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5화 〉1부 16장 10
8월 20일.
대마도가 후쿠오카에 무사히 안착했건말건,
은하대학교 합격자 발표에 따라 대한민국이 뒤집어지건 말건,
나는 닷새 사이에 이루어진 대국민 북진이 드디어 끝났음을 알게 되었다.
히어로, 헌터, 갱생 빌런, 군인, 일반인, 괴인, 괴수-가루라-할 것 없이 한반도에 사는 모두가 북한 땅을 온전히 한국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밤낮으로 북으로 진격했고, 최전방의 히어로들이 가장 먼저 백두산 고지를 점령한 것을 끝으로 소위 '깃발꼽기'는 끝났다.
여기도 태극기.
저기도 태극기.
선의철이 소나무 부대를 동원하며 마구잡이로 찍어냈던 태극기는 갈곳없이 공장 창고에서 썩어가고 있었고, 백희아는 그걸 발견하자마자 바로 북진하는 히어로들에게 쥐어주었다.
선봉의 히어로들이 깃발을 꼽고, 헌터들이 주변의 잔존 괴수를 소탕하고, 그 소탕된 지역마다 군인들이 텐트를 치며 임시 거점을 마련했다.
-여기는 우리 땅이다!
중국의 당국과 러시아 지도부는 평양 정벌에 대하여 소극적인 입장이었다. 대외적으로는 석하랑이 단독으로 평양을 공략했다는 명분이 앞섰고, 공개적으로 북한 땅을 점령하자고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불만은 스멀스멀 기어올라왔다.
그 시각, 샤오린은 어디서 무엇을 하였는가?
그 시각, 루살카는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후자야 모스크바에 있었으니 차치하고, 샤오린의 신출귀몰한 이동력은 이미 널리 알려진 상황이었다. 그래서 나는 중국의 용태를 살필 겸, 겸사겸사 베이징으로 날아올랐다.
"오늘은 무슨 일이야?"
모처럼, 환룡이 회색 소녀의 본 모습으로 나를 맞이했다.
***
"편하게 앉아. 편하게 있어도 되고. 편하게 벗어도 되고."
"마지막은 사양하지."
환룡은 편한 복장으로 나를 맞이했다. 그 복장이라는게 거의 잠옷에 가까운 상태였고, 나는 환룡의 장원에서 환룡의 개인실에까지 초대를 받았다.
"당국에서는 개입하지 않는다고 못을 박았어."
"그런 고맙네."
"모택평이 직접 나서서 딱 잘라 말하니까 다들 수그러들더라. 자존심도 없이 남의 것을 탐하려 드냐고 대놓고 호통을 쳤지. 그랬더니 아무 말도 못하더라."
"샤오린은요?"
대외적으로 샤오린은 뉴클리언 레이드에 나서지 않았다. 2페이즈에 돌입해서는 석하랑보다 더 많은, 무려 세 마리의 뉴클리언 분신을 잡았음에도 샤오린은 자신의 지분을 요구하지 않았다.
"사람들 다 난리던데. 샤오린은 왜 안 나서고 뭘 했느냐고."
"아는 사람들 다 아는 걸. 샤오린이 운장 시절에 평양 가려다가 너한테 잡힌 거. 이런 썰이 돌더라."
환룡은 장난스레 웃으며 마도기어로 네트워크의 글을 내게 보였다.
"샤오린이 전선에 나서지 못하는 이유가, 사실은 평양에서 그랬던 것처럼 우리가 보이지 않는 어딘가에서 샤오린과 피닉스가 치고받았기 때문이라던데?"
"제법 그럴듯한 혹세무민이군."
동시에 나와 샤오린의 부재를 적절히 속일만한 루머였다. 나는 바로 해당 정보를 히카리와 유하에게 날렸고, 둘은 이제 그걸 적절히 살을 덧붙여 진실로 위장하게 될 것이다.
"그럼 피닉스 이미지 중국에서 개판날텐데 괜찮아?"
"알게 뭐냐."
"그건 그렇네. 정령이 지구에서 태어난 사람도 아니고. 아, 원래는 한국인이었지? 후후."
"...누가 들을라. 조심해."
주변에 아무도 없기에 내가 말을 편하게 하는 것도 있지만, 환룡과의 대화는 더욱 각별히 신경을 써야했다. 창염의 안에 피닉스라는 별개의 존재가 깃들어있다는 것은 오직 정령들과 간부들만이 아는 비밀아닌 비밀이었다. 환룡은 차를 홀짝이며 어깨를 으쓱였다.
"들어도 이제 괜찮지 않아? 모두가 이미 신경을 안 쓰고 있어. 네가 원래 인간이든 아니면 테라의 정령이든, 창염 본인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중요치 않은 걸."
"말이라도 고맙네."
"후후, 이거 나 점수 딴 건가? 창염한테 고마워해야겠어."
"......후우."
나는 내 앞에 말린 딸기를 우려낸 차를 한모금 들이켰다. 창염은 왜 얘한테 그런 기억을 보여줘서 이렇게 만든 건지 원. 그런 내 생각을 읽었는지, 환룡은 실실 웃으며 한 손으로 턱을 괴며 고개를 살짝 옆으로 뉘였다.
"네가 창염 본인이 아니라서 정말로 다행이야."
"그건 나한테는 칭찬이지만 창염에게는 모욕이다."
"예, 예. 창염의 피닉스 님. 자기는 욕해도 되지만 창염은 절대로 욕 먹으면 안 된다 이거지? 근데 나 창염 욕한 거 아니다? 나를 어쩌면 영원히 사랑해줄지도 모르는 사람과 만나서 기쁜 것 뿐이야. 후후, 찔렸지?"
"......."
살면서 처음으로 환룡에게 말렸다. 말릴 수 밖에 없었다. 내가 지금 대화를 나누고 있는 환룡은 내 기억속의 혼돈환룡과 너무나도 달랐다. 걔는 이렇게 열심히 뭔가를 하지 않았다.
"역시 창염이 괜히 기억을 보여줬어. 안 그랬으면 만사 귀찮아하며 그냥 누워있기만 했을텐데."
"그런 기억을 보고 가만히 있을 수 없지. 노는 건 5년 뒤에 열심히 놀면 돼. 영원한 사랑이 예정된 미래가 있는데, 5년 동안 놀다가 패배를 맛볼 수는 없잖아?"
"그건 그렇지. 마음을 고쳐먹어서 고맙다."
"고쳐먹다니? 미뤄둔 것 뿐이야. 나는 언제나 놀고 싶은 거라고. 이왕이면 너랑, 가을이랑, 샤오린이랑, 백청영이랑, 환룡단의 단원들이랑."
"뒤로 갈수록 좀 그렇기는 하지만 좋아. 그럼 이제 내가 질문 하나 하자."
나는 환룡의 위아래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환룡은 자신의 잠옷을 훑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꼴려?"
"너 왜 모택평에 안 깃들어있냐."
"꼴리냐고 묻는 거에 대답 안하는 거 보니까 꼴리긴 하나보네. 모택평은 지금 휴식중이야."
"...왜?"
모택평은 가만히 놔두면 썩어 문드러지는 시체가 아니었던가. 환룡은 마도기어로 모택평의 생체 신호를 내게 보였다. 이제는 완전한 환룡의 육체가 된 모택평의 심장에는 검은 마력이 빛나는 코어가 박혀있었다.
"......모택평의 시체로 기거이 사도로 만들었군."
"의지는 없어. 그냥 코어를 박아넣은 거니까. 덕분에 코어의 마력을 쓸 때는 휴면 중이야. 모택평이 자는 동안 나는 밖에 나와서 이렇게 개인 시간을 보내는 거지."
환룡은 차를 다시 홀짝이며 시선을 돌렸다. 뭔가 숨기는 게 있는 눈치였고, 나는 추궁할까 말까 하다가 참았다. 하지만 환룡이 오히려 내 시선을 눈치채고 역으로 물어왔다.
"뭐하면서 지내는지 안 물어봐?"
"대충 감이 오니까."
"어떻게 지낼 것 같아?"
"루살카나 카르나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너는 아마 모택평으로 열심히 박고 다녔을 거다."
뜨끔. 환룡은 찻잔으로 입을 가렸다. 하지만 순간적으로 치켜올라간 눈썹을 나는 봐버렸다.
"정령들은 말이야, 간부일 때는 얌전하다가 정령으로 각성하면서 아주 성욕이 폭발하지. 루살카는 기둥서방이 있고, 카르나는...아주 인간답게 살아가고 있는 중이고. 얼마전에는 아이돌과 잠자리를 가졌다고 하더라."
"와, 대단하네. 그 아이돌은 뭘로 이겼대? 개천광이든 카르나든 자존심 때문에 그냥 벌리지는 않았을텐데."
"벌린게 아니고 박은 거다. 그 녀석, 쓸데없이 남성형의 존재를 알리는 바람에.... 쯧."
"아! 후후, 너, 푸흡, 그거 숨기고 있었구나?"
"......괴인형이 남성형으로 사기치고 다녔는데, 그게 카르나 때문에 완전히 들통났어. 지금 가는 곳마다 남성형으로 바꿔보라고 아주 난리다 난리."
일부 여성 유저층의 지갑에서 돈을 뽑아보겠다고 뇌절하고 판매한 DLC가 원수지. 창염을 제외한 모든 정령들은 '남성형'이 존재한다. 엄연히 인간으로 태어난 히로인들을 바꿀 수는 없으니, 정령의 육체는 마력으로 형성되는 것이니 남성형으로 바꿀 수 있지 않느냐는 논리에서 시작된 참극이었다.
펜릴, 아지다하타, 히드라, 카르나.
네 명의 남성형은 불티나게 팔렸고, 나도 결국 마지막에 가서 구매는 했다. 구매만 했다. 구매만 하고 영원히 봉인했다.
"나야 뭐 남자 몸에 빙의 가능하니까 상관은 없는데…. 너는 여러모로 그렇겠다."
"뭐가."
"남자 모습으로 변해도 창염의 남성형이...될 리가 없구나. 창염이 남자 몸을 만들었을 리가 없지. 걔가 자기 몸 얼마나 아끼는데."
".......그렇긴 하지."
공식 설정이기도 했다. 창염은 남성형 몸 따위 만들지 않았다. 애초에 괴인형도 공개되지 않은 유일한 존재였다.
"혹시 쌓이면 언제든지 얘기해. 나도 어떤 방식이든지 네가 원하는 대로 해줄 수 있어."
"여기도 온갖 방법으로 다 가능하네. 미치겠어, 정말."
남녀전환이 가능한 카르나.
남녀변신에 촉수플레이까지 가능한 천가을.
남녀 인형을 동원 가능한 은유하.
환룡은 아예 빙의를 해버리니 별반 다를 게 없었다. 그리고 환룡에게는 아주 무서운 물건이 남아있다.
"...그건 지금 어디에 있지?"
"...아, 라스푸틴?"
"그래."
여러모로 꺼내기 힘든 화제였지만 궁금한 건 어쩔 수 없었다. 라스푸틴은 이능력자라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누구나 대물로 만들어주는 장착형 무기니까.
"지금 흑사갈에 쓰고 있을 걸? 환룡단 애들은 지금 바쁘니까 그렇고, 캘리펠라가 장착해서 쓰고 있을 거야."
"허어…."
머릿속으로 쉽게 상상이 가지 않았다.
"어떻게 보러갈래?"
"아니, 됐다."
"아니면 내가 가져올까…?"
환룡이 몸을 일으켰다. 영체 특유의 미끄러지는 움직임으로 테이블 위로 올라오더니, 의자에 앉은 내 위에 걸터앉았다. 나는 환룡과 마주보듯 앉았다.
"라스푸틴 끼우고 하면 창염도 뭐라 안 할 것 같은데."
"본인이 허락하겠냐."
"잠깐만."
환룡이 나를 향해 입을 맞추듯 얼굴을 들이밀었다. 환룡은 또 예고 없이 내 정신속으로 들어간 듯 했고, 금방 튕겨져 나갈-
"허락받았어!"
"거짓말."
환룡은 활짝 웃으며 마구잡이로 날뛰었다. 나는 섣부르게 환룡의 말을 신뢰할 수가 없었다.
"창염이 그걸 허락했다고? 웃기지도 않는군."
"백청화로 변신해서 라스푸틴을 장착한 나한테 뒤로 박히는 거라면 오케이래!"
"미쳤냐?"
"......."
환룡이 상처를 받은 얼굴로 그대로 굳어버렸다. 나는 괜히 미안해서 헛기침을 하고 첨언했다.
"너한테 한 소리야."
"와, 진짜 너무하네 정말! 내가 모처럼 모택평으로 단련한 테크닉을 보여주겠다는데!"
"나는 박는 사람이지 박히는 사람이 아니다."
박히는 순간 나는 죽어버릴 것이다.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실체를 갖춘 환룡은 테이블을 붙잡고 허리를 격하게 튕겼다.
"......좀 하는데."
"그치? 나 잘하지? 그러니까 라스푸틴 가져올게!"
"근데 나보다 못하니까 커트. 나한테 박을 생각 일절 하지마라. 차라리 내가 창염한테 허락받고 너한테 박고말지."
"......당장 창염한테 허락 안 받고 뭐하는 거야?"
환룡은 더없이 진지한 얼굴로 내 멱살을 쥐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손가락을 비볐다.
"내가 부른다고 나올 분이 아니십니다. 더욱이 그런 걸로 부탁한다고 들어줄 것도 아닌 것 같고."
라스푸틴에 뒤를 당할 각오가 되어있다면 허락을 해주겠다는 말과 무어 다르단 말인가. 나는 그런 각오를 하지도 않았고, 생각도 전혀 없었다.
"나중에 창염 만나면 물어볼게. 됐지? 진정해라."
"네가 마음만 바꿔먹으면 되는 거잖아, 이 화상아!"
"마음을 바꿔? 웃기고 있네. 변절할 바에는 차라리 라스푸틴에 박히고 말지. 나 지조 있는 사람이야. 이거 왜 이래?"
"독한 새끼."
"칭찬으로 받아들이마."
나는 환룡을 밀어냈다. 환룡은 끝까지 버팅기며 내게서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결국 나는 환룡을 붙잡은 상태로 침대로 달려가 환룡을 침대에 메다꽂고 나서야 씨름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누워서 잠이나 자라. 너 그거 제일 잘하잖아."
"아, 그거 신호인가? 자는 사이에 박겠다는 거지? 후후, 알겠어."
"누가 정령 아니랄까봐 여기도 아주 발정났군. 젠장."
이쯤되면 정령으로 각성시키지 말고 간부로서의 자아를 유지시킨 채 성주에게 세뇌를 안 당하는 방법을 찾는게 더 빠를지도 모르겠다.
"됐다. 원탁회의 시작할 때 까지는 맘껏 박고 싸라. 그 뒤에는 더없이 바빠질테니."
"샤오린한테 듣기는 했는데, 드디어 공식적으로 선언을 하려고 하나봐?"
"그래. 하나부터 끝까지 전부 다."
세계 멸망 조직과 그 간부들의 구성, 그리고 세계 공적 다크 레기온에 대한 범지구적 '토벌'선언.
원래는 뉴클리언 레이드 직후에 서울에서 원탁이 선언했어야 할 일이 아르엘의 가출에 따라 미뤄지게 되었다. 그에 따라 모든 계획은 잠정 연기되었다.
"모처럼 온 김에 얘기하지. 26일부터 28일까지 다함께 어디 섬에 모여서 휴양을 즐길 생각이다. 생각있으면 놀러와."
"모택평도 휴가 보내면 되겠네. 응, 나도 갈게. 수영하는 거지? 뇌살하면 되는 건가?"
환룡은 잠옷 앞 단추를 살짝 풀며 요염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나는 전혀 감흥이 없었다. 환룡의 육체미는 0에 가까웠다. 나보다 10cm는 더 작은 키로 그런 행동을 해봐야, 어린애가 도발하는 것 정도일 뿐이었다.
그리고 그런 도발은 이미 김누리를 통해 너무나도 많이 익숙해졌다.
"너 혼자서는 역부족이다."
"흐흥, 혼자서 안 되면 둘이서 동시에 공략하면 되지! 누구랑 같이 할래? 샤오린? 아니면 가을이? 아니면 둘이 동시에? 셋이서? 말만 해! 아니면 그 유나라는 애로 빙의할까?"
"걔 아직 여고생이다. 아. 너 나중에 한국오면 그 때 나랑 유나 만나러 가자."
환룡은 정신방벽이 단단하니까 유나의 마성에 쉽게 홀리지 않을 것이다.
"유나…."
환룡은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유나의 이름을 읊었다.
"나랑 걔랑 싱크로하면 창염도 이길 수 있을 것 같은데?"
"유나랑 싱크로? 어림도 없지."
나는 확신했다.
"너 24시간 중에 자는 시간 빼고 공부할 자신 있냐?"
"그, 그치만 미래에는 유나가 나랑 싱크로 해줬다고!"
"그건 너한테 희생한 거야. 언젠가는 자기 영혼 먹힐 거 알면서도 몸을 넘겨준 거라고."
"아…."
환룡은 울상을 지었다.
"유나는...천사야?"
"아니."
나는 바로 정정했다.
"여신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