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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염의 피닉스-369화 (369/1,497)

〈 369화 〉1부 16장 3

석하랑이 머무는 호텔에서 뛰쳐나온 나는 조식을 먹기 위해 우리 아지트로 돌아왔다. 아직 서울에 남은 간부들은 한창 바쁘게 움직이느라 간부들의 방에는 사람이 일찌감치 없었고, 나는 식당으로 내려왔다.

"아, 한 명 있다."

"......?"

가을은 막 입에 넣으려던 빵을 옆으로 내려놓았다. 이제 막 아침을 먹기 시작한 건지 간단한 빵과 스프가 테이블 앞에 놓여있었다.

"그것만 먹어서 배가 부르겠어요?"

"그것만이라니. 나 지금 엄청 많이 먹고 있는 거야."

"빵 두 조각에 스프 한 그릇이?"

"한창 배우 할 때는 스프는 커녕 빵도 입에 대지 못했어. 풀쪼가리랑 닭가슴살만 먹으면서 관리한 몸이 이 몸이라고. 알아?"

가을은 허리를 꼿꼿히 세웠다. 반팔의 흰 와이셔츠 아래에는 검은 브래지어가 훤히 비췄다. 대놓고 노린 시스루였고, 천가을은 그걸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너도 여름인데 좀 옷 다르게 입고 다니지? 언제까지 사제복만 입고다닐 거니?"

"이거 사시사철 공용인데요."

"내가 신경쓰이잖아. 내가 너로 변신할 때 맨날 사제복 입고 다녀야 한다고."

"그건 그렇네요."

아무리 이능력자라고 하더라도 여름에 펑퍼짐한 사제복이나 백색의 코트를 고집하는 건 여러모로 보기가 그랬다. 당사자야 체온을 조절할 수 있는 힘이 있다고 하더라도, 주변에서 보는 비능력자들은 그걸 보며 상대적 박탈감을 크게 느끼게 될 것이다.

"그런데 왜 혼자예요?"

"다들 바쁘잖아. 나도 밤에 청화로 활동하고 오는 길이야."

가을은 티슈로 입 주변을 닦았다. 아직 화장을 하지 않았는지, 입술은 건조해보였다.

"오늘 방에서 계속 있을 생각?"

"아니. 오늘 개인적인 일정이 하나 있는데...."

"뭔데요?"

가을은 대답을 하지않고 내 눈치를 봤다. 나를 탐색하는 듯한 눈빛 같기도 했고, 뭔가 힘든 부탁을 하려는 것 같기도 했다.

"...야."

가을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 여태까지 엄청 열심히 했지?"

"네."

"그럼 이 정도 부탁은 들어줄 수 있지 않겠어?"

"일단 뭔지 들어보고요."

한 번 하자는 말도 안 되는 부탁만 아니라면 뭐든지 환영이다. 그리고 우물쭈물하는 가을의 입에서 나온 말은 내 예상을 아득히 초월하는 대답이었다.

"...우리 부모님, 진짜로 서울로 모시고 와도 돼?"

* * *

천가을.

향연 28세.

서울에서 열린 차원문 이후로 실종되었고, 이승형이 직접 상주가 되어 장례까지 치렀다. 서울 수복 작전에서 부모에게 살아있다는 이야기가 들어가기는 했다. 그리고 이번에 알게된 것은 두 부부가 서울과 신서울 사이의 버스 노선 확충을 위한 시위대에 매일같이 몸을 담고 있다는 것.

가을은 신서울을 방문했다가 우연찮게 부모를 발견했고, 시위대에 휩쓸린 부모를 보고 날짜만 벼르고 있었다. 그게 불과 며칠 전이었고, 내게 그걸 말하려고 했다가 뉴클리언 레이드 때문에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다고 했다.

"부모님께서는 당신 살아있는지 아세요?"

"아닐 거야. 그런데 아직까지 그거 믿고 계신가봐. 내가 예전에 전화 드린 거."

가을이 사망했다고 알려진 것도 거의 4개월에 가까웠다. 장례로 떠나보냈지만 아직 두 부부는 가을을 떠나보내지 못한 듯 했다.

"좋아요. 괜찮아요."

"......."

가을은 미심쩍은 얼굴로 나를 찬찬히 살폈다. 나는 조식 코너의 한켠에 놓여있던 딸기라떼를 홀짝이며 얼굴을 가렸다.

"이제와서 허락해주는 이유는 뭐야?"

"딱히 허락을 안한 적은 없었는데요."

"너, 내가 살아있다는 걸 알리는 거 꺼려했잖아."

"그거야 그렇기는 한데...."

나는 천가을의 존재가 노출되는 걸 바라지 않았다. 언제 어디서나 활용 가능한 조커 카드라는 건 분명 추후 상황에서 큰 도움이 될 터.

라는 생각에, 천가을의 존재를 은폐하고 있었다.

'근데 이제는 뭐.'

"...아예 대놓고 '팬텀이 천가을이다!'라고 말하지는 않을 거죠?"

"당연하지."

"부모님께서는 입이 무거운 편이세요?"

"그럼. 내가 이런 말 하기는 뭐하지만, 우리 엄마아빠 둘 다...는 아니네. 엄마는 무거워. 아빠는 조금 격해지실 때 말실수를 하긴 하시지. 그래도 괜찮아."

"음...."

천가을의 부모는 본 적이 없다. 만난 적도 없다. 딱 한 번 만난 순간이 있기는 했지만, 무덤에다가 인사를 드렸던 때 뿐이었다.

"좋아요. 모시고 오죠. 그런데 모두 다 말씀드릴 거예요?"

"......그래서 내가 부탁을 하고 싶은게 있는데."

가을은 얼굴을 붉히며 손으로 네모난 명함을 그렸다.

"비밀 에이전트같은 신분증, 하나 만들어 줄 수 있어?"

"......아무렴 괴인이 되었다는 것 보다는 첩보 요원이 되었다는 게 훨씬 낫겠죠. 무슨 계획이예요?"

"그러니까...."

가을의 입에서 시나리고 줄줄 흘러나왔고, 나는 그걸 실행할 주요 요인이 되었다.

* * *

신서울.

나는 남들 모르게 신서울에 잠입했고, 종합버스터미널 인근에서 여전히 서울행 버스 노선의 확충 시위에 나선 두 부부를 발견했다. 마치 첩보원이 접선하는 듯한 행동에 두 부부는 내 정체에 대해 긴가민가 하였고, 나는 그들을 적당히 구슬려 인적이 드문 카페로 모셨다.

화륵.

두 부부가 눈치채지 못하게 결계까지 치고 나서야 나는 변장을 풀었다. 두 부부는 내 얼굴을 보고 깜짝 놀랐다.

"자네는...."

"네. 청화라고 합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나는 가을의 부모에게 허리숙여 인사했다. 여러모로 내가 죄책감을 가질 수 밖에 없는 상대였고, 심지어 아버지 쪽은 휠체어를 타고 있기까지 하니 미안한 마음에 어쩔 도리가 없었다.

"아이고, 대단하신 분을 상대로 우리가 어떻게...."

"아뇨, 전혀 신경쓰지 않으셔도 돼요."

나는 두 노부부에게 서류를 하나 내밀었다. 각이 잡힌 종이봉투에 두 부부는 침을 꿀꺽 삼켰고, 가을의 부친은 떨리는 손으로 종이봉투를 받았다.

"이, 이건...?"

"네. 두 분의 자녀분, 천가을 님의-"

"...언젠가 이런 날이 올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네?"

담담히 말하는 두 부부는 갑자기 눈물을 왈칵 터뜨렸다. 서럽게 흐느끼지도 않고 눈물만 뚝뚝 흘리는 모습에 내가 다 당황스러웠다. 두 부부는 당황하는 나에 아랑곳하지 않고 제 할말을 시작했다.

"여러모로 이 노인네들이 백방으로 알아봤습니다.... 가을이가 왜 굳이 서울에서 죽어야 했는지."

"서울에서 그 난리가 났는데도 살아서 전화해 준 아이가 왜 연락이 끊겼는지. 화권께서 몸소 서울을 이잡듯이 뒤졌는데도 나타나지 않았다고 했죠...."

"선의철, 그 개새끼가 난민들의 보호를 받던 우리 가을이를 죽인게 틀림없습니다."

"잠시만요, 잠시만요."

그건 맞다. 선의철의 하수인이었던 철표와 궁성이 내가 보호중이던 천가을을 죽였다. 두 부부는 내 손을 갑자기 붙잡았다.

"감사합니다. 청화 님이시죠? 가을이를 구해주셨다는 분이. 서울의 상황이 너무 험해서 바로 신서울로 보낼 수 없다고 하셨던 분."

"아, 네, 맞는데, 맞는데요."

"...한 때는 원망하기도 했습니다. 왜 진작에 바로 신서울로 보내주지 않으셨는지. 하지만 서울이 그 난리가 났었고, 선의철이 그 정도로 지독한 작자인지 몰랐습니다. 미안합니다."

"잠깐만요."

짝! 나는 손뼉을 쳐서 두 부부의 말을 끊었다. 자신들만의 오해에 빠져있던 두 부부는 화들짝 놀랐다. 나는 헛기침을 하고 두 부부에게 '계획된 시나리오'를 읊었다.

일단 결론부터.

"천가을은 살아있어요. 지금, 서울에."

"예...?"

두 부부는 표정이 굳었다. 나는 종이봉투를 찢어 안의 서류를 꺼냈다. 그곳에는 천가을의 간단한 프로필과 함께, 라는 문구가 붉게 찍혀있었다. 두 부부는 떨리는 손으로 가을의 프로필을 들어올렸다.

"이게 뭡니까?"

"보시는 바와 같아요. 천가을, 선의철 정부의 비리를 캐내던 협회의 특수요원이었어요. 배우로 위장하고 살고 있었죠. 두 분 모르게."

"아니, 잠시만요...."

두 부부는 혼란스러워했다. 나는 그 혼란을 틈타 내 말을 쏟아냈다.

"협회는 여러 방면으로 선의철 정부의 악행을 파헤치고 있었어요. 가을은 배우로 활동을 하다가 이능력자로 각성했고, 연예계에 퍼진 선의철 정부의 마수를 캐내고 있었죠."

"가을이가요? 맨날 대본 본다고 그럴 시간이 없었을텐데…."

"맨날 대본 보는 거 치고는 연기 못했잖아요. 그게 실은 대본 형식으로 내려온 암호문을 해독하는 거였어요."

"그렇게 말하니 이해가 가기도 하고…."

다행히 두 부부는 내 말-가을의 시나리오-에 조금씩 빠져들기 시작했다. 가을의 자폭에 가까운 자기 반성은 부부가 내 말에 신뢰하게 만들기에 적절했다.

"그러다가 선의철의 조카인 이승형을 만나게 되었고, 가을은 이승형을 통해 선의철의 진실을 파헤치려고 했어요. 이승형도 가을을 도왔지요. 그런데 이승형을 감시하던 선의철이 그걸 눈치채고 가을을 죽이려고 했어요. 그러다가 갑자기 게이트가 쾅."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가을은 살아남기는 했지만 섣부르게 살아있다고 할 수 없었죠. 괜히 부모님께 폐가될까봐. 선의철의 잔혹함이야 아시잖아요? 서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살아있다는 걸 알리면 두 분께서 해를 입었을 지도 몰라요."

"...알겠습니다. 거기까지는 이해가 됩니다. 그럼 왜 지금까지 살아있었다는 사실을 숨긴 겁니까?"

"신서울에는 아직 선의철의 잔당들이 남아있어요. 뒷공작을 하느라 바빴고, 전면에 나설 수가 없었어요. 그러다가 이제서야 시간이 난 이유는...."

나는 시나리오의 화룡정점을 찍었다. 천가을이 자신이 지금껏 정체를 숨긴 채, 그리고 살아있다는 사실조차 숨긴 채 서울에서 몸을 숨겨야 했던 시나리오의 마지막을.0

"선의철 잔당 세력이 옛 북한에서 탈출한 공작원들과 편을 먹어서, 가을이 그들을 모두 처리할 때 까지 연락을 드릴 수가 없었어요."

"선의철이 빨갱이였습니까? 내 그 새끼 그럴 줄 알았습니다. 육시럴할 놈...."

"...그래서 이제 평양이 완전히 붕괴가 되었고, 잔당들도 모두 처리를 해서 이렇게 두분께 말씀을 드리는 거예요. 가을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을은 두 분을 서울로 모시고 싶어하는데, 괜찮으신가요?"

"아...그럼 서울로 가면...?"

"네. 지금 서울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

두 부부는 눈물을 글썽이며 서로를 끌어안았다. 아무 한탄도 없이, 소리없이 두 노부부는 흐느끼며 누군가를 원망했다.

"선의철 이 개새끼.... 흐어어...."

"......."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잠시 뒤.

두 부부는 겨우 진정했고, 딸을 볼 수 있다는 흥분과 열망으로 가득 차올랐다.

"그런데 서울은 어떻게 가면 됩니까? 지금 버스도 없어서 서울로 올라가지도 못하는데."

"안 그래도 그것때문에 제가 직접 내려왔어요. 하나 여쭤볼 것도 있고. 서울행 버스는 왜 그렇게 찾으신 거예요?"

두 부부는 침묵했다. 휠체어까지 타고 시위에 나선 이유가 궁금했다.

"혹시 가을이 살아있을 거라고 생각하신 거예요?"

"...그런 기대는 솔직히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그냥...."

"행여나 유품이라도 거둘 수 있을까해서."

"......."

얼마 남지 않은 양심이 아주 콕콕 찔러왔다. 나는 고개를 푹 숙여 사과했다.

"죄송해요, 조금 더 일찍 만나게 해드렸어야 했는데."

"아니, 아닙니다. 세계에서 제일 바쁘신 분이 이렇게 내려와 주신 것 만으로도 고마울 따름입니다."

"...그럼 지금부터 서울로 모실게요. 제가 자가용을 데리고 왔거든요."

"자가용?"

딱.

나는 손뼉을 쳤고, 하늘에 몰래 숨겨둔 내 자가용(龍)을 꺼냈다.

"그럼 지금 바로 가실까요?"

"......."

잠시 뒤.

신서울 상공에 갑작스레 나타난 흑염룡은 나와 노부부를 데리고 서울로 북상했다.

비행허가? 흑염룡 등장에 따른 혼란?

'알게 뭐야.'

백희아가 알아서 다 처리할 것이다.

* * *

용산.

두 부부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아파트 앞에 도착했다. 천가을이 아역 배우시절부터 차곡차곡 돈을 모아, 20살 성인이 된 기념으로 두 부부에게 사준 서울의 아파트.

평양 사태로 급히 처분을 하여 신서울에 집을 구한 이후로 다시는 보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던 아파트는 예전의 그 모습을 그대로 갖추고 있었다.

위이잉.

휠체어는 아주 수월하게 엘레베이터에 실려 올라갔다. 집값이 비싸도 굳이 이 아파트를 골랐던 이유는 휠체어가 쉽게 움직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여보."

"......그래."

동, 호수. 그 무엇하나 잊지 않았다. 인적이 드문 가운데, 유일하게 불이 켜진 문 앞에 두 부부는 섰다.

"......."

안에는 너무나도 익숙한, 그러면서도 너무나도 어색한 여인이 앞치마를 두른 채 밥을 차리고 있었다.

"......어, 음."

여인은 회색 눈동자와 회색 머리칼로 볼을 긁적이다가, 손에 들고있는 뚝배기를 식탁에 올리며 애매하게 웃었다.

"...엄마 된장찌개 먹고싶었는데, 못 참아서 내가 해버렸어. 괜찮...지? 밥 먹었어?"

"......."

두 부부는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다시는 듣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던 목소리가 생생하게 울리자, 두 부부는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아니, 아직...."

"......그래, 먹자꾸나."

천가을의 집에서는 조용히 식기 놀리는 소리만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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