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2화 〉1부 15장 20
어이가 없었지만, 대화는 계속 이루어졌다.
'학생이 공부하겠다는 데 말릴 방법이 없네.''
문제는 그 꼴통이 고집 하나는 히로인 중 가장 강하며, 머리는 또 제일 좋아서 추후 수능을 칠 때면 진짜로 만점을 받을게 분명하다는 것.
결국 내가 한 발 물러서야 했다.
"꼭 신서울대학교여야해요?"
나는 유나에게 다른 선택지를 제시했다.
"은하대학교 있잖아요."
서울에 세워질 새로운 대학교. 사실상 이유나를 위해서 만들어진 대학교였다. 그러나 이유나는 영 심드렁한 얼굴이었다.
"어차피 그건 될 확률이 무지 낮은 거잖아요. 그리고 그거 솔직히 관심 없어요. 부모님이랑 딜을 해서 원서를 넣었던 거니까."
"딜?"
유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테이블 위에 올려진 수험서와 문제집을 꺼내들었다.
"부모님이 자꾸 원서 넣자고 하셔서. 원서 쓰는 대신에 용돈 받았어요. 십만원."
유나는 자랑스럽게 쌓여있는 책들을 가리켰다.
수험서는 한 두권이 아니었고, 눈으로 훑어도 족히 10만원은 훌쩍 넘어보였다. 부모에게 받은 용돈에 자기 용돈까지 보태어 수능 참고서를 사다니.
10대의 이유나, 보기보다 제대로 공부에 미친 존재였다.
"만약에 은하대학교에 합격하면 어쩌시려고요?"
"2만 대 1의 확률인데요?"
"60억 분의 1의 존재예요, 당신이."
"음.... 그럼 바로 입학처에 연락해야죠. 부모님이 넣어보라고 하셔서 넣었다. 진짜로 될 줄은 몰랐다. 아직은 부족한 것 같다. 입학 취소 시켜달라. 나는 나중에 수능전형이 생기면 그 때 시험을 쳐서 들어가겠다."
"......."
이능력자로 각성하고 세계 최강자가 될 자질을 가졌음에도, 심지어 자신이 외계 신의 화신이라는 걸 알았음에도 이유나의 꿈은 확고했다.
"그렇게 S대 가고 싶어요?"
"대한민국 학생들이라면 누구나 한 번은 꿈꾸지 않나요? 국내 최고 대학에 들어가는 거."
"꿈이 왜 그렇게 소박해요?"
움찔. 빙수를 떠먹으려던 유나가 처음으로 나를 향해 눈썹을 찌푸렸다.
"지금 제 미래의 모교가 될 곳을 무시하는 건 아니시죠? 저 S대 학생이 되려고 공휴일인데도 공부하러 나온 건데."
"아니. 잠깐만요."
나는 유나의 말을 끊었다. 10대 답지 않게 꽉 막힌 사고방식에 오히려 내가 더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당신 지금 당신의 이능력이 어느정도까지 재능있다는 건 이해했죠?"
"네. 지구상에 유일한 존재로 각성했다는 거 맞죠? 저 그렇게 이해했는데."
"<설화령>, <군신>, 거기에 <피닉스>까지 당장 넘을 수 있는 존재가 당신인데, 그 이능력의 재능을 놔두고 공부로 대학을 가겠다는 거예요?"
"네."
"아니."
나는 답답한 마음에 속이 다 얹힐 지경이었다. 유나는 그게 뭐 잘못되었냐는 얼굴로 눈을 깜빡거리고 있었다.
"그 능력을 가지고 히어로나 헌터 안 할 거예요?"
"대학졸업하고 해도 되지 않을까요? 김누리라는 분을 보니까 히어로 하면서 헌터 겸직을 한다던데. 헌터 시장이 조금 더 안정되면 대학생 생활을 하면서도 아르바이트 식으로 헌터를 할 수 있을 것도 같고요."
"와, 진짜 이유나...."
이정도로 고집불통일 줄이야.
물론 이유나가 정론을 얘기하는 건 맞고, 내가 오히려 특혜를 종용하는 거나 마찬가지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유나는 평범한 대학생이 되기를 원했다.
"진짜 이러기에요? 막말로 당신 내가 당장 청화단에 넣을 수도 있는데?"
"저 공부해야 돼요. 지금 학원가야하는데 당신께서 불러서, 땡땡이 친 거나 마찬가지라고요."
"공휴일에 학원이 일을 해요? 대한민국이 이 난리가 났는데?"
"학원에서 자습하려고 했는데요. 집은 영 소란스러워서."
"와...."
그저 감탄만 나왔다. 나는 품안에 있는 큐브를 이용해 유나를 원작 20대로 바꿔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얘 진짜 말 안통하네.'
결국 나는 마지막 수단을 사용하기로 했다.
"세계가 멸망하면 대학이고 뭐고 다 터질텐데요? 당장 지금만 하더라도 나라가 난리가 났는데, 세계가 멸망 직전에 수능이 제대로 운영될 것 같아요?"
"아!"
유나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는 듯 손뼉을 쳤다.
"수능이 미뤄질 수 있어요?!"
"아무렴."
"그건 좀 그렇네요…."
유나는 그제서야 고집을 꺾었다. 팔짱을 끼고 골똘히 생각을 하더니,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제부터 제가 뭘 하면 되는 거예요?"
화속성 SSS+1 로 각성한 이유나.
석하랑, 카르나, 환룡과 만나면 4개 속성 101도 가능한 절대자.
하지만 유나의 역할은 하나 뿐이다.
"살아있는 것."
"......?"
"그 어떤 고난과 역경이 있더라도 자살하지 말고, 끝까지 버티세요. 절대로 나쁜 생각하지말고 좋은 것만 생각하는 거예요. 알겠죠?"
유나는 내 부탁을 듣고 눈을 깜빡이다가 헛웃음을 지었다.
"......평생겪을 고난이랑 역경을 지금 한 번에 주신 것 같은데."
그렇게 말하면 내가 할 말은 없었다. 하지만 유나는 특유의 은은한 미소로 굳게 고개를 끄덕였다.
"대충 알겠네요. 왜 당신께서 저를 이렇게 특별히 신경쓰시려고 하시는지."
"왜 그럴 것 같아요? 맞춰봐요. 푸흐흐."
"저 자살하면 그 성주나 이계신이라는 분이 제 몸에서 나오나봐요?"
"헐."
어떻게 알았지? 유나는 얼마 남지 않은 빙수를 스푼으로 휘휘 저으며 한 스푼 크게 퍼내며 꿀꺽 삼켰다.
"걱정마요. 저는 절대로 그런 일이 없을 거니까."
유나는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진짜 사랑을 해보기 전까지는 죽을 생각이 없어요."
유나는 내가 알던 그 미소 그대로, 나를 향해 활짝 웃었다.
역시, 유나는 여신이었다.
"어, 그러면 저 지금 성인이에요? 아니다. 일단 출생 신고는 원래 태어날 예정보다 6년 늦었으니까 6년이나 벌었네요? 개꿀이네요. 후후."
그리고 급식이었다.
* * *
피닉스가 여신의 과거에 충격을 느끼고 있던 그 시각.
38선의 히어로들은 사람들이 다닐만한 넓은 길을 만드는데 여념이 없었다.
"아저씨! 거기 멋대로 가지마요! 지뢰 터진다고!"
히어로들과 군인들이 질서를 잡아도 속수무책이었다. 수년간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은 DMZ는 수천 수만 명의 사람들이 한 번에 지나가기에는 길이 너무나도 협소했다.
"으아아아! 비켜어!"
"여기서 이러고 있을 시간이 어디있어! 뗀놈들 내려오기 전에 땅 먹어야지!!"
선두에 있던 사람들은 눈에 불을 켜고 북쪽으로 달리고 있었다. 버려진 땅이나 다름없던 한반도 북녘의 유일한 문제였던 평양의 괴수, 공식명칭 <뉴클리언>이 사라졌다.
- 만주에서 중국인들이 넘어와서 무단 점거를 하기 전에, 백두산까지 진을 치고 막아야한다!
이미 6월 초, 중국의 4천 히어로들은 멋대로 결기를 다지며 평양으로 진격했다. 대외적으로는 히어로의 자의적인 진격이었고, 원탁의 중재와 너무나도 많이 날뛰는 괴수들의 무리에 그들은 회군해야했다.
- 평양이 무너졌으니, 압록강과 두만강을 넘어 인민군이 넘어올 수 있다.
평양의 승전에 따른 사람들의 열광은 땅에 대한 열광으로 가득찼고, 결국 그 열광은 허허벌판이나 다름없는 한반도 북녘으로의 진격이 되었다.
"젠장, 이래서는 늦잖아!"
"급보! 중국에서 싹다 내려오는 중!"
"망했다, 러시아에서도 내려오는 중이래!"
한반도의 북쪽에는 중국과 러시아가 있었다. 그리고 그 국경지대에 있던 사람들은 평양 점령에 따라, 조금이라도 자신들의 땅으로 늘리고자 돌출 행동을 보였다.
"히어로들이지?! 협회랑 나라 명령을 받는 거야, 개새끼들!"
"싹다 민간인이래! 히어로들 저지선을 몸으로 뚫고 내려오고 있단다!"
"에이, 시부랄 것들! 그게 민간인들이냐?! 히어로들 섞여서 내려오는 거겠지!"
북으로 진격하는 이들은 다급했다. 이대로 가다가는 평안도와 함경도를 빼앗길 위기에 처했다.
"이대로 가면...!"
"와!"
누군가가 희망에 찬 목소리로 소리쳤다.
"씨발, 압록강에서 조류형 괴수들 뛰쳐나왔단다!"
누군가들에게는 익숙한, 푸른 새들이 둥지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 * *
"갑자기 어디에 연락을 하신 거예요?"
"아, 잠깐 별장에다가 연락을."
나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화장실을 다녀오겠다며 잠깐 자리를 비웠지만, 유나는 아무 의심도 하지 않았다.
"유나 양."
"네."
"...당신은 제가 아는 그 사람이랑 너무 다르네요."
여신님의 급식 시절과 대화를 하면서 느꼈다. 이 여신은 내가 알던 그 여신이 아니다. 본인도 그렇게 얘기했다.
- 저는 수능치기 전이랑 치고 난 뒤랑 사람이 달라져서....
원작의 갈색 단발의 이유나와 지금 내 눈앞의 이유나는 설정상 분명히 같은 이계신의 화신이지만, 그 5년의 차이가 확연히 달랐다. 원작과 현재의 괴리는 천가을 이상으로 달라서 나는 외려 안심이 되었다.
'원작같았으면 분명 심장이 쿵쿵거렸을 거다.'
정말 큰 마음을 먹고 유나를 만나러왔던 만큼, 내 긴장은 완전히 풀려버렸다.
정도만 걸으려고 하는 유나를 보고 있자니 영 답답해서 속이 터질 지경이었고, 결국 그로 인한 답답함 덕분에 유나에게 반하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빌런으로 살아와서 다행이다.'
만약 유나가 원작같은 성격이었다면. S대로의 진학을 포기하고 E등급 이능력자임에도 불구하고 히어로 길이라는 가시밭길을 걸으며 상처를 입은 존재였다면 100% 나는 이 자리에서 유나를 덮쳤을 것이다.
하지만 다행히 그런 일은 없었다. 유나는 내가 절대로 그를 덮칠 수 없는 최강의 방어구를 입고 있었다.
교복.
'암만 그래도 미성년자 상대로 그러는 건 아니지.'
원작에서는 성인이었다고 하더라도 지금은 미성년자인 만큼, 나는 결코 그들에게 두근거리지 않았다. 나는 풍마가 아니다. 나는 아무 부담없이 유나의 스마트워치를 눌러 내 연락처를 집어넣었다.
"혹시나 공부하다가 힘든 거 있으면 얘기해요. 집안 문제라거나, 돈 문제라거나. 제가 해드릴 수 있는 건 해드릴게요."
"저 자살 안시키려고 너무 쉬운길로 보내려는 거 아녜요?"
"당연하죠. 당신 죽으면 모든게 끝장인데. 자살하지 마요. 절대로."
"만약 제가 자살하려고 하면 어떻게 되나요?"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막을 겁니다."
진짜 가리지 않을 것이다. 유나는 내 엄포에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진짜 사랑을 해보기 전까지는 죽을 생각 없으니까."
그건 맞는 말이긴 했다. 유나도 나름 인공 정령인 만큼 사랑을 통해 진정한 여신으로 각성하는 존재였고, 그 첫사랑은 다름아닌 주인공과의 사랑이었다. 정령 일곱 명 분의 사랑.
'많이 무겁지.'
여러모로 무거운 사랑이었다. 그만큼 진지하다는 얘기기도 했고, 포용이 넓기도 했다. 그만큼 침대 위에서도 대단-
"흠흠."
잊지말자. 유나는 지금 여고생인 것을. 아무리 내가 기억하고 있던 갈색 단발의 여신과 키도 몸무게도 가슴도 별반 다를게 없-
"크흠."
"......."
유나는 추가로 주문한 음료를 홀짝이며 나를 게슴츠레 노려봤다. 나는 괜히 찔려서 내 몫으로 주문한 딸기요거트를 빨대로 휘휘 저었다.
"그래서 유나 양. 앞으로 잘 부탁해요. 당신의 마음가짐에 세계의 미래가 달려있으니까."
"네. 안심하세요. 죽는 한이 있더라도 수능 시험장에서 죽을 거예요."
"......."
언젠가 유나(여신)이 얘기한 적이 있었다. 수능을 치기 전까지, 자기는 수능에 미쳐있었다고. 대한민국 입시가 나은 괴물이었다고.
"흠흠. 그래서 마지막으로 하나만 여쭤봐도 될까요?"
"뭔데요? 이능력의 사용? 다른 속성의 각성? 히어로 협회에 이능력자로 등록하는 방법? 아니면 헌터 길드에 들어가는 방법?"
"아뇨. 그게 아니고."
유나는 마치 자신이 크게 죄라도 짓는 것처럼 눈을 질끈 감으며 내게 물었다.
"그...제가 만점 받는다고 하셨던 수능이 몇 년도 수능이에요? 저, 꼭 그 해에 수험을 보고 싶은데."
공부가 밥먹여주냐면서 고졸이 된 김누리를 보금어주던 여신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성주나 이계신보다 더 무서운-대한민국 입시가 낳은 괴물이 내 눈앞에 앉아있었다.
"......그건 말 안 할래요."
"예? 그러는 게 어디있어요? 부모님이 양부모라는 것도 스포하시고, 제가 이계신이라는 외계인의 화신이라는 것도 스포하시고, 제 이능력도 스포하시고, 제가 세계를 구하는 길드의 일원이 될 거라는 것도 스포하시고, 제가 외계인이었다는 것도 스포하셨으면서 왜 그건 스포하시지 않는 건데요!"
"......."
저렇게 말하니까 미안해서라도 말을 하고 싶지만, 나는 차마 유나에게 진실을 말할 수 없었다.
"...2022년에 수능 치시면 됩니다."
"그래요? 저 딱 고3 될 때네요. 하아, 이제 공부 계획 다시 세우면 되겠네요. 수능 만 점, 후후."
"......."
유나는 수능에 만점을 따내긴 할 것이다. 다만 그것이 400점 만점이 아닌 399점이 될 거라고까지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수능 2교시 수리영역 가,나 두 종류의 시험 모두 2번 문제에서 2번 문항에 대한 정답 체크가 원인 모를 전산 오류로 전원 오답 처리가 될 것이다. 아무리 원인을 찾아도 방법이 없었다.
문제는 선의철 정부 고위 공직자의 자제가 수능 만점을 눈앞에 두고 그 문제를 틀렸기에, 수능 만점자는 나오면 안 된다는 이유로 '전원 오답'이라는 결과를 만들어버리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하게 된다.
그리고 유나는 그 '황신의 저주' 사태의 피해자였다.
그해 유이한 수능 만점이되 399점인 유일한 사람.
"후후, 400점 만점~ 오늘 집에가면 바로 모의고사 풀어야지. 후후."
나는 차마 저리 기뻐하는 유나에게 진실을 말할 수 없었다.
그래도.
다른 이들과는 달리.
'유나는 내 설명을 다 들어줬어.'
내 안의 창염도 만족하고 있을 것이다.
"아 참."
유나는 손뼉을 치며 내게 물었다.
"더 하시고 싶은 말 있으세요?"
역시 유나는 여신이다.
* * *
유나를 학원에 보낸 이후, 나는 어디로 가야할 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뉴클리언을 잡으며 휴가가 시작되었지만, 나는 이제 어떻게 휴가를 보내며 될 지 난감했다.
"......이제 뭐하면서 쉬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