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창염의 피닉스-354화 (354/1,497)

〈 354화 〉1부 15장 12

지속성은 수속성을 상대로 상성적 우위를 가진다.

그리고 지속성의 정령, 지륜의 히드라는 석하랑을 상대로 엿을 먹이고 도망친 걸로 모자라 석하랑을 사회적으로 상당히 난감한 입지에 놓이게 만들었다.

- 석하랑 설마 진짜 대마도 여왕 하려는 건 아니겠지?

얼음이 되어 후쿠오카로 반송된 자, 스스로 대마도를 탈출한 자, 헤엄을 치고 쪽배를 타서 바다를 표류하다가 제주도에 상륙한 자.

- 그래도 나는 SS급 이능력자들이 있는 한국으로 가겠다!

- 나는 일본인이 아닙니다, 한국에 난민으로 신청하려고 온 사람입니다.

히드라가 남기고간 푸짐한 엿, 소위 '대마도 어택'의 이후 대마도에 남은 사람은 공식적으로 약 20만에 육박했다. 대부분이 일본인이었지만, 그들 중에는 대마도를 통해 한국으로 들어오려고 하던 순수 외국인들도 몇몇 존재했다.

평양 사태 이후 개성에서 내려온 난민들 이후 최대의 난민이 발생했다.

- 비행기 한 대 난민으로도 곤란한데 20만은 조금....

- 그보다 영해 문제는 어떻게 할 겁니까? 부산 해협이 사라졌어요!

정치권에서는 섬 자체가 이동해버린 초유의 사태에 별달리 뾰족한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했고, 애꿎은 시간만 하염없이 흘렀다.

그리고 부산에서 잠자코 얼음 택배만 만들며 시간을 보내던 석하랑이 신서울로 발걸음을 옮겼다.

- 진짜로 김누리라는 여자애 때문일까?

- 혹시 뭔가 공식적인 반응을 보이려고 하는 거 아닐까?

마침 시기도 시기.

날짜도 8월 14일이었고, 여러모로 의미가 깊은 날이었다.

사람들의 예상대로, 석하랑은 공식적인 발표를 하기 위해 신서울에 오기는 했다. 하지만 그건 대마도에 관한 문제가 아니었다.

- 어? 개천광도 오늘 저녁에 인천에 도착하네?

은유하가 SNS를 통해 개천광의 귀국 소식을 알렸다. LA에서 출발한 전용기는 여러 정부의 간곡한 요청에도 불구하고 그걸 비웃듯 대놓고 영공을 돌파하여 인천으로 향한다고 알렸다.

신서울에 갑자기 올라온 설화령.

미국에서의 일정을 종료하고 인천에 도착하는 개천광.

그리고 서울에서 두문불출하던 피닉스.

사람들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고, 폭풍전야같은 상황 속에서 숨을 죽였다.

주요 인사들이 모두 약속이라도 한 듯 활동을 멈췄다.

마치 무언가를 준비하고 있는 것처럼.

* * *

<오후 3시, 협회 집행관 개인실.>

"결행일은 내일 오전 10시. 하지만 이미 작전은 새벽 6시부터 진행될 겁니다. 10시라는 건 이미 모든 전투가 끝나고 난 뒤의 시각이죠."

"그것도 장기전이 되었을 때의 이야기.... 하아."

백희아는 나 이외에도 다른 이들이 있음에도 한숨을 대놓고 내쉬었다.

"누리 양은 헌터에 양다리를 걸친다고 해, 설화령 님 대상으로는 자꾸 사람들이 거래를 하자고 해.... 다들 제가 요즘 얼마나 스트레스 인줄 아세요?"

"몰라요, 그런거."

백희아의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당사자, 석하랑은 퉁명스러운 얼굴로 딴생각에 잠겨있었다.

"다들 내일 있을 뉴클리언 전투는 안중에도 없네요?"

"아무렴 당신께서 직접 전투에 참가하시는데 어련하겠어요? 아무 문제 없이 잘 해결하시겠죠. 제가 지금 마음에 걸리는 건 딱 하나에요."

백희아가 펜을 들고 나를 향해 삿대질했다.

"정말 대마도 땅이랑 난민들에 대해서 아무 답도 안 해줄 거예요?"

"얘기했잖아요. 이런 일은 미래에서도 없었다니까."

"미래랑은 별개로 당신이 지금 이 사태에 어떻게 판단하고 있는지 말해달라는 거잖아요."

"음.... 개인적인 입장은 하나밖에 없는데."

나는 손가락을 가볍게 튕겼고, 손가락 위에서 푸른 불꽃이 피어올랐다.

"없애버리죠."

"......악당에게 물은 내가 잘못이지. 알았어요. 우리 알아서 해결하라 이거죠? 그래서 설화령 님."

"왜요, 집행관."

석하랑과 백희아는 서로를 노려보며 기싸움을 벌였다. SS급 이능력자가 적의어린 눈빛으로 노려보고 있음에도 백희아는 물러서지 않았다.

"불과 어제까지는 난민을 단 한 명도 받아들이면 안 된다고 하시던 분이, 갑자기 왜 난민을 일부라도 수용하자는 의견으로 돌아서셨나요?"

"......."

석하랑은 나를 흘깃 노려봤고,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뭐예요, 결국에는 당신이 문제네요."

"그게 왜 내가 문제죠?"

"저보다 극단적으로 난민들 받기를 거부하시던 설화령께서 생각을 바꾸실만한 계기가 당신 말고 또 뭐가 있어요?"

정곡을 찔렸다. 하지만 나 때문에 그런 건 아니다.

"제가 직접적인 원인은 아닌데...."

"집행관. 쟤 미래의 아내 중 한 명이 외국에서 흘러들어오는 난민이래요. 화속성 A급 이능력자. 한국으로 귀화할 의지가 충만한 여자애."

"이름 불러봐요. 생김새는? 나이는?"

역시 백희아답다. 그 흔치 않은 화속성 A급이 한국인으로 귀화하겠다고 하니 받아들일 기세다.

"난민 하나도 안받을 기세더니?"

"원래 난민도 가려받는 거죠. 말씀만 해주세요. 20만명 중에 위치만 찾으면 납치를 해서라도 데려올테니까."

"왜 그렇게 적극적이에요?"

"그 사람을 한국인으로 만들면 당신도 그 분이 신경쓰여서 한국에 더 남으려고 할 거 아녜요? 막말로...."

백희아는 세계지도를 훑다가 한 곳을 볼펜으로 겨눴다.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미국인이라면, 당신 미국으로 바로 날라버리겠죠? 한국에 있던 모든 걸 내팽겨치고 떠나버릴 거예요. 그렇죠, 설화령?"

"집행관과 처음으로 의견이 일치하네요."

"......."

뭐라 답하기는 어려웠지만 아마 그럴 것이다. 창염이 활동했던 주 도시가 미국이었던 만큼, 모든 일이 끝나고 난 뒤 나는 창염이 가자고 하는 곳으로 갈 계획이었으니까.

'창염이 미국가자고 하면 가야지.'

하지만 그건 이계신까지 쓰러뜨리고 난 다음의 이야기.

"......한국에서 만나서 원래 이름은 몰라요. 가르쳐주지도 않았고. 짚시 출신이라 세계를 떠돌아다니는 중이라, 지금 어디서 뭘 하고 있을지도 모르죠."

"그럼 미래에 아는 거라도 읊어볼래요?"

"성장해서 화속성 S급 <아그니>가 되는 슈리 정 입니다. 나이는 저도 몰라요. 본인이 안 밝히던 걸."

때로는 누님같기도 하고 때로는 아이같기도 한 자유분방한 여자였다. 손속에 거침이 없어서 조금 많이 맞기는 했지만.

"슈리 정이라는 건...."

"귀화하면서 개명한 걸로 알고 있어요. 그러니까 지금은 진짜로 어디있는지 모르죠. 협회에 이능력자로 등록이라도 했으면 마력 패턴을 추적해서 위치라도 아는데 없더라고요."

"벌써 찾아봤어요?"

"네. 누리 가출하고나서 바로."

누리의 실종 이후, 나는 공식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루트로 남은 히로인들의 행방을 모두 찾아봤다.

위치조차 파악할 수 없는 아르엘은 논외.

이유나는 다행히 자신의 정체를 자각하지 못한 여고생으로 사는 중이며, 정 슈리는 자신의 과거를 밝히기를 꺼려했기에 어디에 있는지도 모른다.

'사실 천가을 이후로 알음알음 알아보기는 했지만.'

직접 발품을 팔기도 했고, 짬짬이 네트워크를 뒤져 행방을 파악하기도 했다. 초기에는 다른 이들의 눈치를 보느라 대놓고 찾을 수는 없었지만, 누리의 가출 이후로 나도 생각을 달리했다.

어차피 다 까발려진 거, 이제 거리낄 것도 없다. 쓰레기가 개쓰레기를 넘어 핵폐기물로 나아갈 뿐.

"그런데 이제 전 아내라고 하는데도 전혀 부정하지를 않네요?"

백희아는 입꼬리를 비틀며 왼손을 들어올렸다. 네번째 손가락에는 내가 마력을 불어넣어 만든 보호용 마도구가 반지의 형태로 착용되어 있었고, 백희아는 석하랑에게 보란듯이 그걸 과시했다.

"......."

석하랑이 눈을 흘겼지만 나는 모른체했다. 다른 이들과 달리 백희아는 비전투원이고, 전장에 직접 나서며 다칠 위험이 있는 사람 아닌가.

"크흠. 아무튼 슈리를 찾으려면 꽤나 걸릴 거예요. 지금은 미래에 비하면 5년 전이라 얼굴도 다르기도 하고."

나는 불꽃으로 슈리의 얼굴을 기억속에서 꺼내 형상화했다. 푸른 불꽃으로 타오르는 슈리의 얼굴은 원숙한 성인이었으며, 도톰한 입술에 누가봐도 이국적인 서구적 미인상이었다.

"...이런 사람이 난민으로 들어오면 당연히 알겠죠. 좋아요, 내일부터 난민 심사를 하는 거로 합시다."

"20만명을 전부하겠다고요? 어느 세월에?"

"...유성의 X로이드랑 바이오로이드 힘을 빌려서 사람만 찾으면 되잖아요."

"집행관, 잠깐만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사람 한 명 찾겠다고 지금 그 사람들을 부산에 들이자는 거예요? 얼음 장벽 해제하면 어디로 튈 줄 알고?"

백희아와 석하랑이 설전이 격화되는 가운데, 밖에서 노크 소리가 울렸다. 문 너머에는 김누리가 있었다.

[여기 계신다고 해서 왔는데요.]

위잉, 철컥.

자동문이 열렸고, 김누리는 나와 석하랑을 반기다 백희아를 보고 흠칫 놀랐다.

"어, 아, 안녕하세요...?"

처음보는 사이기도 하거니와, 무엇보다 한국 협회의 대표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을 직접 맞딱뜨리니 아무리 김누리라도 어색해 할 수 밖에 없었다.

"안녕하세요, 미래의 대영웅님. 이미 두 분께 말씀은 전해들었어요."

백희아는 어느새 표정을 바꾸어 인자한 미소로 김누리를 맞이했다. 자리에서 일어나 종종걸음으로 달려가, 김누리를 포옹까지 하는 모습은 백희아가 엄마라도 되는 것 같았다.

우웩

어디선가 일부러 헛구역질하는 소리가 들리긴 했지만 애써 무시했다. 김누리의 멘탈 케어에 가장 많은 신경을 써준 이가 백희아였고, 백희아가 괜히 '백마마'소리를 들은게 아니다.

"무슨 얘기하고 있었어요?"

"......대마도 얘기."

차마 내일 있을 진짜 일을 말하기 어려웠던 우리는 화제를 돌렸다. 김누리도 상당히 관심을 보였다.

"우리 언니 여왕 한대요? 나 그거 별론데."

"나도 별로야."

"저도 그건 환영하지 않습니다."

다들 석하랑이 대마도로 넘어가는 건 극구 사양이었다. 애초에 본인도 한사코 거부하고 있었다.

"하지만 대마도가 부산에 딱 달라붙은 상황이니까 여러모로 난감하죠."

"섬이 움직인 거요? 대박. 그런데 어떻게 움직였는지 아세요. 아직도 밝혀진 거 없다고 하던데. 막 제트 엔진 박아서 두둥실 떠내려왔나?"

"...누리 양."

백희아가 누리의 등을 두드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섬은 바다에 떠있는 배가 아니에요. 지각이 융기해서 바다 위로 솟아오른 거죠."

"...그럼 땅이 움직이기라도 한 거?"

"네."

나는 마도기어의 홀로그램을 띄웠다. 히카리가 분석한 히드라의 마력 잔재를 바탕으로, 나와 청화단은 대마도 이동의 실체를 파악한 지 오래였다.

"판은 그대로 두고 그 위에 섬이 움직인 형태예요. 바닥에서 산을 잘라낸 다음 들어서 옮겼다고 표현하면 되려나?"

"꼭 이런 느낌이네요."

김누리는 테이블 위의 종이컵을 손가락으로 튕겼다. 그리고 축구를 하듯 다시 종이컵을 튕겼다.

"대마도로 탁구하는 줄. 푸흡."

"......."

석하랑이 갑자기 인상을 찌푸렸다. 팔짱을 끼고 의자에 등을 기댄게 꼭 뭔가를 깊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왜요?"

"아니.... 바다에서 솟아난 땅이 해저랑 연결되어 있는 거 아이가?"

석하랑은 손날을 세워 수평으로 그었다.

"그카면 땅을 확 잘라버리면 우예되겠는데?"

"......두둥실?"

백희아는 입을 벌리며 경악했다. 그리고 석하랑은 팔짱을 풀고 앞으로 쭉 팔을 뻗었다.

"그리고 내가 바다를 밀어버리면?"

"떠내려가겠죠? 얼음상자들 처럼. 후쿠오카까지."

석하랑과 백희아는 서로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작 아이디어의 계기를 제공한 김누리는 눈만 깜빡이며 꿔다 놓은 보릿자루 처럼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제가 아무래도 크게 입방정을 떤 것 같은데."

"괜찮아요. 신경쓰지마요."

나는 김누리에게 엄지를 척 들어올렸다.

"적어도 부산 사람들은 바다를 되찾아서 당신을 찬양할 거니까."

영토는 늘어나지 못해도 오히려 영해가 늘어나지 않을까.

"그런데 어떻게 자르죠?"

"질풍객은.... 에이, 금마는 영 못쓰겠네. 또 한 명은.... 아오. 부르기 애매하고."

석하랑은 분명 광검을 떠올렸을 것이다. 족히 수 km에 이르는 검을 만들어낼만한 이는 광검 밖에는 없었다.

아.

"한 명 더 있어요."

"누구?"

마침 잘 됐다. 하루 일찍 와서 서울에서 간다고 해서 문제될 사람도 아니며, 이런 일에 정치적인 문제로 전혀 개의치 않는 존재가 하나 있다.

"혹시나 나중에 누가 대마도 잘랐냐고 하면...."

나는 마도기어를 누르며 어깨를 으쓱였다.

"귀신이 대마도의 목을 베어갔다고 전하면 되겠네요. 푸흐흐."

서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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