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창염의 피닉스-393화 (393/1,497)

〈 393화 〉1부 17장 1

8월 28일.

아지다하카 게이트.

12개의 도시에 나타난 아지다하카의 분신은 각각의 도시를 지키던 12명의 S급 히어로를 죽이고, 수 조에 이르는 재산 피해를 일으켰다. 12마룡 사태는 다행히 인근에 있던 히어로들의 헌신과 노력 끝에 금방 제압되었다.

8월 29일.

원탁 히어로들의 활약을 통해 아지다하카가 차원문으로 제물을 삼은 12명의 히어로들이 어째서 괴인이 되었는지 파악되었다.

몸.

그들은 아지다하카의 분신이 주는 쾌락에 홀려 괴인이 되고 말았다. 선량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던 그들이 아지다하카의 분신을 상대로 하는 온갖 도착적인 플레이가 담긴 영상은 네트워크 전역에 뿌려졌다.

이승형과 가루라의 섹스 스캔들 이상으로 사람들은 충격과 공포에 빠졌다. 둘의 행위는 서로에 대한 사랑과 신뢰와 믿음이 생겨나는 연인간의 행위였다면, 아지다하카 스캔들로 인한 히어로들의 행위는 육욕에 의해 인간이 타락하는 과정을 전형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사람들은 아지다하카 스캔들의 영상을 보고 상반된 반응을 보였다.

아무리 그래도 히어로라는 자들이 창녀같은 아지다하카에게 혹해서 괴인으로 타락할 수 있느냐는 입장이 있는가 하면.

아지다하카의 몸을 보고 누구나 혹하게 될 것이며 히어로들이 타락하는 것도 이해를 할 수 있겠다는 입장이 있었다.

후자에 해당하는 이들은 생각했다.

나도 아지다하카의 괴인이 되면 아지다하카를 상대로 성욕을 마음껏 발산할 수 있지 않을까?

아지다하카가 인간들을 상대로 타락의 씨앗을 뿌렸고, 인간들의 마음속에는 삿된 생각이 조금씩 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8월 30일.

본래 서울에서 진행되기로 했던 원탁 회의는 무기한 연기되었다.

전세계적으로 혼란이 일어나는 상황에서 원탁이 한 곳에 모이기는 힘들었고, 원탁들은 각자의 위치에서 아지다하카에 타락한 괴인들을 처리해야만 했다. 그리고 원탁 회의에서 어떤 의제를 밝힐 지 추측하던 전문가들이 입을 모아 하나의 의견을 모았다.

- 혹시 아지다하카가 선수를 친게 아닌가?

다크 레기온을 상대로 전면전을 펼치겠다는 정보가 어디선가 새어버려서, 아지다하카가 그걸 미리 알고 전세계에 자신에 대한 이슈를 일으킨 것이 아닌가?

원탁의 입에서 다크 레기온과 싸우겠다고 말을 하기도 전에, 아지다하카는 고작 이틀의 시간만에 여러모로 전세계에 충격적인 데뷔를 하는데 성공했다. 세간은 다크 레기온이라는 이름으로 북적거렸고, 사람들은 다크 레기온의 하수인이 누군지 찾아나서기 시작했다.

어떤 히어로가 사실은 아지다하카의 치맛폭에 먹혀서 타락했다고 하더라.

어떤 이능력자는 각성할 때부터 아지다하카의 힘으로 각성을 했다고 하더라.

온갖 낭설과 유언비어가 확산되는 가운데, 다크 레기온의 또다른 존재들-간부진에 대하여 추측을 하기 시작했다. 이미 주요 관계자들은 간부들의 존재를 알고 있었고, 어디선가 그 정보가 새어나가버렸다.

절풍의 펜릴.

지륜의 히드라.

그리고 창염의 피닉스.

당연히 <피닉스>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던 SS급 빌런이 다크 레기온의 일원이자 간부가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한국은 피닉스의 덕을 보고 있는 입장으로서, 국제사회의 비난 속에 난처한 입장에 처했다.

그리고 8월 31일.

서울은 비록 원탁 전원 방문이라는 초유의 이벤트가 날아갔으나, 은하대학교의 개교식 겸 첫 입학생인 101명에 대한 입학식을 시작하였다.

* * *

"후우...."

붉은 머리의 소녀는 숨을 고르며 주변을 살폈다. 행여나 주변에 자신을 알아채는 누군가가 있을까봐 전전긍긍했다. 안그래도 붉었던 머리를 더욱 화려한 붉은 색으로 염색을 했고, 옷도 이전과 달리 화려한 복장으로 정체를 숨겼다.

슈리 정. 명찰에는 소녀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슈리는 명찰 뒤에 적혀진 약도를 보며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저기요?"

그리고 슈리의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갈색으로 머리를 염색한 여고생 한 명이 슈리에게 앞을 가리켰다.

"입학하시는 분이세요?"

"...그런데 왜?"

"저도 어디로 가는지 몰라서 물어보려고요."

슈리는 상대의 명찰을 확인했다.

이유나.

"은하관이라는 곳으로 가야하는데 혹시 어딘지 아세요?"

"...흠흠, 기다려봐."

슈리는 헛기침을 하며 주변을 살폈다. 안그래도 지금 슈리가 찾고 있던 곳이 은하관이라고 했다. 하지만 아직 글자를 제대로 읽을 수 없는 몸이라, 건물은 잘 보이기는 해도 어디에 은하관이 있는지 잘 알 수 없었다.

"어, 그러니까.... 금색으로 한자를 써놓은 곳이라고 했는데...."

"저기야. 따라와."

슈리는 자신만만한 얼굴로 정확히 은하관을 가리켰다. 유나는 싱긋 웃으며 그 뒤를 따라 걸었다.

"감사해요. 제가 길을 잘 못찾아서."

"별 거 아냐. 흥."

슈리는 유나의 방글거리는 모습에서 잠깐 소름이 돋았다. 집시로 떠돌면서 길러진 눈치가 경종을 울리고 있었다. 유나의 발걸음은 절대로 긴가민가하며 자신을 따라오는게 아니었다. 처음부터 은하관의 위치를 알고있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얘 혹시 일부러...?'

자신이 길을 헤메고 있는 걸 넌지시 도와주려고 한 걸까? 유나는 손에서 수첩같은 것을 꺼내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거 뭐야?"

"수능 필수 영단어요."

"...? 영단어? 그런 걸 뭐하러 써? 사어나 다름없는데."

"이거 무조건 수능에 나오는 단어란 말이에요."

슈리는 유나가 말하는 수능이라는 것을 입에 머금었다. 혹시 은하대학교의 입학 시험같은 것인가? 한국이 영어가 제2 외국어라고 하더라도, 이런 일상에서 쓰지도 않는 단어들로 2차 시험을 본다는 말인가.

"저기-"

찌릿.

두 소녀는 동시에 무언가를 느껴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둘은 서북쪽의 하늘로 고개를 돌렸다.

"저거...?"

"<피닉스>네요."

괴인, 피닉스. 다크 레기온의 간부로 추정되는 인물. 그가 푸른 날개를 펼친 채 여의도 63빌딩 꼭대기 위를 날고 있었다.

"그럼 들어가죠. 입학식에 늦겠어요."

"자, 잠깐만! 저거 빌런이잖아! 괴물이라고!"

"히어로분들이 대처하지 않을까요?"

유나는 망설임없이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슈리는 전전긍긍하며 일단 유나를 따라갔다. 죽을 때 죽더라도, 일단 입학식에는 참가해야만 했다.

그리고 입학식이 끝난 다음.

슈리는 피닉스의 패전 소식을 전해들었다.

* * *

서울 상공, 푸른 불꽃의 날개를 한 괴인이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검은 갑주를 입은 괴인은 한 차례 서울을 한 번 훑더니, 손을 아래로 내리그었다.

화륵.

푸른 불꽃의 날개에서 깃털이 흩날렸다. 깃털은 곧 불꽃이 되었고, 모든 것을 태워버릴 기세로 지상을 향해 비처럼 떨어졌다.

창염의 피닉스.

다크 레기온의 간부로 추정되던 괴인은 제 정체가 발각되자 서울 상공 한복판에서 모습을 드러내 지상을 공격했다. 이대로 있다가는 수초도 지나지 않아 서울은 불바다가 되기 일보직전이었다.

그리고 불꽃이 떨어지기 직전.

쏴아아-----!!

한강 물이 용솟음치며 불꽃의 깃털을 전부 집어삼켰다. 거대한 수증기가 일어나며 낮게 수면 위에 깔리기 시작했고, 물보라 사이로 하얀 선녀 복장의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설화령>.

설화령은 피닉스를 향해 손을 뻗었고, 한강의 물줄기가 레일건처럼 피닉스에게 쏘아졌다. 피닉스는 날개를 펼쳐 하늘로 날아올랐으나, 물줄기는 빛보다도 빠르게 날개를 꿰뚫었다.

피닉스의 초격은 막혔다.

설화령의 초격은 먹혔다.

서울 게이트 이후, 여의도에서 마주친 둘은 넉 달 사이에 힘의 균형이 확연히 뒤집혀버렸다. 피닉스는 설화령을 한참 동안이나 내려다보았고, 설화령은 손을 피닉스에게 들어올렸다.

까닥, 까닥.

석하랑은 피닉스를 도발했다. 그 손짓에는 여유가 흘러넘쳤고, 피닉스는 고개를 좌우로 꺾으며 싸울 준비를 마쳤다.

그리고 피닉스는 북쪽을 향해 도주했다.

석하랑도 그 뒤를 쫓아 얼음의 나비 날개를 펼쳐 뒤를 쫓았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평양.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피닉스>는 평양 상공에서 원탁의 히어로, <설화령>에게 패배하였다.

* * *

<8월 31일 오후 2시. 백영도.>

"실제로 지지 않았는데 패배한 걸로 되니까 기분이 좀 그런데요."

"미안하다. 상황이 이렇게 되어버린 걸."

석하랑은 머리를 긁적거리며 무안해했다. 나는 유배지에 갇힌 죄인처럼 백영도에 마련된 얼음의 결계속에 갇혔다. 사실 부수고 나갈 수 있지만 나가선 안 될 일이었다.

<피닉스>는 설화령에게 패배하여 인류에게 희망을 줘야하기 때문에.

정확히는 다크 레기온의 간부라고 하더라도, 원탁의 히어로가 나서면 이길 수 있다는 믿음을 주기 위한 사기극이었다.

피닉스와 한국 협회, 정부가 모종의 유착관계가 있는 것 아니냐, 그리고 선의철의 몰락 뒤에는 다크 레기온의 마수가 뻗쳐 있는게 아니냐 하는 의혹을 잠재우기 위한 자작극.

주연은 나와 석하랑이었고, 각본은 은유하와 백희아를 중심으로 한 정재계 핵심 요인들이 만들었다. 그만큼 전세계의 상황은 혼란스러웠고, 혼란을 잠재울만한 이슈가 필요했다.

"패배하는 척 하는 것도 힘드네요."

"구라. 니 거의 질 뻔 했던거 알제?"

"그거야 가을이 흑염룡을 타고 장난을 쳐서 그런 거 아녜요."

"그 언니야, 연기가 아니라 진심으로 니 조질라카던데. 내 착각 아니제?"

<피닉스>, 그리고 <비스트 테이머> 청화.

둘 사이의 연결고리까지 완전히 끊어내기 위해, 청화로 변신한 가을이 흑염룡까지 동원해 1:2의 전투를 연출했다. 물론 실제로 도움이 되었다기 보다는 불리한 순간에 석하랑을 구하는 정도였지만, 다행히 사람들은 잘 속아넘어갔다.

"지금까지 열심히 세계 평화를 위해 힘쓴 보람이 있네요. '역시 청화는 그럴 줄 알앗어!'. 다들 속고 있죠."

"이미지 메이킹 더럽게 무섭네."

"수상하게 착하게 생긴 사람보다, 또라이같지만 정의로운 신념을 가진 존재가 이상하게 믿음직스러워 보일 때가 있죠."

전자는 아지다하카에 의해 제물이 된 12괴인이었고, 후자는 단연 청화였다. 가루라에 의해 간접 스캔들을 일으키기는 했지만, 청화는 여전히 괴수를 반드시 퇴치하려고 드는 정의로운 히어로의 이미지가 강했다.

"그래서 백희아, 은유하 두 아가씨가 청화를 성녀로 만들려고 하는 거 아녜요. 혹시 어렸을 때 그런 거 못봤어요? 적 간부 중에 하나가 아군 진영으로 들어오는 거. 흔한 클리셰라고 생각하는데요."

"거의 반쯤은 사실 아이가?"

"그렇기는 하죠. 이제 모든 건 가을의 연기에 달려있지만."

"...청화의 간곡한 설득 끝에, 인류의 편에 선 다크 레기온의 간부 피닉스라. 좋네. 지금까지 청화가 피닉스를 설득하려고 인간 세상에 대해 알려주려고 했다고 뻥칠 수도 있고."

광검마저 죽인 괴물을 인간들과 공존하는 존재로 탈바꿈시킨 성녀, 청화. 졸지에 청화의 기행들은 피닉스를 설득하고 악행을 그만두게 하려는 헌신과 노력으로 바뀌고 말았다.

가장 대표적으로 6민트 사태.

청화가 피닉스에게 민트초코를 권해봤다가 실패한 케이스라고, 외계에서온 세계정복 조직의 간부도 민트초코는 거른다며 요상한 설득력을 얻고 말았다.

"그리고 이제 설화령에게 패배까지 했으니, 피닉스가 딱 심경의 변화를 일으키기에도 좋죠. '나를 1:1로 이긴 사람은 네가 처음이야!' 푸흐흐, 그래서 어때요? 지구 최강이 될 것 같은 기분은."

"...아직까지는 모르겠는데."

석하랑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냥 이능력 쓰는게 좀 더 그럴싸해졌다?"

"이제 당신 마음만 먹으면 전 지구를 물에 잠기게 할 수도 있는데요?"

"내가 그런 맘 안 먹을 거니까 신경 끄라. 니는 니 할 일이나 똑바로 하고."

"할 일이라고는 하나밖에 없는 걸요."

나는 사방을 가리켰다. 백영도의 주변에 펼쳐진 물의 결계는 그 누구도 들어올 수 없는 불가침의 결계가 되었다. 이제 이 섬을 자유롭게 오다닐 수 있는 존재는 석하랑 뿐이고, 석하랑의 허가 없이는 그 누구도 섬을 드나들 수 없게 되었다.

"여기서 대기하고 있는 거?"

겉으로는.

"니, 지하에 얼음 통로 뚫어놓은 걸로 너무 자주 다니지 마라. 아니면 확실히 청화 모습으로 지내던가. 괜히 괴인화해서 날뛰지 말고. 암만 그래도 바로 설득 되는 건 좀 아니다 아이가."

"그렇긴 한데, 필요하면 나서야죠. 애초에 이런 사태를 대비해서 청화와 피닉스를 분리시켜놓은 거니까."

그리고 피닉스가 싸울 곳이 있다면, 그건 오로지 결계 안에서의 싸움이 될 것이다. 간부를 가두고 정령으로 각성시키기 위한 전장.

"그런 건 어때요? 돔이 좌우로 열리고 피닉스가 하늘로 날아오르는 거. 청화가 '창염개진!'하고 외치면 피닉스가 백영도에서 뛰쳐나와서 청화의 위로 나타나는 거죠."

"니 의견 치고는 썩 괜찮은 것 같은데."

"히카리 의견이예요."

나는 두 팔을 벌리며 장난스레 웃었다.

"최종병기 피닉스! 어때요?"

"그래봐야 싱크로 못하면 성주한테 발리는 건 매한가지 아이가."

"......."

2020년 8월 31일.

나는 창염과의 싱크로를 위해, 백영도에 <피닉스>를 봉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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