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1화 〉1부 16장 16
"그래서 얘는 어쩔 거야?"
"일단 법적 책임은 지게 해야겠죠? 백희아 아가씨가 벼르고 있으니까 곱게 넘어가지는 못할 거예요. 물론 그건 어디까지나 공적인 처벌이고."
나는 유출범의 얼굴을 들어올렸다. 공포에 휩싸인 여자는 내가 익히 잘 알고있는, 원작에서 히로인들을 숱하게 괴롭혔던 파파라치 빌런이었다.
"끼리끼리 논다더니 과거에도, 어휴."
나는 여자의 목덜미를 낚아챈 다음 날개를 펼쳤다.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죽이지는 않을 거예요. 죽이지는. 대신 평생동안 괴롭게 만들어 줄 생각입니다."
경찰서 한복판에 떨어뜨리기 전, 나는 이 빌런이 맛볼 수 있는 최악의 형벌을 내릴 생각이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요. 이쪽으로 영상찍는 전문가가 둘이나 있거든요."
나는 유출범을 들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목표는 중국, 환룡의 거쳐.
"오호, 피닉스 님께서 어쩐일로?"
"당신 주특기를 살릴 때죠."
나는 봉효 백청영에게 정황을 알리고 유출범을 넘겼다. 그는 활짝 웃으며 소매를 걷었다.
"그런 거라면 제 전문이죠. 라스푸틴을 가져오도록 하겠습니다."
청화단 자체 형벌에 따라, 유출범은 큥큥형을 촬영당한 뒤 경찰서에 던져졌다.
영상은 유포되지 않았지만, 평생을 유출당할지도 모른다는 고통 속에서 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날 저녁.
[저는 가루라를 사랑합니다! 제가 생방송으로 가루라와 5분만 사랑을 나누는 걸 보여드리면 믿겠습니까!! 가루라는 괴물이 아닙니다! 어엿한 사람입니다!]
"아니 저 미친."
기자회견장, 홀로 나온 이승형은 정면 돌파를 시도하더라.
"그래야 내 제자답지."
전세계에 생중계로 공개 섹스를 했던 건 참 여러모로 대단했었다. 나는 그 기억을 곱씹으며, 8월 24일 저녁을 홀로 펜트하우스에서 홀로 달밤을 맞이했다. 상념에 잠기고, 밤이 깊어진 때. 나는 귀에 귀걸이처럼 걸어둔 코어를 허공에 집어던졌다.
"...그럼 휴가 전에 저랑 상의 좀 할까요?"
"언제 부르나 했네."
지금까지 내가 했던 일들을 모두 옆에서 지켜본 장본인, 덕배는 시큰둥한 얼굴로 의자에 대충 걸터앉았다.
"그래서 뭐냐? 이번에는 또 누구 후리러 다닐려고? 너 그거 나 염장지르는 거 아니지?"
"아뇨. 오늘은 당신에게 좀 부탁을 해두려고요."
"별 일이네. 네가 부탁을 다하고."
덕배는 떫은 얼굴로 나를 위아래로 훑었다. 마치 내가 변신한 가을이 아닐까 탐색하는 눈초리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당신 말고는 터놓고 이야기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으니까."
"무슨 얘기를 하려고 그려나. 진지잡으면 나 차라리 죽여라."
"나, 아무리 생각해봐도 죽는 각 밖에 안 보여서."
"......."
덕배의 표정이 요상해졌다. 나는 한숨을 푹 내쉬고 덕배에게 내 한탄을 시작했다.
* * *
피닉스 루트 진최종보스전.
이계의 여신, 이유나.
어째서 다른 히로인 루트에서는 성주가 부른 이계신의 혼령이 적으로 나타나지만, 왜 하필 피닉스 루트에서만 이계신이 자신의 화신체인 이유나에게 깃드는가.
그건 창염의 피닉스, 그러니까 화속성 정령인 창염의 생존 여부에 달려있다.
"다른 루...그러니까 미래에서 저는 죽어서 '신관'이라고 하는 남자에게 모든 힘을 주고 소멸해요. 그건 얘기했었죠?"
"그래. 네가 나를 붙잡고 밤낮을 지새우며 미래의 일들을 읊어댔지."
조덕배는 대답만 하고 질문은 하지 않았다. 내가 설명하고, 덕배가 듣는다. 그게 우리 사이에 있었던 대화의 흐름이었다.
"그런데 제가 살아있으면 상황이 달라져요. 구체적으로는 '일곱 정령이 모두 살아있다면' 얘기가 달라지죠."
나는 불꽃을 피워 일곱가지 색으로 만들었다. 지수화풍광암환. 각각의 속성을 대표하는 색의 불꽃이 원형을 그리며 빙그르르 돌기 시작하고, 그 한 가운데에 누군가의 얼굴이 떠올랐다.
"여신 이유나. 지난 번에 유나는 그릇이라고 얘기했었죠? 이계신을 담을 그릇. 하지만 그 그릇만으로는 이계신을 담기에는 부족해요. 그러면 그 에너지가 필요할텐데, 그 에너지를 뭘로 충당하면 좋을까요?"
"큐브."
"맞아요. 큐브가 전부 있으면 이계신을 불러내는 에너지로 작동할 수 있죠. 하지만 큐브가 하나라도 없으면? 한 조각이라도 비어서 그 큐브가 나머지 모든 걸 모아도 제 기능을 할 수 없다면?"
"다른 대체품이 필요하겠지."
"예. 그럼 여기서 질문. 이계신을 불러낼 수 있는 좌표이자 호출기인 큐브를 대체할 수 있는게 뭐가 있을까요? 힌트 드릴게요. 외계에서 지구로 곧장 불러낼 수는 없다고 치면, 뭔가 경유해서 오는 방법이 있지 않겠어요?"
"이미 한 번 점령한 테라를 통해서 넘어오면 된다 이거냐? 너희들 간부들이 차원문으로 넘어온 것처럼?"
"퍼펙트. 정답이에요. 전세계에 열리는 국지적인 차원문, 그리고 마룡이 넘어가면서 공간을 찢어놓는 차원문. 그 모든게 성주가 큐브가 조각조각 쪼개지면서 만들어낸 보험이예요. 설령 자신이 큐브를 발견하지 못하더라도 이계신이 테라에 가서 지구로 넘어올 수 있도록."
그것이 차원문을 반드시 닫아야 하는 근본적인 이유다. 차원문을 열어두면 무한히 괴수가 쏟아지는게 문제가 아니라, 그 차원문이 커지고 커져 겉잡을 수 없이 커진 순간 이계신이 차원문을 통해 직접 발을 디디게 될 것이다.
"이계신은 성간 우주를 떠돌아다니는 괴물이에요. 지구상의 그 어떤 관측장비로도 관측할 수 없는 별세계의 존재죠. 하지만 테라의 좌표는 알아요. 이미 한 번 성주에 의해 한 번 들렸던 행성이고, 성주의 간곡한 요청에 따라 포식을 보류한 곳이니까요."
"성주가 왜 보류를 했대?"
"자기 운명을 안 거죠. 수많은 성주들 중에 하나에 불과한 놈이, 제 머리 조금 똑똑한 걸 잔머리를 굴려서 살아남을 방법을 찾은 거예요. 테라를 자신의 손으로 점령했으니 먹지 말아달라, 대신 다른 행성을 바치겠다. 이계신은 그 제안을 흔쾌히 허락했어요. 그게 성주가 다른 행성을 침공하려고 하던 배경입니다."
"그럼 그 그릇인 이유나는...아니, 이건 좀 있다가."
덕배는 잠시 민머리를 긁적이며 뭔가 이상하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여전히 얼굴을 산적처럼 사나웠다.
"그럼 질문하자. 성주가 테라 경유해서 이계신 부르면 그냥 다 끝나는 거 아니냐? 왜 굳이 이계신을 그...영혼? 정신체만 지구에 부르려고 해?"
"그건 저도 몰라요. 제가 성주도 아닌데. 다만 한 가지 예상되는 부분은 있어요. 성주가 굳이 이계신을 이유나에게 빙의시키려는 이유."
여기서부터는 원작을 플레이한 내 경험, 커뮤니티에서 사람들이 머리를 맞대고 지식을 모은 집단지성, 그리고 거기에 피닉스 루트를 통해 밝혀지는 여신 이유나라는 정보를 종합한 내 추측이다.
"...당신은 좀 듣기 싫을 수도 있을텐데."
"괜찮아. 뭔 말이든."
"성주가 이계신의 영혼을 자신이 제어가능한 여신 이유나에게 집어넣고, 그걸 제멋대로 세뇌해서 사용하려고 하는 거라면? 예. 막말로...성주가 이계신을 이유나에 집어넣어서 따먹으려고 하는 거라면?"
"......."
덕배의 표정이 더할나위없이 구겨졌다. 나도 내 추측의 역겨움과 어불성설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알아요. 듣기도 싫은 거. 그냥 이건 제가 성주에 대해 편견을 가지고 판단하는 추측이에요. 저도 가만히 유나가 성주 따위에게 범해지도록 내버려 둘 생각은 없어요. 이계신이야 뭐 정신체로 범해지든 말든 상관없지만."
"그.... 좀 그렇긴 하네. 성주가 그럴 힘이 있냐?"
"그럴 힘은 없지만, 그를 위해 온갖 연구를 했잖아요?"
나는 일곱 불꽃을 반전시켰다. 원래의 색과는 다른, 정령들 고유의 색이 아닌 다크 레기온의 간부들이 가지고 있는 괴수로서의 색이었다.
"정령을 간부로서 세뇌했고, 그 정령들의 마력을 복제해서 화신 이유나를 만들어냈죠. 그래서 이런 생각이 문득 들었어요. 만약 성주가 이유나를 자유자재로 조종할 수 있는 힘이 있다면?"
"미래에서는 그런 일이 없었냐?"
"네."
성주는 제 1형태에서만 지적 능력을 가져 세뇌빔을 쏠 수 있다.
하지만 그 세뇌빔은 간부들에게나 사용할 수 있는 것이지, 그 힘을 이어받은 다른 히어로나 싱크로로 다른 인간에게 깃든 정령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세뇌빔은 간부들을 특정한 기술이니까.
"그럼 정령형태에서는? 너같이 지금 각성은 했는데 싱크로는 못한 애들."
"지금 있는 네 명 전부다겠죠? 아마 잠깐은 버틸 거예요. 하지만 완벽하게 저항은 못하고,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으면 바로 다시 세뇌당할 거예요."
원작에서는 특정 시간 이후에는 세뇌를 당해 적으로 돌아서는 기믹으로 구현되었다.
단순 동료로서 최종전에 데려간다면 최악의 경우 창염을 제외한 모든 간부들이 적으로 돌아서는 장면까지 나올 수 있었다.
"물론 그것도 그 상황을 눈치 챈 '신관'이 바로 전투원으로 나서서 성주를 2페이즈로 만들었으니 망정이지, 그게 아니었으면 분명 전멸이었을 거예요."
성주와의 초전은 이벤트전이었다.
주인공인 신관이 창염의 힘을 이용해 성주에게 일격을 날린다. 오직 창염에게만 내성이 없는 성주는 제 1형태에서 허망하게 사망하고, 이성을 잃고 폭주하는 제 2형태로 바로 돌입하게 된다.
그게 일반적으로 알려진 최종보스전이었다.
"그러면 여기서 질문. 성주를 불태워야할 사람은 누구?"
"너지."
"그러면 제가 지금 정령인 상태로 덤비면 어떻게 될까요?"
"세뇌빔! 맞고 적으로 돌아서겠네. 야, 그냥 너 죽어라. 그래야 지구가 살아. 아, 아니네? 그러면 내가 죽네. 젠장."
"지금 제가 죽기 싫어서 지금까지 발버둥치고 있는데 그런 말을 하면 어떻게 해요? 제정신이에요?"
창염을 살리기 위해 내가 얼마나 갖은 노력을 다하고 있는데 죽으라니. 최근들어 안 죽어봐서 정신을 차리지 못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덕배는 오히려 내게 검지를 좌우로 흔들며 나를 조롱했다.
"야, 생각해봐. 정령으로서의 존재가 문제라고 한다면 네가 아무나 잡아서 싱크로하면 되잖아. 그러면 해결되는 거 아냐? 고민하지 말고 저기 아무나 잡고 싱크로 해, 싱크로!"
"......."
그건 안 될 말이다.
"그건 불가능해요. 제가 좀 특이한 존재라서."
"싱크로라는 건 결국에는 마음이 맞아야 가능한 거라면서? 그럼 너 좋다고 달려드는 애들이랑 짝짜꿍하라고. 그럼 되잖아?"
"......그러니까 더더욱 안된다는 거죠."
나는 내 심장을 가리켰다.
"제 마음이 그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는데, 싱크로가 가능할 거라고 생각해요?"
"사랑하는 척이라도 하면 안 되냐?"
"네. 암만 사랑하는 척을 해줘도, 결국에는 서로 맞지 않는 부분이 있을 거예요. 그 끝은 오직 파국이죠."
인간과 정령이 진심으로 통하는 순간 싱크로가 이루어진다. 그리고 나는 그 싱크로의 대상으로 내 속에 있는 창염을 간절히 원하고 있다.
"끄응, 다른 싱크로 방법 없어?"
"글쎄요...."
몇 가지 경우를 생각해봤다.
가령, 내가 누군가와 동시에 같은 히로인을 사랑하게 된다거나.
가령, 나를 때려잡고 나를 진심으로 설득하여 반하게 만든다거나.
가령, 내가 끝까지 밀어내고 밀어내도 포기하지 않고 나와의 관계를 발전시켜나가려고 한다거나.
가령, 내가 창염이 아닌 다른 누군가의 매력에 홀리거나.
그리하여 내가 내 속에 있는 창염을 영원히 깨어나오지 못하도록 온전히 묻어버리고, 내가 정령으로서 다른 이에게 깃들어 싱크로 한다거나.
그 모든 경우는 내가 창염을 '포기'하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내가 도저히 선택할 수 없는, 선택해서는 안 되는 결과.
"딱히 없네요."
"그럼 이제 다른 질문."
덕배는 일곱 불꽃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래서 네가 살아있는 거랑, 이유나가 여신으로 각성하는 거랑 무슨 관계가 있는 건데?"
"흡수됩니다. 유나한테. 성주가 내려왔을때, 모든 정령들은 여신 이유나를 구성하는 파츠가 되어요."
덕배의 입이 쩍 벌어졌다. 나는 씁쓸한 미소만 나올 뿐이었다.
"유나가 죽어도 흡수당하고, 성주가 의식을 치뤄도 흡수당하고, 이계신이 결국에 지구에 와도 흡수당해요. 정령의 정수를 복제해서 만들어낸 정령석, <그노시스>가 일곱 정령들을 흡수해서 이계신을 부르는 큐브의 에너지를 대체하게 될 거예요. 일곱 명 모두 흡수당하면 그릇의 에너지가 안정화되고, 유나는 이계의 여신으로 각성하게 되겠죠. 어느 하나라도 없으면 불안정해져서 강림이 실패하게 되겠죠. 밸런스가 무너지니까."
그것이 성주의 노림수이자 정령들의 운명이었다.
"일곱 정령들을 하나로 모아 만든 코어, 그게 이계신의 큐브를 대체할 심장이에요."
그리고 그 운명을 피할 방법은 단 하나.
싱크로.
"싱크로한 정령들은 흡수를 피할 수 있어요."
원작, 피닉스 루트를 제외한 모든 루트에서는 주인공인 신관이 창염을 전해받아 사용하는 것에 불과했다.
그리고 피닉스 루트에서는 창염의 피닉스가 살아남아서 주인공과 싱크로를 하여 신화에 이르렀다.
이계의 여신과 똑같은 신위(神位)을 가져야만이, 오롯한 존재로서 자신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래서 유나에게 흡수당하기 전에 빨리 싱크로 해야하는데."
그 모든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창염은 나와의 싱크로를 거부하고 있었다. 나는 여전히 창염의 속내에 대해 알지 못했다.
자신은 정해진 운명에 따라 죽기 싫다면서, 유일한 살 길인 나와의 싱크로를 한사코 거부하고 있다.
그리고 창염은 여전히 자신이 가진 모순의 이유를 내게 숨기고 있었다.
내 안.
푸흐흐.
창염이 비웃는 듯한 목소리가 환청처럼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