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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염의 피닉스-363화 (363/1,497)

〈 363화 〉1부 15장 21

모처럼 대사건이 끝났다.

나는 평양의 큐브를 손에넣었고, 이제 할 일이 없어졌다.

'그럼 창염을 불러야지.'

어디를 가면 좋을까. 나는 곰곰이 생각을 하다가 마침 은유하에게서 지난번에 들은 것을 떠올렸다.

삐리리.

마도기어가 울렸고, 아직 인천 영종도에 대기하고 있던 은유하가 금방 전화를 받았다.

[고객님! 지금 어디서 뭐하고 계세요?!]

"아무것도 안하고 있는 중인데요."

[그러면 안 되죠! 지금 얼마나 중요한 상황인데! X로이드들로 지금 알짜배기 땅을 알박기 하느라 얼마나 바쁘다고요! 고객님도 빨리 올라오세요!]

"그런 땅에 아무 관심도 없어요. 내가 지금 관심있는 건 하나뿐이라고요."

나는 은유하와 대화를 나눈 기록 중에 내가 은유하에게 전화를 건 목적을 꺼내들었다.

"딸기뷔페."

[네?]

"부산에 있는 당신네 호텔, 분명 딸기뷔페를 만든다고 했죠?"

[아, 그, 그거야 다음 주 중에 오픈하려고 했는데요.... 혹시 지금 그거 물어보려고 전화하신 거예요? 진짜로?]

"네."

그러면 내가 은유하에게 전화를 걸 이유가 뭐가 있다는 말인가. 나는 새삼스레 어이가 없었지만, 은유하도 어이가 없어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북한 땅 전체를 어떻게 개발할 지에 대한 논의도 아니고, 은하대학교의 신입생에 관한 논의도 아니고, 대마도의 문제도 아니고 딸기 뷔페라고요?]

"그거야 은유하 아가씨를 비롯해서 다른 사람들이 할 일이고."

지구의 절반을 날려버릴 핵폭발을 막았다. 이미 오늘 내가 할 일은 끝났다.

"지금 부산 내려갈 거니까, 호텔에 사람 물려둬요. 딱 요리들만 대기시켜놓고."

[자, 잠깐만요! 그럴 거면 저도 같이!]

"일단 좀 혼자 즐기게 해줄래요? 부탁할게요."

[......고객님? 혹시 제가 모르는 다른 사람 부르려는 건 아니죠?]

은유하는 눈치가 제법 빨랐다. 하지만 은유하는 하나는 알아도 '둘'은 모른다.

"에이, 저 말고 또 누가 그런다고."

[...네. 그러면 준비시켜놓을게요. 언제 가실 거예요?]

"지금."

나는 이미 신서울에서 날아올라, 부산에 도착했다.

"지금 호텔 옥상이니까, 식당 창문 깨버리기 전에 준비하세요. 10, 4, 1."

[카운트다운을 그렇게 하는 게 어디있어요?!]

여기있다.

* * *

잠시 뒤.

내가 은유하에게 딸기 뷔페라는 사업 아이템을 주문하기는 했지만, 이 세계의 인간들은 아무래도 제정신이 아닌 모양이다.

'딸기 뷔페라는 거, 이런 게 아닌데.'

딸기 뷔페라고 말은 해뒀지만, 사실상 딸기 뷔페는 딸기가 들어간 여러 가지 디저트를 즐길 수 있는 뷔페식 디저트 카페같은 곳이다.

그게 호텔에서 하다보니 크기가 조금 큰 편이며, 1인당 가격이 족히 평균 5만원을 훌쩍 넘어 나름 비싸다면 비싼 디저트 카페였다.

"......."

그러므로 이곳은 딸기 뷔페가 아니다. 은유하가 사업을 망나니 모드로 벌였는지, 아니면 나를 엿먹이려고 작정한 건지.

나는 뷔페 모든 음식에서 풍겨지는 딸기향에 그만 정신이 아뜩해졌다.

"......."

나는 그릇을 들어 샐러드바 앞에 섰다. 그곳에는 두 종류의 샐러드가 있었다.

딸기가 하나 통으로 들어간 샐러드.

옆에는 딸기가 작게 큐브 형태로 조각난 샐러드.

그리고 그 옆에는 온갖 종류의 샐러드 소스와 함께 분홍빛깔 소스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나는 그 소스의 스푼을 떠서 내 그릇에 올린 다음, 숟가락으로 살짝 핥아서 맛을 봤다.

"......."

딸기요거트소스였다. 그래, 여기까지는 오케이.

하지만 이 뒤로 늘어진 온갖 뷔페음식들에는 도저히 맛을 보러 가고 싶지 않았다. 한식, 중식, 양식, 일식이 코너별로 구성된 섹션에는 붉은색과 분홍색으로 넘실거리고 있었다.

'이거 개장하면 100% 망한다.'

장담한다. 한식 코너의 정갈하게 대형 그릇에 담겨진 밥을 퍼올렸다. 하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가운데, 쌀의 색깔은 선홍색이었다.

퍽.

나는 주걱을 내려놓았다. 나도 모르게 힘이 들어가, 괜히 부서지지 않았을까 걱정이 되었다.

"......."

과연 이걸 그릇에 담는게 맞을까? 이건 인간으로서 과연 허용할 수 있는 걸까. 음식에 장난치면 안되는데.

"...하아."

나는 결국 일단 내가 허용할 수있는 것부터 도전하기로 했다. 나는 모든 식사류 코너를 지나쳐 디저트 코너로 향했고, 딸기가 위에 올려진 하얀 쇼트 케이크를 한 판 통째로 들고 햇빛이 잘 드는 테이블에 앉았다.

"......."

나는 품에서 평양에서 얻은 큐브를 꺼냈다. 약속은 약속인만큼 부르는게 맞기는 하지만, 이 위치는 여러모로 신경쓰이는 것들이 많았다.

'CCTV 깔려있는 건 당연하고.'

그냥 호텔의 식당이다. CCTV는 은유하의 눈이 될 것이며, 결계를 치더라도 전자정보는 당연히 넘어가게 되어있다.

'어리석도다, 은유하여.'

일단 나는 식당 전체에 결계를 쳤다. 제법 넓은 결계라 물리적인 염탐 수단은 막아냈다. 마력이 깃든 물건들도 완전히 차단할 수 있었지만, 전력을 이용한 일반 CCTV까지는 차단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런 방법이 있는 줄은 몰랐을 거다. 지금 시간은 오후 2시.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마침 석양이 질 때 까지 햇빛이 잘 스며드는 자리가 있었다.

스윽.

나는 햇빛을 향해 손을 뻗었고, 나의 손은 분명히 햇빛의 힘에 의해 사라졌다. 아니, 투명화되었다. 빛의 난반사를 이용해 내 육신은 분명히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후후후."

나는 쇼트 케이크를 통째로 내려놓고 자리에 앉았다. 식기는 일부러 가져오지 않았다. 식기를 가져와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었다.

화륵.

내 눈높이가 변했다. 창염의 몸보다 훨씬 높은 키. 뻥 뚫린 창으로 고개를 돌리니, 푸른 머리칼에 백색의 코트를 입은 남자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보이지는 않지.'

밤이라도 경우에 따라서는 몸을 숨길 수 있지만, 그래도 역시 햇빛 아래에서 몸을 숨기는 편이 훨씬 나았다. 아마 CCTV 상에는 내가 잠깐 사라진 것으로 보이리라.

화륵.

나는 창염의 몸으로 다시 돌아온 뒤, 마력을 해제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햇빛이 있는 곳까지 멈춰섰다.

"아, 식기 안 가져왔네요."

연기하기도 참 힘들다. 나는 품안의 큐브를 불태웠고, 곧 나는 '나'로부터 분리되었다.

"......."

나는 햇빛 속에서 어깨를 으쓱였다. 큐브를 불태움으로서 딸기 뷔페 속에 모습을 드러낸 창염은 크게 심호흡을 하며 손을 비볐다.

[당신은 안 먹어요?]

창염 또한 내 안에서 주변 상황을 살폈는지, 마력을 통해 내게 의사를 전달했다. 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내가 처음 앉았던 곳과 반대편에 앉았다.

[알았어요. 그럼 저 혼자 챙겨올게요.]

"흥흥~"

창염은 콧노래를 부르며 그릇을 챙기러 떠났다. 과연 창염은 이 뷔페에 어떤 반응을 보일까. 나는 괜히 창염이 은유하를 죽이러가는게 아닐까 걱정이 되었지만, 적어도 디저트 섹션은 어느정도 살아있었다.

'아니면 후안 사장님한테 잠깐 부엌 좀 빌리면 되고.'

아직 후안에게 알려주지 않은 특별한 딸기 레시피가 남아있다. 창염이 이 뷔페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나는 그걸로 창염의 분노를 잠재울 생각이었다.

"......."

"흥, 흥흥, 흥~"

창염은 하필이면 원작의 BGM을 흥얼거리며 음식들을 퍼나르기 시작했다.

딸기 소스가 듬뿍 쳐발라진 스테이크부터 시작하여, 딸기를 갈아 넣은 갈비찜, 딸기를 얇게 잘라서 화덕에 도우와 함께 구운 피자, 거기에 화룡점정으로 면 색깔부터 핑크색으로 반짝이는 딸기 스파게티.

은유하.

신서울 개망나니는 딸기 뷔페를 만들라고 했더니 뷔페 모든 음식에 딸기를 갈아넣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런다고 내가 좋아할 거라고 생각했나.

'저건 좋아하네.'

"어, 이거 맛있어보인다! 푸흐흐."

창염은 그릇 하나로는 부족한 양을 최대한 많이 쌓아 테이블로 돌아왔다.

[안 먹어요?]

[알면서 뭘 묻냐.]

[맛있을 것 같은데....]

[난 이걸로 충분해.]

나는 내 앞에 놓인 쇼트 케이크를 가리켰다. 맨 위에 올려진 딸기를 옆으로 툭 쳐내면 그냥 생크림 케이크나 다름 없었다.

"음.... 흐흐, 그럼 다른 것도 가져와야지~"

창염은 신이 난 발걸음으로 다른 코너의 그릇을 들어올렸다. 나는 창염이 분홍색 튀김옷이 입혀진 치킨을 집어 그릇에 담는 것을 확인한 뒤, 창염이 음식을 담는 것을 바라보기를 포기했다.

'차라리 6민트를 하고 말지.'

딸기는 디저트에 들어갈 음식이지, 메인에 들어갈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염은 열심히 딸기가 꼭 하나는 들어간 음식들을 퍼담았다.

'쟤들은 지금 내 심정을 알까.'

창밖에는 얼음 장벽을 넘어오려 안간힘을 쓰는 대마도 인들이 한 눈에 보였다. 마침 호텔이 있는 장소가 해운대이기도 했고, 창가 자리에서는 바다라고 부르기에는 상당히 동해 바다가 얼음 장벽 옆으로 졸졸 흐르고 있었다.

[다 담아왔어요.]

창염은 동시에 그릇 두 개를 내려놓았다. 무려 세 그릇이나 동시에 시식을 시도하려는 창염은 손바닥을 비비며 혀까지 날름거렸다.

예쁘기는 했지만, 식탁을 보고 싶지는 않았다.

[육성으로 대화는 가능해요?]

[결계 이중으로 치면.]

창염은 CCTV를 등지고 앉았다. 나는 우리의 테이블에 얇은 결계를 다시 쳤다. 딱 이야기 소리만 차단될 정도였다.

"푸흐흐, 한 입 하실래요?"

창염은 까르보나라 소스가 듬뿍 담긴 분홍색 파스타를 포크로 휘감아 내게 건넸다. 나는 단호히 고개를 가로저었고, 창염은 아쉽다는 얼굴로 조심스레 입에 파스타를 넣었다.

"!!!!"

창염은 눈을 찡그리며 오도방정을 떨었다. 테이블 아래 다리로 내 다리를 톡톡 건드리기까지 했다.

할짝.

창염은 입술에 묻은 소스를 혀로 핥으며 싱긋 웃었다.

"저, 결정했어요."

"뭘?"

"은유하까지는 봐줄게요. 푸흐흐!"

"......."

전국민에게 이 사업아이템이 망하게 되더라도, 은유하는 지구 상의 유일한 고객에게 핀포인트로 판매에 성공을 한 것 같았다.

"은유하 지분 늘려주게?"

"네. 1.0625?"

"참 많이도 늘려준다."

은유하를 허락했다고 해서 내가 은유하에게 양다리를 걸칠 생각은 추호도 없지만, 창염은 은유하의 괴식 러시를 상당히 마음에 들어했다.

"맛있냐?"

"네. 매일매일 여기서 밥 먹고 싶은 만큼. 어때요?"

"...혼자서 매일 이 시간에 여기서 먹는 건 좀."

"다른 사람들 데려와서 먹으면 되죠!"

"아냐. 그랬다가는 청화가 미친 년 소리밖에 더 듣겠어?"

"싫으면 말고. 칫. 베에."

창염은 입술을 삐죽 내밀며 나를 향해 혀를 내밀었다. 나는 확 그 혀를 손가락으로 잡아채려다가 말았다.

"저 사람들이 너 이런 식성인 걸 알아야할텐데."

"식성이 뭐 어때요? 정령인데. 인간의 식성이랑 다르다고요."

"그래, 그래. 맘껏 먹어라. 내가 살테니."

"푸흐흐."

창염은 웃으며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대마도 사람들 아직 모르나봐요?"

"어. 그냥 잘려진 상태로 올려져있지."

"석하랑은 어디서 뭘 하길래?"

"석하랑이 할 건 아니고, 다른 사람이 해주기로 했어."

"누구요?"

"루살카."

맛있게 딸기 피자를 먹던 창염이 인상을 찌푸렸다.

"루살카가 부산을?"

"석하랑이 괜히 부산에 있을 때 바다에 이상이 생기면 문제가 생길 수 있으니까. 석하랑이 대마도를 옮겼다! 이런 오해가 생기지 않게끔."

창염은 능숙하게 마도기어를 조종해 석하랑의 현재 위치를 확인했다. 여전히 하얀 소복같은 선녀복을 입은 석하랑은 딱딱하게 웃는 얼굴로 서울로 개선하고 있었다.

"쟤 저 옷 싫다더니 계속 입네요."

"아무렴 저거 벗으면 알몸인데 오죽할까."

인천에 모든 옷을 놔두고 졸지에 사람들의 행가레에 서울까지 직행으로 와버렸으니, 석하랑은 지금 마력으로 이루어진 선녀복 한 벌만 걸치고 있을 뿐이다.

"누가 마력이라도 해제하면 난리가 나겠네요~"

"내 마력도 아닌데 무슨."

"힘으로 벗길 수 있잖아요."

"그런 짓 안 해. 내가 벗기고 싶은 건 하나 밖에 없거든."

"이런 거?"

창염은 은근슬쩍 사제복을 열어젖혔다. 나는 시선을 가슴골에 고정했다.

"역시 안에서 보는 것보다 이렇게 따로 보는게 훨씬 더 예쁘다."

"흥, 개수작부리지 마요. 만져보고 싶어서 그런 거 다 아니까."

"아니, 이번에는 빨아먹고 싶은.... 흠흠."

창염은 노골적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흥, 당신 딸기 싫어하니까 안 줄 거예요."

"딸기 먹으면 한 번 주냐?"

"음...."

창염은 그릇과 함께 가져온 딸기 우유를 흔들며 꿀꺽 꿀꺽 삼켰다. 그리고 가슴을 살짝 열어젖히며, 자신의 손을 가슴에 집어넣었다.

찌걱.

"모유플레이라는 거, 히드라 말고도 저도 가능한데...."

창염의 손가락에는 갓 마신 딸기 우유가 반짝이고 있었다. 창염은 검지와 중지를 세워 식탁위에서 앞으로 걸었다.

"미안하네요. 제 맛은 딸기맛이라서."

"가능."

"싫어한다면서요."

"야."

나는 고개를 앞으로 뻗었다.

"내가 민트초코 좋아해서 펜릴이랑 민트초코 그렇게 퍼먹은 줄 아냐?"

"...푸흐흐, 그래요. 당신 그런 사람이었죠."

창염은 실실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근데 지금 이 시간이면 누가 '자고 있어서' 안 돼요. 나중에 언젠가 기회가 있지 않을까요? 푸흐흐."

"......."

창염은 다시 식기를 놀리기 시작했다. 나는 주변을 훑은 뒤, 속으로 다짐했다.

다음 원정에는 냉장고에 딸기우유만 한 가득 채워놓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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