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9화 〉1부 16장 24
모두가 즐겁게 저녁을 먹고 마시며 잠든 그 시각.
잠들어야 했을 시각.
현재, 피닉스가 잠든 백씨네 강녕전 인근에는 온갖 이능력자들이 각자 위치에서 진을 치고 있었다. 누군가는 투명화한 상태로, 누군가는 밤하늘 위에 떠오른 상태로, 그리고 또 누군가는 그늘에 숨은 상태로 강녕전 주변을 에워쌌다.
술 취한 피닉스.
김누리의 표현에 따르면, 완벽한 '킬각'이었다. 모든 이들이 아침부터 피닉스의 얼굴을 붉게 만들어 방글방글 웃게 한 환룡에게 엄지를 척 들어올렸다.
오늘이 아니면 기회가 없다. 모든 이들이 숨을 죽여 기회를 엿보았다. 피닉스를 어떻게든 해보려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자고로 역사는 밤에 이루어지는 법.
모두가 오늘이 아니면 더이상 방법이 없다는 걸 직감했다. 술에 취한 피닉스는 여러 의미로 수비가 약했다. 만나는 사람마다 활짝 웃고 깔깔 거리는 모습은 여러 사람들의 마음에 불을 지폈다.
그리고 그 강녕전을 지키고 있는 호위병은 자동문이나 다름 없는 존재, 조덕배는 양반다리로 정문 앞에 앉아 눈을 감고 있었다.
-저거 그냥 밟고 지나가도 되지 않아?
-죽이고 가자. 어차피 피닉스가 부활시켜 줄 거 아니야.
-아무리 그래도 죽인다는 말은 하는게 아니지! 몰래 들어가는 방법 없나? 결계 따로 펼쳐져 있는 것 같지는 않은데.
-밖에서 소란 일으키면 피닉스가 깨! 자고 있을 때 덮...흠흠. 자는 얼굴을 사진으로 찍어야 한다고!
그들은 이도저도 못했다. 하필이면 B급인 조덕배가 수문장인게 그들을 미치게 만들었다. 힘을 쓰면 누구나 밟고 지나갈 수 있는 자동문이지만, 곱게는 죽거나 제압되지는 않을테니 단말마라도 내뱉을게 뻔했다.
그럼 피닉스는 습격이라고 생각하고 잠에서 깰 것이다. 술기운도 모두 날려버리고 맨정신으로 대응하려 할 것이며, 그러면 모두 말짱 도로묵이었다. 소란을 일으키지말고 몰래 들어가자. 암묵적인 합의였다.
-음? 그런게 뭐가 중요한가! 비켜라, 내 오늘 피닉스와 배를 맞출 터이니! 브라흐마스트르으읍?!
피닉스 다음으로 가장 강한 정령은 주변에서 달려드는 이들에 의해 금방 제압되었다. 좀비때처럼 몰려든 억척스러운 손길은 SS급 정령이라도 견뎌내기가 어려웠다.
-술 취한 피닉스의 애교가 보고 싶지 않아?!
-......미안하다!!
사과는 무척이나 빨랐다.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할 말 못 할 말 다 해대는 피닉스는 분명 여러모로 신경이 많이 쓰일 수 밖에 없었다.
누군가는 술에 취한 피닉스의 영상을 찍어 간직하기 위해.
누군가는 술에 절어있는 피닉스와 더욱 대작을 하며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누군가는 취기가 오른 피닉스를 상대로 뭔가 좋은 것을 얻기 위해.
누군가는 피닉스를 따먹기 위해.
누군가는 피닉스를 따먹으려는 자를 막기 위해.
그리고 누군가는 이 충격과 공포를 즐기기 위해 강녕전 앞에서 기싸움을 벌였다. 덕배가 지키고 있는 강녕전의 입구는 몹시 얇아보이면서도 두터워보였다. 누군가가 조덕배의 시선을 끌어야했다.
"...조덕배 님?"
그리고 그 역할은 강녕전 주변에 순찰을 돌던 노란 우비의 남자가 졸지에 수행하고 말았다. 하선태는 등불을 덕배에게 비췄고, 덕배의 머리는 불빛 속에서 반짝였다.
"왜."
"아니, 안 주무십니까?"
"여기 지키는게 내가 해야할 일이라서."
"...끙, 그렇습니까. 시장하신데 뭐라도 간단히 드시지요?"
하선태는 공손한 자세로 덕배를 인도했다. 덕배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하선태의 호의를 사양했다.
"지금 하이에나 때가 너무 많아서 자리를 못 비워. 악의가 진동을 하거든. 여기 자리 비우면 어떤 일이 벌어질 지 몰라."
"알겠습니다. 그럼 간단히 요깃거리라도 챙겨오겠습니다."
하선태는 덕배를 안쓰러운 얼굴로 쳐다본 뒤 자리를 이탈했다. 모두가 숨을 죽였다. 아무래도 음식을 먹을 때는 조금 빈틈이 생기지 않겠는가.
"기다리셨습니까?"
그리고 하선태는 금방 간단한 먹을 거리를 가져왔다. 덕배는 하선태가 가져온 간식을 보고 떫은 얼굴로 주전부리를 집어들었다. 간식이라고 하기에는 뭔가 조금 두터워보이는 떡이었다.
"야밤에 무슨 떡이냐."
"여기에는 떡이 간식입니다. 백희아 아가씨가 떡을 좋아하셔서, 따로 냉장고에 바로바로 취식이 가능한 떡이 마련되어있지요."
어디선가 헛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덕배는 대충 아무 떡이나 집어들고 종이 포장을 벗겼다. 하얀 서리가 내린듯한 찹쌀떡이었다.
"잘 먹으마. ......커, 커흑?!"
덕배는 찹쌀떡을 먹다가 목에 사레가 들렸다.
"조덕배 님?! 다,당장 마실 걸 들고오겠습니다!"
하선태는 부리나케 자리를 떠났다. 덕배는 벽 기둥을 움켜쥐며 켁켁거리며 괴로워하다 앞으로 고꾸라졌다. 숨을 쉬거나 하는 생명 반응도 없어졌고, 덕배는 목을 잡고 쓰러져있다가 그만 숨이 넘어가버렸다.
덕배는 떡을 먹다가 죽었다. 졸지에 하선태가 덕배를 살인한 꼴이었다. 모두가 덕배를 향해 애도를 표했다.
"컥, 커억...."
...죽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 짧은 순간.
어디선가 불어온 녹색의 바람이 덕배를 스치고 강녕전 안으로 들어갔다. 다들 기회를 놓친 것에 안타까워하면서도, 스쳐지나간 녹색의 바람이 어떤 존재인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화륵.
그리고 푸른 결계가 펼쳐졌다
* * *
"어서오시오, 김펜릴이."
녹색 고양이귀 미소녀 메이드, 김펜릴은 늦은 심야임에도 아이스 박스를 들고 나타났다. 붉은 리본으로 포장된 물건은 후안 카페 특유의 무늬가 그려져 있었다. 나는 김펜릴에게 품안에서 코어 하나를 튕겨 넘겨줬다. 흑사갈이 낳은 S급 코어였다.
"이건 뭐냥."
"팁."
"세상 누가 해장용 아이스크림 배달로 S급 코어를 팁으로 주냥."
"이 몸이."
나는 침대에 걸터앉아 손가락을 척 턱밑에 받쳤다. 김펜릴은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나를 경멸하면서도 아이스 박스를 테이블 위에 올렸다.
"나는 배달 끝났다냥. 빨리 결계 풀라냥."
"너를 위한 선물도 준비했다. 자, 포장 풀어."
나는 리본을 가리켰고, 김펜릴은 한숨을 쉬며 포장을 벗겼다. 그리고 김펜릴은 완벽하게 밀봉되었던 박스가 열리며 풍겨오는 냄새에 코를 킁킁거렸다.
"......이 향은?!"
김펜릴은 커다란 눈동자가 터질 것처럼 휘둥그레졌다. 박스의 안에는 딸기향과 민트향이 반반씩 어우러진 케이크가 있었고, 나는 자리에서 바로 일어나 민트가 들어간 딸기 조각 케이크를 스푼으로 크게 퍼먹었다.
"흠흠, 해장하는데에는 케이크만한 게 없지."
"미쳤냥?"
"떽. 후안 사장님네 아이스크림 케이크가 얼마나 해장이 되기 쉬운데. 그래도 고맙다. 네 덕분에 이렇게 백영도에서도 이걸 먹다니. 흐흐."
"...아까부터 물어볼 게 있는데."
펜릴은 나를 위아래로 가리키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너 왜 말투가 그 모양이냥."
"어느 누가 그딴 식으로 말하지? 응, 김펜릴이."
"김펜릴 김펜릴 그러는 건 고맙지만 뭔가 놀리는 것 같아서 기분이 이상하다냥."
"말끝에 냥냥거리는 걸로 자아를 확립하는 애가 내 말투가 조금 달라진다고 해서 지적하는 게 이상하지 않나?"
"평소에는 죽어도 존댓말 하려던 애가 갑자기 꽐라가 되어서 이러고 있으니 이상해서 그러는 거다냥. 역시 너는 창염의 피닉스가 아니다냥."
당연한 말을. 나는 내 침대의 옆을 손으로 팡팡 쳤다.
"앉아봐. 마침 얘기할 상대가 필요했다, 흐흐."
"주정뱅이랑 어울리는 취미는 없는데."
"주정뱅이? 얼마 안 마셨는데."
"얼굴이 시뻘게진 상태로 그렇게 헤실거리는데 안 취했다고 말하는 게 이상한 거다냥. 본인이야 취했으니까 취한 지 모르는 거다냥."
그런가? 모르겠다. 창염의 몸은 애초부터 몸에 열이 많았고, 지금의 상태가 내가 몸에 열이 오른 건지 아니면 마력적으로 흔들리는 건지 잘 판단할 수 없었다.
"음.... 지금 목 그으면 죽일 수 있을 것 같은데."
펜릴은 살벌한 말읋 하며 손톱을 날카롭게 세웠다. 나는 한 번 크게 콧방귀를 뀌고 내 옆을 팡팡 두드렸다.
"일로와! 김펜릴이, 오랜만에 오빠랑 같이 누워서 잠이나 자자."
"역시 미친년이었다냥."
"오랜만에 그루밍도 해주마."
"......안 어울려주면 결계 다시 거둘 생각이 없어보이는데. 하아, 어디 얼마나 망가지는지 두 눈으로 똑똑히 보겠다냥."
김펜릴은 짜증이 서린 얼굴로 내 옆에 주저앉았다. 나는 바로 김펜릴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손을 치마 아래로 넣었다. 긴 고양이 꼬리가 여전히 장골에서부터 솟아나있었다. 나는 그걸 살살 간질이며 바깥으로 쓸었다.
"...흐냣?"
"네 약점은 어딘지 훤히 꿰뚫고 있지."
나는 김펜릴의 꼬리를 만지작거리며 얼굴을 김펜릴의 쇄골에 묻었다. 김펜릴은 내 공격을 전혀 예상치 못했다는 듯 당황하며 일방적으로 당하기만 했다. 나는 김펜릴의 쇄골을 오물거리며 김펜릴을 이불로 넘어뜨렸다.
"너, 너너, 너...?"
"왜?"
"나, 나는 적이다냥?"
"적이랑은 이러면 안 되냐?"
나는 이로 김펜릴의 제복 셔츠 단추를 하나하나 풀었다. 단추를 이로 누르고 옷깃을 입술로 잡아 당기며, 김펜릴의 제복을 천천히 벗겨내렸다. 김펜릴 특유의 백옥같은 나신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자, 잠깐만. 마음의 준비를 좀.... 아니지. 내가 무슨 말을. 정신 차리라냥!"
"난 지금 완전 맨정신인데."
"누가봐도 술에 취해서 제정신이 아닌 사람이다냥!"
"술에 취해? 흐흐흐, 술에 취하기는 무슨."
나는 김펜릴의 얼굴을 두 손으로 붙잡았다. 김펜릴은 나를 어찌 대해야 하나 눈동자를 굴리며 당황하고 있었고, 나는 김펜릴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자, 잠깐만-"
쮸읍.
나는 김펜릴의 복스로운 볼을 한 번 크게 빨아당겼다. 김펜릴의 두 눈이 다시 휘둥그레지고, 옆으로 삐져나온 꼬리가 쭈뼛 서는게 눈에 훤했다. 김펜릴에게서는 여전히 진한 민트향이 났다.
"흐흐, 내가 진짜 너 때문에 먹은 민트만...하아."
"무, 무슨 말이냥.... 이, 이런. 너, 너 그러지 말라냥. 창염의 피닉스 몸으로 나를 어떻게 하려고 하지 말라냥!"
"내가 뭘? 지금은 내 몸인데. 흐흐, 기분 좋지? 내가 다른 건 몰라도 키스 하나는 도가 튼 사람이다."
"틀렸다냥. 전혀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냥."
대화가 잘만 통하는데 김펜릴은 왜 이런 반응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펜릴을 빤히 쳐다보며 질문했다.
"야, 김펜릴이."
"왜 그러냥."
"너 내가 절풍이 아니라 너를 살려주겠다고 한다면, 그러면 내 편이 되겠냐? 성주를 배반하고, 너는 김펜릴로 살아가는 거지."
"......."
김펜릴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 말이 진의인지 아니면 취해서 나온 헛소리인지 파악하는 듯 했다. 나는 전혀 취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김펜릴은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네 목적은 나를 정령으로 각성시키는게 아니었냥?"
"그렇긴 하지. 하지만 나도 마음이 급해서 말이야."
"너는 절풍을 일깨우려고 나를 적으로 만든게 아니었냥...?"
"절풍이라."
깨우면 분명 그 누구보다도 강한 아군이 될테지만, 지금은 과연 어떨까. 나는 혀를 날카롭게 세워 김펜릴의 왼쪽 눈을 세로로 길게 그었다.
할짝, 할짝.
김펜릴은 내 혀놀림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나는 다시 김펜릴의 볼을 입술로 한 번 세게 잡아당겼고, 김펜릴은 내 애무아닌 애무에 한숨을 쉬며 포기했다.
"그래, 그래. 마음껏 하라냥. 나중에 이거 찍어서 직접 보여줄 거다냥."
"김펜릴 볼은 여전히 찹쌀떡처럼 쫀득하군. 민트맛이지만."
"그렇다고 반대쪽 볼까지 하라는 얘기는 아니었, 햐윽. ...이건 진짜."
김펜릴은 내 이마를 손으로 쿡쿡 밀며 엄한 눈초리로 나를 노려봤다. 아, 방금 되게 절풍이랑 닮았다.
"그만하는게 어떤가. 아르바이트 돌아가야 한다. 지금 본인은 일을 하는 중이외다."
"아, 절풍이다. 안녕? 만나서 반갑네. 오랜만이라고 해야하나, 아니면 처음 뵙겠습니다라고 해야하나? 어느쪽이든 이 세계에서 나와는 처음 만나는 걸려나. 흐흐."
"...전혀 들어처먹지를 않는군."
김펜릴, 아니 절풍은 볼을 씹어먹던 내 머리를 붙잡고 반 바퀴 몸을 돌렸다. 그 바람에 내가 절풍의 아래에 깔리는 자세가 되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 몸은 지금 바빠. 배달 끝났으니 아이스크림이나 쳐먹고 나를 놓아주시외다. 당장 돌아가서 다른 곳에도 배달을 뛰어야 하니. 취객을 상대로 헛소리나 들어줄 시간은 없다."
"절풍, 흐흐, 김펜릴의 자아에 먹혀서 온전하게 자기 스스로를 유지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정령아. 김펜릴 또한 너의 또다른 자아임을 왜 인정하지 않는 거냐."
"......제대로 정신이 나간 모양인데, 그건 본좌가 아니다. 그건...."
"너도 알고 있잖아?"
나는 절풍의 볼을 붙잡았다.
"성주에게 세뇌된 인격이라 함은, 결국 정령들이 바라던 자신의 가장 이상적인 모습이라는 걸."
취해서 그럴까.
"너...이 개냥이 새끼.... 또 각성해있었으면서 김펜릴에게 주도권을...."
나는 절풍의 얼굴을 붙잡은 채 눈꺼풀이 사르르 감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