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창염의 피닉스-366화 (366/1,497)

〈 366화 〉1부 15장 24

김펜릴이 딸기를 먹고, 내가 민트초코 케이크를 먹었다.

그것은 내가 펜릴에게 은근하게 제안한 신호였고, 펜릴도 그 신호를 인지했다.

"나한테 뭘 요구할 생각이냥?"

"아무것도 하지 않기를. 정확히는 그냥 여기 가만히 있어주기를."

아지다하카나 히드라는 내가 대처가 가능하다. 하지만 펜릴은 다르다. 여의도 한복판에 들어와 몇 주간 아르바이트를 했다는 건 분명 뭔가 모종의 방법이 있다는 얘기였다.

"지금 거래를 하자는 거냥? 나는 다크 레기온의 간부인데?"

"거래가 통하는 간부니까 이렇게 얘기하는 거죠. 당신, 민트초코면 성주도 배반할 사람이니까."

"설마 그러겠냥."

"설마가 사람 잡는다고요."

원작에서부터 민트초코 때문에 주인공 일행을 봐주지 않았던가. 결국 주인공 일행에게 푹 빠져버려서 간부 중 최초로 공략당한 보스가 펜릴이다. 펜릴이 많이 봐주기는 했지만.

"이거 봐봐요."

나는 홀로그램으로 꺼낸 김펜릴의 근로계약서를 꺼냈다. 그리고 그걸 후안에게 보여 다시 확인했다.

"사장님, 이거 진짜 계약서 맞죠?"

"그래."

계약서 상 갑 후안이 을 김펜릴에게 숙식을 제공하며, 하루에 세번씩 제각기 다른 종류의 민트초코로 된 디저트를 공급할 것. 생각보다 간단하면서도 어려운 메뉴였다. 민트초코 디저트의 레시피가 하나도 없다면.

"이거 당신 사인 맞죠? 김펜릴."

"맞다냥."

"당신 지금 알바중이니까 간부로서 활동도 안 하겠네요? 그쵸?"

"굳이 지금 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아서."

"그럼 이렇게 하죠."

나는 메뉴판을 가리켰다.

"후안에게 최대한 질좋은 민트와 초코를 공급할테니, 당신 다른 간부들 내가 잡기 전까지 그냥 여기서 조용히 아르바이트하면서 민트초코나 드세요."

"나를 마지막으로 잡으려고 하는 거냥?"

"그렇죠. 히드라랑 아지다하카 잡고 난 뒤에 당신을 잡을게요."

"음...."

펜릴은 민트색으로 물든 마카롱을 반으로 쪼개며 내게 건넸다.

"이거 먹으면-"

아그작.

나는 바로 마카롱을 씹었다. 입안에서 불을 질러 소멸시키지도 않고, 일부러 입과 혀를 보이며 으적으적 소리까지 내며 씹어삼켰다.

"됐나요?"

"......나쁜 사람인데 어떻게 민트 초코를 먹는 거지?"

펜릴은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김펜릴 식 논리에 따르면 나는 나쁜사람이니 민트초코를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대답은? 저랑 거래 하실래요, 아니면 여기서 싸울래요?"

"그거야 당연한 거 아니냥."

김펜릴은 자세를 바로하고 내게 고개를 숙였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건물주 님."

"하여튼 김펜릴 진짜 또라이."

"아항항, 칭찬으로 듣겠다냥."

김펜릴은 손사레를 치며 웃었고, 나는 펜릴에게 보이지 않게 후안에게 레시피 하나를 넘겼다. 후안은 내가 넘겨준 레시피를 보고 화들짝 놀랐다.

"이건...?"

"지금 가능할까요?"

"이걸 지금 나보고 만들라고? 이보시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건..."

"내기할래요? 얘가 잘 먹나 안 먹나. 만약에 이거 얘가 맛있게 먹으면...."

나는 카페의 벽을 가리켰다.

"이 1층 전체를 사장님 카페로 쓰셔도 돼요."

"당장 만들어 오지."

후안은 내기에 응했다. 사실상 그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레시피였지만, 후안은 카페를 확장하고자 하는 욕망에 순응했다.

"도대체 뭘 만들려고 하는 거냥?"

"당신이 미쳐 날뛸 음식?"

창염이 그러하듯 얘도 좋아하지 않을까 싶었고, 나는 후안을 부엌으로 보냈다. 이제 나와 펜릴만 테이블에 남았다. 나는 목소리를 낮췄다.

"절풍."

흠칫. 펜릴의 고양이귀가 쫑긋 섰다.

"절풍의 펜릴. 절풍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이 대답에 따라 나와 펜릴의 관계가 정말로 많이 달라질 것이다. 내 진지한 목소리에 펜릴은 포크도 내려놓고 씁쓸하게 웃었다.

"...내 과거?"

"구체적으로 말하면?"

"정령."

"역시."

아니나다를까. 펜릴은 스스로 과거에 '정령'이었음을 알고 있었다.

"어떻게 알았는지는 묻지 않을게요."

"그건 고맙다냥."

하지만 자신이 정령이라는 걸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뇌가 풀리기는 커녕, 간부라는 '펜릴'으로서의 정체성이 더 강하게 자리를 잡고있다. 스스로의 이름을 김펜릴이니 뭐니 하면서 펜릴이라는 걸 과도하게 강조한다 싶을 정도로.

"당신, 정령으로서의 자신으로 돌아가는게 무서운 거죠?"

"......다르지, 달라. 그건 아니다냥."

펜릴은 표정까지 굳히며 진지한 어조로 내게 답했다.

"과거에 정령이었더라고 하더라도, 나는 지금 펜릴아니냥. '절풍'이라는 게 다시 돌아온다고 하더라도, 그러면 '펜릴'이라는 나는 어떻게 되는 거냥.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는 거 아니겠냥."

"그렇겠죠."

펜릴은 개성이 넘치는 만큼 다른 간부들에 비해 개성이 강했다. 그 바람에 펜릴의 자아는 겉잡을 수 없이 확고해졌다.

냥냥거리는 말투의 녹색머리 고양이귀 메이드 김펜릴. 그게 펜릴이 자기 스스로의 자아를 확고히 유지하는 방법이었다.

"내가 만약 너와 싸워 진다고 친다냥. 그럼 펜릴으로서의 나를 가만히 내버려 둘 거냥?"

"아니요. 당신의 세뇌를 풀고 절풍으로 각성시키겠죠."

"거봐라냥. 그럼 나는 죽는 거 아니냥."

펜릴의 말은 틀린게 아니었다.

딸을 낳고 혼백만 남아 인간에 빙의함으로써 인간에 가까워진 설야.

영체로서 혼돈과 완전히 별개의 존재로 존재하던 환룡.

간부 카르나를 불쌍히 여겨 자신의 몸과 정신을 카르나에게 직접 내어준 개천광.

세 명의 정령이 특이한 개체였고, 오히려 간부로서는 펜릴이 지극히 정상적이었다. 창염 또한 피닉스로서의 자신에 대해 지극히 경멸하고 있었고, 그 피닉스의 흔적은 내가 모두 받아들였다.

펜릴, 아지다하카, 히드라. 셋다 절풍, 마암룡, 지륜으로 바뀌게 되는 것을 거부했다. 정령의 각성은 간부의 사망.

죽고 싶지 않다.

내가 성주와 이계신에게서 발버둥 치듯, 펜릴 또한 절풍에게서 살아남기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근데 그거 알아요? 계속 펜릴로 지내면 영원히 성주의 노예가 될 거라는 거. 심지어 당신이 정령의 흔적을 자각한 걸 알게되면 다시 세뇌를 할 거예요."

"알고 있다냥. 하지만 그래도 상관없다냥. 나는 펜릴로 살고 싶다냥."

펜릴은 두려워하고 있었다. 내가 괜히 펜릴의 속에 있는 절풍을 깨울까봐 나를 경계하고 있었고, 나는 괜히 트러블을 만들기 싫어서 손을 흔들었다.

"됐어요. 지금 저도 휴가니까 복잡하게 머리쓰기 싫어요. 모처럼 입가심하려고 왔는데 싸우기도 싫고."

불과 하루 전에 뉴클리언이랑 치고박고 싸웠다. 나는 원탁 회의가 있을 시기까지 싸울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러니까 밀약을 맺는 것이에요, 펜릴. 당신은 서울에서 조용히 살고, 나는 당신의 존재를 눈감아주고."

"하지만 히드라랑 아지다하카가 가만히 있지 않을텐데?"

"오면 모가지를 뜯어버리면 되죠. 개천광까지 아군으로 합류했는데 그게 쉽겠어요?"

카르나가 은유하와 함께 전세계를 한 번 순방한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어디 있는지 모를 둘에게 대놓고 시위를 하기 위해서였다.

이제 4:3. 카르나가 우리쪽에 합류하면서 파워 밸런스는 명백히 무너졌다. 나를 제외한 3:3으로 붙어도 우리쪽이 이길 만큼.

"음.... 알았다냥. 나도 여기서 계약 끝나기 전에 떠날 생각은 없다냥. 뭣보다 이렇게 맛있는 민트초코를 두고 그냥 갈 수는 없고!"

"그건 다행이네요."

"그보다 내가 궁금한 건 이 카페의 민트초코 레시피, 정말로 네가 만든 거 맞냥?"

"네."

딱히 숨길 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이 정보를 밝힘으로써 펜릴의 이중 스파이 짓은 내 쪽으로 더 넘어오게 되었다.

"왜?"

"나중에 당신이 오면 대접하려고 했죠. 설마 그 전부터 벌써부터 와서 처먹고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지만."

"나?"

"네. 절풍은 민트초코 안 좋아해요."

오히려 혐오하는 쪽에 가까웠다. 카페에 방문하겠다고 전화를 했는데 후안이 아니라 김펜릴이 받아서 얼마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는지 모른다. 펜릴은 입을 뻐끔거리며 팔짱을 꼈다.

"역시 나는 죽을 수 없다냥. 절풍에게 이 몸을 내어줄 수 없다냥. 죽으면 민트초코 더이상 못 먹게 되는 거 아니냥."

"그런 셈이죠. 그럼 언젠가 저랑 붙게 되면 죽게 되겠지만."

"으으.... 그럴 수는 없지. 나는 절대로 안 죽을거다냥."

"예, 그러세요. 서울에서 민트초코 마음껏 먹으면서 죽을 날을 기다리세요. 히드라와 아지다하카가 죽고, 둘이 지륜과 마암룡으로 각성하는 날이 되면 당신은 절풍이 될 테니까."

"싸우기 싫다면서 시비거는 솜씨는 진짜 일품이다냥. 진짜 창염의 피닉스처럼 말하고. 너도 참 특이한 존재다냥."

"아무렴 뭐 어때요. 이제 제가 피닉스인데."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내가 후안을 통해 파놓은 민트초코의 함정에 펜릴은 빠져들었고, 간부 펜릴은 원작처럼 김펜릴이 되었다.

"응? 벌써 가려는 거냥?"

"네. 괜히 기빨리기 싫어요."

펜릴이 스스로가 나태하고 파업을 벌이는 김펜릴로 살기로 작정한 이상, 내가 할 일은 하나뿐이다.

"당신 진짜로 멸망의 날까지 그냥 놀고 먹을 거죠?"

"당연하지. 목에 칼이 들어와도 놀거다냥."

"20년 가까이 놀았는데 더 놀고 싶으세요?"

"남은 5년동안 더 열심히 놀아야겠다는 생각밖에 없다냥."

"좋아요. 그 기개 잊지마요. 제가 당신 잡으러 올 때 까지 맘껏 노세요."

"아항항, 그 때가 되어도 나 쉽게 못 잡을 거다냥."

펜릴은 여전히 자신만만했다. 나는 무슨 근거로 이리도 자신감이 넘치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 이유가 조금이나마 예상은 되었다.

'큐브 한 서너개 들고 있는 모양이네.'

큐브의 힘을 사용한다고 하면 충분히 이해가 갈만하다. 더욱이 큐브를 가지고 있다면 펜릴을 서울 밖으로 빼내고 난 뒤에나 싸울 수 있다.

'싸우다가 서울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릴 수도 있으니.'

기껏 열심히 가꾸어놓은 인프라가 전부 무너지는 건 사양이다. 나는 원작에서 펜릴이 그랬던 것 처럼, 김펜릴이 끝까지 게으르기를 믿을 수 밖에 없었다.

"사장님."

"그래."

"쟤 이상한 짓 하려고 하면 바로 연락주세요."

"이상한 짓이 하나 둘이 아닌데."

"...막 빌런으로 날뛰려고 한다거나, 사람들 죽이려고 한다거나, 사장님 상태로 반란을 일으키려고 한다거나."

"살아있으면 연락 주지. 껄껄껄."

후안도 여러모로 대범했다. 아무래도 녹색머리 고양이귀 메이드 알바가 생각보다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역시 전세계를 떠돌다가 김치 맛에 반해 한국에 정착한 변태 다웠다.

"에휴. 저는 이제 갈게요. 김펜릴, 제 뒷통수 치지 마요. 알겠죠? 얌전히 서울에서 지내고 있으면 민트초코 레시피 얼마든지 드릴테니까."

"놀고 먹는 거라면 얼마든지 할 수 있다냥."

태평하게 웃는 김펜릴의 모습에 나는 입맛이 싹 사라졌다. 입안에 가득한 민트초코의 치약맛 덕분에 기분도 착 가라앉았다.

무엇보다도 목전에 칼날이 드리워져있었다는 걸 전혀 눈치채지 못한게 이상했다.

'감시 잘 해야겠네.'

다른 정령들에게도 전달해둬야겠다.

- 김펜릴이 김펜릴인 동안에는 건드리지 말 것.

나는 주요 인사들에게 펜릴이 서울에 있었음을 알렸고, 다시 또 사람들은 뒤집어졌다.

"......에이, 모르겠다."

잠이나 자자.

일단 한숨 자고 저녁에 일어나서 생각해보자.

나는 내 방으로 돌아갔다.

***

잠시 뒤.

피닉스가 떠난 뒤, 김펜릴은 테이블에 고개를 처박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살았다냥…."

"그렇게 싸우기 무서우면 도망치지 그랬나."

후안은 피닉스가 넘겨준 레시피에 따라 만든 음료를 건넸다. 하얀 머그잔에는 우유 거품이 몽글몽글 피어올랐고, 커피향이 물씬 올라왔다.

"이건?"

"건물주 특제 레시피다."

"......? 뭔가 이상한 것 같은데."

"그냥 먹으시게."

후안은 굳은 얼굴로 민트초코카페라떼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자신은 아주 옅은 아메리카노를 홀짝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래서 김펜릴 양, 굳이 피닉스의 전화를 받은 이유는?"

후안은 이해가 잘 가지 않았다. 펜릴은 피닉스와 적이나 다름없는 존재였고, 굳이 앞에 나서서 자신의 정체를 드러낼 이유는 없었다.

막말로 숨으려고 하면 완전히 숨을 수 있었다. 후안이 조금만 말을 맞춰주면 그만이니까.

"아항항, 그럼 사장님께 폐가 되는 거 아니냥. 등잔 밑이 어두워도 언젠가 들킬 것 같았다냥. 그래도 굳이 마음을 먹은 이유라고 한다면…."

펜릴은 어유로운 얼굴로 컵을 들어올렸다.

"저거 안에 든 사람이 창염의 피닉스가 아니라서?"

"그건 무슨 말이니."

"그냥 이쪽의 얘기다냥. 대화가 통하면 대화로 해결하는 게 제일 아니겠느냥."

펜릴은 라떼를 홀짝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안에 든 사람이 정상이라서 다행이다냥."

"...정상?"

"그렇다냥. 굳이 원본에 대해서 얘기해주자면…."

펜릴은 꼬리를 부스스 떨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거슬리면 다 태우고 보는 미친 년이었다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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