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8화 〉1부 17장 6
백세준과 나의 백영도 회담은 전세계인의 이목을 끌었다.
나는 대놓고 창염의 피닉스임을 천명했고, 반드시 숨겨야할 일부 몇몇 정보들-싱크로, 유나, 이계신, 창염, 그리고 4차원 세계에서 온 나-를 제외하고 거의 모든 정보를 백세준에게 밝혔다.
물론 그 정보는 알려지지 않았다. 나와 백세준은 모래사장을 산책하며 대화를 나누는 장면을 연출했고, 등대는 멀찍이 떨어져서 우리의 대화가 들리지 않는 위치에서 카메라에 담았다.
백세준의 뒤에는 백희아가 그를 보좌하듯, 그리고 내 뒤에는 석하랑이 나를 연행하듯 차가운 얼굴로 걸어갔다.
나와 백세준은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는 척, 계속 입을 놀리며 잡다한 이야기를 나눴다.
"정녕 서울에 부동산이 건물 한 채 밖에 없단 말인가?"
"그렇다. 애초에 나는 재산 욕심이 없는 사람이다. 차 한 잔 마실 카페가 있는 건물에서 월세 대신 음료만 즐기면 그만이야."
"...거 참 소박하면서도 이상하구만."
"안분지족의 삶을 바라는 거지. 그리고 그 삶을 방해하는 제 일의 요소, 성주를 죽이는게 내 최고의 목표이고."
나는 잠시 걸음을 멈췄다. 이미 백희아를 통해 모든 정보를 전해들었겠지만, 나는 굳이 불꽃을 피워 설명을 하는 척 상황을 연출했다.
"그대에게만 미리 말하지만 성주가 온다고 해서 당장 지구가 멸망하지는 않을 거다. 석하랑은 말 그대로 지구를 지키는 신이 되었고, 석하랑이 한국을 떠나지 않는 이상 한국은 외계의 위협에서 영원히 무사할 거다."
"한국만 안전하게 살아남는 다는 건가?"
"지구가 통째로 날아가는 핵폭발이 일어나도 석하랑의 결계 속이면 안전하다는 얘기지. 대신 앞으로 해외 여행은 영원히 못하게 되겠지만."
"농담 한 번 살벌하군."
"농담 아닌데. 지구 전체가 파괴되어도 석하랑의 결계 속은 무사할 거다. 행성은 아니게 되더라도 지구 궤도를 떠도는 하나의 별이 되겠지. 인류가 어떤 식으로 진화할 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슬쩍 마도기어의 정보를 훑었다. 사람들은 나와 백세준의 대화를 두고 무슨 정보가 오고가고 있을까 궁금해했지만, 나는 굳이 그에게 장황한 설명은 하지 않았다. 할 필요도 없었다.
"오늘 회담 이후, 나는 로마로 간다. 대외적으로는 백영도에 갇힌 걸로 하고, 피닉스에 대한 관심은 미안하지만 그쪽이 받아주셔야겠어."
"히드라라는 정령을 각성시키기 위한 작전이라면 얼마든지."
"전세계인들이 물어보러 갈 거다. 각국 정상들의 전화가 빗발칠 거다."
"이참에 갑질 한 번 제대로 해보면 되겠군, 껄껄."
백세준은 호방하게 웃었다. 미래와는 달리 지도자가 된 그에게서 왠지 모르게 주인공의 모습이 조금씩 비쳤다. 역시 피는 물보다 진한 법이라고, 백세준은 백희아보다 더 백청화와 가까운 성격이었다.
"그래서 언제쯤 출발할 생각인가?"
"출발일은 내가 정하는게 아니야. 그대의 손녀가 정한다."
"...내일 아침입니다."
뒤에서 가만히 있던 백희아가 입을 열었다. 그는 뚱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며 뭔가 할 말이 있어보였다.
"희아야. 하고 싶으면 말하려무나. 설화령께서 그...청각차단? 그걸 해주시니 우리의 대화는 방송으로 전해지지 않아."
"입모양을 독순술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 같은데…. 네, 할아버지. 잠깐 양해를 구할게요. 피닉스 씨. 왜 남자 목소리예요?"
"내 맘이지."
백희아의 눈썹이 찌푸려졌다. 하지만 나는 괴인형은 남성형이라는 걸 바꿀 생각이 전혀 없었다.
"애초에 이런 꼴로 여자 목소리를 내는게 가당키나 하다고 생각하나?"
"귀엽다고 생각하는데요."
"귀여운 건 인정하지. 하지만 그건 인간형이 되었을 때의 얘기야."
나는 다시금 네트워크의 반응을 살폈다. 집행관은 다크 레기온의 진의를 추궁하고 있는 걸로 보였지만, 실상은 언제나 그러하듯 신변잡기와 중요 일정이 뒤섞이듯 화제로 오다녔다.
"......."
그리고 그걸 적절히 커트해줬어야 할 김지화는 현재 촬영줄이었고, 석하랑은 차가운 얼굴로 아무 말도 없었다. 정정, 삐친 얼굴이었다.
[나는 네 목소리 들으려고 그 난리를 피웠는데에에에에에에!!]
석하랑은 마력으로 시끄럽게 굴었다. 마력 통만 100으로 늘었을 뿐 실제 전투력은 카르나나 샤오린보다 한끗발 아래면서, 그 1 늘어난 마력수치만으로 나를 힘겹게 만들었다.
"...꼭 목소리가 사람의 정체성을 정하는 것은 아니지."
"그럼 자네, 남자로도 변신이 가능한가?"
"가능은 하지만 굳이 할 필요는 없지. 더 예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변할 수 있는데 굳이 남성형을 취할 이유는 없지 않나. ...라고 말하고 싶지만 유감이군. 이게 내 남성체다."
백청화로 사느니 창염으로, 그리고 피닉스로 사는게 낫다.
"그래서 또 궁금한 게 있어보이는 얼굴인데."
"혹시 자네, 한국 국적을 만들 생각은 없나?"
"이미 청화로도 등록은 해놨는데."
"아니. 남자로도 말이야. 신분증이 필요할 거 아닌가?"
"그건 위조하면 되지."
"아주 대놓고 위조한다고 말하는 군."
"빌런이니까."
"이해하지. 허허."
백세준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덕분에 네트워크는 지금 그가 왜 웃었는 가에 대해서 온갖 전문가들이 나와 뇌피셜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럼 자네. 내가 시선을 끌어주는 것 말고 또 도와줄 건 없는가?"
"없어. 그냥 정치적인 문제만 해결해주면 돼. 상담할 거 있으면 백희아에게 이야기하고. 정계와 협회의 문제에 있어서는 백희아의 선택이 곧 내 선택일 거다. 큰 이견이 없는 이상."
"...이제는 예전처럼 그런 짓 안 하니까 걱정마요."
"그럼 됐고. 그럼 내가 질문하지. 당신, 원래 당신의 손자가 어디에 사는 지 혹시 알고 있나?"
내 질문에 백세준과 백희아가 동시에 굳었다. 나야 백청화라는 이름을 미래에서부터 알고 왔지만, 백세준은 이름조차 지어주지 못하고 백청화를 보지도 못하고 떠나보내야했다.
"그건 알고 하는 질문인가, 아니면 몰라서 내게 묻는 건가?"
"둘 다. 미래는 알지만 지금은 몰라."
"나도 모르네. 그저…."
백세준은 석하랑의 눈치를 봤다.
"...설화령께서 어린 시절을 함께 보냈다는 것 빼고는 아는 바가 없어."
"헐."
마력으로 빽빽 소리지르던 석하랑이 처음으로 육성을 내었다.
"금마가 진짜로?!"
"놀라지 마라. 네가 놀라면 그림이 다 망가져."
"진정하세요, 설화령. 당신은 피닉스에게서 승리한 최강의 이능력자입니다. 조금더 위엄있는 얼굴과 말투로 이야기를 해주세요."
"......."
석하랑은 백희아에게 혼났다. 눈썹이 살짝 비틀린게 속으로 궁시렁대고 있는게 틀림없다.
"...그래서 그 꼬마애가 대통령님 친손자라는게 사실입니까?"
"평소대로 말해라. 표정은 굳힌 채로."
"그래서 맨날 내랑 머리 쥐어뜯던 그 걸배이가 손자분이라고?"
"덧붙여서 화속성 S급 이능력자기도 했지. 평양 사태에 투입되었던 S급 이능력자 중 한 명이기도 했고."
셋의 표정이 경악과 분노와 공포로 물들었다. 설정 상, 한국에는 두 명의 화속성 S급 이능력자가 있었다. 한 명은 익히 잘 알려진 화권. 그리고 또 한 명이 미래의 <신관>.
"...내 손자가 <무궁화 보이>이였다고?"
무궁화 보이.
선의철표 국뽕열차의 첫 희생양.
"얼굴에 무궁화 가면을 달고 다니던 그 사람이요? 선의철의 희생양이라고 불리던 그 자?"
"청색 스판 슈트에 태극기가 그려진 망토 달고 얼굴에 무궁화 꽃잎 달고 있는 소년계 히어로라면 그 당사자가 맞다."
주인공이 기를 쓰고 과거를 숨기려 했던 이유는 다른게 아니라 자신의 과거 정체가 쪽팔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히어로 활동을 한 이유도 상당히 부끄러운 이유였다.
"자, 잠깐만. 금마 내랑 동갑이다! 근데 무궁화맨은, 어, 2009년부터 활동했다고!"
"만약에 업적을 달았으면 <10살에 A급 곰을 잡은> 타이틀을 달았을 거다. 10살 때부터 키가 동년배들보다 3살 정도는 성장이 빨랐지."
백청화는 주인공답게 어려서부터 S급으로 각성했다. 하지만 선의철에 의해 각성 등록도 하기 전에 선의철의 사냥개이자 프로파간다용 히어로로 키워졌고, 평양 사태가 터지면서 MIA 처리된 존재였다.
그리하여 미국으로 날아간 그는 자신의 이름을 노골적으로, 선의철 본인만 알아볼 수 있도록 개명했다.
시안(Cyan). '청'색과.
화이트(White). '백'색의.
히비스커스(Hibiscus). 무궁'화'.
'정작 선의철은 몰랐지만.'
히비스커스라는 무궁화의 학명까지 선의철이 알 턱이 있던가. 결국 주인공의 활약으로 선의철은 감옥에 끌려가던 마지막에 가서야 주인공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게된다.
'이제는 별 의미없는 이야기지만.'
백청화, 미국에 있는 시안 따위 내게는 중요치 않았다. 오히려 위험한 존재였다. 그래서 나는 미리 경고를 남겼다.
"괜히 찾으려고 하는 건 좋지 않다. 그도 미국에서 꽤나 잘 살고 있으니. 애초에 정의로운 인물이니 본인 스스로 때가 되면 나올 거야. 만약 괜히 미리 찾으려 했다가 아지다하카나 히드라, 펜릴의 눈에 들면 어쩌겠나? 괴인이 되거나 살해당할 수도 있는 거지."
"자네는 그의 도움으로 과거로 왔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왜 그를 찾지 않는 거지?"
"......."
창염의 몸으로 만났다가 행여나 반해버린다거나 하면 큰 문제가 발생하니까. 나는 뒷말을 삼키고 대답을 회피하는 것으로 답했다. 그리고 묵묵부답이라는 내 대답은 이상한 오해를 불러일으키에 충분했다.
"헐."
"에이, 설마."
"잠깐."
나는 분명히 밝혔다.
"나는 여자를 좋아하지 남자를 좋아하지 않는다."
"......다행이네요. 오해할 뻔."
"다행은 뭐고, 다행이."
"......희아가 그렇게 혼인관련법을 건드리려던 이유가 있었군."
"아니라고."
카메라만 없었으면 바로 내 몸을 바꾸어 커밍아웃을 선언했을 것이다. 카메라만 없었다면.
"그래서 여자 좋아하는 우리 피닉스 군. 아니 양? 일단 여러가지를 알려줘서 고맙네. 그리고 내 손자에 대한 것도 알려줘서 고맙고. 하지만."
백세준은 백희아를 손으로 가리켰다.
"나는 손녀딸을 가진 노인이야. 백청화, 그가 모든 진실을 알고 내게 온다면 나는 그를 얼마든지 환영하겠지만 내 손자는 희아 한 명 뿐일세."
"할아버지."
백희아의 목소리가 떨렸다. 원작과 똑같은 말을 내뱉기는 했지만, 세뇌되어 성희롱 범죄를 저질렀던 이가 일국의 수장이 되어 이런 말을 하니 느낌이 사뭇 달랐다.
"그렇게 되어서 설령 천년 백가의 대가 끊어진다고 해도?"
"미국에서 잘 살고 있다고 했잖나. 후후, 그럼 된 게야. 조상님들 볼 면목은 없지만, 희아를 만났으니 다 용서해 주시겠지. 껄껄."
여러모로 대단한 사람이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의 전형을 눈으로 직접 본 것만 같았다. 아니면 원래 이런 사람이었는데 선의철의 영향을 받아서 그리되었다거나.
어느쪽이든, 그는 나와 야합을 맺었다. 세계 평화라는 공통의 목적을 두고, 다행히 나는 최고 권력자의 암묵적 지지를 받는데 성공했다.
"그러면 희아야. 돌아가면 멕시코로 갈 준비를 하자꾸나. 외교 문제는 신경쓰지말렴. 내가 알아서 처리할테니."
"...그래주시면 감사하죠. 그럼 저는 명단 구성을 다시금 살펴볼게요."
"내는 집 지키면 되죠?"
각자의 역할이 모두 정해졌다. 영상의 끝, 나는 백세준이 내민 손을 악수하는 것으로 마무리 지었다. 이제 피닉스에 대한 숱한 이슈는 모두 백세준에게 넘어갈 터.
"모처럼 왔는데 식사라도 하고 가지."
"밥은 먹을 수 있나...?"
나는 김지화에게 신호를 보냈다. 영상 중계는 끝이났고, 나는 손뼉을 짝 치는 것으로 몸을 불살랐다.
화륵.
나는 다시 창염의 몸으로 돌아와, 사제복을 정돈했다.
"이러면 얼마든지 먹을 수 있죠?"
"...청화가 피닉스라는 걸 직접 보니 놀랍기야 한다만, 갑자기 존대?"
"원래 그런 거예요. 푸흐흐."
"식사라.... 이보세요, 피닉스 씨."
백희아는 '씨'라는 호칭까지 붙이며 인상을 찌푸렸다.
"여기 제 섬인데요."
"불만있으면 쫓아내시던가요."
나는 백영도를 손에 넣었다.
* * *
그 날 저녁.
언제나처럼 기습적인 기자회견 예고를 던진 백희아의 선언에 사람들은 또 온갖 추측을 늘어놓았다.
과연 다크 레기온의 간부, 창염의 피닉스와 백세준은 어떤 대화를 주고받았을 것인가.
어쩌면, 정말 기적적인 확률로 악의 조직 간부가 사랑과 정의에 눈을 떠서 세계를 구하려는 길을 걸으려 하는 것인가?
모두의 희망회로가 부푼 가운데, 드디어 백희아가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청화 양을 위시한 청화단 전원. 멕시코로 갑니다."
이 시국에?
모두가 당황했지만, 백희아는 고개를 쌩 돌리고 떠나버렸다.
그리고 나 또한, 로마로 떠날 준비를 모두 마쳤다.
내일.
나는 히드라를 잡으러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