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7화 〉1부 16장 12
8월 21일.
나는 원래 중국 개입 문제에 관하여 환룡과 논의를 나눌 계획이었지만, 결국 환룡이랑 잡담만 하고 돌아왔다.
만주에 사는 이들에 대해서는 봉효 백청영이 알아서 하겠다고 연락을 취했고, 나는 두 발 뻗고 환룡이 내어준 객실에서 잠들었다.
그런데 역시 내심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
샤오린.
그저 뉴클리언을 상대하는 것으로 만족한다던 여인은 정말로 뉴클리언을 잡는 것을 제 보상으로 삼았다.
당연히 나로서는 뭔가 제대로 된 보상을 하고 싶었지만, 샤오린에게는 보상이라고 할만한 건 적당한게 없었다.
그래서 나는 샤오린에게 내 개인적으로 보상을 하고자 연락을 넣었다. 샤오린은 흔쾌히 내 연락을 받았다.
-무슨 일로 전화를 주셨나요? 또 상대할 강자가 있는 건가요?
"아, 다른 건 아니고요. 지난 번에 뉴클리언 레이드 왔던 거 고마워서 그거 선물 주러 왔어요."
-선물이라니. 당치도 않습니다. 저는 그저 제가 석하랑보다 강하다는 것을 입증 받은 것만으로도 족합니다.
샤오린은 은은한 미소와 함께 내 선물을 거절했다. 하지만 나는 샤오린을 이끌어낼 마법의 주문을 알고있다.
"샤오린. 몸으로 갚으려고 하는데 괜찮아요?"
-예?
"지금 좌표 찍어줄게요. 여기로 와요."
나는 샤오린의 기어에 내 위치 정보를 전송했다. 옛 호로관 터. 과거 캘리펠라를 잡았던 곳에서 나는 샤오린을 맞이할 준비를 마쳤다.
"한 판 뜰래요?"
-그 한 판 이라는 말씀이 설마!
"10분내로 오면 풀파워로 싸워드릴게요."
뚝.
샤오린은 연락이 끊어졌고, 나는 마도기어의 알람을 맞춰 느긋하게 바닥에 누웠다. 사람의 인적이 드문 장소로서 잡초가 우거진 덕분에 충분한 쿠션이 되었다.
7분.
4분.
시간은 하염없이 흘러갔다. 나는 느긋하게 누워 샤오린이 올 때 까지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리스 갈 때 어쩌지."
러시아에 라스푸틴이라는 악재가 있다면, 그리스에도 마찬가지로 제작진의 악의로 똘똘 뭉친 존재가 하나 있다. 여러모로 이름을 언급하기도 싫은 존재로서, 여자를 강제로 취하여 괴인을 낳게하는 그 빌런을 상대로 사람들은 <번식왕 Z>라고 불렀다.
"순서상 히드라가 나올 때긴 한데."
그리스 파르테논 신전. 이름과 그닥 관계는 없지만, 히드라가 지륜으로서 각성하는 장소가 바로 그곳이었다. 타지마할에 카르나가 있었던 것처럼, 히드라도 그곳에 있을 개연성이 높았다.
'히드라는 침착해. 안 나올 거다.'
생각이 깊고, 속도 깊다. 대마도 어택 당시 교묘히 펜릴의 양동을 숨겼던 걸 생각하면 히드라는 먼저 나오지 않을 확률이 높았다.
'그러니 혹할만한 조건이 필요해.'
마치 샤오린이 지금 비행허가를 개무시하고 달려오듯, 눈이 뒤집힐만큼 적절한 회유 대상이 있어야했다.
'당장은 생각이 나지 않으니.'
"일단 싸우고 나서 생각해보는 걸로."
화륵.
나는 두 팔을 부분괴인화하여 건틀릿을 만들어냈다. 결계 너머, 하늘을 달리는 붉은 궤적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대마도도 잘랐는데 결계 정도는 잘라줘야겠죠?"
서걱.
내 결계가 잘렸다. 샤오린은 순수한 검기로 결계를 잘라냈다.
푸르르.
적토에 탄 샤오린은 자다 깨어난 차림으로 내 앞에 나타났다. 용을 형상화한듯한 캐릭터가 후드로 씌워진 캐릭터 잠옷을 벗지도 않고, 샤오린은 적토만 달랑 대동하여 내 앞에 섰다.
시간은 9분 58초.
샤오린은 싱긋 웃으며 언월도를 어깨에 걸쳤다. 샤오린은 지난 전투의 경함을 바탕으로 자신의 무기를 투명언월도로 확정했다.
"피닉스 님, 전력으로 부탁드립니다!"
"좋아요. 오세요."
뉴클리언 레이드 이후. 이렇다 할 전투다 없어서 굶주리고 있던 건 샤오린 뿐만이 아니었다.
석하랑이 누리와의 부산 데이트로 아쉬움을 달래고, 카르나가 온갖 여자들을 후리고 다니는 동안, 샤오린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투명화 상태로 어딘가를 돌아다니며 욕구를 충족하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채워지지 않는 전투의 갈증.
그것을 내가 해소해주기 위해 이곳에 왔다.
"이기면 원하는 대로 하게 해드릴게요."
"바라던 바-!!"
샤오린이 적토를 탄 채로 내게 달려들었다. 나는 마력으로 변환된 마도기어에서 TAT를 꺼냈다.
탕.
샤오린은 초격을 수월하게 피해냈고, 그것이 우리의 전투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 * *
"하아, 하아."
약 세 시간.
나는 오랜만에 운장 콤비를 상대로 전력으로 맞서 싸웠다. 비록 전체 괴인화는 아니었지만, 두 팔만 부분괴인화로 바꾸어 싸워도 충분했다.
"이걸로 만족하나요?"
샤오린은 바닥에 대자로 뻗어있었다. 땀에 흠뻑 절어있었고, 적토는 진작에 나가떨어진지 오래였다.
"하하, 하...."
샤오린은 두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잠시 몸을 떠는게 울분을 삼키는 것 같아,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무예의 상승욕구와 전투에 대한 승리욕이 강한 만큼, 아무리 강한 자를 상대로 한다고 하더라도 패배는 달갑지 않았을 것이다.
"...흐끅!"
나는 샤오린이 홀로 울도록, 그리고 울음을 그칠 때까지 옆에서 조용히 기다렸다. 10분 정도 시간이 지나자, 샤오린은 울음을 그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피드백 부탁드립니다."
샤오린은 반성도 빨랐다. 나는 샤오린과 마주 앉아 전투에 대한 피드백을 나누었다.
"저와 적토의 합은 딱 두 팔 만큼입니까?"
"부분괴인화가 당신들의 전력을 말하는 건 아니에요. 오히려 예전보다 훨씬 합이 좋아졌어요. 순수하게 둘이서 S+급의 전력을 낼 수 있을만큼."
"그건...."
"네. 적토가 당신의 움직임을 따라가지 못하는 거죠."
적토는 A급 유니콘 괴수가 기적적인 확률로 괴수에서 이능력자로 각성한 존재였다. 즉, 적토가 S급이 되지 않으면 샤오린의 움직임을 따라갈 수 없었다.
"전 오히려 이상한 걸요. 왜 굳이 적토를 타고 싸움을 걸었죠?"
"...초심으로 돌아가자는 생각에서."
"아하."
내가 처음 졸전을 펼쳤던 샤오린 전. 내가 여러모로 부끄럽기까지 했던 전투였고, 샤오린도 수치스러웠던 전투였다.
하지만 우리 둘 다 그 때와는 확연히 다른 존재가 되었다. 나는 조금 더 정교하게 피닉스의 힘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고, 샤오린의 무위는 더욱 날카롭게 진화했다.
샤오린의 성장 폭은 폭발적이었고, 나는 그저 정체되어 있을 뿐이었다.
"언젠가 당신도 순수하게 대련으로는 나를 뛰어넘을 계기가 있을 거예요."
"대련으로 말입니까? 하지만 피닉스 님, 당신께서는 이쪽이 주된 전투 방법이 아니시죠?"
"네."
창염의 말마따나, 원거리전에 특화된 존재가 주먹쥐고 힘법사를 하는 꼴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거의 대부분은 스펙으로 이겼다.
"그렇다면 정말 좋은 스승을 두셨던 것 같습니다."
"한 번 싸워보실래요?"
"예?"
"제 무술적 스승이랑. 솔직히 저보다도 막싸우는 건 잘 할 거예요."
투귀라고 불러도 좋고, 개싸움꾼이라고 불러도 좋다. 그는 여러모로 근접전에서 물불 가리지 않는 존재이니. 나는 풍속성 SS급 코어를 꺼냈다.
"이건?"
"뉴클리언 레이드의 보상. 나머지는 전부 히카리에게 맡겼고, 이건 아주 특별한 물건이죠. 마력적으로 가치는 없어요. 너무 많은 마력을 담고 있어서."
나는 샤오린에게 SS급 코어를 건넸다. 샤오린은 그걸 쥐고 마력을 느끼며 입을 벌렸다.
"아...."
"이 세상 어떤 폭탄이랑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만큼 많은 에너지를 가지고 있죠. 안정되어 있으니까 절대 폭발할 일은 없지만, 중요한 건 그 안에 있는 하나의 작은 세계에요."
나는 코어의 표면을 손가락으로 톡톡 건드렸다.
"뉴클리언 레이드의 진짜 보상은 이 안에 있어요. 한 번 싸워보실래요? 제 무술적 스승이랑?"
화권(火拳), 김철수.
집정관에 의해 이름을 이어받은 이승형이 아닌, 평양사태 이전 광검보다 더 강했던 대한민국 최강의 남자.
"어느정도로 강합니까?"
"주먹 한 방으로 뉴클리언의 일곱 분신을 모두 때려잡고, 본체와 1:1로 이길뻔 했다가 패배한 남자."
사인은 방사능 피폭.
당시 유일하게 무신에 필적했던 남자는 전투력은 SS급이었으나, 마력은 S급에 불과했다.
뉴클리언을 혼자 제압하다보니 체내에 쌓이는 방사능을 어찌할 방법이 없었고, 결국 그는 일격을 남겨두고 누적된 방사능으로 패배하고 말았다.
"...그럼 그 분과 싸울 수 있는 겁니까?"
"네. 이길 때 까지 재도전 가능하고, 이기면 자신의 전투 방법에 대해서 가르쳐 줄 거예요."
"그런 건 필요 없습니다. 피닉스 님, 한 가지 부탁을 들어주시겠습니까?"
"뭔데요?"
"...제가 이기고 오면 한 가지 부탁을 들어달라는 부탁입니다."
"뭘 새삼스럽게."
그 정도는 얼마든지 들어줄 수 있다. 나는 샤오린에게 코어를 건넸고, 샤오린은 코어를 움켜쥐었다.
"이제 뭐라고 하면 됩니까?"
"마력을 안에 흘려넣기만 하면 돼요. 자, 다녀오세요."
"......."
샤오린은 아무 의심없이 마력을 안으로 집어넣었다. 코어에서 마력이 급격히 피어오르며 샤오린의 몸을 집어삼켰다.
"이제 1시간...."
누구도 관여할 수 없는 전투가 시작될 것이다. 나는 한 때 세계 최강이었던 남자와의 싸움을 샤오린에게 양보했고, 샤오린이라면 분명.
'이기겠지.'
과연 얼마만에 승리를 따낼 수 있을까. 나는 샤오린이 반드시 승리를 따내기를 바랐다.
결코, 화권 김철수에 대한 개인적인 원한은 없었다.
* * *
콰앙!
주먹이 날아온다. 불꽃을 머금은 일격은 샤오린이 익히 알고있던 궤적과 너무나도 비슷했다. 샤오린은 언월도의 창대로 주먹을 튕겨낸 뒤, 그 반탄력을 이용해 언월도를 쳐올렸다.
"크윽!"
수염이 덮수룩한 남자는 급히 고개를 뒤로 젖혔다. 보이지 않는 언월도의 날이 남자의 얼굴을 잘라낼 뻔 했다. 남자는 주먹을 회수해 다시 뻗었다.
이번에는 왼쪽. 허리에 모든 힘을 실어 횡으로 날리는 주먹은 분명 맞으면 곱게 다치는 걸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샤오린은 그걸 너무나도 쉽게 피해냈다.
부--웅!!
"뭐?!"
샤오린이 사라졌다. 남자의 주먹은 허공을 갈랐고, 남자는 황급히 주변에 기감을 퍼뜨려 샤오린의 흔적을 찾으려했다.
적의 마력은, 정면. 샤오린은 여전히 앞에 있었다.
"?!"
분명 주먹으로 휘둘렀던 곳이건만, 샤오린은 갑자기 다시 나타나서 다리를 접었다 쭉 뻗었다. 남자의 가슴팍을 정확히 가격한 킥을 날린 샤오린은 그 반동을 이용해 높이 뛰어올랐고, 남자는 뒤로 두 걸음 물러서며 가슴을 붙잡았다.
"크윽.... 네 년, 도대체 뭐냐!"
"알 필요 없습니다."
"비켜라! 나는 당장 복수를 해야해!"
"복수?"
샤오린은 남자가 무슨 말을 하는지 순간 이해가 가지 않았다. 머리가 산발이 된 남자는 귀기 어린 눈빛으로 피를 토하듯 소리질렀다.
"평양의 그 괴물, 그 개새끼에게 복수를 해야한다고!"
"아, 뉴클리언 말씀이십니까?"
샤오린은 그제서야 이 세계의 구성이 어떻게 되었는지 깨달았다. 복수심에 가득찬 남자의 정신과 원념은 뉴클리언의 코어 속에 깃들어있었다. 그리고 그 복수심은 아직까지도 풀리지 않고 있었다.
다만.
"이미 제가 죽였습니다만."
"뭐...라고...."
샤오린은 언월도를 어깨에 올리며 여유를 부렸다.
"여덟마리로 분화되고, 녹색의 강아지같은 녀석. 이미 죽였습니다."
"......진짜냐."
"네."
남자의 귀기가 한 풀 꺾였다. 그리고 남자는 한참동안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으하하하하!!"
배를 잡으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 개새끼, 결국에는 죽었구나! 으하하, 9년, 9년이나 걸렸어! 으하하, 그래, 너는 누구냐? 어디 사람이야? 혹시 강릉인가?"
"북경인데요."
"......?"
"중국인입니다만."
"뭐...라고...!"
남자, 화권 김철수의 표정이 더할나위없이 일그러졌다.
"뗀놈이 그 괴물을 잡았다고?! 인정할 수 없다! 이 놈----!!"
"인정하고 자시고...."
정확히는 한국계 외계인 둘, 인도계 외계인 하나, 그리고 중국계 외계인 하나가 함께 힘을 합하여 뉴클리언을 쓰러뜨렸지만, 샤오린은 그냥 조용히 화권의 분노를 이용하기로 했다.
화권의 권격은 분명히, 피닉스의 권격과 너무나도 유사했다. 피닉스는 화권을 스승이라 칭했지만, 화권의 권격은 분명 피닉스의 것보다 조잡했다.
"역시, 그 분이 당신보다 더 강해요."
"알 수 없는 소리하지 마라!"
"저는 말입니다."
이미 샤오린은 그와의 전투는 안중에도 없었다.
"이 싸움이 끝나면, 청혼할 겁니다."
서걱.
샤오린의 언월도가 달빛처럼 그어졌다.
* * *
한 시간이 지났다.
나는 샤오린이 왜 나오지 않을까 전전긍긍했고, 의식을 차린 적토도 내 눈치를 보며 옆에서 주인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우웅.
녹색의 코어가 반짝이며 거대한 마력이 터져나왔다. 회색의 마력을 가득 머금은 샤오린은 몸 구석구석이 그을려있었지만, 별다른 상처는 없었다.
"어땠어요?"
"정말 이 남자가 2012년 최강이었습니까?"
"네."
"안타깝군요. 살아있었다면 더 강한 상태로 만날 수 있었을 것 같습니다만."
샤오린은 허탈하게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얼굴만 봐도 전황이 어땠는지 짐작 가능했다.
"아무래도 당신 지금 전력으로는 쉬운 상대였죠?"
"예."
"그야 당신이 지금 세계 3위니까 그런 거죠."
나는 샤오린에게 다시금 파워 랭킹을 상기시켰다.
"내가 1위, 카르나가 2위. 그리고 이제 당신이랑 광검이 공동 3등 되겠네요."
"아직 넘어야할 산이 하나 더 있군요. 좋습니다. 피닉스 님, 이제 부탁을 말씀드리려 합니다만."
샤오린은 코어를 건네며 발그레 미소지었다.
"아주 나중에, 피닉스 님을 쓰러뜨리고 나서 부탁을 드리겠습니다."
"혹시나 그럴 일도 없겠지만, 저를 대련으로 이기고 나서 그 자리에서 바로 청혼하고 범하겠다는 것만 아니면 돼요."
"......."
"네가 그러면 그렇지."
철컥.
나는 샤오린과 다시 싸움을 붙었고, 무난히 승리를 거머쥐었다.
샤오린은 결국 프로포즈하겠다는 부탁은 철회했다.
"후후, 그럼 이제 이기면 피닉스 님을 범할 수 있게 되겠군요!"
"......."
싱크로라도 안 하면 절대로 이길 수 없겠지만, 나는 괜히 두려워졌다.
"저, 반드시 강해지겠습니다!"
"예, 예. 꼭 강해지세요. 그럼 한 판 더?"
"벌써 기회를? 좋습니다!"
8월 21일. 나는 샤오린과 해가 떨어지고 달이 하늘에 걸릴 때까지 싸우고 또 싸웠다.
샤오린은 전투의 과정에서 더욱 빠르게 성장했고, 나도 며칠 쉬면서 잊었던 전투의 감을 날카롭게 되살렸다.
하지만, 아무래도 이제는 방심해서는 안 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