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3화 〉1부 16장 18
8월 26일.
우리는 백희아의 초대를 받아 자가용을 이끌고 서해의 주인없는 섬으로 날아갔다. 청화단의 모든 간부들은 날짜에 맞추어 휴가를 냈고-심지어 정치인인 류천성 마저도-, 다들 태양빛 아래 스텔스 모드인 흑염룡의 등 뒤에 올랐다.
그리하여 우리는 백희아가 알려준 좌표 위에 도착했다. 하지만 주변에는 섬은 커녕 망망대해인 서해바다 뿐이었다.
"좌표대로 도착했는데 왜 없지?"
"집행관이 먼저 도착해서 좌표를 알려준다고 했던 것 같은데."
간부들은 저마다 백희아가 말한 섬을 찾았다. 하지만 지화가 이능력까지 써봐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잘 찾아봐요."
"단장님, 혹시 결계같은 거 쳐진 겁니까?"
"제법 그럴싸한 가정이네요. 하지만 오답. 결계였으면 몇몇은 마력 반응을 느꼈겠죠?"
"끙."
바다에는 결계에 해당하는 마력 반응이 없었다. 대신 다른 반응은 해저에서 명백히 느껴졌다. 간부들은 그 반응에 눈에 이채를 띄었다.
"혹시?"
"네, 맞아요."
"서해에 있다던 또다른 괴수입니까?"
"......서해무기는 아니고, 괴수도 아녜요. 네스 호의 괴수같은 전설이기는 한데, 실제로 존재는 하죠."
나는 백희아에게 연락을 넣었다. 서로서로 스텔스 모드인 만큼, 이쪽에서 먼저 연락을 넣는게 인지상정이었다.
[도착하셨나요?]
마도기어의 스크린 너머 백희아의 얼굴이 나타났다. 휴가 기간 동안 마음고생을 심하게 했는지 얼굴살이 홀쭉 빠졌다.
"네, 도착했어요. 이제 올라와주세요."
[저한테 뭐 하실 말씀 없으세요?]
"......."
나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백희아의 출생에 얽힌 비밀에 관해서는 나는 덕배에게만 이야기를 했고, 덕배는 그걸 딱히 외부에 유출하지 않았다.
"무슨 얘기야? 둘이서 또 뭐 짝짜꿍이라도 맞췄어?"
"집행관과 모종의 관계를 만들기로 결심하신 겁니까?"
그래서 간부들은 이런 오해를 하게 되었다. 나는 손을 흔들어 간부들을 물렸고, 헛기침을 하며 뻔뻔하게 고개를 들었다.
"적어도 탈모 유전자는 없을 거라는 걸 확인했으니 좋은 거 아녜요?"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아. 알았어요. 일단 섬에 내려오세요.]
"섬이라니. 여기 아무리 살펴봐도 없-"
구구구.
바다가 크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지진이라도 일어난게 아닐까 싶었지만, 자연적인 지진이 아니었다.
"섬이...."
"바다에서 떠오른다고?"
쏴아아아---
천장에 돔처럼 드리워진 거대 유리막 위로 바닷물이 흘렀다. 유리막의 아래에는 어엿한 섬이 하나 자리를 잡고 있었고, 백사장에 검은 베레모를 쓴 백희아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백희아의 이능력이죠. 동시에 백씨 가문의 은신처이기도 하고."
"저게 이능력이라고?"
"네."
나는 섬의 곳곳에 자리잡은 포문을 가리켰다. 그건 섬이라기보다는 요새에 가까웠다.
"섬을 개조해서 하나의 '잠수함'으로 만든거죠."
사실상 백희아를 위해 만들어진 초거대 잠수함인 동시에, 존재 자체가 은폐되어있는 비밀의 섬이다.
백영도.
우리는 백희아의 아지트에 초대를 받았다.
* * *
애국주의자답다면 답다고 해야할까.
백희아의 별장이자 비밀 아지트는 백희아의 취향이 고스란히 묻어있었다. 서해바다 한 가운데에서 떠오른 비밀의 섬 한 가운데, 천혜의 자연이 반짝이는 수풀을 지난 간부들은 별장의 모습에 제각기 다른 반응을 보였다.
"...내가 지금 민속촌을 잘못 온 건가?"
"유감스럽게도 이곳이 별장 맞습니다, 하늘성."
안내를 나온 백희아는 직접 주변을 소개하는 가이드를 자처했다. 간부들은 안내가 이루어질 때마다 떫은 얼굴로 따라다닐 수 밖에 없었다.
"너 알고 있었지?"
"당연하죠."
선글라스에 속이 비치는 시스루 원피스 차림으로 내려온 가을은 촉수라도 꺼내서 몸을 가리려고 하는 듯 했다. 안에는 벌써부터 해수욕을 즐기려고 수영복을 받쳐입고 왔건만, 백희아의 별장은 바캉스라고 하기에는 사뭇 분위기가 달랐다.
"...여긴 한복입고 와야할 곳이잖아!!"
"빌려드릴까요? 손님용 한복 진열장이 따로 있습니다."
"조선시대 체험마을 수준일세. 사극 촬영하면 정말 영상미 하나는 끝장이겠어."
"수영복으로 흰 소복입고 계곡에서 멱이라도 감아야 할 것 같습니다."
간부들의 말마따나, 백희아의 별장은 민속촌을 방불케했다. 단단하게 다져진 흙길 좌우로는 취향에 따라 선택할 수 있는 초가집도 있었고 기와집도 있었다.
"마도기어의 전파가 터지는 게 신기하구만."
"허어억, 조선 초기 양식의 초가집이라니, 싸, 쌀 것 같다!"
약 한 명, 손으로 이마를 탁 치며 가이드의 안내를 따라오지 못하고 군침을 삼키는 개량한복의 외국인이 있었지만 상큼하게 무시.
우리는 백희아의 가이드에 따라 안쪽으로 들어갔고, 그 속에는 정갈하고 넓은 한옥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고택체험이라고 해도 족히 1박에 수십, 아니 백만원 이상은 깨질 것 같은 궁궐같은 한옥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오십시오, 아가씨. 그리고 환영합니다, 손님 여러분."
노란 도포를 입은 남자가 우리와 백희아를 맞이했다. 나는 그의 얼굴을 어디에서 본 것 같은 기시감이 들었다.
"...혹시 우리 구면 아니에요?"
"어디서 본 것 같은데."
"...후훗."
남자는 쓰게 웃었다. 왠지 모르게 내가 아픈 기억을 들쑤신 것 같아 미안한 감정까지 들었다. 내가 그의 정체에 대해 고민하던 때, 백희아가 옆에서 거들었다.
"섬 내부에 온천을 설치하면서 고용한 분이에요. 실력도 좋아서 믿을만한 분이기도 하고."
"백희아 아가씨가 그렇게 말한다면야…. 아."
기억났다.
"그 온천 사장님?"
"역시 기억하시는 군요. 옛 황신당이라는 간판을 내건 온천의 사장이었습니다. 하선태라고 합니다."
남자, 하선태는 품안에서 명함을 꺼내려고 하다가 손을 멈췄다. 그 행동이 꼭 오랫동안 비즈니스맨으로 살다가 모종의 이유로 이직을 하여 옛 습관이 남은 사람을 보는 듯 했다.
"원래 온천은요?"
"...그, 손님분들 가고 나신 뒤로 한 외국인 부부 손님을 받았다가 공연음란 방조로 영업장 폐쇄 조치를 받은 바람에…."
"죄송합니다. 대신 사과할게요."
부산 곳곳에서 씨를 뿌리고 다닌 피해자가 내 눈앞에 나타났다. 나는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하선태는 전혀 개의치 않으며 안쪽을 가리켰다.
"이쪽으로 안내하겠습니다. 백가의 별장은 방만 99칸이며, 한 분당 객실 하나씩 들어가셔도 충분히 공간이 남습니다. 아씨, 여기서부터는 제가 안내할까요?"
"네. 간부분들을 부탁드릴게요. 청화 아가씨 방은 제가 직접 안내해드리죠."
직접이라는 말이 왜이리 무서울까. 나는 백희아의 안내에 따라 내게 할당된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역시 예상대로 백희아의 바로 옆방이었다. 심지어 건물도 가장 안쪽에 위치한 곳으로, 흡사 조선시대 왕의 침소같은 강녕전을 쏙 빼닮아있었다.
"이 디자인 너무 노골적인 거 아녜요?"
"후훗. 그래서 '별장' 아니겠습니까? 백씨 가문의 염원이 담긴 건물이죠. ...이제는 애매하게 되었지만."
"......."
백희아는 쓰게 웃었고,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시간이 되시면 따로 한 번 불러주세요. 많은 분들이 오신다고 하셨으니, 용건이 있는 분들은 모두 저마다 각자 휴식을 취하고 계실 겁니다."
"당신은요?"
"...굳이 그 때 일을 신경쓰시어 제게 시간을 할애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는 제 나름대로 할아버님과 해결을 보았습니다."
아무래도 내가 휴식을 즐기는 사이, 백희아는 홀로 제 문제를 해결한 듯 했다.
"잠시만요."
나는 미안한 마음에 사과를 하고자, 백희아의 어깨를 가볍게 터치했다. 정장에 마력이 서려 푸른 빛으로 휩싸인 뒤, 백희아의 옷은 검은색을 기조로 하고 청색이 포인트가 된 한복으로 변했다.
"미안해서 선물이라도. 미안해요, 백희아 아가씨."
"...제게는 최고의 선물이군요."
백희아는 얼굴을 붉히며 저고리 위에 손을 올렸다.
"그런데 이제 백 씨가 아니니 성을 갈아야하나 고민중입니다. 검은색이 제 트레이드 마크이니, 흑희아 어떻습니까? 현희아라거나."
"그냥 백희아 하세요. 그 이름이 제일 예쁘고 당신과 잘 어울리니까."
아차.
이거 오마케에서 나오는 결정대사인데.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바로 방으로 들어왔다.
8월 26일 오전.
나는 백희아의 별장에 도착해 짐을 풀었다. 간부들은 저마다 짐을 풀고 삼삼오오 모여 각자 휴식을 즐기기 시작했다.
자.
그러면 누구한테 가서 휴가를 깽판 놓을까.
* * *
8월 26일 오후.
간부들이 저마다 휴식을 취하는 가운데, 주요 요인들이 하나 둘 속속들이 도착하기 시작했다. 청화단의 간부들을 비롯하여 청화단에 관계된 주요 인사들, 거기에 백희아가 직접적으로 신뢰하는 히어로들도 백영도에 초대를 받았다.
해저터널.
하랑에 의해 임시로 만들어진 얼음터널은 외부에서 오는 이들의 관광코스가 되었고, 사람들은 서해 바다 한가운데를 아쿠아리움마냥 드나들며 깨끗해진 바다를 구경했다. 나는 사람들이 이동한 뒤, 하랑과 둘이서 석하랑제 해저터널을 거닐며 이야기를 나눴다.
"예전에도 이렇게 바다가 깨끗했을까요?"
"아무렴 깨끗하지 않았겠나? 물론 쓰레기가 아예 없는 건 아니다만 서도."
"그래도 이 정도로는 안 깨끗했을 걸요. 주로 배가 다니면서 기름을 뿌린다거나, 오폐수가 바다로 흘러간다거나."
"니 말은 괴수들 덕분에 지구 자연환경이 깨끗해졌다 이거가? 무슨 환경단체 말하는 거 같네. 치아라."
하랑은 인상을 와락 일그러뜨렸다. 괴수가 나타난 이유는 지구를 오염시키는 인간들에 대한 지구의 복수랍시고 주장하는 환경종말론자들은 히어로들에게 여러모로 골치가 아픈 존재들이었다.
"금마들 말하는 뽄새 보면 사람 열받게 하는게 장난 아니다 아이가. 괴수 잡으러 가야하는데 괴수가 인간보다 더 자연환경을 덜 파괴한다면서, 인간이 자연 도태되어야 한다는 개소리 지껄이고 말이지."
"너무 심란해하지 마요. 어차피 당신 싱크로하면 지구상의 모든 물은 당신이 조종하는 거니까."
신화 속에서 자주 등장하는 물의 신이 되는 거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내 말에 하랑은 별 감흥이 없어보였다.
"퍽이나. 99에서 100으로 오르는 거 아이가. 고작 그걸로 물의 신이 된다고? 허풍이 심하네."
"진짠데요. 달이나 화성에 인간이 살 수 있는 강도 만들어낼 수 있는게 신화에 이른 당신이예요. 사하라 사막에 365일 비를 뿌려서 정글로 만들어버릴 수 있는 수준이기도 하고."
"...그 정도로 대단하다면 꼭 되어야 되겠네."
"당연하죠."
추후, 유나에게 흡수를 당하지 않으려면 무조건 싱크로를 해야했다. 그리고 나는 하랑에게 걸린 마지막 조건을 완수하기 위해 그들을 불렀다.
"각오는 됐어요? 역시 내가 같이 가주는게 나을 것 같은데."
"닌 빠져라. 괜히 옆에서 거들다가 이상한 말 하지 말고."
하랑은 내 도움은 필요없다며 한사코 거부했다. 그러나 나는 마력을 통해 하랑의 긴장과 떨림을 여실없이 느낄 수 있었다.관악에서 나와 대결을 펼칠 때도, 뉴클리언 레이드를 뛸 때도 하랑은 이정도까지 긴장하지 않았다.
"내, 미래에서도 이렇게 떨더나?"
"미래에서는 양쪽 다 죽었으니까 부담이 덜했죠."
"말하는 게 환경단체보다 더 하네. 씁, 하아. 그래, 편하게 생각하면 된다 이거제."
짝!
하랑은 양 손으로 자신의 뺨을 때렸다. 얼굴에 붉은 손자국이 날 정도로 제법 강했고, 나는 하랑에게 마력을 불어넣었다. 열기가 하랑의 몸에 퍼지기 시작했다.
"부모님 만나는데 그러고 가면 누가 뺨 때린 줄 알잖아요."
"아. 그렇네. 근데 진짜 어카지."
하랑은 내가 넘겨준 마력을 자신의 마력으로 변환하면서도 전전긍긍했다. 얼굴 쪽으로 혈기가 돌아다니며 붉은 손자국은 금방 가라앉았지만, 애초에 처음부터 긴장으로 심장이 쿵쾅거리고 있었다.
"내 엄마라고 불러야 하나, 아님 어머니라고 불러야 하나?"
"마망?"
"뒤질래?"
"나쁜 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요. 귀여운 딸을 어필하는 거니까."
"그건 내보고 지금 귀엽다고 하는 거제, 맞나?"
"맞으니까 이제 슬슬 제 손에서 손 좀 땔래요?"
하랑은 처음부터 내 손을 잡고 걸어왔다. 행여나 누가 볼까봐 내가 다 부끄러울 지경이었다. 하랑의 손에서부터 흘러들어오는 긴장으로 나까지 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하아. 이거 더럽게 긴장되네...."
"일단 손 좀 놔요. 괜히 이거 봤다가는 광검이 또 뭐라고 할 수 있다고요."
"아빠가 뭐라카면 뭐 어쩔건데. 내가 좋아하는 오빠야 손 꼭 잡고 부모님한테 소개시켜드리겠다는데."
"긴장해서 제정신이 아니구만. 떽."
나는 원거리에서 반대쪽 손가락을 튕겨 하랑의 이마에 마력을 튕겼다. 하랑은 잠시 벌게진 이마를 문지르며 씩씩거렸다.
"내가 틀린말했나. 가족 상봉 하는데 이왕 만나는 거 니까지 같이 만나면 어디 덧나나?"
"이상한 소리 하지 마요. 아까는 혼자가겠다면서 이번에는 나랑 같이 가달라고 하고. 지금 혼란스러워서 앞뒤 말이 안 맞는거 몰라요?"
"......미안하다. 내 혼자 가기로 했제. 끙. 알았다."
짝.
하랑은 다시 손으로 뺨을 때렸다. 나는 다시 하랑의 몸에 따스한 기운을 불어넣어 하랑을 다독거렸다. 약속 시간은 이제 고작 1분도 채 남지 않았다.
"아무쪼록 잘 다녀와요. 부디 좋은 결과가 있기를."
"야. 내 하나만 부탁하면 안 되나?"
하랑은 드디어 손을 놓았지만, 자신의 얼굴을 들이밀며 내게 뭔가를 어필했다.
"응원 한 방 씨게 찍어도."
"......어휴. 알았어요."
창염의 몸이기는 하지만, 의도는 정확히 전달되리라. 나는 손가락으로 입술을 슥 훔쳤다. 그리고 그 손가락을 하랑의 볼에 꾹 문질렀다.
"......."
하랑은 불만스러운 얼굴로 나를 노려봤다. 나는 반대편을 가리키며 어깨를 으쓱였고, 우리는 백영도에서 이어진 해저터널을 빠져나왔다.
쏴아아.
절벽에 파도가 부딪히는 해운대의 D섬. 나와 광검의 전투로 인해 파괴되었던 흔적이 일부 남아있는 그 섬에, 두 명의 외국인 부부가 절벽 끝에서 서있었다. 하랑은 머뭇거리면서도 바다에서 절벽을 향해 높이 뛰어올랐다.
"......확실히 모녀는 모녀지간이네."
루살카의 뺨은 본인의 손바닥 자국으로 벌겋게 익어있었다. 나는 그들이 자유롭게 이야기를 할 수 있도록 시간을 주려고 했....
"흐아아아앙!!"
루살카가 눈물을 펑펑 터뜨리며 하랑을 와락 끌어안았다. 자신을 끌어안은 비슷한 나이대의 여성이 목 놓아 꺼이꺼이 울자, 하랑은 처음에는 어색해하다가 딸꾹질을 시작했다.
"어, 엄, 흐끅, 엄마...."
"미안해, 미안해요, 하랑아, 미안해. 정말 미안했어, 미안했어요...!"
루살카는 이유도 없이 연신 사과만 하며 눈물만 흘렸다. 직접 끌어안았기 때문인지, 하랑은 루살카에게서 뭔가를 느낀 듯 입술을 꽉 깨물었다.
"......."
하랑은 그저 눈물만 뚝뚝 떨어뜨리며 루살카를 끌어안았다. 광검은 숙연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고, 나는 바다 위에서 그들을 바라보며 주변을 살폈다.
너무나도 서러운 울음이었고, 바깥으로 마력까지 퍼져나갈 기세에 나는 급히 D섬을 중심으로 결계를 쳤다.
"아이고...."
물의 정령들이 울기 시작하면 홍수날텐데. 나는 결계를 강화하고 두 모녀가 눈물을 그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 * *
"점마가 그 때 이상한 설명회만 안했어도 좀 더 편하게 만날 수 있었을 것 같지 않나, 엄마?"
"그러니까. 쟤는 왜 쓰잘데기 없이 그런 짓을 저질러가지고 우리를 곤혹스럽게 했는지 모르겠단다."
울음을 그친 두 모녀는 동시에 나를 공격했다. 물론 내가 둘을 같은 자리에 부른 전과가 있기는 했지만, 시작부터 이런 식으로 나를 공격할 거라고는 예상 못했다.
"긍정적으로 생각해요. 오히려 그 때의 만남으로 서로가 다 살아있다는 걸 확인한 거니까."
"적반하장이군."
조용히 있던 광검이 나를 욕하고 들었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 두 명의 설야가 나를 욕할 수는 있어도, 적어도 광검은 내게 뭐라 말을 할 수 없었다.
"당신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요."
"그래. 서방님."
"......."
하랑이 그를 매도할 차례였지만, 하랑은 여전히 어색한 얼굴로 쭈뼛거렸다. 그건 광검 또한 마찬가지였다. 서로 시원시원하게 이야기를 나누기에는 분명 껄끄러운 부분이 없잖아 있었다.
차라리 아예 모르고 지내다가 본능적인 감정이 앞서서 서로 모녀라는 걸 다시 한 번 인식한 루살카와는 달리, 광검은 분명 아버지인 걸 숨기고 스승으로서 살아온 기간이 훨씬 길었다.
"...내가 네게 아버지라고 불릴 자격이 없는 건 잘 안다."
광검이 먼저 입을 열었다.
"평생 나를 원망해도 좋다. 네게는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었으니까."
"...할 말은 그것 뿐이에요?"
하랑의 목소리는 착 가라앉았다. 광검은 집행을 기다리는 사형수마냥 눈을 감았다.
"언젠가 이런 일이 있게 된다면, 나는 그저 네 뜻에 따랐겠지. 용서해달라는 말도 하지 않겠다며, 네가 원하는 대로 해달라며 무게를 잡았을 거다. 하지만.... 지금은 달라."
광검은, 허윤환은 하랑에게 허리를 숙였다.
"미안하다. 내가 잘못했다. 용서해다오."
"......."
하랑의 몸에서 한기가 풀풀 흘렀다. 루살카는 하랑에게서 멀찍이 떨어졌다. 한 걸음 물러서기만 할 뿐, 하랑과 허윤환 사이에서 누군가를 편들지 않았다. 나는 그저 옆에서 광검을 부활시킬 준비만 마쳤다.
'설마 그럴 일은 없겠지만 죽이지는 않겠지.'
미래의 석하랑은 틈만나면 아빠 살아나면 죽여버릴 거라면서 농담조로 킬킬 웃었다. 그 말이 빈말인 걸 내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기야했지만, 지금의 하랑은 어떤 기분일지 쉽게 예측할 수 없었다.
하랑의 마력에는 온갖 감정이 뒤섞여 흘러나오고 있었다. 분노, 슬픔, 짜증, 애환, 기쁨. 표정은 냉막하기 그지 없었으나, 마력에서 묻어나오는 진한 감정은 단 한 번도 내가 본 적 없는 감정이었다.
"...미안하다고, 잘못했다고, 용서해달라고 하면 그렇게 해줄줄 알았어요?"
하랑은 손을 하늘높이 치켜올렸다.
"배에 힘 꽉줘요. 전력으로 날릴 거니까."
하랑의 손 위에 거대한 얼음창이 생겨났다. 루살카가 깜짝 놀라서 하랑을 제지하려고 했지만, 나는 마력을 튕겨 루살카의 앞을 가로막았다.
"너!"
"쉿."
하랑은 손을 내렸다. 첨탑만한 얼음창의 끝이 허윤환의 배를 향해 날아갔고, 허윤환은 하랑의 얼음창에 찔려 절벽 아래로 떨어졌다.
"얘!"
루살카가 비명을 지르며 절벽 아래로 내려갔다. 하랑은 허윤환을 향해 패륜을 저질렀다. 나는 하랑의 옆으로 다가가 어깨에 손을 올렸다.
"이제 후련해요?"
"......솔직히 이 정도면 싸게 친 편이지."
하랑은 툴툴거리며 마력을 가다듬었다. 21년 가까이를 부모 없이 살고, 심지어 9년 가까이를 부녀관계가 아닌 사제관계로 기만당하고 산 분노를 고작 절벽에 떨어뜨리는 것 한 번으로 끝낸 것이다.
어차피 다치지 않는 다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지만, 과연 대중들이 이 사실을 알면 어느쪽의 패륜이 더 중죄라고 할까.
"난 당신 편이에요."
"그야 당연한 거 아이가?"
하랑이 얼음창을 날린 공격은 광검이 다치지 않을 만큼 조절한 공격이었다. 하랑은 속이 다 시원해보였고, 루살카는 바다에 빠졌던 허윤환을 잡아와 절벽 위로 올라왔다.
"......."
허윤환은 물에 빠진 생쥐 꼴은 되었지만 생채기 하나 나지 않았다. 둘 다 SS급인 만큼, 살의없는 공격으로는 데미지를 입힐 수 없었다.
"지금까지 부모 없이 살게 해놓고 이제와서 잘못했다고 빌고. .......하아, 정말."
하랑은 머리를 긁적거리며 손사레를 쳤다. 허윤환도 그렇지만, 하랑도 부산에서 나고 자란 만큼 거친 성향이 없잖아 있었다.
"괜히 어영부영하지말고 고마 이걸로 퉁칩시다! 씁, 맘 같아서는 동해바다 한 가운데 처박아버리고 싶은데, 임마랑 엄마 땜에 참는 줄 아세요."
"...고맙다. 진심으로."
허윤환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나는 석하랑 루트를 밟으며 그가 보였던 회환이 지금에서야 풀리는 것을 보고 괜히 내가 마음이 시큰거렸다.
"아, 근데 아빠라고는 절대로 안 할 겁니다."
"뭐...?"
허윤환의 눈이 떨리기 시작했다. 하랑은 씩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아니, 뭐. 20년 가까이 내 혼자 살게 했는데 설마 이거 한 방으로 아빠 소리 들을라 카는건 아니지요? 에이, 그건 너무 양심없다 아입니까. 그래도 내가 진짜 착해갖고 예전처럼, 아버지처럼 모실게요. 그런데 혹시 잊으셨어요? 내 데리러 왔을 때 뭐라고 했는지."
"......앞으로 나를 평생동안 선생님이라고 부르라고 했지."
허윤환의 표정은 핼쓱해졌다. 하랑은 그 얼굴을 보며 통쾌하다는 듯 활짝 웃었다.
"내 보육원에서 자란 12년 기간 동안은 아빠 소리 듣지 못할 줄 아이소. 허윤환 선생님."
"......."
아마도 하랑에게 있어서는 그게 최고의 복수가 아니었을까.
나는 그저 하랑에게 엄지를 척 들어올려 줄 뿐이었다.
"저, 하, 하랑아, 엄마는...."
"엄마는 엄마지 뭘 신경쓰고 그래요? 엄마가 내 죽일라 칸 건 성주 금마 때문 아닙니까. 그건 성주한테 따져야죠."
"...시간을 돌리고 싶군."
"지금이라도 잘 할 생각을 해야지, 이 인간 아직 정신 못 차리셨네. 검 들어요. 석하랑 대신 내가 패줄테니까."
"뭣."
"아, 쌤요. 나야 아까 그걸로 용서하는데...암만 생각해도 고작 한 방으로는 분이 안 풀려서. 근데 일단 명목상 아버지 패는 불효녀가 될 수 없잖아요? 그래서."
하랑은 내 어깨에 손을 올리며 활짝 웃었다.
"불꽃같이 효도 안마 해드릴 안마 시술사 하나 고용했어요! 저는 엄마랑 이야기 좀 나눠볼테니까, 쌤은 얘랑 좀 놀고 있어요."
"자, 잠깐만, 나는-"
[순순히 궁극기 켜라. 하랑이 괜히 약속장소로 여기를 잡았겠냐.]
"이, 이런-"
나는 하랑(21세) 대신 주먹을 들어올려 광검을 두들겼고, 겸사겸사 석하랑(27세)의 원수도 갚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