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0화 〉1부 15장 8
<오후 9시, 부산 석하랑 자택.>
가족사의 비극은 단연 김누리가 압도적이지만, 그에 비해도 손색이 없는 가정사를 가진 사람이 한 명 존재한다.
"......이런 말하기는 좀 그렇지만 좀 그렇네."
[뭐 그런 부모가 다있어? 제정신이야? 애가 가출을 했는데 2주동안 안 찾다가 호적에서 파? 실환가?]
겉으로는 조신한척 하면서 마력으로는 온갖 쌍욕을 내뱉고 있다. 저게 부산 사투리로 필터링이 되어 튀어나왔으면 아마 김누리는 울었을 지도 모른다.
"자, 자. 너무 그러지 말고."
나는 석하랑에게 블루베리가 잔뜩 들어간 아이스크림 컵을 내밀었다. 야밤이지만 이능력자는 칼로리 걱정은 없었고, 석하랑은 수푼을 통째로 쑤셔넣으며 한 입 크게 베어물었다.
"너도 먹어. 부담갖지말고."
"......썰이 다 사실이었네. 와, 대박. 대박사건."
김누리는 뭔가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나와 석하랑을 번갈아 보고 있었다. 나는 테이블을 차려놓고 거기에 앉았고, 석하랑은 빈백에 누워 밍기적거리고 있었다.
"피닉스랑 설화령이랑 둘이 뒤로는 손잡았다고 하더니."
"손만 잡았게? 여기에는 하해와도 같은 복잡한 사정이 있어."
석하랑은 여전히 벽에 서있는 김누리에게 방석을 내밀었다.
"편하게 앉아. 언제까지 서있을 거야?"
"서, 설화령 님이 지금 제 입장이 되어보세요...! 제가 아까부터 얼마나 혼란스러운데!"
김누리는 역정을 내며 나와 석하랑을 번갈아 가리켰다.
"청화 님이 사실은 청화단의 단장이었고, 청화 님이 사실은 빌런 피닉스였고, 피닉스가 설화령 님의 집에 아무렇지 않게 드나들고, 거기에 설화령 님은 무슨 가족 들이듯이 편하게 대하고 있잖아요!"
"봤죠? 이게 보통 사람들이 느끼는 충격이라니까. 그러니까 더 철저히 숨기기로 하죠. 알겠어요?"
"내사 알아서 잘 한다 케도.... 흠흠."
석하랑은 귀찮다는 듯 손을 흔들다가 헛기침을 했다.
"김누리 학생. 말 편하게 해도 돼요?"
"네. 대신 저도 언니라고 부를게요."
"...그래. 누리야. 언니가 쟤랑 사이가 좀 많이 안좋기는 해도, 대의를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손을 잡았단다."
"대의요?"
"응. 여기에는 아주 짧은 시간에 설명하기 힘든 복잡한 사연이 있는데...."
"3줄로 짧게 요약해서 설명해주세요."
빠득. 석하랑이 이를 갈았다. 김누리는 펼친 손가락 세 개를 굽힐 생각이 전혀 없어보였다. 나는 부엌 찬장에서 쿠키를 꺼내와 테이블 위에 올렸다.
"세계 정복을 노리는 악의 조직이 있고, 그걸 잡기 위해 빌런과 히어로가 손을 합쳤다. 그 과정에서 투닥투닥하다보니 친해졌다."
"아, 이해했어요."
김누리는 한번에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석하랑은 콧방귀를 뀌며 어이가 없어했다.
"너 장난해? 처음 만났을 때 나한테는 앞에 것만 두 시간 가까이 설명했잖아!"
"그거야 밥먹으면서 얘기했던 거니까 그렇죠. 요즘 애들은 그렇게 길게 얘기하는 거 싫어해요."
"나는 요즘 애들 아니야?!"
"......."
원작에서 석하랑과 주인공은 동갑에 S급인지라 나름 연장자 조에 속해서, 미안하지만 김누리처럼 앳된 느낌이 전혀 없었다. 어려서부터 혼자 자라서 그런지 어른스럽기도 하고.
"요즘 애들이라고 하기에는 사회 생활이 벌써 9년째 아니에요?"
"히어로로 활동한 경력이랑 사람 마인드가 올드하다는 거랑 같은 선상에서 두면 얘기가 다르지. 그거 내가 애늙은이 같다는 거잖아."
"하는 행동만 보면 상당히 그런 쪽인데."
"뭐야? 한 판 뜰래?"
"대마도 여왕님 옥체 상하게 하면 대마도 주민들이 싫어할 거니까 안 돼요."
"이게."
나는 석하랑이 최근 가장 신경쓰는 문제로 공격을 펼쳤다. 석하랑도 얼굴을 붉히며 인상을 찌푸렸지만, 옆에 있는 김누리 때문에 마력을 거두었다.
"......."
김누리는 허공에 생겨난 수 백 개의 얼음창에 침을 꼴깍 삼켰다.
"...누리야? 언니가 미안해. 쟤가 조금 사람을 짜증나게 하는 게 있어서-"
"대박. 언니, 이거 어케한 거임?"
김누리는 이미 석하랑이 보인 힘에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허락만 했으면 SNS에 사진이라도 찍어서 올릴 기세였다.
"나도 마력 각성하면 이런 거 할 수 있음요?"
"암속성을 각성한다면 모를까, 수속성으로는 힘들죠. 물가촉천민이니까."
"물가촉천민이라도 어디에요! 히히, 고맙습니다. 단장님."
"......단장님?"
석하랑이 불편한 기색을 내비쳤다.
"야, 무슨 소리야. 얘 암속성 S+급 자질이라며? 그럼 히어로 길을 걸어야지 무슨 단장님이야?"
"김누리는 헌터 체질인데요. 애초에 암속성이 히어로랑 자질이 맞을 거라고 생각해요?"
"백희아 집행관부터가 암속성인데 무슨 소리. 너 지금 예 청화단 간부만들려고 하는 거지? 안 돼. 애한테 무슨 헛바람을 집어넣은 거야? 누리야?"
석하랑이 빈백에서 몸까지 일으키며 누리를 설득하려 나섰다.
"누리야. 언니가 잘 챙겨줄게. 수속성 C등급으로 시작해도 나쁠 거 없어. 협회 등록하자. 히어로로 활동하다가 암속성으로 각성하면 S급 하면 되잖아. 그치?"
"얘는 헌터 체질이라니까. 인명구조나 그런것보다는 괴수나 빌런 때려잡는 쪽으로 더 특화되어있어요. 왜 애 장래를 짓밟으려고 그래요?"
"그래서 미성년자인 애를 지금 괴수들 앞에다가 세워놓겠다 그거가?! 이게 돌았나!"
"지는 12살부터 북에서 내려오는 괴수들 상대로 궁극기 써가면서 잡아놓고는 무슨 헛소리를."
"내가 다 해봐서 아니까 이카지! 누리야, 니 절대로 헌터하지 말그라! 내가 키워줄.... 흠흠."
석하랑, 자폭. 김누리는 석하랑의 본성을 보고 침을 꼴깍 삼켰다.
"얼음여왕님이...."
"얼음여왕은 무슨. 틈만 나면 상 엎어대는 왈가닥이에요."
"...오냐, 서로 본성 까발려서 해보자 이거제? 니 지금 니가 이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기가? 어이가 없네."
석하랑은 김누리의 손을 붙잡고 나를 향해 궁시렁거렸다.
"점마 겉은 천상 여자면서 안에는 왠 시커먼 아저씨 하나 들었다. 막 이여자 저여자 재능있는 여자만 보면 후리고 다니는 놈팽이인기라. 내가 니한테 이런 말 하기까지는 좀 그렇지만, 점마한테 넘어간 여자가 한 둘이 아니다. 내도 그렇고."
"여자가...여자를?"
김누리의 혼란이 중첩되었다.
"거기에 설화령님까지?"
"하여튼 쓸데없는 말은."
나는 괜히 헛소리를 할까봐 걱정되어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석하랑은 김누리의 얼굴을 붙잡고 소리를 질렀다.
"점마가 니 챙길라 카는 거, 어쩌면 나중에 니 키워서 잡아먹으려고 하는 걸지도 모른다 이 말이다!"
"얘 미성년자야, 이 것아!"
나는 달려가 석하랑의 배를 걷어찼다. 석하랑은 내 발등이 닿기도 전에 얼음의 보호막을 펼쳐서 막아냈다.
"미성년자라도 알 건 알아야지! 청화단이 얼라 가르치는데 좋은 환경이가?! 툭하면 어디서 이상한 소리 들려오는 곳인데!"
"다들 그정도 상식은 있거든요!"
"네가 가장 비상식적인 상황을 만드니까 그카지! 니 땜시 유하 언니도 지금 완전 이상해졌다 아이가!"
"그건 은유하가 당신한테 그런 모습을 숨겨서 그런 거죠! 막말로 당신이 그 쪽으로 조금만 관심이나 흥미가 있었으면, 은유하가 인형들 대동해서 도와줬겠죠!"
"이 미친 가스나가 애 앞에서 못하는 말이 없네! 돌았나!"
"......저기요."
김누리가 끼어들며 현관을 가리켰다.
"배달, 도착한 것 같은데요...."
"......."
"......."
잠시 휴전.
나는 짜장면의 비닐을 뜯으며 머리를 삭혔다. 가운데에 바삭한 탕수육이 자리를 잡았고, 나는 소스 그릇을 붙잡았다.
"그러니까 제가 피닉스 님을 따라가면 청화단에서 헌터가 되고, 설화령 님을 따라가면 히어로가 된다?"
"정리하면 그런 셈이죠."
"못 볼 꼴 보이기는 했지만 점마도 그렇고 내도 그렇고 힘 좀 께나 쓰는 사람들이데이. 니가 원하면 뭐든지 할 수 있는기다."
"...밥 먹으면서 생각해볼게요. 아, 저 조금만 찍어먹어도 되나요...?"
"......."
석하랑은 내 눈치를 봤다. 집은 석하랑의 집이지만, 언제나 돈은 내가 냈다. 그리고 석하랑은 찍먹이고, 언제나 나는 석하랑의 앞에서 소스를 부어버렸다.
"얼마든지요."
나는 소스 그릇을 통째로 그릇 옆에 내려놓았다. 그에 석하랑이 군만두 하나를 젓가락으로 집어던졌다.
"니 사람 차별하나?"
텁. 나는 목에 감고 있던 베일을 들어올려 군만두를 집어들었다. 김누리는 내 묘기에 입을 벌리며 감탄했다.
"차별이라뇨? 배려죠. 저는 어느쪽이든 상관 없어요. 상대 먹는 쪽에 맞춰서 먹는 편이라. 누리양 부먹 극혐하죠? 그럼 찍어서 먹어요."
"얌마! 근데 왜 내가 찍어먹겠다고 할 때마다 부어버렸는데!"
"아, 그거?"
나는 손에 잡은 군만두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거야 니가 부먹 싫어하니까 일부러 붓는 거지."
"야 이 새개끼야! 나와, 한 판 붙자!"
탕수육 소스로부터 시작된 스파링이 시작되었다.
결계 속에서 석하랑의 공격은 제법 매서웠으나, 유감스럽게도 시간만 질질 끌릴 뿐 제대로 승부는 보지 못했다. 결국 답답했던 내가 아주 작게 만든 궁극기를 터뜨려 석하랑의 결계를 깨뜨리고 나서야 우리의 대련은 내 승리로 끝났다.
"하하하! 내 승리다, 이 닭대가리야!"
"개발려놓고 무슨...."
면은 한껏 불어있었고, 석하랑은 볶음밥을 주문했더라.
"......."
짬뽕을 시킨 김누리는 이미 제 몫을 충분히 먹었다. 탕수육도, 군만두도.
"씁."
나는 남은 소스를 전부 부운다음 군만두까지 쑤셔넣었다.
* * *
SS급 둘과 무능력자(예비 SS)가 한 자리에 모여 SS급 둘만 패배한 식사가 끝났다.
나와 석하랑은 마지막 남은 군만두를 두고 누가 먹을 것인가 설전을 벌였고, 길고긴 협상 끝에 앞으로 찍어서 먹는 걸로 하여 군만두는 내 차지가 되었다.
"자요. 아직 배고프죠?"
"...안 주셔도 되는데."
"아까부터 눈치 보느라 적당히 먹은 거 내가 모를까봐. 먹어요. 일부러 빼놓은 거니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조금 눅눅해지긴 했지만 그래도 탕수육 소스로 점철되지는 않았다. 김누리는 고개를 숙이며 젓가락을 들었고, 석하랑은 머리를 쥐어 뜯으며 짜증을 부렸다.
"나는 완전 쓰레기 만들고 지가 이미지는 다 챙기네."
"배고픈 사람 조금 더 챙겨줘야죠. 누리는 무럭무럭 클 나이지만, 당신은 이미 다 컸잖아요."
"...하긴, 키도 그렇고 좀 많이 커야되긴 하겠다."
석하랑은 군만두를 씹는 김누리를 재빠르게 위아래로 훑었다. 하지만 그 시선을 김누리는 귀신같이 눈치채고 눈을 흘겼다.
"아, 아니! 오해하지 말그라. 15살이면 성장기 아이가! 한창 클 때지!"
"걱정마요. 당신보다 더 잘 클테니까. 키도 거기도."
"......."
석하랑은 침묵했다. 김누리도 입에서 씹던 군만두를 다 씹지도 않고 삼켰다.
"...진짜요?"
"네. 근데 당신 스무살 때 이야기라 지금은 어떻게 될 지 몰라요. 암속성 각성하면서 신체도 같이 성장하거든요. 성장호르몬이 마력이랑 같이 굳어져버려서 신체 성장이 멈췄다나 뭐라나. 나중에는...꽉차게 C?"
가로든 세로든 무려 20cm 가까이 자란 그 폭풍성장의 비결이 무엇인지 히카리가 한 때 연구를 했던 적이 있었다. 그리고 순식간에 봉긋한 봉우리까지 융기한 그 비결이 유전자의 힘임을 깨달은 몇몇 히로인들이 절망했었다.
"와…. 누구는 SS되도 간신히 B인데. 와…."
석하랑은 5년 일찍 절망했다. 김누리는 고개를 갸웃하며 전혀 이해못했다.
"어쨌든 암속성인가 그거 각성하면 키도 큰다는 거죠? 수속성은 아니고."
"네. 그래도 당장은 암속성 각성할 방법이 없...으니까 일단 수속성부터 각성하도록 해요."
나는 석하랑에게 턱짓을 하며 부탁했다. 석하랑은 미심쩍은 눈으로 나를 쳐다보다가 김누리의 손을 붙잡았다.
"조금 찹다."
"...? 무슨, 헐!"
하얀 눈같은 마력이 석하랑에게서 흘러나와 김누리의 피부에 닿았다. 눈송이는 서서히 녹아내려 김누리의 피부로 스며들어갔고, 석하랑은 눈을 감은 채 마력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소복, 소복.
춤추듯이 떨어진 눈이 사르르 녹아내릴 수록 김누리는 점점 차분해졌다. 나는 석하랑을 당장에라도 멈추게 하고 싶었지만, 중간에 건드리기에는 몹시 난감했다.
"......끝!"
석하랑은 김누리의 손등을 두드리며 자리에서 일어났고, 나는 바로 석하랑의 뒤를 점해 관절기를 걸었다.
"내가 각성만 시키라고 했죠!! 또 왜 이런 짓을!!"
"아니! A급은 되어야 그 부모 앞에서도 당당하게 가슴을 펼 수 있을 거 아이가! S급 할라다가 참았구만! 니 마력 줄어드나! 내 마력 줄어들지! 오늘 밤에 자면 다 차니까 괘안타!"
"끝난 거예요?"
"네. 애들 주사 맞는 것 보다 더 빠르고 간단하죠."
언제나 그렇듯 정령의 마력 주입에 의한 각성은 빠르고 정확하다. 단지 석하랑이 김누리의 좋지 못한 가족사에 감화되어 조금 과한 애정을 준 게 마음에 걸리기는 하지만, 김누리는 단숨에 C급 수속성 이능력자로서 A급까지 올라갈 자질이 생겼다.
"와. 개꿀."
김누리는 벌써부터 물덩이를 허공에 만들어내며 마력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제 교실에 물통 안 들고 가도 되겠다. 물가촉천민 지렸다. 이제 진짜 지려도 아무도 모르죠?"
"......역시 히어로 해야겠다. 내가 표준어 선생 좀 해야될 것 같은데."
물가촉천민들의 여왕은 인내심이 끊어졌다.
야황 김누리.
임시적으로나마 C급 물가촉천민이 되었고, 여왕의 집에 잠시간 머물게 된 식객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