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창염의 피닉스-391화 (391/1,497)

〈 391화 〉1부 16장 26

아침이 밝았다. 2박 3일간의 바캉스 겸 휴가는 히어로들과 헌터들, 인간과 사도들, 그리고 일반인과 정령들이 한 자리에 모여 서로에 대해 알아가고 친해지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나는 그 모든 이들이 피로에 찌들어있는 걸 한 눈에 확인할 수 있었다. 그들은 밤이라도 지새운 듯 모두가 퀭한 얼굴이었다.

"다들 왜 그래요?"

"......."

모두가 대답을 회피했다. 내가 밤에 잠을 자는 사이 뭔가 다들 심야에 몰래 뭔가 저지르려다가 실패한 것 같기도했다. 나야 아이스크림 케이크 배달부와 모종의 일이 터질뻔 했다는 걸 제외하면 그닥 문제는 없었지만, 설마 바깥에도 그러했을까 싶었다.

'그랬을 수도 있지.'

내가 결계까지 치고 잠든 사이, 저마다 간밤 사이에 각자 휴가를 즐기거나 파트너와 거사를 치른 모양이었다.

김지화는 유이신과 대놓고 팔짱을 낀 채 서로 달달 볶고 있었으며, 청화단 간부진들은 모두 술에 절어있는 퀭한 얼굴이었고, 히어로들도 딱히 다를 건 없어보였다. 이승형의 마력을 배 한가득 가지고 있는 가루라라거나, 이제는 거대한 블랙 드래곤에서 소녀가 되어버린 흑염룡이라거나.

나도 첫 날에는 창염과 긴 밤을 지새웠으니 딱히 뭐라 할 말은 없었다. 늦저녁에 불러낸 김펜릴을 상대로 어떻게 미리 정령으로 각성을 시켜볼려다가 실패하기는 했지만, 덕분에 내 정신도 또렷해지고 마음가짐도 달라질 수 있었다.

"그럼 다들 주목."

나는 모두의 이목을 끌었다. 누군가는 피곤한 얼굴로, 누군가는 원하던 바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듯한 짜증어린 얼굴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나는 헛기침과 함께 하늘을 가리켰다.

"오늘까지 휴가 즐기시느라 고생 많으셨어요. 이런 멋진 섬을 빌려준 백희아 아가씨에게 감사를. 그리고 각자 위치로 돌아가면 앞으로 벌어질 거대한 흐름에 주의하도록 하세요. 이제부터는 전면전입니다."

오늘부터 원탁의 히어로들이 하나둘 한국을 방문할 것이다. 서울은 그들을 맞이할 준비에 여념이 없었고, 회의 장소는 다른 곳도 아닌 여의도 국회의사당.

사실상 우리 아지트 바로 옆에 13명의 원탁이 모이는 셈이었다. 여러모로 긴장도 되고 걱정도 되기는 했지만, 어디까지나 상대는 다크 레기온.

상대를 죽인다는 가정하에 카르나 이상의 실력을 가진 간부, 절풍의 펜릴.

전세계에 차원문을 뿌리며 이능력자들을 이미 괴인으로 만든 간부, 마암룡 아지다하카.

어느 곳에 숨어있는지 아직까지도 그 흔적이 발견되지 않은 베일에 쌓인 간부, 지륜의 히드라.

그러니 지금부터는 전면전이다.

원탁 전원이 모인 성명을 통해 전세계인들이 세계의 이면에 관한 대부분의 진실을 알게될 터. 나는 사람들의 욕망보다 세계 멸망을 막고자 하는 사람들의 생존 본능과 연대에 대하여 희망을 걸기로 했다.

그 모든 신뢰를 위해, 나는 밤 사이 고민에 고민을 한 끝에 내가 어떤 존재인지 밝히고자 했다. 왜 간부 중에 창염의 피닉스는 빠졌는지, 그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미래에서 넘어와 창염의 피닉스라는 간부에 빙의한 인간.

그런 설정이라면 다른 이들도 어느정도 수긍할 수 있지 않을까. 처음부터 나는 이 휴가가 잡힌 순간부터, 모두에게 내 진실을 알려주려고 마음 먹었다.

모두의 이목이 내 입에 쏠렸다.

"저는-"

그리고 그 얘기를 하려던 순간.

에에에에엥------

모두의 마도기어, 스마트 워치 등에서 차원문 경보가 울리기 시작했다.

장소.

전 세계 곳곳.

열린 차원문의 갯수는 한 둘이 아니었다.

* * *

"오호호호!"

차원문 경보가 울리고 있는 가운데, 흑발의 여인은 허공에 떠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깔깔 웃었다. 여인이 위치한 장소는 다름 아닌 미국, 뉴욕 상공 한 가운데.

"우매한 것들아, 나를 우러러 보아라!"

사람들은 상공에 나타난 검은 여인을 올려다보며 혼란에 빠졌다. 흑발의 여인은 청초한 외모를 하고 있으면서, 네 발로 엎드린 벌거벗은 남자의 등에 다리를 꼬고 앉아 있었다.

사람들은 여인의 아름다운 외모에 놀랐고, 여인으로부터 느껴지는 마력 반응-S급에 한 번 더 놀랐고, 검은 시스루 드레스의 여인이 엉덩이를 깔고 앉은 남자에의 모습에 한 번 더 놀랐다.

"저 남자, 발기했어?!"

남자는 가면이 씌워진 채 아래를 향해 물건을 꼿꼿이 세우고 있었다. 여인은 검은 부채를 접어 남자의 엉덩이를 찰싹 내리쳤다. 그 소리에 모두의 이목이 다시 여인에게로 집중했다.

"나의 이름은 <아지다하카>! 너희 우매한 인간들을 다스릴 다크 레기온의 주인!"

아지다하카 하늘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리고 뉴욕의 주민들은 아지다하카의 손이 이끄는 대로 남자가 떠오르는 것을 멍하니 쳐다봤다. 도대체 저 남자의 정체는 무엇인가.

"아--!!"

누군가가 남자의 정체를 깨달았다.

"<라이트닝>?!"

미국의 S급 히어로. 뉴욕의 신사. 만화에서 뛰쳐나온 것만 같은 로맨틱한 존재로 뭇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던 뉴욕의 수호자. 그가 아지다하카의 어둠에 제압당해, 아무 힘도 못쓰고 결박당한 채 발버둥을 치고 있었다.

"서, 설마?"

그리고 사람들은 인도 상공에서 있었던 연쇄 차원문 사태-<마하트마 게이트>를 상기했다. 히어로 협회에 등록되어있던 정의로운 이들이 사실은 타락한 이들의 하수인이었다는 것.

거기에 그 찬양의 대상인 빌런, 아지다하카는 이능력자를 매개체로 하여 차원문을 연다는 것.

"오호호호!"

콰득!

아지다하카가 손톱을 세워 라이트닝의 심장을 찔렀다. 붉은 피가 분수처럼 치솟았고, 아지하카나는 손을 타고 흘러니래닌 피를 요염히 핥으며 세계를 향해 선포했다.

"다크 레기온의 힘을 톡톡히 보아라!"

콰득.

아지다하카가 라이트닝의 심장을 움켜쥐며 터뜨렸다. 뉴욕 상공에 피분수가 터졌고, 사망한 라이트닝의 몸 여기저기에서 검보랏빛 꽃이 살을 뚫고 피어올랐다. 피안화처럼 꽃잎이 흐드러져있지만, 보는 이로 하여금 정신을 아찔하게 만드는 불운한 기운이 넘실거렸다.

"그리고 멸망하라, 지구인들아! 아하하!"

아지다하카는 검은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라이트닝의 전신이 검붉은 꽃으로 뒤덮인 순간.

푸하---악!!

허공에서 세로로 균열이 길게 찢어지며 무언가가 고개를 들이밀었다. 사람들은 거대한 괴물의 얼굴에 비명을 질렀다.

"꺄아아아아악!!"

스마트 워치가 경고음을 내뱉기 시작했다. 그 경고음은 하나가 아니었다.

뉴욕, 베이징, 파리, 상투페테르부르크, 리우데자네이루 등.

전 세계, 유명한 S급 남자 히어로들이 기거하고 있던 도시 곳곳에서 아지다하카가 부른 암마룡이 검붉은 꽃다발을 이빨로 깨물어 삼켰다.

전체, 12곳.

전세계에 무려 12곳이나 되는 차원문이 발생했다.

* * *

휴가는 강제로 끝났다.

차원문 발생으로부터 불과 30분.

모든 히어로들과 그 관계자들이 빠르게 각자의 위치로 돌아갔다. 그리고 나를 중심으로 모인 청화단은 내가 침실로 쓰던 강녕전에 모여 작전 회의에 들어갔다. 이 곳은 전세계에 열린 차원문에 대처하는 베이스 캠프가 되었다.

"하늘성, 소식 들어온 거 있어요?"

"그대로일세. S급 한 명을 제물로 삼아 암마룡을 소환. 공통점이라고 하면 각 도시를 지키고 있던 이들이었고, 남자라는 거지."

그 사이에 집계된 '확실한' 피해는 S급 히어로 12명의 사망. 마하트마 때와 마찬가지로, 그들은 모두 남들에게는 착실하고 선량한 이미지를 가진 이들이었다.

"아지다하카에게 홀려서 괴인이 된게 아닐까요?"

"확실치는 않지만 거의 그렇다고 봐야하지 않겠나. 마하트마라는 놈도 그러했지. 히어로인 척 일반인들 사이에 숨어있었어. 다른 놈들이라도 별반 다를 게 없지."

"하지만 괴인은 금방 알 수 있잖아요? 카르나 님도 전세계를 돌아다니기도 했고."

"카르나 님이 전 지구를 샅샅이 돌아다닌 건 아니잖냐. 지금 봐봐. 카르나 님이 들리지 못했던 곳만 차원문이 발생했어."

"전혀 괴인이 될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다거나, 나라의 수도가 아니라거나. 아니면 S급이 둘 이상 있었고 괴인은 잠시 몸을 숨겼다거나."

그리고 그들이 아지다하카의 제물이 되었다는 의미는 단 하나.

"아지다하카는 12명의 히어로 뿐만 아니라, 이미 전 세계의 많은 이들을 괴인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암마룡의 제물이 되었죠. 그게 지금 집행관으로부터 전해진 결론입니다."

등대가 집행관의 판단을 전했다. 히어로들의 괴인화. 나는 한 방 크게 먹은 기분에 머리가 띵했다.

"얘, 걔들도 혹시 미래의 빌런이었어?"

"...아뇨. 전혀. 오히려 히어로였어요."

<라이트닝>을 위시한 온갖 S급 히어로들은 모두가 괴인이 될 존재들은 아니었다. 일부는 괴인이 되기는 하더라도, 대부분은 미래에도 히어로가 되거나 헌터 길로 빠지거나 은퇴하는 이들이었다.

'아지다하카에 의해 강제로 괴인이 되었다?'

어불성설이다. 내가 나의 존재를 협회와 원탁에 커밍아웃을 한 이후, 원탁들은 전세계를 돌아다니며 괴인들의 존재를 살폈다. 그리고 거기에 카르나와 은유하까지 거들었다.

"그럼 히어로들도 용의선상에 올려야 하나?"

"공식적으로 등록된 이능력자의 수가 백만 언저리입니다. 물론 A급 이상이야 만 명이 채 되지 않지만...."

"C급 괴인이라도 일반인들에게는 큰 위험이거든?"

"젠장, 미치겠군. 한국에도 그 놈들 괴인이 있는 거 아냐?"

수가 파악이 되지 않으니 앞으로 얼마나 많은 자들이 괴인으로 변할 지는 미지수. 그나마 다행스러운 점은 당장 한국에는 괴인화한 이들이 없다는 것. 그리고 문제는 아지다하카만 나타났다는 것.

"피닉스 님, 펜릴이나 히드라가 나설 일은 없습니까?"

"......펜릴은 그냥 혼자 조용히 있을 것 같고, 히드라는 굳이 나서지는 않을 거예요. 이쪽에서 먼저 건드리지 않으면?"

확신은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높은 확률로 이 상황은 아지다하카의 독단이나 다름없는 짓이었다. 이건 원작에서도 있는 이벤트니까.

'이걸 아지다하카가 일으키네.'

원래는 폭주 석하랑이 일으켰다. 자신에게 주어진 루살카의 힘을 이용해, 부산의 시민들을 제물로 바쳐 전세계 곳곳에 마구잡이로 차원문을 열었다.

"그나마 다행인건 아지다하카 단독으로 나와서 암마룡만 주구장창 튀어나오는 거네요."

"...빌런들의 대부분이 암속성인 거랑 반대로, 히어로들도 광속성이 많으니까요."

광검의 예가 그러하고, 거기에 숱한 히어로들이 광속성이 메인인 경우가 허다했다. 그리고 정말로 다행스럽게 광속성의 최강자는 아군이다.

"현재 카르나 님은 가루라를 타고 자카르타로 바로 떠났습니다. 서쪽으로 돌면서 마룡들을 금방 격퇴할 겁니다."

"샤오린 님과 환룡 님은 울란바토르에 발생한 차원문을 막으러 갔습니다. 루살카님도 그...부군과 함께 상투페테르부르크로 이동하셨구요."

정령들이 서쪽으로 퍼져나갔다. 석하랑은 내키지는 않다고 하면서도 삿포로에 발생한 차원문을 막으러 떠났다.

"피닉스 님. 저희는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간부들의 시선이 내게 모였다. 모두가 떠난 백영도에는 이제 진짜 청화단의 간부들만이 남았다. 여러모로 내가 편하게 얘기를 할 수 있는 사람들이지만, 내 머릿속은 여전히 복잡해서 뭐라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일단은 현상 유지. 집행관이 지원을 요청하면 그에 응해서 파견을 나갑니다."

"미적지근하네. 성질 내면서 바로 뛰쳐나갈 줄 알았는데."

"이미 카르나가 갔으니까요. 그보다. 아니, 실은...."

연관성은 없지만 어쩌면 운명력 같은 것이 작용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깊은 한숨과 함께 모두에게 미래에서 일어났던 일을 짧게 읊었다.

"전 세계에서 발생하는 국지적인 차원문. ...성주가 지구를 향해 오기 시작하면서 시작되었거든요."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지는 격이지만, 공교롭게도 딱 그러했다.

만약 이대로 시간이 계속 흘러간다면 약 3개월 뒤.

"성주가 도착하게 될텐데."

달에.

* * *

"씨발, 이게 다 꿈 때문이야."

오라클은 머리를 벅벅 긁으며 천문대의 상황을 예의주시했다. 최첨단 마도공학 장비로 천체를 관측하게 된 덕분에, 별은 이전보다 훨씬 더 잘 보였다. 오라클은 초코바를 씹어먹으며 허블 망원경에 연결된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받았다.

"...이런 젠장."

오라클은 머리를 쥐어뜯었다. 선대가 자신에게 힘을 넘겨주며, 마지막 영혼을 불살라 얻어낸 미래가 너무나도 일찍 찾아와버렸다.

"왜 벌써부터 오기 시작했지...?"

명왕성.

5년 뒤에나 출발했어야 할 외계인의 비행접시는 서서히 궤도를 이탈해 지구를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