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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염의 피닉스-388화 (388/1,497)

〈 388화 〉1부 16장 23

환룡과의 술자리를 가진 이후.

나는 취기를 일부러 마력으로 지우지 않았다. 덕분에 알딸딸해진 나를 노리는 마수를 피해 숙소로 들어온 나는 입구에 보디가드를 세웠다.

"어우, 술 쩐내. 얼마나 쳐마신 거냐?"

"...얼마 안 마셨거든요?"

"막걸리 병나발 불던 거 지나가다가 봤는데 무슨."

덕배는 망나니같은 복장으로 문앞에 서있었다.

왕의 침소를 지키는 자는 호위무사여야하건만, 덕배는 그런 위사는 커녕 위사에게 목이 달아날 백정만도 못한 복장이었다. 나 또한 왕이라기보다는 왕의 자리를 참칭하는 역적같은 존재였다.

"후우, 그냥 속이 좀 타서 그래요."

"또 무슨 복잡한 일이 있길래."

"......."

환룡에게는 창염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면, 덕배에게는 아무런 부담없이 이 세계의 전반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었다. 그가 다른 이들에게 그닥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것도 있지만, 뭣보다 얘기하기가 편했다.

"성주."

"또 성주는 왜."

"언제쯤 올까 해서."

"죽음이 예고하고 찾아오냐? 언제 어디서든 죽는 거지. 나 봐라. 괜히 거기서 붙들려있다가 미친년 하나 찾아와서 낭패를 봤잖냐."

"그 미친년이 설마 저를 얘기하는 건 아니죠?"

"아니. 그 변호사 양반. 빌런이었다며? 따라서 신서울 내려갔으면 뒤지는 각이었지. 설마 그보다 더한 것이 나올 줄은 몰랐지만."

덕배는 장난스럽게 제 목을 그었다.

이미 죽은 횟수만 족히 세 자리수를 넘긴 덕배는 죽음에 대해 익숙해진 모양이었다. 거의 대부분의 죽음은 나에 의해 이루어졌지만, 실제로 적에게 살해당한 것도 몇 번 있었다.

"그래서 여전히 죽고 싶어요?"

"글쎄. 죽을 때 죽더라도 너 끝까지 삽질하는 거는 다 보고 죽으려고. 어우, 재밌잖아. 힘은 더럽게 강한게 맨날 정신적으로 생리하면서 '저건 어쩌지', '이건 어떻게 하면 되지'하면서 골머리 썩히는 거. 어휴, 너는 나 없었으면 어쩔 뻔 했냐?"

"딱히 당신이 반드시 필요한 존재는 아니지만, 여러모로 도움이 된다는 건 인정할게요. 축하해요, 부하 2호. 당신에게 나의 짜증과 분노를 담는 쓰레기통이라는 임무를 부여할게요."

"그래. 어디 한 번 계속 얘기해봐. 이번에는 또 무슨 쓰레기를 투척하려고 그러시나?"

"성주."

나는 마도기어를 통해 달력을 꺼내들었다.

"멸망의 날인 2025년 12월 25일. 하지만 딱 그로부터 4개월 전인 지금 이 맘때 즈음부터 징조는 생길 거예요. 성주가 방주를 출발시키는 징조가."

"지난 번에는 3개월이라고 하지 않았냐?"

"네. 시동걸고 도착하는데 3개월이고, 1달동안 숨어서 간을 봤죠. 워낙에 조심성이 많은 양반이라, 무려 한 달이나 지구의 동태를 파악하고나서 전력을 쏟아부어요."

"왜?"

"제가 없어서."

나는 덕배가 했던 것처럼 장난스럽게 내 목을 손날로 그었다.

"성주가 왔을 때는 이미 제가 소멸당한 뒤였죠. 성주는 무서워진 거예요. 아니, 지구의 미개한 것들이 창염의 피닉스를 잡았다고? 나도 제대로 못 잡아서 시간이 끌린 존재를 이리도 쉽게? 지구인들은 괴물인가? 쫄았죠."

"그럼 너 죽으면 최소 1개월은 확보한다는 거냐?"

"그런 셈이죠? 지금의 지구 전력은 미래보다 어찌보면 더 강하기도 하고 약하기도 하니까 1개월일지는 모르겠네요. 질적으로는 우수한 자들이 많아도 양적으로는 미래보다 훨씬 적어서."

성주는 1달 동안 전 지구의 이능력자들을 살폈다. 11월이 넘어가고 12월이 되는 순간부터 전세계에 국지적으로 차원문이 열렸고, 그 안에서 이전에는 넘어오지 않았던 괴수들이 우후죽순처럼 쏟아지기 시작했다.

마룡. 그리고 키메라.

성주가 유나를 만들어내기 위해 테라의 것들을 괴수로 만들고 복제하던 도중에 생성된 실패작들. 원작에서는 창염까지 쓰러뜨린 후반부인 만큼, 나오는 적도 상성을 타지 않는다거나 무조건 1/2 데미지만 들어간다거나 하는 특성을 가지고 지구로 넘어오는 괴물들이었다.

"결국에는 양질의 이능력자들이 많아져야만 하는 이유가 있어요. 부하 2호, 최소 A급은 되어야 딜이 박히는 괴물들이 하루에 만 단위로 쏟아지는 차원문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뭐야, 그거. 미친 거 아니야?"

"성주가 도착하면 그렇게 됩니다. 그것도 전세계에 퍼트리죠. 저항하는 인간들을 무참히 학살하기 위해서. 창염의 피닉스가 인간들에게 죽었다는 걸 알고, 지구의 인간들을 상대하는 레벨을 상향조정 하는 거예요. 그 때문에 지구 인구가 확연히 줄게 되죠."

살아남은 이들은 S, SS급 히어로들의 아래에 모여 도심을 수호하고, 주인공 일행은 성주를 직접 쓰러뜨리기 위해 소수 정예를 편성했다.

"성주를 죽이지 않으면 그 끝없는 전쟁이 계속되는 거예요. 인류가 과연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그럼 그 성주가 온다는 징조가 있으면, 그 때부터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간부들을 정령으로 만들거나 이능력자들을 강화해야겠구만. 너도 그 싱크로인가 뭔가 하는 것도 해야할테고."

"그렇죠."

"그래서 그 징조는 뭐냐? 아직 못 들은 것 같은데."

나는 잠시 고개를 숙였다가 홀로그램을 띄웠다. 푸른 태양을 중심으로 행성들이 원을 그리며 돌아가는 모습은 분명 태양계의 모습을 담고 있었다.

"부하 2호의 천문과학 지식을 묻겠습니다. 지구 상의 행성들은?"

"갑자기 왜 이런 얘기를 하는 거지?"

"몰라요?"

"모른다면 어쩔 건데. 내가 이런 거 관심있을 만큼 공부를 할 거라고 생각하냐?"

그건 또 그렇다. 나는 고개를 끄덕여 덕배의 말을 수긍했다.

"그럼 가르쳐드릴게요. 태양으로부터 수금지화목토천해. 이건 알고 있죠? 굳이 말하지는 않을게요."

"......? 하나가 없지 않아?"

덕배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홀로그램 속 행성을 살폈다. 나는 그 손가락이 끝, 해왕성에 이른 것을 보고 절로 웃음이 나왔다.

"푸흐흐. 하나가 비죠?"

"어. 잠깐만. 나 이거 이름 기억날랑말랑하는데. 잠깐, 검색찬스."

덕배는 자신의 마도기어를 조작해 태양계 행성의 마지막을 찾아냈다.

"찾았다. 명왕성."

"예. 명왕성이라는 이름의 왜행성이죠."

"행성이면 행성이지 왜행성은 뭐냐? 쪽바리 행성이냐?"

"그건 또 그렇게 들어쳐먹네. 왜소한 행성이라고 생각하세요. 크기가 상대적으로 작은 행성. 그래서 태양계에서 퇴출...은 아니고."

그건 바깥의 이야기지 이 세계의 이야기는 아니다.

이 세계에서는 명왕성이 아직까지는 행성의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 행성을 재분류할 과학자들이 괴수들에 의해 잡아먹혔고, 명왕성의 지위를 놓고 따질 만큼 사람들은 여유롭지 않았다.

"나중에는 명왕성이 행성에서 퇴출됩니다. 크기가 작기도 하지만, 크기가 꼭 작아서 그런 건 아니고."

"그러면?"

"방주(方舟)."

본래는 네모난 모양의 선박을 말하지만, 그 선박의 겉에 외골격으로 바윗덩어리를 구형으로 덕지덕지 붙여놓아 숨었다면 어떨까.

"성주가 왜 별의 주인이라는 이름이겠어요? 진짜로 별의 주인이니까 그런 거지. 엄밀히 따지면 주인 대신 쓰고 있기는 하지만, 소유권은 성주에게 있죠."

"......나 잠깐만 이해가 안 되는데. 명왕성은 아주 오래전부터 태양계를 돌고 있던 행성 아냐?"

"맞아요. 그리고 그 오래전부터 전 우주 상에 뿌려진 이계신의 자가용 행성들 중 하나죠. 성간우주를 뛰어다니기 위해 만들어놓은 일종의 좌표라고 해야하나. 간단히 말해서 이거예요, 이거."

나는 명왕성의 홀로그램을 만들어 그 형태를 조작했다. 기괴한 디자인으로 꿈틀거리는 육방면체 같은 형태. 그건 마치 큐브를 거대한 소행성 사이즈로 키워놓은 형태였다.

"조덕배 씨. 지구 상에 한 때 번성해서 인류 이전에 지구의 주인이라고 불리웠던 공룡들, 그들의 멸망설 중에 하나가 운석 충돌인 것 정도는 알고 있죠?"

"......에이, 설마."

덕배는 핼쓱해진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명왕성이 UFO라도 된다는 말이냐?"

"오."

나는 덕배의 말에 손뼉이 절로 쳐졌다.

"딱 그 말을 하려고 했는데. 그럼 이제 성주가 온다는 징조가 뭔지 대충 감이 오시죠? 그리고 제가 왜 오라클이라고 하는, 제 행보를 읽을 수 있는 원탁의 이능력자를 굳이 살려주고 아군으로 만들고자 했던 이유가 뭐겠어요?"

"......오라클이 별을 보면서 천기를 읽던가?"

"꼭 그런 건 아닌데, 취미가 별을 보는 거죠. 그리고 세계에서 가장 큰 천문대의 주인이기도 하고. 푸흐흐, 아마 정보를 듣고 나면 난리가 날 걸요?"

나는 명왕성이라는 방주를 아주 천천히 지구를 향해 이동시켰다.

"갑자기 가만히 있던 행성이 지구를 향해 돌격해오는데, NASA에 깊게 연관되어 있는 오라클이 모를 수 있겠어요? 바로 알지."

성주가 오는 징조.

그건 지구에서 관측하기 너무나도 용이했다. 신경만 쓰고 있다면.

"그래서 마지막 전투를 위해서는 백희아 아가씨가 필요해요. 그 아가씨가 없다면 여러모로 난감해지니까. 부하 2호, 예전에 제가 은유하 아가씨한테 투자 좀 하라고 했던 거 기억해요?"

"...그 너 우주로 튀겠다고 항공우주 분야에 투자 좀 하라고 했던거? 그거 우주 빤스런 하려고 했던 거 아니였냐?"

"사람을 뭘로보고. ...여차하면 그럴 생각도 있기는 하지만, 주 목적은 도주가 아니예요. 전투지."

나는 지구에서 작은 불꽃을 하늘로 집어던졌다.

"최종전은 우주, 성주의 방주인 명왕성. 그리고 그곳으로 가기 위한 이동 수단으로는 백희아 아가씨의 이능력인 <동기화>를 통해 우주로 나아가는 우주선이 되겠죠."

"백나로 호?"

"...그거 이름 무조건 바꾸게 할 생각이에요."

이름을 바꾸지 않으면 하늘로 올라가다가 터질 것 같은 그런 기분이 들었다.

"백희아 이능력이 아무거나 탈 것으로 만드는 거라고 했지. 그럼 너 타고 가면 되겠다. 아니면 뭐 다른 거 개발하거나. 로켓? 비공정? 항공모함? 흐흐, 우주를 날아가는 증기선은 어떠냐?"

"에휴. 내가 뭘 얘기하겠어요. 잠이나 자야지."

나는 덕배를 밖으로 내던지고 다시 잠을 청했다. 술기운이 맴돌았지만, 그 덕분에 구름속을 거니는 느낌으로 잠들 수 있었다.

* * *

탁. 탁탁탁.

오라클은 잠에서 깨어났다. 자기 전에 미리 물건에 끼워둔 오나홀 덕분에 오라클은 사정을 하고 난 뒤에도 오나홀만 빼고 상쾌하게 일어날 수 있었다.

"으으.... 정말 미쳐버리겠네."

오라클의 눈은 퀭했다.

지난 열흘 사이 그가 꾼 꿈의 종류만 무려 100개가 넘었고, 그 꿈에서 나온 여인들의 수만 무려 16명이나 되었다. 때로는 둘이서 풋풋한 사랑을, 때로는 넷이서 퓻퓻한 정사를 나누는 꿈의 연속에 오라클은 기저귀와 오나홀을 동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안 자고 버틸 수도 없는 노릇이고."

잠을 자지 않으면 미래를 예언할 수 없다.

하필이면 그 예언이 한 남자와 다른 여인의 애정행각과 사랑이라는 것이 여러모로 불편하기는 했지만, 덕분에 오라클은 그 꿈을 통해 많은 정보들을 얻어낼 수 있었다.

성주. 방주. 이계신. 그리고 신관.

오라클이 꾸는 꿈은 주로 신관과 신관의 여인들에 관한 내용이었다. 신관은 비록 몇 번 실패를 하기는 했지만, 분명히 자신의 여인들과 동료들의 힘으로 성주라는 거악을 물리치고 세계의 평화를 가져왔다.

"내가 그런 자의 유일무이한 스폰서가 된다라.... 흐흐."

그리고 오라클은 그들의 대화를 통해 간접적으로 알게된 자신의 미래에 대하여 뿌듯함을 느꼈다. 직접적으로 자신이 나온 건 아니지만, 그들의 대화를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자신의 미래를 알게 된 것에 감사했다.

'하지만 지금과는 좀 달라.'

오라클이 꾸는 꿈은 뒤죽박죽이었다. 꿈에서 일어나는 일이 현재의 연장선상인 경우도 있었고, 현재와는 전혀 다른 상황에서 벌어지는 신관의 이야기인 경우도 있었다.

최후의 폭풍같은 자기회의 이후, 오라클은 그 어느때보다도 현명한 정신으로 꿈의 내용들을 종합해 추론했다. 그리고 그 결과, 오라클은 하나의 결론에 도달했다.

창염의 피닉스.

"신관이 모종의 힘으로 과거로 보내준 건가? 그래서 과거에서부터 미래가 완전히 뒤바뀌게 된 건가?"

신관이라면 시간을 거스르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그 방법은 오라클이야 알 수 없었지만, 창염의 피닉스가 '예정된 시점보다 빠르게' 활동을 시작하면서 자신의 꿈도 완전히 어그러졌다.

덕분에 창염의 피닉스로 인한 여러가지 꿈을 꾸며 알게된 정보를 바탕으로 오라클은 열심히 암약했다. 자신이 영향력을 가진 미국에서는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그가 뒷세계를 열심히 조종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아메리카의 절반이 불에 탄다.

'남아메리카지만.'

미국 대통령을 면전에서 협박한다고 아메리카의 절반을 불태워버리겠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창염의 피닉스는 '남아메리카'를 불태워버렸다. 결국 미 대통령은 미국이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았음에도 항복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왜 하필 신관은 저 멍청이를 과거로 보내준 거지."

오라클은 자신의 꿈 기록 노트를 살폈다. 여신처럼 아름다운 이유나의 꿈의 갯수만큼, 창염의 피닉스가 삽질을 한 끝에 세계가 멸망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

한 번 더 잠을 자면 알 수 있지 않을까. 오라클은 마지막 꿈에서 뭔가 실마리 같은 것을 잡았다.

삐리리리, 삐리리리!

스마트 워치에서 뭔가 긴급한 연락이 오는 것 같았지만 무시.

"또 질풍객이겠지."

오라클은 수면제를 한 가득 움켜쥐었다.

* * *

사락.

나는 눈을 떴다.

어느새 밤이 짙어졌는지 어둠이 짙어져있었다.

"......."

그리고 거기에는 누군가의 얼굴이 나를 빤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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