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3화 〉1부 15장 1
2020년 8월 13일.
청화단이 인도에서 귀국한 지도 어느덧 2주가 넘는 시간이 흘렀다.
임시로 한국에 방문한 <개천광> 카르나는 유성 그룹에 몸을 의탁하였고, 이에 그룹의 망나니로 소문난 은유하가 직접 카르나를 보좌하여 유성의 전용기를 통해 전세계를 누볐다.
전 세계에 뿌리를 내린 다크 레기온의 잔재를 찾아다니겠다는 카르나의 강력한 의지 표명에 사람들은 환호했다.
차원문이라는 재앙을 임의로 일으키는 악의 조직에 대해서 사람들은 큰 공포를 느꼈고, <라스푸틴>이나 <마하트마>같은 히어로들이 실은 악의 조직 하수인이었다는 것에 경악했다.
청화가 몸이 약해서 한 달에 한 번 꼴로 해외에 나가는 대신, 카르나가 은유하와 함께 전세계를 누비며 온갖 괴수들을 사냥하고 다녔다.
다크 레기온의 조무래기를 찾는 의도도 있기는 했지만, 무엇보다도 S급-어쩌면 그 이상의 힘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는 이능력자를 그냥 관광만 하고 돌려보내기에는 여러모로 안타까웠기 때문이다.
-나는 강자와의 싸움을 원한다. S급 괴수가 아니면 사양하지.
-그럼 A급 밑으로는 제가 상대할게요.
망나니인 줄 알았던 은유하가 드디어 진면목을 드러냈다.
가정용 섹스돌로만 알려져있던 X로이드의 차세대 개체이자 '바이오로이드'를 운용하는 A급 이능력자 <인형술사>의 전세계 데뷔였다.
***
<2020년 8월 13일 오전 8시, 피닉스 펜트하우스.>
"해명하세요."
나는 은유하에게 전화를 걸자마자 따지고 들었다. 스크린 너마의 은유하는 과테말라 커피 농장을 점령한 괴수를 죽이고 얻은 원두로 커피를 홀짝이고만 있었다.
[고객님. 무슨 해명을 듣고 싶은 거죠? 제가 워낙에 저질러놓은게 많아서.]
[우리 유하가 좀 많이 저지르기는 했지.]
스크린 너머 카르나는 알몸인 채로 비행기 안을 돌아다니며 샤워로 젖은 머리칼을 말리고 있었다.
"아주 편하게들 사시네."
[친해지길 바라는 마음에서 여행을 보낸 거 아니었나?]
[그러게요. 그렇게 질투하시면 지금 여기로 오셔서 같이 즐기시는게 어때요?]
"...도대체 어느 상황에 끼어들라고요?"
나는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내 몸을 그대로 갖다박은 바이오로이드 들 상대로 1:7 난교를 벌이는 카르나 아저씨의 비행 떡방에 참가하라는 말이에요 지금?"
[난교라니. 나도 그렇게까지는 무리야. 우리 유하가 허리 하나는 정말 확실히 놀릴 수 있어서. 7연전이라고 정정하지?]
[그래요. 카르나 님이 남자로 변하시면 얼마나 절륜하신데요? 그런 의미에서 고객님, 만약에 빼앗기는 느낌이 드시면….]
은유하와 카르나가 게슴츠레 눈을 뜨며 혀로 입술을 핥았다. 명백히 나를 도발하는 행동이었다.
[저희 본체는 정말 순수하게 간직하고 있거든요? 고객님, 여기 좌표 찍어드릴게요.]
[내가 마력으로 확인했다. 유하 본체는 적어도 처녀가 확실하고, 나도 카르나로서는 처음이니 둘다 처녀가 맞다!]
"이 또라이같은 년들이 진짜."
나도 모르게 험한 말이 튀어나올 정도로 어이가 없었다.
"둘 다 섹스에 있어서는 스페셜리스트면서 무슨 헛소리예요? 누구는 인형으로 온갖 체위 마스터하고, 누구는 테라에 있을 때부터 다른 정령들이랑 놀아난거 내가 다 아는데."
[그게 다 사랑하는 고객님을 위해 갈고 닦은 실력이에요!]
[아니…. 그 테라에 있을 때 일을 얘기하면 내가 좀 부끄러워지는데…. 그래도 나, 너와는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지 않냐.]
"흥미 없네요. 내가 당신들한테 가면 박히기만 할텐데, 그건 죽어도 싫거든요."
창염의 몸으로 남자 인형을 조종하는 은유하와 금발태닝양아치가 된 카르나에게 앞뒤로 박히는 건 죽어도 사양이다.
하지만 둘은 그런 내 생각과는 별개로 자기들 좋을 대로 해석하고 있었다.
[아. 고객님 취향은 박는 쪽이셨죠. 그럼 남성형으로 변신하세요! 정령이 남성형으로 바꿀 수 있다는 건 이제 숨길 수 없다고요!]
[그래. 나는 오히려 여태까지 이걸 숨기고 여성형으로만 사는 네가 이상한 걸.]
"그거야 내 마음이죠."
인간형으로 변신할 수 있게 되었어도 변신하고 싶지 않다. 그래서 나는 애매한 늬앙스를 풍겼다.
"그리고 남성형은 지금 괴인체로 계속 보여주고 있잖아요? 그럼 된 거 아녜요?"
[아…. 혹시 뭔가 제약이라도?]
[끙. 그런가.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아쉽군. 그래도 나는 그 상태로도 괜찮을 것 같은데…. 유하, 너도 그렇지 않나?]
[어, 그거 저도 공감. 역시 우리 뭔가 통하는게 있네요.]
죽이 아주 잘 맞다못해 나를 잡아먹지 못해 안달이다. 나는 스크린을 두드려 그들만의 세계에 빠진 둘의 정신을 바로잡았다.
"정신 차려요. 내가 지금 날아가서 당신들 머리를 쥐어박을까 하다가 참고 여기서 묻는 거니까. 은유하, 당신 도대체 언제 내 몸을 스캔한 거죠?"
나는 은유하의 뒤, 여덟 명이 누워도 공간이 남을 넓은 침대를 가리켰다. 그곳에는 똑같이 생긴 바이오로이드들이 나신으로 새근새근 잠들어있었다.
은유하가 <인형술사>로서 전력으로 삼는 바이오로이드는 하나같이 청화를 닮아있었고, 그 몸에는 카르나가 싸지른 마력이 덕지덕지 묻어있었다.
[...어, 고객님 몸을 만지거나 한 건 아니고요.]
은유하는 볼을 긁적이며 내 시선을 피했다.
[가루라, 그리고 고객님으로 변신한 천가을의 몸에서 데이터를 얻었어요.]
[그래도 진짜인지 아닌지는 모르겠군. 피닉스여, 어떻게 직접 비교해 볼 기회를 내게 주지 않겠나?]
"싫거든요. 됐고, 그쪽 일이나 마무리 잘 해요. LA에 진짜 다크 레기온 잔당이 없었어요?"
나는 억지로 화제를 돌려 본론으로 돌아갔다. 은유하와 카르나는 표정을 바꾸어 진지해졌다.
[하나 있었죠. 워싱턴에 숨어있던 놈이었는데, 카르나 님이 빛을 쬐니까 바로 괴인으로 변했어요. A급이었고, 하원의 정치인이었죠.]
[ㅆ…. 아지다하카의 괴인이었다. 이능력자는 아니었어. 나를 만나자마자 도망치길래 브라흐마스트라를 먹였지.]
카르나는 손목에 찬 마도 기어를 흔들었다.
은유하의 마도 기어와는 달리 히카리가 정령들을 위해 특수하게 제작된 마도기어로, 카르나의 것은 검은색이 아니라 머리색과 똑같은 금색이었다.
"비쟈야를 썼어요?"
[그래. 히카리를 만나면 고맙다고 전해줘. 덕분에 아주 편하게 제자들을 데리고 다닐 수 있게 되었으니.]
카르나의 손목에 채워진 마도기어는 광속성 S급 코어 여섯개가 하나로 녹아든 물건이었다. 마도 기어로서의 기능을 가지고 있는 동시에, 카르나가 마력만 흘리면 얼마든지 무기로 변하는 기능까지 가지고 있었다.
[히카리 양에게 아낌없이 투자하기를 잘 했어요. 슬슬 시중에 보급형 마도 기어도 풀 수 있는 단계까지 됐기도 하고요. 구로 공단에서도 곧 있으면 시제품 나올 것 같아요.]
"그건 잘 됐네요.
히카리가 이틀만에 만들어냈다. 아니, 히카리가 이틀씩이나 걸려서 만들어낸 물건이었다. 기술적으로 아마 한 세대는 커녕 한 세기는 훨씬 넘은 물건이 아닐까.
[언제까지 히카리 양이 수작업으로 만들어낼 수는 없으니까요. 고객님, 근데 진짜 무시하기로 하신 거예요?]
"뭘요? 아, 그거? 뭘 당연한 걸 물어요?"
나는 은유하가 보낸 신문 기사를 보고 확실히 답했다.
"그깟 대마도 땅덩어리랑 히카리랑 바꾸자고요? 회장님이라면 바꾸시겠어요?"
[당연히 아니죠.]
대마도.
해운대 바로 옆에 생겨버린 뜨거운 감자.
"일단 본인들은 대마도 사람들 부터 진정시키고 거래에 나설 것이지. 쯧."
[알겠습니다. 그러면 여기 상황 정리하고, LA에서 바로 김해로 돌아갈게요.]
"네. 한국 돌아오면 봅시다. 특히 그 바이오로이드, 모델 <가루다>에 대해서도 이야기가 필요할 것 같고요."
뚝. 나는 연락을 끊었다. 은유하가 양심고백으로 미리 알려준 카탈로그에 나는 정신이 아뜩해졌다.
"어떡할 거냐…. 지금 전 세계에서 폭동 일으키겠다."
마도기어.
그리고 바이오로이드, 모델 <가루다>.
카르나가 순례를 통해 시선을 분산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전세계의 얼리어답터들이 한국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삑.
나는 신서울의 유성 그룹 저택 근처를 중계하는 영상을 재생했다.
[은유하는! 가루다를! 판매하라! 판매하라!]
[비매품이! 왠말이야! 우리들도! 사고싶다!]
"사고 싶은게 아니라 싸고 싶은 거겠지. 하아."
절로 한숨이 나온다. 나는 은유하가 유럽에서 A급 괴수들을 인형들을 이용해 퇴치하는 영상을 보고 골머리가 아팠다.
"그냥 집에 있는 X로이드들이나 계속 쓸 것이지…."
사람들은 1가정 1가루다를 원했다.
그리고 그 욕망을 거슬러올라가면 S급 사도 가루라가 있고, 그 위에는….
'창염 몸이 좀 꼴리기는 하지.'
"......본인은 깔깔거리면서 허락해 줄 것 같아서 무섭단 말이야."
큐브라도 찾아서 물어봐야겠다.
그리고 나는 그 큐브를 얻을 준비를 위해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평양, SS급 괴물 뉴클리언.
카르나가 김해에 도착함과 동시에, 네 명의 SS급이 결계를 치고 괴물을 사냥할 것이다.
***
바이오로이드는 기계인형이었던 X로이드와는 확연히 차별화된 새로운 존재였다.
점점 더 사람에 가까워지는 형태에 몇몇 생명공학자들이 윤리문제를 따지고 들었으나, <인형술사>가 부리는 바이오로이드의 압도적인 전투력과 외형에 반해버리고 말았다.
괴수의 코어를 기반으로 바이오로이드는 어지간한 이능력자의 전력과 비슷했고, 그 힘은 인형술사가 A급 괴수를 일곱 대의 바이오로이드로 쓰러뜨린 걸로 전 세계에 널리 알려졌다.
분명 바이오로이드는 뛰어난 전력이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호문클루스'를 만들려다 생긴 부산물에 불과했고, 현재 이 세상에서 바이오로이드를 만들 수 있는 유일한 기술자는 추가 생산에 흥미를 잃었다.
"그래서 히카리, 정말 상위 모델 만들 생각 없어요?"
"당연하죠. 그 시간에 U튜브나 보는 게 훨씬 더 생산적인 걸요, 단장님."
히카리는 한 번 만족한 연구에 대해서는 흥미를 잃었다. 여기서 강요를 한다고 해도 죽어도 하지 않을 것이며, 그건 히카리의 창의성을 죽이는 짓이나 마찬가지다.
"그보다 단장님. 말씀하신 그거 말이에요. 저는 그게 더 궁금한데요?"
투두두두두.
히카리는 한창 보고있던 전쟁 영화를 중지시켰다. 테이블 위에는 온갖 총기에 관한 자료들이 넘쳐났다.
"단장님이 갑자기 총에 관심을 가진 이유 말이에요."
"음, 스타일리쉬하게 싸우고 싶어서?"
"단장님 스타일은 힘으로 밀어붙이는 슈퍼 히어로 액션이지, 느와르 물에서나 나오는 히트맨이 아닌데요."
"......언제 그런 걸 분석했어요?"
나는 새삼 정곡이 찔린 기분이 들었다. 사실 그게 피닉스로서의 힘을 가장 잘 살리는 방법이기도 하고, 내가 가장 주력으로 싸우는 방법이기도 했다.
"통계죠."
히카리는 안경을 치켜올렸다. 시력 보호의 기능을 겸한 안경의 유리 위로 온갖 홀로그램 스크린이 떠올랐다.
"...혼자만 너무 22세기를 살고 있는 거 아녜요?"
"음...22세기에도 이거 개발 못 할 걸요?"
"......."
예산이 충분한 천재 기술자가 자기 멋대로 개발을 시작하면 어떻게 되는 지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히카리는 내가 알려준 5년 뒤의 물건들을 벌써부터 상용화가 가능하도록 만들 걸로도 모자라, 다음 세기로 나아갈 준비까지 마친 상태였다.
"히카리, 혹시 테라포밍은 어떻게 생각해요?"
"재미있을 것 같기는 한데, 지금은 그것보다 다른 데 더 신경이 쓰여서 말이에요."
히카리는 녹차를 홀짝이며 자신의 뒤에 있는 캡슐을 가리켰다. 배양액에 갇힌 백발의 작은 소녀는 나신으로 잠들어있었다.
생명은 아니다. 하지만 곧 생명이 깃들 존재였다. 루살카의 반신이.
"일단 이것부터 먼저 만들고 나야 뭔가가 될 것 같다는 말이죠…. 단장님, 코어는 구해오셨나요?"
"...A급으로 하면 안 될까요?"
"단장님?"
히카리는 엄지로 턱을 쓸며 싸늘하게 웃었다. 그 미소는 질풍객이 사람 모가지를 날릴 때와 너무나도 비슷해서 소름까지 끼쳤다.
"무조건 S급으로 일곱개여야 해요. 지금이야 호문클루스지만, 어쩌면 신인류가 될 기틀이잖아요! 그래요, 저는 뭣보다도!"
히카리가 자리에서 번쩍 일어나며 두 손을 높이 치켜들었다.
"그 성주라는 자가 먼저 이걸 성공했다는 게 짜증난다고요!"
"...하아."
여기, (기술적으로) 타도 성주를 외치는 히로인이 하나 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단장님, 저는 비록 적이지만 기술자로서는 성주라는 자가 존경스러울 지경이에요. 그렇잖아요? 단장님같은 분들을 세뇌하다니 말이에요."
"...그거 나는 이해하고 넘어가는데, 다른 정령들 앞에서는 절대로 말하지마요. 특히 카르나."
"아…. 실언이에요?"
"네. 엄청. 내가 당신 성격을 알고 있었기에 망정이지, 그냥 들었으면 당신 연구하던 재료들 다 불태워버릴 만큼 심각한 실언이었어요."
내 말에 히카리는 사색이 되다 못해 창백해졌다. 그리고 쭈뼛거리며 내 눈치를 살살 보기 시작했다.
"...죄송해요. 정말로."
"괜찮아요. 이해해요."
히카리는 아직 10대에 불과하다. 어린 천재에 어려서 주변의 학대를 받은 만큼, 여러모로 정서적 안정감을 찾을 상대가 필요했다.
"히카리. 혹시 학교 다시 다녀볼 생각 있어요?"
"......단장님?"
히카리의 얼굴이 핼쓱해졌다. 학교라는 말만 들어도 입술이 떨릴 정도로, 히카리는 아직 트라우마를 벗어던지지 못했다. 나도 그걸 잘 알고 있다.
"아뇨. 그냥 학교 말고, 대학교."
"......그건."
히카리는 망설이고 있다. 대학교에 대한 환상을 가진 자로서, 대학 만큼은 스스로 가고 싶어하는 꿈을 가지고 있었다.
"......생각을 좀 해봐야 할 것 같은데요. 은하대학교 말씀하시는 거죠? 그거 신입생 모집이 오늘까지잖아요."
"......? 오해하는 것 같은데, 미안하지만 당신 학생 아니에요."
나는 히카리의 오해를 정정했다.
"<프로페서>가 왜 학생으로 다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