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7화 〉1부 16장 22
8월 27일 오전.
나는 최악의 아침을 맞이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조식을 먹는 이들도 있었고, 어제 밤늦게까지 달리느라 밤잠을 설친 이들도 있었다. 나는 찝찝한 속을 달래기 위해 아침부터 뭔가 독한 게 필요했고, 마침 그럴만한 상대도 눈앞에 나타났다.
"무슨 일이야? 안색이 엄청 안 좋은데."
"...당신은 아침부터 술이에요?"
환룡은 막걸리를 병나발째 물고 흔들어대고 있었다. 플라스틱 병에 들어있는 찰랑거리는 막걸리를 한 번 눈으로 흘긴 환룡은 손가락을 좌우로 까딱거리며 나를 비웃었다.
"아아, 이건 쌀음료라고 하는 것이야. 아침의 햇살과도 같은 맛이지."
"누가 그런 개소리를 해요?"
"풍백이."
"...때로는 나이에 걸맞지 않은 짓을 하는 이들이 생기는 법이에요."
아무래도 환룡은 밤 사이에 풍백과 술친구가 된 모양이었다. 정작 상대인 풍백은 코빼기도 비치지 않건만, 환룡은 아무래도 좋다는 듯 홀로 자작을 하고 있었다. 나는 환룡이 앉은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무슨 바람이 불어서? 자리 많은데."
"아침부터 술 마시는 사람은 당신 뿐이니까요. 다음 잔은?"
"밤막걸리."
"...아주 제대로 꽂힌 모양이네. 좋아요."
백희아네 별장답게 국산 술은 주류 냉장고에 종류대로 비치되어 있었다. 나는 그 중 환룡의 주문에 따른 밤막걸리를 꺼냈고, 내 몫의 잔도 하나 가져왔다. 환룡은 내가 잔을 드는 것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 뭐야. 너도 마시게?"
"한 잔 해야할 것 같아서."
"풍백이 아침은 해장술이라던데, 너도 혹시 어제 취했어?"
"취했죠."
창염에 취했다. 얼마나 취했는지 머릿속으로 창염과 스마타 플레이를 하는 꿈까지 꿨다. 아니, 그건 꿈인가? 꿈이 아닌가. 모르겠다.
"환룡, 제 머릿속에 창염 좀 만나고 올래요?"
"...야, 그런 말을 이런 오픈된 장소에서 해도 돼?"
환룡은 주위를 살피며 목소리를 낮췄다. 하지만 이미 우리의 주변에는 결계가 펼쳐져 있었고, 결계를 넘어 내 목소리를 들을 만한 존재는 없었다.
"제가 그 정도 판단은 하고 말하죠. 설마 누가 들으라고 대놓고 얘기했겠어요?"
"그거야 그렇네. 그래서 갑자기 그 얘기는 왜 하는 거야? 걔가 너한테 뭐 사고쳤어? 속상하게 했니? 그럴 줄 알았다."
"...속상하게 한 것 까지는 아니고."
꿈의 내용이 진실이라면 속상하거나 섭섭한 걸 넘어 사람을 열받게 하는 일이었다. 자기는 마음껏 나를 희롱하면서 기억을 지워버리다니. 여러모로 술이 필요했다.
"그냥 뭐, 싱크로를 하게 되었을 때 제가 이 몸으로 강간당하지 않을까 두려워서 말이죠."
"아, 음, 그렇구나, 음...."
환룡은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내 시선을 피했다. 결계 너머에 있던 누군가가 뜨끔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마침 우리 테이블 너머 반대편에는 천가을과 샤오린이라는 의외의 조합이 얼굴을 마주하고 있었다.
"혹시 싫어?"
"당연히 싫죠. 제 몸도 아니고 남의 몸으로 당하는 건데."
"그럼 네 몸을 상대로 하는 거라면 오케이라는 거네?"
"이야기가 그렇게 흘러가는게 지금 아니잖아요. 당신도 노리고 있어요? 세상에."
환룡의 진의를 파악한 나는 절로 어이가 없어졌다. 어째 싱크로를 통해 각성하는 정령들이 하나같이 나를 어떻게든 해보려고 안달이 나있었다.
"정말 술이 고프네요. 안그래도 석하랑도 무서운데, 당신도 나를 범하려 들고 말이에요. 그래서 누구랑 싱크로 할 예정인데요. 천가을? 샤오린? 그도 아니면 이유나?"
"......공략대상에게 공략 방법을 알려주면 대처할 거 아니야?"
"어차피 다 예상 가능한 범주니까 괜찮아요."
"그런가. 음, 일단 솔직히 말하면 둘다 지금은 불가능해."
환룡은 두 후보에 대한 싱크로의 불가능을 언급했다. 나는 절로 고개가 갸웃거렸고, 우린 일단 잔을 채워 부딪혔다. 공산품이 아니라 실제로 빚어낸 물건인지, 밤막걸리는 고소하고 달콤하게 목을 타고 넘어갔다.
"크으. 흠흠."
환룡은 헛기침을 하며 눈으로 둘을 가리켰다. 한 명은 최고의 매칭이 이루어지는 사람이고, 또 한 명은 자신이 직접 괴인으로 만든 사람이었다.
"내가 신화에 이르려면 우선 나와 평생을 함께 하겠다는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해."
"그거야 그렇겠죠."
다른 이들과 달리 환룡은 자기 자신에 대해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만큼, 싱크로의 조건에 대해서도 스스로 깨우쳤다. 아마도 내가 정령으로 완전히 각성시킨 이후, 싱크로에 대해 언급한 것을 계기로 열심히 그 방법을 관조한 모양인 듯 했다.
"가을이나 샤오린이나 둘 다 그런 각오는 되어 있어. 문제는 딱 하나 서로 양보할 수 없는 부분들이 있는데.... 하아."
환룡은 골치가 아프다는 듯 다음 잔을 들었다. 나는 환룡의 잔을 채워줬고, 환룡은 그걸 바로 원샷으로 비워버렸다.
"가을이랑은 얘기가 잘 됐어. 너를 어떻게 꼬시면 좋을지 논의를 할 정도니까. 적어도 공유하자는 합의까지는 이루어졌지."
"뭘 그걸 가지고 합의까지야. 합의를 했다는 것도 웃기긴 하네요."
"중요한 문제야. 싱크로를 하면 지분 문제를 따져야하니까. 유나처럼 내게 100% 전부 넘겨주거나 하지 않는다고. 뭣보다 나의 싱크로는 완벽한 빙의를 하는 거니까."
"인간과 정령이 하나가 된다는게 그리 쉬운 이야기는 아니죠."
정말 여러모로 골치가 아픈 문제였다. 외계인과 인간이 영적으로 서로 통하는 부분이 하나는 있어야 싱크로가 가능했다.
"성주에 대한 복수든, 강함에 대한 갈망이든, 그도 아니면 한 대상에 대한 사랑이든. 전자라면 모를까, 후자라면 그게 말이 쉽지 실제로는 어렵기 짝이 없죠. 사랑은 1:1. 한 사람을 두고 두 여자가 결국에는 한 몸으로 경쟁을 하는 꼴이 되니까."
"그래. 그 한 사람이 그 말을 하니까 조금 열받기는 하네."
"그건 어쩔 수 없는 부분이네요. 그래서 뭐가 문제예요?"
나는 술기운을 빌어 대놓고 선언했다.
"어차피 당신이나 가을이나 샤오린이나 나 좋아하는 건 마찬가지인데."
"와, 너 진짜 개쓰레기같다."
"재활용 안 되는 폐기물인 건 아니까 괜찮아요."
"결계 해제해서 직접 듣게하면 안 돼? 그러면 너에 대한 분노로 셋이서 동시에 싱크로할 것 같은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싱크로는 1:1로 이루어진다. 3인 이상 싱크로는 균형상 절대로 이루어질 수 없으니까.
"100을 3으로 나눌 수 있나요? 하지만 100을 2로 정확히 나누는 건 가능하죠. 100+100을 2로 나눠서 100이 되는 거나 마찬가지예요. 3인 싱크로는 불가능."
"왜? 99.99라도 되잖아."
"그건 완벽한 신이 아니잖아요. 신이 뭐겠어요? 전지전능. 완벽함. 부족한 것 없음. 그 0.01, 0.001라는게 부족한 거죠."
"그 정도는 너에 대한 사랑으로 채우면 되잖아. 뭐, 너에 대한 호감이 가을과 샤오린은 다른 것 같기는 하지만."
환룡의 말대로였다. 가을의 호감이 생명의 은인이자 동료로서 시작된 호감이라면, 샤오린은 강자에 대한 존경으로부터 시작된 호감이었다. 환룡은 본래 나에 대해 비호감만 가져야했건만, 창염이 굳이 오마케의 기억을 보여줘서 강제로 호감을 가지게 만들어버렸다.
"일단 나나 가을이나 너 좋아한다고 못을 박아두고 시작하자. 그런데 문제는 그 관계를 어떤 식으로 설정할 것인가를 두고 어제 가을이랑 싸웠어."
"왜요?"
"나는 남녀관계가 되기를 바라지만, 가을이는 지금 이 모습 그대로를 원하거든."
"그건 좀 의외인데요."
나는 만약 둘에게 마음이 넘어간다고 하면 가을과는 남녀관계가, 그리고 환룡과는 정령으로서의 관계가 되리라 예상했다. 하지만 그 관계는 내 예상과는 정반대가 되어버렸다.
"당신은 왜 남성형을 선호하는 거예요?"
"스카이다이빙 큥큥."
"아니, 그 미친짓을 하고 싶다고? 그런 말 입에도 담지 마요.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어이가 없어서 기가 차니까."
"후후, 당황하는 걸 보니까 잊을 수 없는 기억인가봐?"
"당연하죠."
오존층에서부터 지상을 향해 자유낙하하며 플레이를 한다는 오마케는 여러모로 미친 오마케였다. 환룡의 귀차니즘을 깨어나게 하기 위한 극단적인 선택이었으나, 그걸 직접 체험하는 플레이어는 어떤 기분이 들겠는가.
"하지만 가을은 이성애자인데."
"너랑 부대끼면서 생각이 달라졌나보지. 여차하면 본인이 남자로도 변신 가능하잖아. 얘기들어보니까 너, 애초에 처음부터 여성형으로 끌어안으면서 접근했다며? 흔들리는 모습도 보여주면서 모성본능 자극까지. 고단수야, 정말."
"...크흠."
남의 부끄러운 얘기를 하다니. 용서할 수 없었다.
"그래서 가을이랑은 그 문제만 해결하면 싱크로로 돌입할 수 있으시다?"
"그렇지. 하지만 문제가 쉽게 해결될 것 같지는 않네. 지금이야 어쩔 수 없이 창염의 얼굴을 보고 산다고 해도, 이걸 평생 보고 산다고 하면 나도 정신이 돌아버릴 것 같거든."
"창염의 얼굴을 보고 사는데 돌아버려요? 말도 안 되는 소리지."
"그건 네가 창염의 진면목을 못 봐서 그런 거고. ...너 설마 걔가 어떤 앤지 알고도 그렇게 좋아하는 거야? 진짜로?"
환룡의 진지한 물음에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대답을 굳이 할 필요가 없는 질문이었고, 나는 술잔을 들어올리는 걸로 답을 대신했다.
"...대단하네, 정말. 인정할게. 아무튼 너 조심해. 우리가 합의를 이루는 순간, 너도 조심해야 할 거야."
"걱정마요. 이쪽도 좋은 자위 수단이 있으니까."
"...어머나."
"아니, 그런 자위가 아니라. 뇌에 라스푸틴이 끼었어요? 왜 그래, 정말."
"라스푸틴이 낀 건 너 같은데? 왜, 자는 사이에 창염이 몽정이라도 하게 해줬어? 막 대줄 것 처럼 하면서 애태우고 그래? 그래서 빡쳐서 술 마시는 거야? 후후."
"......."
나는 한 병을 아예 통째로 들고왔다. 환룡은 우물쭈물하다가 고개를 숙였다.
"미안."
"알면 됐어요."
"내가 창염 욕하면 또 너 창염 욕하지 말라고 화낼 거니까 속으로만 욕할게."
"그러시던가요. 어휴, 정말."
나와 환룡은 다시 잔을 부딪혔다. 오늘따라 막걸리 맛이 일품이었다. 무슨 맛인고 하니 딸기 맛이었다. 젠장할.
"그래서 샤오린이랑은 왜요? 샤오린도 나한테 박으려고 하기를 원하는 건가?"
"...샤오린이랑은 그 쪽으로 문제가 있는 건 아니야. 전투 부분에 있어서 트러블이 있는 거지."
"아, 그럴만도 하겠네요."
샤오린은 본래 환속성의 재능이 그리 특출나지 않다.
정신계열의 스페셜 리스트와 무투계열의 스페셜 리스트.
애초에 샤오린의 메인 속성은 지속성과 광속성이며, 환속성은 서브 중에서도 하위권에 위치하는 속성이다. 그걸 환룡이 괴인화를 통해 강제로 S급까지 일깨우고 더 강화시켰으니, 애초에 속성적으로 잘 맞지 않는 사이였다.
"투명화 된 무기도 일단 성능이 좋으니까 그대로 쓰고 있지, 원래는 카르나처럼 무기를 들고 직접 싸우기를 바랄 걸요?"
"그래서 문제야. 하아, 샤오린은 분명 유능한 부하이기는 한데, 막상 싱크로 하려고 하니 가을이 보다 더 트러블이 많다고."
"고생하세요. 이쪽보다 더하겠어요."
"그건 동감."
현재 주어진 싱크로의 난이도만 따지면 창염이 제일 어려우리라 확신한다. 하지만 노가리를 까도 아무런 의미가 없으니, 나는 환룡가 간단한 잡담만 나눌 뿐이었다.
"다른 화제로 돌릴까요? 가벼운 주제로. 석하랑, 설야도 이제 싱크로가 가능해졌어요. 단독 싱크로."
"세상에. 그게 가벼워? 그럼 이제 성주도 설야 혼자서 잡을 수 있는 거야?"
"...아뇨? 무적치트 벗기는 유일한 힘이 저한테 있어서 안 됩니다. 싱크로를 해도 성주 1형태는 공격하지 못해요. 세뇌에 완전히 저항은 하겠지만, 그 사이에 다른 모든 지구인들이 멸망당하겠죠. 성주는 창염으로 공격하지 않으면 언터쳐블의 존재예요. 1형태는."
"사기네. 근데 너 창염이랑 싱크로 못하면 끝장 아니야?"
나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6명이 싱크로를 모두 하더라도 내가 싱크로를 하지 못하면 내가 죽어야만이 성주를 물리칠 수 있었다.
"잠깐만. 내가 직접 들어가서 확인해볼게. 한 소리도 좀 하게."
환룡은 몸을 일으켜 나와 이마를 맞대었다. 그리고 잠시 뒤, 환룡은 시뻘게진 얼굴로 두 손을 덮으며 훌쩍였다. 분명 정신세계에서 창염과 뭔가 얘기를 나눈게 분명했다.
"......진짜 나쁜 년이야."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창염 욕하지 마요."
"너랑 나랑 서로 끌어안고 하는 거 보여주더라. 내가 하는 거 귀찮아하니까, 네가 마사지 해주고, 혀로 전신을 애무해주고, 너 혼자서 다 알아서 하면서 나 기쁘게 해주고, 나는 네 손길대로 절정하고 하는 기억을 보여줬어. ...쓰레기 같은 년."
"그럼 노코멘트."
아무래도 H씬을 본 모양인 듯 했다. 나는 그저 환룡에게 애도를 표하며, 둘이서 잔을 부딪혔다.
오늘따라 술이 달았다.
딸기맛이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