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5화 〉1부 15장 23
8월 16일.
대마도가 떠내려가기 시작한 다음 날.
나는 모처럼 서울의 내 방에서 휴식을 즐겼다.
[청화 님. 전화받으세요. 사람 출생의 비밀 까발려놓고 이렇게 연락 안받으시면 어떡해요?]
[휴가 중 ㅇㅇ.]
무시.
[고객님? 혹시 딸기 뷔페에 뭔가 문제가 있었나요? 딸기 함량이 부족하다던가?]
[사업 접어라.]
조언.
[섹스.]
"이 놈은 뭐야?"
나는 보지도 않고 차단을 박았다. 블랙 마켓은 익명성이 보장되어있기는 하지만, 간혹 이런 식으로 변태같은 놈들이 튀어나오고는 한다.
'오늘도 여유롭네.'
세상은 여유롭지 않고 여전히 급박하지만, 나는 뉴클리언을 제거함으로써 앓던 이가 다 빠진 것처럼 시원했다.
'그럼 이제 어쩔까.'
어제 딸기 쇼크 이후로 나는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하게 되었다. 정령은 굳이 음식이 필요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맛은 느낄 수 있는 만큼 여러모로 맛은 즐길 수 있었다.
"아직도 입에서 딸기 향이…. 하아."
입안부터 위장까지 창염을 삼켜 씻어내렸음에도 전신에 딸기향이 묻어나온다. 이건 뭔가 다른 것으로 씻어내릴 필요가 있었다.
'커피라도 마셔야 하나.'
아무래도 입가심을 할 무언가가 필요했다. 방 안에는 은유하가 나를 위해 사준 커피메이커가 있지만, 정작 나 말고 천가을이 가장 애용하고 있다.
'원작에서 너무 커피 많이 마셔서 질리는데.'
"그래도 오랜만에 입가심 좀 하러갈까요."
나는 마도기어로 단골 카페에 전화를 걸었다. 영업 시간은 아니지만, 사장은 내 번호를 잘 알고 있다. 정신이 없을 정도로 바쁜게 아니라면 전화를 받을-
[사장님 바쁘다냥!]
뚝. 뚝. 뚝.
"......?"
나는 멍하니 마도기어를 내려다봐야했다. 그리고 내가 방금 들은 목소리외 말투를 어디서 들어봤는지 떠올려야 했다.
"이 개새끼가?"
와장창.
나는 바로 내 방에서 뛰어내렸다. 강화유리고 뭐고, 전력으로 뛰어내린 나는 카페까지 한걸음에 내달려 카페의 문앞에 착지했다.
"힉."
녹색머리 고양이귀 미소녀 메이드가 카페의 문패를 OPEN으로 바꾸는 중이었다. 나는 눈앞의 존재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기도 하고, 분노가 치밀어오르기도 했다.
"당신 뭐예요?"
"......내 이름은 김펜릴!"
김펜릴은 귀를 쫑긋하며 손가락으로 V자를 만들었다.
"카페 알바다냥!"
"이런 미친."
설마 이런 곳에서 놀고 있을 줄이야. 나는 발을 들어 펜릴을 카페 안으로 걷어찼다.
콰앙!
문짝이 무너지고, 김펜릴은 몸을 빙그그르 돌며 테이블 위에 착지했다. 고양이같은 움직임은 완벽한 낙법을 취했고, 문앞에서 이루어진 소동에 사장인 후안이 깜짝 놀라며 부엌에서 튀어나왔다.
"뭐, 뭔가?!"
"흐냐앙! 손님이 아르바이트 팬다! 사장님, 경찰에 신고해달라냥!"
"손님이라니."
나는 손가락을 위아래로 가리켰다.
"여기 내 건물인데요."
"......."
김펜릴은 쭈볏거리며 꼬리를 말았다.
"......사장님은 최고인데 건물주가 최악이다냥."
"야."
나는 김펜릴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결계를 치...지는 않았다. 김펜릴은 도망치지 않았고, 도망칠 생각도 없어보였다.
"사장님, 혹시 얘 근로계약서 잠깐 볼 수 있을까요?"
"그, 그거야 문제가 되지 않네만."
건물주가 아르바이트 생의 개인정보를 요구하는 건 영업방해나 다름없었지만, 임대료를 한 푼도 내지 않는만큼 후안은 내 쪽으로 더 눈치를 볼 수 밖에 없었다.
"괜찮은가…?"
그러나 후안은 김펜릴의 눈치도 함께 보았다. 뭔가 걸리는 게 있는 모양이었으나 김펜릴은 당당하기 그지없었다.
"봐도 된다냥!"
김펜릴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후안은 내게 근로계약서의 파일을 날렸고, 나는 마도기어를 통해 김펜릴의 계약서를 확인했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어이, 김펜릴이."
"왜 그러냥."
"세계 멸망 사흘 전까지만 일하겠다는게 지금 말이 된다고 생각해요?"
김펜릴의 계약기간. 그것은 세계가 멸망할 것으로 예정된 2025년의 12월 22일까지였다. 성주가 간부들에게 '이 날에는 무조건 지구에 오겠다'고 약속을 한 날.
이른바 지구 종말의 날. 김펜릴은 그 날이 되기 3일 전까지 다크 레기온의 간부 일을 태업하고 놀고 먹을 생각이었다.
"흐흐, 어차피 세계를 멸망시키는데 3일이면 충분하지 않겠냥? 그러면…."
김펜릴은 웃으며 손가락을 세 개 펼쳤다.
"그럼 사흘 되기 전까지는 놀고 먹어도 되는 거다냥!"
"에라이 썩을."
예상은 했지만 설마 이정도로 막장일 줄이야. 나는 눈앞이 아뜩해졌다.
***
히로인적 속성에 관해 사람들이 파악하는 것은 전세계적으로 많은 이슈가 되었다.
창염은 어떤 속성의 히로인인가?
나야 개인 루트를 한 번 끝까지 밟았고, 당장 몸을 빌리고 있는 입장에서 그 성격이 어떤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지만, 당연히 피닉스 루트에 진입하기 전이었던 때에는 전혀 알지 못했다.
그래서 제작사의 고객 센터나 이벤트 행사가 있으면 항상 사람들이 물었다. 창염의 피닉스는 어떤 성격인지라도 좀 알려달라고.
"간부들이 조별과제를 하면 이런 느낌일 겁니다."
이벤트 행사 당시, 한 GM이 이런 식으로 썰을 풀기 시작했다.
"성주가 지구 정복이라는 조별과제를 간부들에게 나눠준 대학교수고, 간부들이 과제를 맡은 대학생이라고 해볼까요? 이런 비유가 맞는 지는 모르겠지만. 아하하."
당연히 사람들은 짜증을 냈다. 성주가 정령들을 어떻게 간부들을 세뇌하였는지 다 알고 있는 시점에서, 지구 정복을 과연 조별과제로 표현하는 검은 멀대 GM의 말에 게이머들은 분노했다.
하지만 그 정보라도 감지덕지. 제작사에서 생각하는 정령들의 이미지도 궁금하기는 했고, 창염의 피닉스가 가진 정보를 얻을 수 있다는 생각에 나도 생방으로 지켜봤다.
"먼저 석하랑. 어...간부로서 폭주한 는 열심히 노력하는 타입입니다. 자기가 맡은 역할을 충실히 수행할 뿐더러, 다른 사람들의 파트도 어느정도 알아볼 정도죠. 그래서 행여나 빠진 부분이 있으면 루살카가 보충을 하는 타입이에요. 앞에 나서서 발표하기는 싫어하지만 자료는 엄청 많이 모아오는 타입?"
맞는 말인 듯 했다. 석하랑은 자기 포지션의 역할에 최선을 다하면서도 여유가 되면 다른 이들을 신경쓰는 타입이었다.
"다음으로는 펜릴. 펜릴은 닥치면 하는 타입이에요. 방학숙제를 마지막에 몰아서 한 번에 끝내는 성격? 자기 나름의 기준을 가지고 그 기준에 따라서 마지노선까지 탱자탱자 노는 타입이죠. 그러다 막판에 닥쳤을 때 밤샘으로 과제를 마치는 타입."
"그 다음으로는 히드라. 히드라는 딱 자기 파트만 철저하게 하는 타입이죠? 네. 원작에서 그랬던 것처럼, 자기한테 주어진 부분만 해놓고 '나머지는 너희들이 알아서 해!'라고 말하죠. 마찬가지로 조장은 절대 안하고 평균만 가려고 하는, 1인분 이상은 안 하려고 하는 사람."
"카르나는 능력은 엄청 대단한데, 놀러다니느라 조별과제가 있는지도 몰라요. 그래서 직접 찾으러 가는 게 아니면, 카르나는 높은 확률로 무임승차하거나 하게 되죠. 하지만 카르나가 놀고있는 걸 현장에서 검거해서 충분히 만족시킨다면, 카르나는 남들의 3~4배는 더 잘할 거예요."
"아지다하카는 여왕벌입니다. 네. 주변에 아는 오빠, 선배, 동기들에게 족보를 얻는다거나, 아양을 부려서 과제를 대신 하게끔 한다거나 하면서 본인은 노력을 잘 하려고 하지 않아요."
"환룡은 강의에 들어가지도 않았습니다."
모두가 공감했다. 공감은 했다. 다들 여섯 정령들이 간부로서 어떤 성격을 가지고 있는지 정도는 잘 알고 있었고, 이제 베일에 드리워진 창염의 피닉스가 어떤 스타일인지 궁금했다.
그리고 GM은 관중들을 향해 외쳤다.
"그래서 이번 DLC는 강 정령들이 대학생이라면 어떨까라는 주제로 만들어낸 '캠퍼스룩' 스킨입니다! 각 정령별로 패키지를 구입하시면 봄여름가을겨울 사계절 룩을 모두 획득가능하시며…."
모두가 분노하여 울부짖었다. 그리고 룩이 하나 둘 공개되는 순간.
음머.
모두가 지갑을 열어젖혔다.
젠장.
캠퍼스룩이라고 해놨더니, 대학생 여친 룩을 만들어놓은 건 몹시 비겁했다.
"출시 이후 1개월 이내에 풀 패키지를 구입하시면, 22%할인된 가격과 함께 창염의 피닉스에게도 입힐 수 있는 대학생 룩이 서비스로 지급됩니다!!"
개새끼들.
***
그리하여.
나는 민트초코 케이크와 딸기 생크림 케이크가 놓여진 테이블 위에서 아르바이트 생을 상대로 '재면접'을 실시했다.
'세계 멸망 사흘 전까지.'
그 때까지 놀겠다는 말은 즉 펜릴이 사흘 내로 지구를 정복하고 성주에게 바칠 자신이 있다는 말이나 다름 없었다.
나라는, 창염의 피닉스가 배신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있어요?"
"물론이다냥."
펜릴은 풍속성 주제에 여유를 부렸다. 나는 그 여유의 원천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당장 민트초코 케이크를 포크로 퍼먹는 저 개냥이의 여유로움이 진짜로 풍기는 여유인지 아니면 허장성세인지 긴가민가했다.
'전력으로 싸우면 이길 수 있다.'
상성은 내가 우위였고, 기술적인 부분도 내가 더 뛰어나다. 대인전만 따지면 펜릴은 암살에 특화된 존재고, 나는 1:1이든 1:다든 어떤 전투에서도 밀리지 않는다.
카스피 해에서 삼중결계에 갇혔을 때 이미 확인했다. 펜릴은 나보다 약한 존재인 것을.
하지만.
'왜 모르고 있었지?'
아무리 암살에 특화되어 자기 존재감을 숨길 수 있는 존재라고 하더라도, 나의 광역 스캔에서 피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오히려 간부인 만큼 내게 더 쉽게 잡혔으리라.
"손 좀 줘봐요."
"싫다냥. 성희롱이다냥."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고."
"너야말로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냥. 손 잡으면 바로 불꽃을 내 속에 심으려고 할 거 아니냥."
"쳇."
성격은 무사태평하고 게으른 주제에 눈치는 더럽게 빠르다. 눈치가 빠르니까 놀고 먹는데 최적화 된 걸지도 모른다. 멸망의 날까지 성주가 지구로 내려오지 못한 다는 걸 알고 있을 테니, 그걸 금방 눈치채고 놀고 먹기 시작한 거다.
20년 전부터. 그것도 영국 왕실묘 이니 뭐니 하는 말도 안되는 이름으로.
"서울에 온 목적이 뭐죠? 그냥 알바하러 온 것도 아니고."
"다른 간부들의 부탁으로 서울을 파괴하러 왔다냥."
"얘 진짜 얼척없네. 제가 지금 눈앞에 있는데 그런 자신감이 나와요?"
"지금 여기서 바로 해볼테냥?"
펜릴은 한 번 입에 쪽 빨아먹은 포크로 내 딸기 생크림 케이크를 푹 찍었다. 명백한 도발이었다.
"흠. 미안하지만 그건 사양합니다."
나는 포크로 펜릴의 포크를 쳐냈다.
"여기 제 건물이고, 일단 당신 날뛰면 서울 무너지는 건 확정이라."
펜릴은 분명 본체로 변신을 감행할 것이다. 그러면 나도 전력을 발휘할 수 밖에 없을 것이며, 서울은 뉴클리언 레이드가 펼쳐진 평양 이상으로 파괴될 것이다.
'일단 놀 때 가만히 내버려둬야 해.'
적어도 2025년 12월 22일까지는 안전하다. 펜릴은 나를 향해 귀를 쫑긋 세우며 다시 포크를 휘둘렀다.
카--앙!
마력을 실은 포크와 포크가 부딪혔다. 펜릴은 나의 생크림 케이크 위에 올려진 딸기를 빼앗으려 했으며, 나는 포크를 쳐내며 딸기를 사수했다.
카앙, 카앙--!!
테이블 위에서 나와 펜릴의 자존심 대결이 펼쳐졌다. 신속에 가까운 펜릴의 포크질에 점점 내 생크림 케이크가 깎여나가기 시작했다.
"흐흥, 아무리 너라도 나한테 속도로는 안 된다냥."
"그럼 이렇게 하면 되죠."
나는 포크를 강하게 수평으로 휘둘러 펜릴의 포크를 쳐냈다. 우리의 포크는 동시에 테이블을 벗어났고, 서로 동시에 케이크로 다시 손을 뻗었다.
"늦었다냥!"
펜릴의 말대로, 내 포크보다 펜릴의 포크가 더 빨랐다. 펜릴은 딸기 생크림 케이크를 1/3가까이 잘라냈다.
"흐흥, 내 승리-"
"내 승리예요."
나는 포크를 역수로 쥐고 케이크를 위에서 한 가운데로 푹 찔렀다. 펜릴의 표정이 굳었고, 나는 민트초코 케이크 조각을 한 번에 들어올리며 입을 쩍 벌렸다.
으적.
"와...."
펜릴은 기가 차다는 얼굴로 나를 노려봤다. 그러면서도 꼬리를 쫑긋 세우며 나를 노려봤다. 역시, 펜릴은 설마 내가 민트초코를 먹을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듯 했다.
"너 뭐냥? 민트초코 싫어하던 거 아니였냥?"
"싫어하지는 않아요."
싫어하지는 않는다. 다만 누구 때문에 너무 많이 먹어서 질렸을 뿐.
"그런데 왜 민트초코에 불질렀냥?"
"아, 그거요? 당신 찾으려고요."
".......아하!"
펜린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 방법이면 나를 골려먹기에는 가장 적절한 방법이다냥. 지금도 그렇고."
"그렇죠?"
"그리고 확신했다냥. 너는 가 아닌 것을."
펜릴은 자신의 포크에 찍힌 딸기를 내게 겨눴다.
"걔라면 나를 죽여서라도 딸기를 사수했지, 이런 식으로 자기 걸 버리면서 남을 엿먹일 사람이 아니다냥."
"잘 아시네요."
"너, 도대체 정체가 뭐냥?"
"저요?"
나는 포크에 남은 민트초코 케이크를 한 번 쓱 핥고 깨끗해진 포크로 펜릴을 겨눴다.
"이 카페 건물주인 정령이죠."
"......."
아르바이트생 김펜릴은 꼬리를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