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6화 〉1부 15장 4
<오후 5시 40분, 신서울 유성 일가 저택.>
"단장님, 주문하신 물건이요."
히카리는 내게 검은 아타셰 케이스를 전달했다. 사각형으로 검은 광택이 나는 케이스는 곳곳이 고급스러워보이는 마감으로 장식되어있었다.
"이건…?"
"킨나라 발굽 쓰고 남은 걸로 만든 케이스예요. 흑전갈 표피를 이용해서 장식을 더했어요."
히카리는 피곤한 얼굴이지만 고개를 치켜들며 자랑스러워했다. 히카리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케이스는 미관상 정말 아름다웠다.
"고마워요. 그럼 이제 열어줘요."
나는 미리 히카리에게 케이스의 잠금장치 번호를 조정해달라고 부탁했고, 히카리는 케이스를 돌려 내게 아날로그로 된 다이얼 식 자물쇠를 보였다.
1, 2, 2, 5.
크리스마스이자 원작에서 성주가 내려오는 시각. 그리고 동시에 선대 오라클이 목숨을 버려가면서까지 알아낸 지구 멸망의 날.
2025년 12월 25일. 이 날은 정말 여러모로 역사적인 날이 될 것이다.
딸칵.
나는 조심스레 케이스를 열었다.흑전갈 표피를 갈아 만든 케이스 안에, 킨나라의 질긴 가죽이 내부를 보호하고, 가죽 아래에는 물지기의 털이 쿠션으로 들어가있으며, 그 홈에는 권총이 한 자루 들어있었다.
철컥.
나는 그 권총을 들어올려 그립감을 확인했다.
"역시 히카리. 그런데 하나밖에 없네요?"
"하나면 됐죠. 두 정은...아시잖아요. 헤헤."
히카리는 머리를 긁적이며 웃었다. 히카리는 총기에 대해 그렇게까지 열의가 없었다. 총을 만든 것도 내가 간곡히 부탁을 해서 들어준 거지, 본인의 호기심이 그렇게까지 동하지는 않는 부분이었다.
"그래도 하나는 제가 주문한 대로 만들어졌네요?"
"단장님이 마력으로 견본을 제공해주셨잖아요."
S급 괴수들의 사체를 재료로 만든 권총은 내가 주문한 형태를 그대로였다. TAT. 화력 하나는 확실히 보장하는 50구경 탄환을 사용하는 권총. Tripple.Action.Thunder.
지휘관으로서 최소한의 무기를 갖춘 주인공의 기본 무장인 동시에, 내게는 그나마 가장 익숙한 권총이었다.
"단장님, 잠시만요. 이제 탄환만 넣으면 되는데...."
"탄환은 마력으로 처리할 거니까 괜찮아요."
"네? 하지만 형태는 있어야 할텐데요?"
"그 형태를 잡아줄 물건은 여기 있으니까 괜찮습니다."
나는 미리 주머니속에 넣어둔 탄환을 꺼냈다. 총열의 덮개를 연 곳에는 탄환을 '장착'하도록 해둔 작은 홈이 있었고, 나는 거기에 필살의 무기 <덕배탄>을 끼웠다.
"음.... 단장님, 그냥 새로 탄환 파시죠?"
"적당히 스스로 너프하려고 쓰는 거니까 괜찮아요. 정령석이랑 같이 있으니까 준 A급 화력은 나올 거고."
딱.
나는 손가락을 튕겨 임시 결계를 만들어냈다. 푸른 불꽃의 결계가 사방에 펼쳐졌고, 나는 TAT의 총열에 덕배탄을 장전하고 한손으로 들어올렸다.
"무게감 좋고."
킨나라의 발굽 하나가 통째로 갈아넣어진 총은 덕배탄까지 포함하여 거의 10kg에 육박할 정도로 무거웠다. 하지만 마력으로 이루어진 육체는 그 무게를 충분히 감당해냈고, 나는 결계를 향해 총구를 겨누고 총열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우우웅-
덕배탄의 위에 얆은 마력이 덧씌워졌다. 덕배탄은 탄피의 표면에 얇게 펼쳐진 정령석을 통해 내 화속성 마력을 흡수했고, 마력이 총열 내부에서 들끓기 시작했다.
"빵!"
나는 방아쇠를 당겼다.
□□□□□□□□!!
우레와 같은 천둥소리가 울리며 총구가 불을 뿜었다.
덕배탄의 위로 타오르던 마력이 방아쇠를 당김과 동시에 총열 내부에서 폭발했고, 덕배탄으로 형태를 잡은 덕분에 폭발은 탄환의 형태로 결계를 향해 날아갔다.
화륵.
결계는 덕배탄을 먹어치웠다. 카르나마저도 깨지못한 결계였던 만큼, 원래가 B급에 불과했던 덕배로서는 결계를 깨기는 커녕 내가 원하던 화력도 제대로 담아내지 못했다.
"단장님. 역시 그냥 다른 S급 괴수로 탄환을 만드시는 건 어때요? 소모성으로."
"탄피 챙겨다니기 귀찮아요."
행여나 흘리기라도 하면 귀찮다. 마력을 정제하여 발사하는 식으로 만든 이유도, 탄피 관리가 귀찮기 때문이었다.
"고마워요. 이 은혜는 잊지 않을게요. 반만."
"...다음에 다른 괴수들 재료 가져와주시면, 나머지 반 만들어드릴게요."
지속성, 수속성, 암속성.
세 개의 속성을 가진 괴수들이 한데 모여 만들어진 총이었다. 히카리는 케이스 안에 조심스레 보관해둔 금빛의 깃털 하나를 꺼내들었다.
"가루라 님에게는 제가 직접 받았어요. 그리고 제가 말씀드렸던 거는...."
"자, 여기."
나는 중국에 들렸다가 챙겨온 물건을 히카리에게 건넸다.
"캘리펠라의 더듬이에요. 본체로 일부러 변신시켜서 잘라낸 거니까 다시는 얻지 못해요. 당분간은."
광속성 S급 괴물 캘리펠라를 데려다가 본체로 바꾸어, 그 더듬이를 잘라냈다.
덕분에 캘리펠라는 스스로 자랑스러워 하던 금빛 머리칼이 잘려나가 서럽게 울었지만, 곧 라스푸틴을 선물로 주어 흑사갈에 박으라고 하니 좋다고 눈물을 그쳤다.
그리하여 화속성 S급, 광속성 S급이 하나로 모였다.
이제 남은 건 풍속성과 환속성 S급 괴수들. 그것들의 사체에서 얻은 재료가 있다면, 히카리는 나머지 한 정의 TAT를 만들어 줄 것이다.
"그냥 둘 중에 하나만 얻어서 그걸로 세 개 재료 쓰면 안 되나요?"
"네. 절대로. 가루라 님의 깃털은 어디까지나 장식이에요. 이건 양보 못해요."
"......."
총에 적금색 깃털을 굳이 달겠다는 히카리의 감성은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히카리가 아니면 창염이 만족할만한 물건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호문클루스 제작에도 굳이 S급 코어를 속성별로 7개를 쓰겠다고 주장하는 만큼, 히카리의 재료 욕구는 상상을 초월했다.
"당신도 참 이상한데서 고집이 세다니까요."
"그치만 그게 아니면 만족할 수 없는 걸요!"
"알았어요. 곧 구해줄게요. 이틀 뒤에."
속성별로 하나씩 얻고도 랜덤으로 하나 더 얻을 수 있다. 그게 기존에 내가 가진 속성이 아니면 정말로 좋겠지만, 뭐가 나올지는 직접 뉴클리언을 잡아봐야 아는 일이었다.
"그럼 뉴클리언 전에도 이거 쓰실 거예요?"
"아뇨. 걔한테는 이걸로."
나는 허공에 잽을 날렸다. 히카리는 질린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S급 이하 공격은 무효.... 세상에 그런 괴물이 바로 머리 위에 있다니. 참 무섭네요."
"그러니까 안전하게 결계치고 잡는 거죠."
S급 '이하' 공격은 전혀 통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덕배탄은 봉인.
"뉴클리언 문제는 내일 모레 생각하기로 하고, 지금은 다른 문제부터 봅시다. 이건 잘 쓸게요."
나는 덕배탄을 빼낸 TAT를 마도기어에 붙였다. 카르나가 비쟈야를 수납하고 다니듯, 나도 이제는 마도기어를 통해 TAT를 들고 다닐 수 있게 되었다. 쓸 일은 거의 없겠지만.
삐리리릭.
마침 시각이 오후 6시 정각을 알렸다. 나도 히카리도 침을 꿀꺽 삼켰다.
"......히카리. 집계."
"네."
히카리는 전용 키보드를 꺼내 빛의 속도로 타자를 두드렸다. 우리들의 앞에 떠오른 수 십개의 스크린에는 네트워크를 통해 신청된 은하대학교의 '입학 원서'가 수두룩했다.
"...요약해서 말씀드려요, 아니면 정확한 수치를 말씀드려요?"
"요약해서."
"이백십만 장이에요."
"......."
한 해 수능에 응시하는 사람의 수만 거의 45만에 이를 것이며, 그건 이 세계에서도 별반 다를 게 없었다. 그런데 그 45만이라는 숫자가 무려 다섯 배나 되는 원서가 지금 스크린을 빼곡히 메웠다.
"입학 정원이 100명인데...."
"경쟁률만 따지만 대략 21000:1이네요."
"......그럼 이제 사람들 추려봅시다."
히카리는 검색창을 올렸다. 내가 이름만 부르면 바로 원서를 접수했는지 안했는지 알 수 있었다.
"...크흠."
다만 이 방법은 히카리만 사용할 수 있기에, 내가 부르는 이름들은 모두 히카리가 알게 될 것이다.
"흥, 흥~ 단장님 전부인들은 또 누가 있을까나~"
일일이 내가 목록을 뒤져가며 확인하는 방법도 있지만, 210만장이라는 원서를 일일이 훑어가며 확인할 시간은 없었다.
"히카리, 비밀 지켜요?"
"물론이죠! 저는 말이에요."
히카리가 느긋한 손길로 이름 석 자를 적었다.
#이승형
"우리 승형 오빠가 꼭 수석 입학으로 들어오기만 하면 돼요. 흐흐."
"...글쎄."
아무리 시험이 필기시험이라고 하더라도 과연 이승형이 수석을 먹을 수 있을까? 나는 절대 이승형이 수석을 하지는 못할 것이라 확신했다.
"그럼 다음."
나는 원서를 넣었을 법한 이름들을 하나 둘 검색했다. 의외로 넣지 않은 이들도 있었고, 미리 예고한대로 신청한 이들도 있었다. 그들 중 역시 눈에 걸리는 이라면 단연 풍백.
"...이 할배 진짜 대학 다시 다니려고 하나?"
"배움에는 나이가 없다지만 어쩌실 거예요?"
은하대학교의 마도공학부 교수(내정)는 볼을 긁적이며 웃었다.
"풍백 천현택 님, 교수로 초빙한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아 씨, 역사학자면 그냥 초청교수로 올 것이지 왜!"
나는 풍백에게 미리 초청장을 찔러넣었다.
은하대학교는 이능력자 양성 전문 대학을 표방하지만 최소한의 교양 과목이 필요했고, 나는 그 핵심 인사로 하늘성인 류천성과 풍백 천현택, 그리고 아키택트 제임스 리를 내세우고자 했다.
"학자로서의 삶보다 이능력자의 삶에 더 꽂힌 거 아닐까요?"
"에이, 진짜. 설마 류천성이랑 같은 대학에서 교수한다고 해서 싫어하는 건가?"
어쩌면 그게 가장 정답일지도 모른다. 모스크바에서는 공동전선을 펼치기는 했지만, 그 미묘한 자존심싸움은 누가 편들어 줄 수 없는 애매한 부분이 있었다.
"......끙. 일단 알겠어요. 본인이 재학생으로 류천성 밑에서 수학할 자신 있으면 하라고 하지."
설마 그 가능성도 생각 안하고 냅다 원서를 지른 건 아니겠지. 나는 기가 막혀 얼른 다른 사람을 찾았다.
# 박라온.
"역시."
"이 분이 그 분이죠? 풍속성이랑 수속성의 더블 SS가 가능한데 아직 A+급인 분."
"본인 들으면 울 거니까 본인 앞에서는 말하지 마요."
인도 원정을 통해 박라온은 여러모로 높은 자질을 가지게 되었지만, 정작 아직 A+급에 머무르고 있다.
같이 내게 조치를 받은 유이신이 한순간이나마 S급에 오른 것에 비하면, 지금 박라온은 초조해하는 것도 당연지사였다.
풍백과 운사, 두 명 이외에도 숱한 히어로들이 지원서를 작성했다. 굳이 안 적어도 될 자기소개란에 이능력자로서 온갖 활약을 했던 것을 장황하게 적어놓은 이들도 수두룩했다.
"현역 히어로들 따로 빼 둘까요?"
"아뇨. 어차피 다 똑같은 재능빨이에요. 히어로들은 남들보다 조금 더 빨리 각성을 했을 뿐."
숨을 쉬는 인간이라면 누구든지 다 몸에 마력이 쌓이기 마련이다. 특히 차원문이 터졌다거나, 괴수가 많이 죽었다거나, 간부가 인근에 살고 있다거나 하면 자연스레 몸에 마력이 쌓이기 마련이다.
"시간만 있으면 전 인류를 이능력자로 만들 수 있어요. 누구든 SS급까지 마력을 쌓을 수도 있죠. 한 2만년 걸리겠지만."
"생전에는 불가능하다는 얘기네요. 하지만 단장님, 설화령 님은 엄청 늘려주지 않았어요? 한강방위대 분들."
"그건 본인들의 재능이 있어서 일깨워주기만 한 거죠. 막힌 둑을 터주는 거랑 메마른 논에 물을 부어주는 거랑은 다르죠."
"아, 이해했습니다. 음…."
히카리는 고민하는 눈치였다. 나는 행여나 히카리가 뭔가 요상한 아이디어를 생각하기 전에, 바로 화제를 돌렸다.
"그보다 검색해주세요. 이번에는 김-"
"코어의 마력을 전환하여 인간에게 부여한다? 사도들에게 하는 것처럼? 전인류의 사도화? 정령없이 코어의 마력을 추출해서 인간의 몸에 흘려내는 기술을 개발하기만 한다면-"
"젠장."
이래서 히카리한테 틈을 보이기 싫었는데. 히카리는 어느새 검색도 멈추고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히카리. 진정해요. 당신 요즘 쌓인 연구만으로도 고생하고 있을텐데-"
"코어에서의 마력을 추출하여 결정화. 이것을 가칭 '사탕'이라고 가정. 마력 추출에 따른 손실율은? 얼마? 현재 기술로 1.5% 정도로 코어의 핵심이 전환한다고 하면, 1의 각성을 위해서는 그의 50배의 에너지가 필요할텐데, 그러면 최소 중상급의 B급 코어가…."
"히카리!"
짝!
나는 손뼉을 쳤다. 하지만 히카리는 겨우 손뼉 소리로는 깨지 않았다.
"A급 코어에서 마력을 추출한다고 가정하고, 각 속성에 따른 친화성을 계산하면 비각성자라도 충분히 마력을 쌓아서 이능력자로 각성이 가능.... 하지만 여기서 각자 체내에 쌓여있는 마력량의 변수를 생각한다면 2세대 이상의 기술로 마력을 추출해야-"
□□□□----!!
나는 TAT로 덕배탄을 쐈다. 전신을 울리는 마력의 폭발이 귀 바로 옆에서 터지고 나서야, 히카리는 눈을 껌뻑거리며 내게로 시선을 돌렸다.
"......단장님?"
"히카리."
나는 히카리의 어깨를 지긋이 누르며, 히카리가 도저히 생각을 멈추지 않고는 못 베길 협박을 했다.
"코어 마력의 추출을 통한 미각성자의 강제 각성. 가능은 한데...어떻게 알려드려요? 당신이 3년 뒤에 발견하게되는 이론인데-"
"스톱!"
히카리는 손으로 내 입을 막으며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었다.
"죄송해요! 제가 알아낼게요! 그러니까 스포일러만은 제발!"
"......."
나는 히카리의 손목을 잡고 입에서 떼어냈다. 히카리는 눈물까지 글썽이며 두려움에 떨었다.
"제, 제가 직접 알아낼 거라고요...!"
"아, 예."
타임머신을 개발하여 20대 청년 시절의 아인슈타인에게 상대성 이론을 알려주면 과연 그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나는 미래 히카리가 내 귀에 고막이 터져라 읊어대던 이론들을 삭이며 히카리를 진정시켰다.
"...이제 그러면 검색 좀 해도 될까요? 천천히 하나하나 확인하도록 하죠."
210만 명 중에 있기를 바랄 뿐이었다. 나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히카리에게 검색을 부탁했다.
"06년생 김누리부터."
일부러 빠른 년생까지 들먹이며 06년 2월생까지, 중2 꼬맹이들을 모집한 이유는 단 하나. 김누리가 06년 1월생이기 때문이었다.
검색결과 <김누리>,<06년생>. '0'건'.
"......미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