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0화 〉1부 16장 25
성주에 의한 세뇌는 단순히 인격을 만들어 덧씌우는 단순한 방법이 아니었다.
본인이 바라는 자신. 이상적인 자신.
간부라는 괴물로 만들면서 정작 성주는 각 정령들이 가지고 있던 단점을 없애고, 원하는 이상향으로서의 자신으로 탈바꿈하도록 만들었다. 정령들은 테라에서 성주와의 전투에서 각자의 인격을 갖추게 되었지만, 급조한 인격체인 덕분에 어딘가 나사가 빠진 상태가 되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절풍으로, 그는 고압적인 절대자로서 자아를 유지했다. 절풍의 아래에 있던 모든 부하들이 절풍을 두려워하고 무서워했으며, 성주는 그 충성의 괴리를 교묘히 노려 절풍부터 제압했다.
그리고 간부가 된 펜릴은 무게감을 많이 내려놓은 가벼운 존재가 되었다. 단순히 가볍다고 하기에는 뭔가 경박하기까지했지만, 그 덕분에 펜릴의 자아는 너무나도 확고해졌다.
이전의 자신-절풍-과 나-펜릴-은 엄연히 다르다.
그게 원작에서 펜릴이 절풍에 대해 내뱉었던 말이다.
패배한 정령의 모습으로 돌아갈 바에는 승승장구하는 펜릴로서 자아를 유지하겠다.
그것이 김펜릴의 선택이었다. 절풍에게 다시 먹혀 소멸하느니, 설령 성주의 개가 되는 한이 있더라도 자신의 자아를 유지해나가기를 바랐다.
그게 내가 판단하고 있는 김펜릴이 절풍에 대해 가진 생각이었다. 정령의 자아가 자신을 자각했음에도 불구하고, 김펜릴의 자아가 워낙 강해 절풍은 인격의 주도권을 가져오지 못하는 것이다.
단순히 김펜릴을 소멸시키면 간단하지만, 절풍은 김펜릴을 흡수하려고 했다. 김펜릴의 가볍고 자유분방한 바람같은 성격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고 했기에 자각을 했으면서도 김펜릴을 일부러 죽이지 않은 것이다.
개천광이 카르나로서의 자신을 받아들인 것과는 달랐다.
정령 개천광은 카르나에게 측은지심을 느끼는 동시에 투쟁의 즐거움을 깨달아버렸다. 지극히 평화를 사랑하던 정령은 카르나로서 인간 세상에서 쌈박질을 해대며 전투의 열락에 빠져버렸다.
그래서 개천광은 카르나와 힘을 넘겨주고 안에서 그를 지켜보는 것으로 합의를 봤다. 살육전이 기본이었던 성주와의 전쟁에서 싸움에 대한 환멸을 느꼈던 개천광은 카르나가 살아가는 인생에 반하고 만 것이다.
반면, 바람의 정령은 김펜릴에게 주도권을 넘겨주기는 커녕 주도권을 빼앗으려고 했다.
원작, 미래에서의 절풍은 펜릴의 무사태평함과 여유로움을 질투했다. 그래서 펜릴의 안에서 있으면서도 펜릴의 자아를 잡아먹으려 들었고, 펜릴은 은연중에 그런 낌새를 눈치채고 김펜릴이라는 캐릭터를 만들어 주도권을 빼앗기지 않으려했다.
절풍이 워낙에 펜릴을 부러워한 탓에.
오히려 펜릴의 자아가 더 강해지는 역설이 생겨버리고 만 것이다.
정령은 자신의 육체를 차지한 간부로서의 자아를 없애고 증오해야하건만, 절풍 만큼은 그 펜릴의 성격을 제 것으로 만들고자 했다.
그것이 성주의 계략이었다.
성주는 설령 세뇌가 풀리게 되더라도, 이계신의 영향이 깃든 간부로서의 오염된 마력이 조금이라도 정령에 영향이 남기를 바랐다.
- 설령 세뇌가 풀리게 되더라도, 정령이 간부의 마력을 조금이라도 가지고 있다면 금방 세뇌할 수 있을 터.
성주가 정령을 어떤 특정한 성격으로 타락시키려고 했다면, 그 세뇌는 명백히 성공한 세뇌였다. 정령들은 모두 간부로서의 자신의 성격에 대해 호의적인 입장이었다. 그런 점을 생각하면 성주의 간계는 효과적으로 보였다.
그 세뇌가 풀리는 과정에서 간부로서의 자아가 자멸을 택했고, 정령이 그 자아의 성격만 이어받는게 문제였다. 성격만 남고 세뇌를 위한 오염된 마력은 모두 정화되고 말았다.
성주의 오판이 있다면, 이 세계는 미연시라는 것.
설마 악의 조직 간부들이 주인공과 사랑에 빠져 자기희생을 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
그리하여, 나는 김펜릴을 어떻게 대해야 할 지 감이 잘 오지 않았다.
원작에서는 반대로 절풍이 김펜릴을 위해 희생했다.
원작에서의 주인공 팀원들과의 이야기를 통해 김펜릴이 인간에게 감화되는 걸 옆에서 지켜보면서 김펜릴을 환멸하게 되는 것이다. 우상같았던 자신의 또다른 자아가 한낱 인간들에게 애교를 부리는 것도 모자라, 왠 금발의 서양남에게는 온갖 아양을 떨며 잠자리 한 번 가져보려고 갖은 애를 쓰더라.
결국 절풍은 펜릴이 되기를 포기했다. 그리고 절풍은 펜릴의 왼쪽 눈에 자신의 흔적이라고 할 수 있는 손톱자국을 남기고 소멸한다.
- 그렇다면 현재 나와 적이 되어있는 김펜릴을 설득해야할까, 아니면 안에 있는 절풍을 끌어내야 할까?
그래서 모처럼 전세계에 '선전포고'가 이루어지기 전, 김펜릴을 불러 이야기를 좀 하려고 했다. 두 자아가 한 번에 양립할 수 있는 길이 있다면 김펜릴은 김펜릴대로 살고, 절풍은 절풍대로 살아남을 수 있지 않을까.
김펜릴과는 적이든 뭐든 일단 놔두고, 풍정령 절풍만 일단 빼내어 박라온이든 누구든 싱크로를 시키면 어떨까.
......그 이야기를 하기도 전에 김펜릴을 상대로 볼을 물고 빨았던 것은 어디까지나 창염으로부터 꾼 꿈의 영향이 아직까지 남아있기 때문이었다. 결코 사심은....
...
솔직히 말해서.
누구든 방에 들어왔으면 아마 사단이 났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마지막 의지를 짜내어, 후안 사장에게 연락을 걸어 김펜릴에게 아이스크림을 배달하도록 부탁했다.
김펜릴을 상대로는 그래도 이성을 유지할 줄 알았는데, 어렵더라.
썩어도 준치라고, 김펜릴도 히로인은 히로인이었다.
유일하게 간부로서 정령을 잡아먹고 히어로이자 히로인이 되는 존재. 새로이 호적까지 만들며 마침 아무 성씨나 붙였던 김씨 성을 누리의 동생으로 입적까지 했던 민트초코 덕후.
나는 펜릴을 범할 뻔 했다가, 창염에게 의식이 다시 붙잡혀왔다.
죄인이 된 나는 창염의 어전 앞에서 무릎을 꿇은 채 머리를 조아려야 했다.
"변명은?"
"네가 감질나게 해줘서 그런 거 아니냐. 야, 지금 밖에 절풍있잖아. 빨리 꺼내줘. 걔 설득해서 김펜릴 잡아먹게."
"그 잡아먹는다는게 어떤 의미예요? 김펜릴을 죽인다? 아니면 침대 위에서 먹으려고?"
"...설득하는 거다. 둘이 동시에 양립할 수 있게."
어쩌면 그게 가능할 지도 모른다. 마침 정말로 운좋게, 1/7의 확률에서 뉴클리언은 풍속성의 SS급 코어를 남기고 떠났다. 그리고 그걸 바탕으로 오직 풍속성만을 중심으로 하는 호문클루스를 만들면 어떨까.
성주가 오기 전까지 얼마의 시간이 있을지 모르지만.
"그게 가능할 것 같아요?"
"가능할 지 아닐 지는 직접 해봐야지."
"절풍이랑 펜릴 둘 다 양손의 꽃으로 만들어서 먹으려는 건 아니겠죠? 쌍둥이 하렘 엔딩? 수인 자매 덮밥? 푸흐흐."
"술을 마신 건 난데 왜 네가 취한 것 같지?"
"그거야 몸을 공유하고 있으니까요. 취기를 날리지 않은 바람에 나까지 영향을 받고 있잖아요. 밖에 나가면 빨리 취기나 날려버려요. 만약에 다른 히로인 애들이 들어왔으면 어쩌려고 했어요?"
"......."
분명 높은 확률로 마음이 혹했을 것이다. 창염도 유사 성행위를 하게 해줬으니까, 누가 될 지는 모르지만 가장 먼저 들어온 이와 아마도 했을지 모른다.
"어쩌면 김펜릴을 부른게 최고의 선택이 된 건가, 딸꾹."
"아뇨. 하필이면 다른 사람도 아닌 적을 부른 바람에 지금 엄청 위험한 상태죠. 혹시 알아요? 다른 히로인들은 당신을 범하려 들겠지만, 김펜릴은 당신이 자는 사이 목을 뎅겅 날려버릴 수 있겠죠."
"그럼 내가 지금 여기서 이러고 있으면 안 되는 거 아닌가?"
"네. 그렇긴 한데, 당신이 그 상태로 절풍 설득하려고 들었으면 자꾸 할짝거리면서 본방으로 빠졌을 걸요? 저는 알아요. 당신의 그 절조없음을."
창염은 혀를 할짝거리며 나를 조롱했다. 창염의 말이 거의 사실이 될 가능성이 높았기에, 나는 아무 변명도 하지 않았다. 그저 툴툴거리기만 했다.
"내가 너랑 어제 그걸 하고도 다른 사람한테 눈을 돌릴 것 같아?"
"눈은 안 돌려도 자지는 돌리지 않을까요? 아, 창염이 허벅지에 비비게는 해줬으니까 다른 애들도 그 정도는 해도 되겠지! 그러면서 자기도 모르게 본방으로 넘어가려고 할 거예요. 약 96%의 확률로."
"그건 무슨 말도 안 되는 확률이야?"
"통계거든요."
창염은 눈썹을 찌푸리며 손을 휘휘 저었다. 다행히 내가 창염에게 붙들려온 동안, 밖은 별다른 문제가 없는 모양이었다.
"그럼 이제 가요. ...이미 좀 늦은 것 같지만."
딱.
창염은 손가락을 튕겼다. 나의 의식이 다시 푸르게 불타올랐고, 나는 말똥말똥해진 정신으로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하아, 하아, 하아."
그곳에는 전신의 옷이 벗겨진 채 숨을 헐떡이고 있는 절풍이 있었고, 내 입에는 민트초코 향이 가득했다.
"읍."
설마 무의식적으로? 나는 절풍의 전신에 새겨진 키스마크를 손으로 쓸고, 확인을 위해 절풍의 쇄골을 한 번 더 쪽 빨아당겼다.
내 입술 자국이었다. 세상에.
"...나 혹시 졸면서 한 거예요?"
"이제와서 무슨 말투를, 하아."
몽롱한 얼굴의 절풍(?)은 나를 올려다보며 내 볼을 양손으로 붙잡았다. 절풍의 꼬리는 내 목을 휘감았고, 내 얼굴을 자신의 정면에 놓았다.
"졸면서도 이 몸을 희롱하다니, 하아. 역시 너는 걔가 아니다냥."
"......."
"절풍은 다시 잠재웠다냥. 고귀하신 정령님은 네 그루밍 테크닉 덕분에 가버리셨다냥. 히힛, 모처럼 정령을 깨울 기회를 네가 망친 거다냥."
절풍이 아니었다. 김펜릴은 절풍이 절정에 달한 틈을 타 다시 육체의 주도권을 되찾는데 성공해버린 것이다. 모처럼 김펜릴의 짜증을 유발하여 절풍이 잠시 겉으로 튀어나오도록 한다는 내 계획은 창염의 방해로 인해 또다시 실패했다.
"이렇게 될 거라고는 예상 못했는데."
"히힛, 네 혓바닥 놀리는 솜씨는 확실히 뛰어나다냥. 하지만 그걸로 나를 이겨먹으려먼 아직 멀었다냥."
김펜릴은 내 배를 걷어찼다. 나는 마력으로 배를 보호하면서 뒤로 크게 물러났다.
"잠깐만요, 싸울 생각이예요? 내가 지금 당신과 절풍을 동시에 살릴 수 있는 엄청난 계획을 가지고 있는데?"
"알바가야한다냥. 지금 주문 밀려서 사장님 바쁘시다냥."
다행히 펜릴이 아니라 김펜릴이었다. 나는 진이 다 빠져서 힘없이 결계를 해제했고, 김펜릴은 테이블 위에 놓여진 민트초코 케이크를 한 조각 맨손으로 집어들며 손을 휘저었다.
휘이잉--!!
바람이 일며, 김펜릴의 옷이 다시 원래대로 돌아갔다. 김펜릴 또한 메이드복을 마력으로 유지하고 있는 듯 했다. 반대로 얘기하면 내가 마력으로 저걸 태우면 알몸이 된다는 말이기도 했다.
"후우. ...좋아요. 그럼 돌아가면 사장님한테 전해요. 30일 날 큰 파티가 있으니까, 아주 멋진 케이크를 준비해달라고."
"파티?"
"그래요. 모처럼 왔으니까 당신에게는 미리 얘기해드리죠."
나는 김펜릴을 가리키고 엄지로 목을 그었다.
"원탁에서 다크 레기온을 상대로 선전 포고를 할 겁니다. 전세계에 퍼진 악의 씨앗을 뿌리 뽑기 위해, 당신의 이 세계에 있던 신분인 <캐트시 경> 또한 다크 레기온의 하수인이라고 선언할 거예요."
"상당히 강하게 나온다냥."
김펜릴은 손으로 머리를 뒤로 쓸어넘기며 씩 웃었다. 메이드가 아닌, 간부 펜릴으로서 선언하려는 듯 했다.
[기대하마. 나를 잡으려면 먼저 히드라와 아지다하카를 잡고 나서야 상대할 수 있겠지만.]
굳이, 펜릴은 괴인형으로 변한 상태로 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녹빛의 바람이 일며, 펜릴은 그야말로 바람처럼 사라졌다. 바깥으로 나가는 창문 하나만이 삐거덕 거렸다.
"끝까지 허세부리네 진짜."
펜릴이 설령 자각한 절풍으로부터 힘을 빼앗았다고 하더라도 결국 그 힘은 최대 99. 나와 1:1로 붙어도 상성과 전력상 내가 우위에 있다.
"그나저나 절풍...하아. 창염은 또 왜 트롤링을."
고작 혀로 물고 빤다고 모처럼의 기회를 날려먹게 만들다니. 창염은 절풍을 싫어했던가? 이유를 도통 알 수 없었다.
"진짜 도무지 모르겠네. 하아."
술에 취한 듯 여러모로 혼란스러운 날이었다. 나는 밤공기를 마시기 위해 침실을 나서 정문으로 나섰다. 그곳에는 바닥에 엎드려 구토를 하는 대머리 괴인이 있었다.
"......이건 왜 여기서 이러고 있어요?"
"아, 그, 그게."
노란 도포의 하선태는 두 손으로 얼굴을 덮으며 무안해했다.
"...떡 먹다가 목에 걸린 걸 손으로 꺼내시려다가 그만."
우웨에엑!!
덕배는 저녁에 먹은 것들을 한껏 게워내며 켁켁 거렸다. 나는 안쓰러운 마음에 손가락을 튕겼다.
화륵.
푸른 불꽃이 어둠을 밝혔다. 덕배는 고통없이 가버렸다. 나는 덕배의 아래에 놓인 코어를 들어 먼지를 털어냈다.
"...피닉스 님?"
"네."
"오늘 밤, 문 꽁꽁 걸어잠그고 주무십시오."
"......?"
하선태는 이상한 소리만 하고 몸을 떨며 떠나버렸다.
"......뭐, 들어서 나쁠 건 없죠?"
나는 몸을 돌려 침실에 다시 누웠다.
"아. 결계 치는 거 까먹었네."
하선태는 이걸 알고 얘기한 걸까? 취기가 완전히 사라진 나는 다시 결계를 친 뒤, 이불에 누워 조용히 눈을 감았다.
김펜릴.
절풍.
그리고 다시 펜릴.
머릿속이 복잡해지는 상념이 실타래처럼 엉키기 시작하는 가운데, 나는 딱 하나 명쾌한 답을 찾아냈다.
"아."
창염이 나를 굳이 그 상황에서 의식세계로 불러들였다는 건, 정말로 위험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라는 것.
"설마 내가 진짜로?"
술에 취해 혓바닥 그루밍 플레이를 하다가 본방으로 넘어갈 뻔 했다는 건가.
나는 괜히 오한이 들었다.
* * *
"흐어억!!"
오라클은 기겁을 하며 몸을 일으켰다.
"어흐, 흐어억."
오라클은 봐버렸다. 그리고 아래에 끼워놓은 오나홀을 멀리 집어던졌다.
"으으.... 이제는 좀...."
사정감은 났지만 사정은 더이상 이루어지지 않았다. 요 며칠 사이 오라클이 몽정을 한 횟수가 방금 전의 꿈으로 무려 100번을 넘겼다.
"민트초코 모유 플레이라니, 미치겠군. 정말."
오라클은 소름끼치는 얼굴을 하면서도 펜을 들어 꿈에서 본 내용을 적었다.
그리고 오라클의 스마트 워치는 여전히 삑삑거리며 알람을 울리고 있었지만, 오라클은 무시하고 꿈의 내용을 기록했다.
오라클이 세계 멸망의 징조를 깨달은 것은 막 한국으로 떠나려던 비행기에 오른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