, 전세계에 자신의 존재감을 발휘했다.
[저는 오늘 오전, 다크 레기온의 간부 중 한 명으로 알려진 <피닉스>와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국민 여러분, 그리고 전 세계 많은 여러분이 저와 피닉스가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궁금해 하실 걸로 생각됩니다. 그...어디서부터 말씀을 드려야할 지 모르겠습니다만.]
백세준은 목이 타는 듯 시작부터 물을 한 모금 들이켰다. 긴장된 목소리가 차분히 가라앉았다.
[우선 피닉스, 그는 올해 4월 경 서울에 도착했습니다. 이유는 서울 관악산에 열린 차원문. 자신이 관리하던 화마룡의 차원문이 열리게 된 이유를 찾아 서울에 방문했습니다. 자신이 열지도 않은 화속성..의 차원문이 열리게 된 이유를 찾고자. 예. 본인의 말에 따르면, 서울 게이트는 자신이 연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시작부터 날조였다.
[그리하여 그는 서울에 잠입하여 동작 지하에 살던 서울 주민들을 발견, 한 소녀를 만나게 됩니다. 예. 그렇습니다. <비스트 테이머>, 청화. 난민으로 지하에 살던 소녀와 만나게 되었습니다. 차원문에 의해 괴수에게 쫓기던 소녀를 구해준 피닉스는 소녀를 이능력자로 각성시켰습니다. 그리고 마침 청화 양은 괴수를 조종하는 힘을 깨우쳤죠.]
갑자기 대본이 러브스토리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그러던 도중 피닉스는 서울 게이트의 범인을 알게되었습니다. 전 대통령, 선의철의 짓이었습니다. 그는 대전 연구시설에서 차원문을 연구하던 도중 관악산에서 실제 실험을 한 것입니다. ...조카인 이승형을 제물로 바치려 했으나, 다행히 여러분들이 아시는 바와 같이 이승형 군은 역경을 이겨내고 <화권>으로 각성했습니다.]
일반인의 손이 닿지 않는 감옥 안, 왼쪽 눈에 상처를 입은 한 남자가 격렬히 난리를 피우기 시작했다. 그는 외쳤다. 이건 날조라고. 하지만 그 누구도 그 말을 듣지 못했다.
[본래 다크 레기온의 간부로서 다른 작전을 준비중이던 피닉스는 청화 양을 돌보게 되었으며, 그 이후로는 여러분께서도 알다시피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청화 양은 피닉스에게 지구의 삶에 대해 알려주었고, 피닉스는 청화 양에 대한 감정과 다크 레기온의 간부로서의 사명 사이에서 혼란을 느꼈습니다.]
이미 사건을 알고 있는 관계자들은 더욱더 혼란을 느꼈다. 철저히 왜곡된 진실이 일국의 수장이 입에서 뻔뻔히 흘러나왔다. 오랫동안 선의철의 아래에서 비굴한 정치인을 연기해온 그는 철면피가 따로 없었다.
[그리고 그는 세계가 혼란스러워진 가운데, 결단을 내렸습니다. 자신을 이길 수 있는 강자가 있다면 다크 레기온 또한 이길 수 있을 것이라 판단했고, <설화령>께서 피닉스를 상대로 승리를 거머쥐었습니다. 우리는 다시 한 번 더 설화령의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피닉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착각하지마라. 나는 지구를 구하는게 아니다.
청화가 살아갈 세상을 지키려는 거다.
정의감 넘치는 여인과 사랑에 빠져 조직을 배반하고 정의의 편에 선 악당.
그것이 피닉스를 어떻게 세계의 일원으로 받아들이게 할 것인가에 대해 모두가 집단지성을 발휘하여 만들어낸 대지구 사기극의 주제였다.
"고객님, 저기 청화 부분 빼고 되나요? 아니다, 직접 불러주세요. 유하라고. 그거 녹음 따서 합성하게."
"......."
피닉스가 청화, 창염의 것임을 전세계에 공언하는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