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7화 〉1부 16장 1
8월 16일 저녁.
자고 일어나서 여기 저기에 펜릴을 주의하라는 연락을 넣던 나는 석하랑과 관계된 이야기를 듣고 깜짝 놀랐다.
"아직도 부산으로 못 내려갔다고요?"
[...지금 엄청 난감하게 됐다고.]
스크린 너머 석하랑은 머리를 쥐어뜯고 있었다. 뉴클리언 레이드를 벌였을 때보다 초췌해져있었고, 나는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카르나도 멀쩡히 돌아다니는데 왜 당신이 죽을 상이에요?"
[내 지금 실시간으로 정신력 깎여나가고 있으니까 쫌 배려해줄래?]
석하랑은 위로가 필요한 듯 보였다. 나는 구석에서 서브 스크린을 켜서 석하랑에 관한 기사들을 확인했다. 그리고 석하랑이 어제 '신서울로 내려갔다가 천안에서 기겁을 하며 서울로 돌아왔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왜죠?"
[말도 마라…. 천안 입구부터 구국의 영웅이니 뭐니 카면서 띄워주는 거 개쪽팔려서 튀었다.]
"개선장군이 그런 거 부끄러워하면 안 되는데."
[씨이. 이 정도로 사람들 열광할 줄은 몰랐지!]
현재 한국은 세 명의 여신이 있었다.
구국의 결단을 내린 지휘의 여신 백희아.
평양을 정복하고 옛 조선 땅을 되찾은 얼음 여신 석하랑.
그리고 아무도 모르는 수능의 여신 이유나.
"이러다가 진짜 둘이서 사람들한테 죽으라고 하면 죽겠네요, 정말."
[말도 마라. 내가 한 번 손 한 번 흔들어주니까 뻘건 모자 쓴 할아버지들 기절해서 쓰러지더라.]
"......."
그럴 법도 하지. 뉴클리언을 쓰러뜨린 것 만으로도 압도적인 전과인데, 한반도 전체를 손에 넣었으니 사람들이 자지러질만도 하다. 특히 오래전부터 선의철에게 선동되어 북진을 통한 영토 회복을 주장하던 이들은 더더욱.
"그래도 당신이 혼자 영예를 맡아서 차지한 덕분에 온전히 한국땅이 되었잖아요."
원래는 결계가 거두어지면서 네 SS급들이 전부 모습을 드러내려했었다. 하지만 그러면 여러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는 걱정에 철회되었다.
"나는 빌런이니까 논외. 카르나는 인도 측에서 뭔가 떡고물 떨어지지 않을까 걱정. 그리고 환룡은…."
[내는 암만 걔가 열심히 싸웠더라도 한반도에 중국인들 들어오는 건 못 본다!]
"그러시겠죠."
환룡이 깃든 샤오린이 모습을 드러냈다면 분명 중국 내 여론이 들끓었을 것이다. 중국인인 샤오린도 활약을 했을테니, 그 지분에 따라 땅을 이양받는게 어떻겠느냐면서.
"당신 샤오린한테 감사해야해요. 샤오린이 양보한 덕분에 뉴클리언 레이드 지분을 당신이 100% 먹은 거니까."
[그건 고맙다고! 근데, 근데 씨이….]
석하랑은 분노하고 있었다. 울컥하기까지 한 듯 눈물까지 글썽이고 있었다.
[그 핵냥이 새끼들…. 흑, 내가 더 쎈데…. 흑, 나를 제일 깔로 보고, 크흡.]
"...."
석하랑은 눈치를 채고말았다. 뉴클리언이 지목한 최약체 다음이 자신이라는 것을.
"...아니, 뭐 샤오린은 환룡까지 깃들었으니 버프 받은 거잖아요."
[카르나는 혼자서도 뉴클리언 본체랑 맞짱 떳다 아이가!]
"그건 그렇네요."
뭐라 위로할 말이 없었다. 석하랑은 진심으로 분통을 터뜨리고 있었다.
[내가 진짜 뉴클리언 본체 때려잡고 하드캐리 했으면 당당하게 신서울 들어가지! 근데 봐봐래이, 내 한게 뭐있는데!]
"결계를 단단하게 쳤죠."
[그냥 얻어맞은 게 다 아이가! 씨, 안 그래도 최약체로 찍힌 것도 서러운데 내가 제일 몬 싸웠다고!]
"진정해요."
석하랑은 부끄러워하고 있는 것이다. 레이드에서 졸전을 치른 자신에 대하여. 사실 졸전이라고 하기에도 뭐했지만, 나나 다른 정령들의 활약에 비하면 조금 초라하다고 보는게 사실이었다.
누군가 위로해 줄 사람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럴만한 가족은 원탁 회의 직전에 한국에 공식적으로 방문한다고 했으니, 아직 시간이 도래하지 않았다.
지금 부를까.
하지만 이미 러시아로 돌아갔다. 동해 바다 전체를 밀어내기 위해 마력을 엄청나게 사용한 루살카는 결국 텔레포트를 하지 못했고, 광검이 업고 유성의 전용기에 실어 모스크바로 돌아갔다.
"에이씨."
안그래도 펜릴 때문에 머리가 복잡했는데 신경써야 할 곳이 너무 많았다. 나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지금 어디에요?"
[내? 동작에 있는 호텔. 유하 언니야네 호텔 펜트하우스인데-]
와장창.
와장창.
"짠."
석하랑은 하얀 호텔 가운을 입고있었다. 그 안에는 아무것도 입지 않은 나신이었다. 석하랑은 주섬주섬 자신의 허리띠를 강하게 동여메었다.
"...니 또라이가? 여기 남의 호텔인데 유리창은 또 와 깨먹는데?"
"수리비 주면 되죠. 남는게 S급 코어인데."
"호텔 유리 깨먹었다고 S급 코어로 변상하는 또라이는 니밖에 없을 끼다. ...어휴."
석하랑은 한숨을 내쉬며 얼음의 벽으로 창문을 덮었다.
"그래서 니는 또 왜 왔는데? 그냥 전화로 얘기하면 되지."
"...흠흠."
나는 주변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 목을 편안하게 풀었다.
"보고싶어서 왔는데 그럼 안 되나?"
"......."
석하랑은 나를 한참동안 바라보더니, 피식 웃으며 방 안의 냉장고에서 음료를 꺼냈다.
"블루베리밖에 없는데 괘안나?"
"물론이지."
나는 석하랑의 침대에 앉았다.
***
"무라. 니 혹시 피자 싫어하는 건 아니제?"
"...아니. 이런 정상적인 음식도 오랜만이다 싶어서."
나는 야식 겸 저녁으로 배달된 피자에 감사를 느꼈다. 불과 이틀 만에 제대로 먹는 음식임에도 나는 오랫동안 굶다가 음식을 마주한 사람처럼 허기를 느꼈다.
"하나 질문. 파인애플 피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 파인애플? 뭔가 은어가?"
"아니. 파인애플을 도우로 올린 피자."
"미친."
정통 양식파답게 석하랑의 식성은 별나지 않았다. 루살카라면 뭔가 특이한 식성일테지만, 다행히 석하랑은 인간이었다. 지금쯤 수보르프에게 한창 깨지고 있을 허윤환에게 감사를.
"그런데 왜 피자냐? 다른 것도 먹을 수 있으면서."
"피자는 혼자서 한 판 다 먹기는 좀 그렇다 아이가."
"거 이미지 더럽게 챙기네."
"시끄럽다. 니 내가 성인 되고 나서 얼마나 신경쓰고 다니는 지 아나? 학생때는 아무도 뭐라 안 카더니, 쒸이."
석하랑 스테이크 사건.
히어로 협회 부산 지부에서 지내다가 수능을 개판으로 친 석하랑이 배달 어플로 분노의 스테이크 칼질을 했다가 기자들에게 그 일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 바람에 석하랑은 믿을만한 곳만 시키게 되었다나 뭐라나.
"석하랑, 그거아나?"
"뭐."
"김누리 지금 신서울에 혼자 있다."
내 말에 석하랑은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자기 집에 누가 있는지조차 까먹을 정도로 석하랑은 여유가 없었다. 어떻게 그런 걸 까먹을 수 있겠냐싶을 정도로.
"우, 우야지?! 내 신서울 다녀와야겠다! 거 앞에도 기자들 진을 치고 있을 거 아이가!"
"그럴 줄 알고 다 조치를 취해놨지. 푸흐흐."
나는 마도기어를 두드려 김누리와 연락을 취했다. 김누리는 아이스크림을 퍼먹으면서 내 연락을 받았다.
[무슨 일이심?... 이 아니고 무슨 일이세요?]
"석하랑이 정신 차려서요."
나는 등 뒤에 어색하게 웃고 있는 석하랑을 가리켰다. 석하랑은 김누리에게 손을 붙이며 고개를 숙였다.
"누리야, 미안! 지금 바로 신서울 못 들어가서 미안해. 내가 어떻게든…."
[음…. 언니 지금 들어오면 그게 더 난리날 듯? 그냥 바로 부산으로 들어가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지금 여기 완전 조-온나 난리임.]
"무슨 난리?"
[조, 조은 난리라고요. 제가 입 안에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어서...헤헤.]
김누리는 비굴한 얼굴로 눈을 깜빡였다. 나는 김누리의 급식어는 건드릴 생각은 없어도, 비속어 만큼은 철저하게 관리했다.
"호텔에 가둬서 미안해요."
[음? 아녜요. 부모님도 좋아하시고, 뭣보다 가온 언니까지 챙겨주셔서 얼마나 좋은 걸요. 지금 가온 언니랑 엄빠랑 호텔 내 수영장 또 갔어요. 저는 방 안에서 쉬는 중.]
그 누구도 김누리를 돌봐줄 수 없는 상황이었고, 나는 15일 당일부터 김누리를 부모에게 맡기고자 했다.
은유하의 관리하에 있는 유성 호텔의 객실 키를 그들에게 맡겼고, 사람을 불러 김가온을 서울에서 신서울로 보내 가족 상봉을 하도록 했다.
"그래...편히 쉬어요. 그럼 끊습니다."
[네. 언니? 무리하지는 마? 괜찮아지면 다시 연락해?]
"알았다."
누리는 다시 아이스크림을 퍼먹는데 집중했다. 나는 피자 한 조각을 들어올렸고, 석하랑도 피자를 집어들었다. 우리는 피자를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너 진짜 지금 정신 없나보군. 누리 어디에 있는지 신경도 못쓰고."
"하아…. 말도 마라. 사람이 한 순간에 영웅이 되어버렸는데 이게 지금 쉽게 견딜 일이가?"
"익숙해지면 돼."
"니는 익숙해졌나?"
"거 세계를 몇 번 구하면 싫어도 익숙해지게 되어있어."
16번 하고도 한 번을 더 구했다. 마지막 시도에는 모두를 구했다. 단 한 명도 빠짐없이.
"근데 와 회귀인지 뭔지 한 건데?"
"...그런 게 아니, 하아. 됐다."
그냥 회귀자로 살기로 했다. 회귀할 때마다 여자 갈아치우는 쓰레기로 그들은 거의 확신하고 있었고, 나도 이제는 더 변명하기는 귀찮았다.
"한 명을 제대로 구하지 못했거든."
"누구?"
"그건 비밀."
피닉스 루트를 통해 모두를 구했다. 폭주하던 이유나도 구했다. 하지만 그건 원작의 이야기.
"내가 '다시하기'를 바란 바람에, 괜히 나한테 딸려온 사람이 하나 있거든. 걔 구해야 한다."
그리고 그 당사자는 내 안에서 포만감을 느끼고 코 자고있다.
"음…. 그게 낸가?"
"개소리."
"아, 씁. 안 넘어오네. 26살의 석하랑은 뭔 재주로 오빠야를 자빠뜨렸는데?"
"알려줄 것 같냐?"
나는 석하랑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튕겼고, 석하랑은 이마를 문지르며 성질을 부렸다.
"아 씨. 알려주면 어디 덧나나? 괴수들 잡을 때는 잘만 약점 알려주면서 지는 하나도 안 알려주네."
"내가 괴수냐?"
"나한테는 뉴클리언보다 공략 난이도가 더 빡신 것 같은데."
"아무렴 창염의 피닉스가 쉽게 공략 될 사람은 아니지. 그렇게 쉽게 공략할 수 있었으면 난 이미 진작에 넘어갔을 거다."
안 그러면 내가 반 년동안 그 개고생을 했겠는가. 주인공과 이유나, 창염이라는 양립할 수 없는 존재들을 동시에 살려내려고 했던 난리를 생각하면 아직도 치가 떨린다.
"음…. 근데 오빠야 왜 목소리 안 바꿈?"
"뭔 소리야."
"레이드 뛸 때는 잘만 얘기하더니."
"그러니까 뭔 소리냐고."
미쳤다고 내가 그걸 구분하지 않았을까봐. 석하랑은 지금 내 목소리를 들어보겠다고 낚시를 하는 것이다.
"내 분명히 들었거든? 오빠야 분명히 얘기하는 거. 해치웠나?"
"그러니까 갑자기 무슨 개-"
앗.
"...잠깐만."
나는 뉴클리언 레이드의 전투 영상을 마도기어에서 뽑아냈다. 1차전이 끝나고 2페이즈가 시작되던 순간.
-해치웠나?
나는 '괴인형'으로 분명히 말하고 있었다. 석하랑은 어느새 피자를 들고 내 뒤로 넘어와 나를 뒤에서 끌어안으며 영상을 누르려했다.
"다시 듣자. 한 번 더 반복!"
"싫다."
"에이, 그카지 말고 들려도! 듣는다고 닳는 것도 아이다 아이가!"
"닳는다. 구체적으로 내 정신이."
나는 영상을 건드리려는 석하랑의 손을 밀었다.
"네가 왜 뉴클리언한체 최약체로 선정되었는지 아냐? 이런데 신경을 쓰고 있었으니까 그러지."
"싸울 때는 몰랐거든! 반성할라꼬 전투 영상 되돌려보다 보니까 알게 된 거지. 내가 설마 오빠야 목소리 때문에 정신이 흐트러져서 뉴클리언한테 최약체 평가 받았을까봐?"
"충분히 가능성 있지."
"...이게 진짜."
석하랑이 내 목에 헤드락을 걸었다. SS급으로 성장하면서 조금씩 부푸는 가슴이 목덜미에 닿았다. 닿게 하고 있었다.
"수치심도 없냐?"
"마! 이게 육탄공격이라 카는 거다!"
"천가을이나 카르나 정도도 안 되면서 무슨."
"씨, 니 사실대로 말해라. 사실은 여성형일 때는 이렇게 크면서 남성형일 때는 작아서 그거 숨기려고 이카는 기제?"
"......."
나는 석하랑의 팔을 잡고 자리를 크게 박차고 뛰었다. 석하랑은 화들짝 놀란듯 내 목에 건 팔에 힘을 주었고, 나는 그 힘을 이용해 침대에 집어던졌다.
"요즘 이승형 가르친다고 네가 아주 기강이 해이해진 것 같은데, 안 되겠군."
"자, 잠깐만! 니 이카면서 또 이상한 짓 할라카제! 내 다 안다! 낚시하려 하지마라!"
"흥, 낚시인지 아닌지 알고 싶으면 직접 겪어보면 되는 일."
나는 얼굴이 선홍빛으로 물든 석하랑의 위에서 손가락을 튕겼다.
화륵.
…
…
…
[겁 먹는 거 봐라.]
석하랑은 눈을 질끈 감고있었다. 그러면서도 실눈으로 나를 올려다봤고, 나는 건틀릿으로 석하랑을 번쩍 들어올렸다.
[이게 내 남성형이다. 내 스스로 신화에 이르지 못하면 계속 이 상태지.]
"아…. 니 혹시 여성형이랑 남성형이랑 구분한 거가?"
[그런 셈이지.]
오해였지만 나는 딱히 해소할 생각이 없었다. 그렇게 오해를 하게 하는 편이 더 나았다.
"그럼 목소리는?"
[일부러 내는게 아니면 굳이 낼 필요가 없지. 오히려 이쪽이 진심을 전하는데 편하고.]
나는 석하랑의 어깨를 두드렸다.
[고맙다. 석하랑. 진심으로.]
"...고마우면 부탁이나 좀 들어주던지."
[첫날밤을 함께 해달라는 것만 아니라면 뭐든지.]
"......그럼 손만 잡고 자면 되는 거 아니가?"
석하랑은 귀까지 벌게져서 까치발을 들었다. 나는 그게 너무 우스워서 석하랑을 침대로 밀쳤다.
8월 16일.
나는 석하랑과 손을 잡고 밤새도록 이야기를 나누었다.
창염에게 가라사대, 정말로 손만 잡고 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