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창염의 피닉스-355화 (355/1,497)

〈 355화 〉1부 15장 13

<2020년 8월 14일 오후 6시 55분>.

집행관이 때아닌 기자회견을 자처했다.

협회 공식 사이트, SNS 등을 통해 공식적으로 발표를 나선 건 집행관 치고는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덕분에 익명의 관계자들이 말하는 온갖 추측과 예상이 우후죽순으로 쏟아졌다.

가령, 은하대학교 입학 원서를 불과 하루 사이에 모두 파악을 완료하여 1차 합격자를 발표한다더라.

가령, 청화와 청화단이 이번에는 새로운 도시에 원정을 나갈 준비를 한다더라.

가령, 석하랑의 대마도 여왕 사태에 대하여 협회 차원에서 뭔가 협의가 이루어진 것을 밝히려 한다더라.

가령, A급 이능력자 김누리에 대하여 협회가 나서서 양성한다고 주장한다더라.

가령, 난민 사태에 대하여 백희아가 총대를 메고 공식 적으로 협회와 정부의 입장을 대표하여 무언가를 발표한다더라.

그야말로 온갖 기상천외한 예상들이 오고가는 가운데, 기자단에게도 어떤 발표가 이루어지는지 알려지지 않았다.

그야말로 베일에 꽁꽁 감싸여진 발표.

그 누구도 알지 못하는 상황이었고, 심지어 협회에서 집행관의 업무를 보좌하는 보좌진들도 집행관이 무슨 발표를 할 지 몰랐다.

-총리 님. 혹시 뭔가 아시는 거라도…?

오직 권한대행을 맡고 있는 총리만이 입을 굳게 다물었다.

한창 대선이 준비되고 있는 와중이기는 하였지만 백가의 우두머리인 총리에게는 어쩌다보니 집행관 백희아라는 뒷배경 덕분에 권력을 쥐고 있기는 하였다.

-나도 모르네.

그 권력이 드디어 끝이 나버렸다. 총리에게조차 알리지 않은 극비의 발표에 협회 차원에서 무언가 단순한 조치가 있는게 아닐까 하는 예상이 지배적인 가운데, 백희아가 드디어 기자회견대에 섰다.

모두가 예상했다.

딱 한 줄. 한 마디.

백희아가 회견대 앞에 서서 말하는 것은 지극히 간결했고, 이후의 설명은 철저히 보도자료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전 청화의 중국행도 그러했고, 인도행도 그러했다.

뚜벅. 뚜벅.

백희아는 아무 종이도 없이 기자회견대에 섰다. 모두가 숨을 죽인 가운데, 백희아는 조심스레 붉은 입술을 열었다.

"평양."

모두가 굳었다. 아주 잠깐 세상이 멈췄고, 백희아의 입술만이 움직이고 있었다.

"다음 날 8월 15일 오전 10시, 평양의 괴수를 잡겠습니다."

핵폭탄이 터졌다.

* * *

<오후 8시, 영종도 US호텔 펜트하우스.>

"다들 PTSD 일으키고 난리네요."

"아무렴 나라가 망할 뻔한 사고였는데."

석하랑이 빈정거렸지만 나는 전혀 개의치않았다. 어차피 이런 혼란은 원작의 미래에서도 마찬가지였고, 지금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다.

"평양 사태라는게 그렇게 심각한 문제였나?"

"네. 한국에 있던 S급들이 딱 두 명 빼고 다 죽었죠."

광검, 그리고 설화공주.

S급으로 올라갈만한 자질을 가진 준S급들까지 포함하면 거의 10명에 가까운 S급들이 죽었던 게 평양 사태였고, 백희아는 서울수복작전보다 더한 사람들의 공포를 터뜨리고 말았다.

"다들 백희아 욕하는 중이네요."

은유하는 네트워크에서 벌어지는 사람들의 분노를 읊었다. 차마 입에 담지 못할 분노와 욕설이 모두 집행관 백희아를 향하고 있었다.

"정리해보면.... '객기부리지 마라?'. S급들도 모두 죽었는데, 석하랑까지 잃으려고 작정한 거냐. 난리네요, 정말."

"대외적으로 보면 한국 협회에서는 석하랑 단독 작전이니까요."

백희아는 평양을 정복하기 위한 명단으로 <설화령> 한 명만 달랑 발표했다. 화권도, 궁성도, 심지어 청화단의 괴수 군단 조차도 동원하지 않은 사실상 단독작전이었다.

"실상은 다르지만."

전투를 치를 당사자들은 여기에 다 모였다. 나, 석하랑.

그리고 막 LA에서 영종도에 도착한 은유하와 카르나.

거기에 대마도를 자르고 싱글벙글 웃고 있는 샤오린과 환룡.

"고객님, 저는 X로이드들이랑 바이오로이드들로 주변 통제하면 되는 거죠?"

"예. 분명 미친 놈들이 벌써부터 평양 근처에 접근하려고 하고 있을 거예요."

은유하는 전투에 직접 참가하지는 않지만, 야차 레이드에서 인도 히어로들이 경계를 섰던 것처럼 기계인형들을 이용해 방어선을 구축할 것이다.

뉴클리언 레이드로 인한 여파가 바깥으로 미치지 않도록 하는 것도 있지만, 괜히 부나방처럼 뛰어들 혈기 왕성한 이들을 막으려는 의도였다.

"그리고 사람들 여론 좀 잠재워줘요. 옛 북한 땅 전체를 우리가 먹었을 경우의 이점과 장밋빛 미래를 퍼뜨리면서 진정시켜주세요."

"쉽지 않을 걸요? 다들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에요. 석하랑 한 명이 평양 사태 막으러 간 결사대보다 더 강하냐, 아무리 그래도 혼자서 모든 걸 다 해결할 수 있냐. ......장작 제대로 타오르고 있어요. 지금 사람들 백희아 찾으면 찢어죽이려고 하고 있는 걸요?"

"덧붙여서 내도 난리다."

석하랑은 이제 해탈한 얼굴이었다. 뉴클리언 레이드-공식적으로는 '평양 정벌'-가 설화령의 단독 레이드로 알려지는 바람에, 한국 뿐만 아니라 대마도도 시끌벅적했다.

"우리 여왕님 멋대로 데려가서 싸우게 하지 말라고 난리네. 나참, 내가 가서 싸우겠다는데 지들이 뭔 상관이야."

"그만큼 SS급 이능력자의 위용에 안정감을 느끼는 걸테지."

카르나는 불안감에 떠는 이들을 두둔했다. 하와이안 셔츠에 통이 큰 반바지를 입은 카르나는 실내임에도 선글라스를 착용한 채 껌을 씹고 있었다.

"원래 강한 자의 아래로 가는 건 인간의 어쩔 수 없는 본능같은 거다. 음...표현이 조금 그랬군. 정정하지. 신변의 안전을 찾아다니는 건 약한 인간으로서 당연한 거라고 할 수 있지."

"전혀 정정한 게 아니잖아...."

환룡은 샤오린의 품에 안겨 빈정거렸다. 강자의 여유가 느껴지는 카르나의 발언은 평범한 인간으로서는 조금 듣기 거북한 발언이었고, 오히려 환룡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뭐.... 지금 이 땅이 가장 안정감이 있다는 건 동의해. 그 뉴클리언까지 제압하면 아마 평양 땅이라도 산다고 하지 않겠어?"

"그건 안 됩니다."

은유하가 단호한 목소리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다 제 땅이에요. 제가 사들일 땅이라고요."

"음. 응당 그래야지. 그래야 내 파트너지."

"우후후, 리조트부터 지을까요? 인형들로 땅 개척하고 막 그러면 될 것 같은데."

벌써부터 김칫국을 사발로 들이키고 있는 은유하는 그야말로 무사태평이었다. SS급 4명이 동원되었다는 건 여기 있는 당사자들과 청화단의 극히 일부만 알고 있는 만큼, 실상을 아는 사람은 태연자약하기 그지 없었다.

은유하가 비정상이었다. 전국민의 99.99%는 지금 백희아를 찾으려 혈안이 되어 있었다.

삐리리.

마침 내 마도기어에 호출이 들어왔다. 제자놈. 이승형이었다.

[스승님, 확보했습니다.]

화면 너머 이승형은 백희아를 직접 등에 업고 있었다. 백희아는 창백한 얼굴로 내게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했다.

[...저 내일 햇빛 꼭 보게 해주세요.]

"물론이죠. 그 때까지는 거기 숨어계셔요."

나의 방.

이승형은 신서울에서 백희아를 납치하여 서울로 직접 뛰어서 들어갔고, 아키택트의 도움을 받아 지하로를 돌파하여 여의도에 도착했다.

[스승님, 저도 가면 안 되겠습니까?]

이승형은 또 오지랖을 부리려했다. 나는 단호한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은 다음 스크린을 손으로 휘저었다.

-오면 죽는다.

전화를 다시 걸기도 전에 문자를 보냈다. 나는 이승형이 임무를 제대로 수행한 것에 제법 만족스러웠으나, 왠지 모르게 따가운 시선에 고개를 들어올렸다.

"......."

"...그래도 제자랑 통화하는 건데 무슨 문제라도?"

"아니, 거 정식으로 들인 제자 억수로 아낀다 싶어서."

석하랑을 툴툴거리며 내게 따지고 들었다. 내가 석하랑을 가르치기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과외 스승과 제자의 느낌이지, 정식으로 내가 가르침을 주는 제자는 이승형이었다.

"질투해요?"

"조금 그렇네. 니 혹시 이승형이랑...?"

"퍽이나. 괜히 기껏 얻은 제자가 다치는 게 싫을 뿐이에요. S급들도 동원할 수 있으면 죄다 동원했지, 뭐하려고 가만히 내버려두겠어요?"

"그건 그렇네."

안전하게 잡으려고 하기에 이렇게 넷, 아니 다섯이 모인 거다. 나는 몸을 일으켜 전투원들을 눈으로 훑었다.

"그럼 가기전에 가장 먼저 해야할 것이 있어요."

"뭔데?"

나는 양손에 마력의 불꽃을 피웠다.

"전부다 옷 벗어요."

"......."

내 말에 누군가는 다른 이들을 신경쓰고, 누군가는 인상을 찌푸리며 나를 멸시하고, 누군가는 훌러덩 하와이안 셔츠를 벗어던졌다.

"그렇군, 혹시나 전투에서 죽을 수도 있으니 한 판 거하게 하고 죽겠다는 건가? 좋다, 내 당장 남자로 변신을-"

"아니, 그런 거 아니니까 진정해요. 옷 버리기 싫으면 이걸로 갈아입으라는 말이었으니까."

나는 내 사제복을 손으로 가리켰다. 그에 환룡이 바로 눈치를 채고 샤오린의 몸속으로 기어들어갔다.

우우웅.

샤오린의 속에 들어간 환룡은 회색 눈동자를 빛내며 의복을 마력으로 바꾸었다. 검은색과 흰색, 그리고 회색이 적절히 섞인 전포는 옛 운장 시절보다 훨씬 더 위엄이 넘쳐흘렀다.

"안에 들어간 사람이 달라서 그런가."

"그거 지금 안에서 듣고 있거든."

"당사자였으면 분명 SS급들 눈에만 보이는 투명 전포를 입었을 걸요?"

벌거벗은 군신님. 진짜로 마력으로 짜낸 방어구를 입었지만, 정작 그 방어구가 SS급 이상에게만 보이는 옷이라면 샤오린은 나체나 다름없는 상태로 전장에 나서는 셈이었다.

"당신이랑 샤오린이 아직 싱크로를 못해서 다행이네요."

"싱크로를 하게 되더라도 나는 노출 안 해."

"...그러면 평생 싱크로 못하겠네요."

샤오린과 싱크로 하는 애들은 하나같이 노출증이 생기던데. 나야 다 한 번씩 눈으로 확인했지만, 환룡의 경우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환룡, 전투완료. 다음 타자는 <개천광> 카르나였다.

"음.... 나야 이거로 충분하지."

카르나는 자신의 마도기어를 만지작거렸다.

금색의 빛무리가 카르나의 몸을 휘감았고, 곧 찬란한 황금 갑옷이 카르나의 몸을 휘감았다. 여전히 투구는 착용하고 있지 않지만, 전신을 가리는 갑옷은 갈색의 피부가 어디에도 노출되는 부분이 없었다.

"갑옷궁수라니."

"걱정마라. 전투에 전혀 지장은 없다."

카르나는 손에 든 비쟈야의 활대를 잡고 허공에 휘둘렀다. 겉에 마력을 씌우니 곧 비쟈야는 만도와 쿠크리 사이의 어중간한 형태가 되었지만, 분명 뉴클리언에게 데미지를 넣을 수 있는 강력한 근접 무기였다.

"여차하면 쏘면 되지."

"네. 그럼 마지막인데."

"......."

석하랑은 침묵했다. 모처럼 신서울에 올라온다고 김누리가 옷장에서 발굴한 옷으로 나름 센스가 있는 옷차림이었지만, 유감스럽게도 그 의복들은 평상복이지 히어로 슈트가 아니었다.

"아니, 뭐, 보호막 치면 되는데 굳이 옷을 신경쓸 이유가 있나?"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지만 석하랑은 카르나보다 마력량만큼은 훨씬 많았다. 하지만 다들 석하랑의 차림새를 위아래로 훑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나도 그러고 싸우러 나가는 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이 몸 주인 봐봐. 평소에는 안 입고 다니더라도 중요 전투에서는 귀신같이 전포 챙겨 입잖아."

"설야의 딸이여. 비록 네가 인간으로 태어났지만, 전투라는 것은 신성한 의식 같은 것이다. 하얀 박스티에 돌핀 팬츠 입고 세기의 전투에 임하는 건 상대에 대한 모독이다."

"내가 뭔 옷을 입던 뭔 상관이에요?"

석하랑은 자신을 향해 뻗어오는 전사들의 손길을 완강히 거부했다. 그리고 구원의 눈빛을 나와 은유하에게 보냈지만, 나도 은유하도 석하랑의 패션을 지적하는 입장이지 지지하는 입장은 아니었다.

"차라리 정장 차림이라면 모를까 어디 나들이 가는 것도 아니고 그런 복장은 조금."

"고객님, 신서울에서 히어로 슈트 하나 공수해올까요? 이번에 차세대 공정법으로 새로 만든 것도 있는데."

"그거 영영 못 쓰게 될 확률이 높으니까 하지마요."

모든 장비가 파괴되는 전투나 다름없다. 하지만 석하랑은 격렬히 저항하며 나를 걸고 넘어졌다.

"저, 점마는 저꼬라지로 싸우는데 그럼 나는?!"

딱.

[할 말 있나?]

"아오, 망할 괴인형!"

나는 갑주를 입은 괴인의 상태에서 어깨를 한 번 으쓱인 뒤, 다시 원래의 인간형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사제복을 손으로 집었다.

"당신도 이제 이거 가능하잖아요? 마력으로 옷 짜기."

"......!"

안 그래도 흰 석하랑의 피부가 더 창백해졌다.

"...?"

굳이 내가 스킨을 만들어주지 않아도, 석하랑은 이제 자력으로 충분히 마력으로 만든 방어구를 짜낼 수 있을만큼 성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렇게 창백해지는 것은 단 하나.

"......꺼내봐요. 당장."

나는 마도기어의 카메라 렌즈를 석하랑에게 조준했다.

"얼마나 정령감수성이 넘치는 옷이길래 그렇게 부끄러워하는 거죠?"

"자, 잠깐만! 아직 시간 있다 아이가! 옷 새로 만들게! 아니면 니가 만들어주는 걸로 입으면 되잖아!"

석하랑은 완강히 저항했지만, 펜트하우스에 모인 모든 이들은 석하랑의 '전투복'을 보기를 바랐다.

"걱정마요. 우리만 보는 거잖아요? 결계치고 싸울 거니까 아무도 못 볼 거예요."

"흐흐, 설야의 딸이여. 그 어떤 디자인이라도 우리는 뭐라하지 않을 것이다."

"아무렴. TPO에 맞는 복장을 입으라는 거야."

"그래. 정령분들 말씀 들어. 너 내 호텔이니까 봐줬지, 후드에 슬리퍼 질질 끌고 조식먹으러 오면 쫓겨나."

"씨이...."

석하랑은 결국 입술을 깨물며 울먹거렸다.

"노, 놀리지 마요...!"

석하랑의 몸은 하얀 빛으로 휘감겼다. 나는 석하랑의 전투복을 보고 감탄했다.

"선녀다!"

동화 속 선녀가 다소곳이 앉아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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