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0화 〉1부 14장 31
카르나가 각성, 가루라가 사도가 된 날. 그러니까 원정대가 인도를 떠나기 전.
피닉스는 결계를 치고 잠자리에 들었다. 그 누구도 감히 결계를 친 피닉스의 방을 들어갈 생각을 못했다. 카르나를 각성시킨 피닉스는 다른 이들보다 훨씬 피로감을 호소하고 있었고, 히어로들은 피닉스의 피로를 이해했다.
백나로 호를 빠져나가지는 못하는 자유시간.
히어로들은 저마다 삼삼오오 모여 각자의 시간을 가졌다.
* * *
<휴게실>
술판이 벌어졌다. 휴게실에는 각자 준비한 각양 각색의 술들이 즐비했다.
"자, 자. 이게바로 한국 전통 음료일세."
"막걸리잖소."
"조금 알딸딸해지는 음료지. 껄껄!"
풍백 천현택이 온갖 병에 막걸리를 담아왔다. 텀블러부터 시작해 생수병, 심지어 찌그러진 군용 수통에도 막걸리를 담아왔다.
"너무 독한 거 아니오?"
"맞아요. 무슨 수학여행 갈 때 술 숨기려는 고등학생도 아니고."
"껄껄, 청화 양이 이리도 풀어주는 스타일일 줄 내 알았나!"
천현택은 껄껄 웃으며 피닉스와의 연락을 보였다.
"다음 번 승선할 때는 어디 약병에 담지 말고 그냥 병째로 들고 타라더군. 괜히 어린 애들이 쌀음료인 줄 알고 마신다면서 말일세."
"약병에까지 넣었소?"
"...아니, 그 말이 그렇다는 게야."
"이 미친 노인네가. 비타민 통 어디있수? 내 당장 까봐야 할 것 같은데."
"끄응. 거 죽은 마누라보다 더 깐깐한 놈일세. 알았다 이 놈아, 내 돌아가면 약 챙겨 먹으마. 쯧. 이능력자가 뭐 비타민이 필요하다고. 에잉."
천현택은 궁시렁거렸지만 꼬리를 내렸다. 조목조목 따지고드는 강하백의 잔소리는 대부분 맞는 말이었다.
"그래서 춘자야. 너는 뭐 들고 왔느냐?"
"참 나. 제가 어르신같은 줄 알아요?"
"아니. 나보다 더하지."
"맞아요. 짠."
템페스트 레이디, 양선우는 방에서 들고온 박스를 꺼내놓았다. 선물포장 된 하얀 골판지 박스에는 너무나도 익숙한 녹색의 병 30여개가 찰랑거리고 있었다.
"후후, 캐리어 안에 넣어 오니 전혀 모르던데요?"
"모르는 게 아니라 눈감아준 거겠지. 미래의 남편감도 알고 있는데 소주 없어서 못사는 귀신을 모를까봐."
"...그 이야기는 하지 말죠. 으으, 내가 그 미련곰탱이랑 결혼을…. 썅."
양선우는 소주의 병뚜껑을 따고 강하백에게 넘겼다.
"아저씨, 그거 해주세요."
"너 말이다…. 아니다, 그래. 됐다."
강하백은 소주병의 입구를 엄지로 막고 마력을 흘렸다. 녹색 유리병 속에 담겨있는 소주가 병 안에서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크흐, 역시 우사."
"이명이랑 이런 잡기랑 무슨 상관이오? 나 참."
강하백은 궁시렁거리며 소주병을 내려놓았다. 소주잔은 없었고, 그들의 앞에 놓인 잔이라고는 탕비실에서 가져온 종이컵 뿐이었다.
"언제나처럼 첫 잔은 풀샷이우."
"여부가 있겠나, 껄껄."
"늦어서 미안하다."
휴게실에 금발 장신의 여인이 들어왔다. 편한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나타난 카르나는 자신의 옷이 영 어색한지 겸연쩍어했다.
"내게 배정된 방에서 그나마 제일 편해보이는 옷으로 골랐는데…."
"허어…. 정령이라는 자들은 전부다-"
"영감, 입 조심하쇼."
"...하여튼 남자들이란."
트레이닝 복으로도 카르나의 존재감은 지울 수 없었다. 나름 자신감 넘치던 양선우도 카르나의 앞에서는 한 수, 아니 세 수는 접고 들어가야했다.
"정령들은 전부다 그렇게 크나…?"
"음? 아니. 굳이 말하자면 차이가 확연하지. 7명 모두 사이즈가 다르다."
카르나는 자리를 깔고 앉았고, 카르나의 앞에도 종이컵이 놓였다. 세 히어로는 뭔가 재미있어보일 것 같은 주제에 침을 꿀꺽 삼켰다.
"일단 한 잔 마시고 하겠나?"
"좋지."
짠. 네 이능력자는 종이컵에 소주를 가득채워 풀샷으로 마셨다. 심지어 따르다가 소주가 모자라 한 병을 더 따야했다.
"흐음, 나쁘진 않군. 그래. 7명 모두 사이즈가 다르다. 구체적으로 얘기하면…. 음…."
카르나는 자신의 가슴을 두 손으로 움켜쥐었다. 두 남자는 눈을 돌리지 않았고, 양선우는 종이컵을 집어던지려다 참았다. 화를 내야 할 상대는 이 상식없는 외계인이었다.
"정령이라고 너무 막 하는 거 아녜요? 여기는 지구라고요, 지구! 그러면 지구의 법도를 따라야 할 것 아니야!"
"나도 지구에서 20년을 살았다만? 그 정도 상식은 알고 있다. 굳이 보여도 상관 없어서 한 것이지."
"아아악!"
양선우는 머리를 쥐어뜯었다.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았고, 카르나는 소주를 병째로 마시며 입맛을 다셨다.
"톡 까놓고 말해 지륜, 나, 차...피닉스, 썅년, 환룡, 절풍 순이다."
"히드라, 카르나, 피닉스까지는 알겠는데 썅년?"
"마암룡. 피닉스의 표현에 따르면 지금은 '아지다하카'라는 이름을 쓰고 있다고 하더군."
"아, 라스푸틴의...."
암속성 정령, 마암룡 아지다하카에 대하여 강한 적의를 보이는 카르나의 태도는 분명 사적인 감정이 엿보였다. 불과 며칠 전에 모스크바에서 아지다하카의 괴인, 라스푸틴과 일전을 벌인 천현택과 강하백은 카르나의 혐오감을 어느정도 이해는 했다.
고간룡을 부하로 부리는 여자. 여러모로 싫어할만 했다.
"음...잠깐만요."
숫자를 세아리던 양선우는 눈을 찌푸렸다.
"정령은 일곱이라며? 하나가 없는데?"
카르나는 여섯 명을 언급했다. 양선우는 그걸 지적했고, 카르나는 병나발을 불며 쓰게 웃었다.
"...있는 사람들만 얘기한 거다."
"헉."
양선우는 비명을 지르며 입을 막았다. 천현택은 안타까움에 수통에 든 막걸이를 한 사발 들이켰고, 강하백은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받은 것처럼 입이 쩍 벌어졌다.
"그럼 설야라는 자는 없는 정령이라고? 세상에, 광검은 그럼 남성형 정령에다가 박은-"
"설야는 명백한 여성형이다."
카르나가 강하백의 말을 자르고 설야, 광검을 두둔했다. 정작 광검은 누군지도 모르면서.
"애초에 정령들 모두가 간부로서 지상에 내려올 때 여성형을 기본으로 내려왔다. 그...석하랑이라고 했던가? 그 아이가 설야의 딸이지. 아쉽군. 싸워보고 싶어서 일부로 초대까지 했는데."
카르나는 입맛을 다셨고, 강하백은 가슴을 손으로 쓸어내리며 안도했다.
"난 또. 내가 큰 오해를 할 뻔 했군."
"...하랑이 불쌍해."
"유전적인 문제는 어쩔 수 없지."
넷은 잠시 석하랑의 언덕에 대해 추모하는 시간을 가졌다. 정작 당사자는 그 자존감을 키워나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몰랐다. 당사자가 아직은 자신감이 부족해서 크기를 드러내는 옷을 입고 다니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 지륜이라는 그 아가씨는 얼마나 큰 거요? 거 그쪽보다 크나?"
"나보다야 크지."
카르나는 입꼬리를 비틀며 히드라를 비웃었다.
"그 팬텀이라는 여인 있지 않은가? 나랑 거의 비슷한. 아마도 그보다도 클 걸세. 세 자리는 족히 넘을 거야."
"...그럼 이거랑 비교하면?"
강하백은 비밀의 영상을 꺼냈다. 어둠 속, 중국의 청하이 호에서 있었던 싸움을 재생했고, 백염을 쓰던 화권이 어둠을 밝혔다.
"......이건 괴수가 아닌가?"
"인간 사이즈로 비교하면 말이야."
"...이거보다는 더 작지. 이건 규격외다. 하지만 보기는 좋군. 지륜과 비교하면 말이야, 큭큭."
카르나는 다시 병을 물고 소주를 들이켰다. 이미 잔을 부딪히는 단계는 넘어섰고, 히어로들은 각자의 페이스로 술을 마시며 이야기 꽃을 나누었다.
"지륜은 말이야, 키도 크고 거기도 크지만 그만큼 무겁지. 군살이 많은 타입이야. 톡까놓고 말해 푹신푹신하다."
"......직접 봐야겠지만 무슨 말인지는 알겠어요."
"그래. 덧붙여서 다른 이들은...."
카르나는 기탄없이 정령들의 자존심을 까발렸다. 세 히어로는 점점 높아지는 수위에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다.
"...그럼 피닉스는?"
흠칫.
병뚜껑을 따던 카르나의 손동작이 멈췄다. 세 히어로는 자신들이 선을 넘었음을 직감했고, 카르나는 병을 내려놓고 볼을 긁적였다.
"...미안하군."
그리고 갑자기 사과했다. 세 히어로들은 카르나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지지만 않았어도 바로 그 아름다운 형태에 대해 까발리겠지만, 패자로서 감히 그걸 언급할 수는 없다."
카르나는 이상한 기준으로 선을 긋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겼으면 사이즈가 몇인지 다 까발렸겠네?"
"사이즈 뿐일까? 내가 따먹었을 거다."
"푸웁!"
양선우는 병나발을 불던 소주를 뿜었다. 강하백과 천현택이 황급히 양선우의 입주변을 차단하여, 침섞인 소주가 튀는 걸 막았다.
"따, 따먹는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아, 그렇군. 이렇게 표현하는 편이 옳겠어."
퓩퓩퓩. 카르나는 빈 소주병에 새끼손가락을 세워 푹푹 쑤셔넣었다. 좁은 소주병의 입구에 유일하게 약지가 들어갔다.
"덮쳐서 침대로 들였을 거란 말이다. 톡까놓고 말해서 정령 중에 몸 하나는 제일 좋으니까."
"......."
세 히어로는 기억을 더듬었다.
"맨날 펑퍼짐한 사제복을 입고 다녀서 딱히 몸매를 볼 기회가 없는 것 같은데."
"뭐 다른 사진 있는 거 없수?"
"없어요. 오히려 사제복 아닌 경우를 찾기가 드물어요."
세 히어로들은 사제복에 가려진 피닉스의 몸을 생각하느라 혈안이 되었다. 가슴은 사제복으로도 숨길 수 없을만큼 부풀어있었지만, 그 아래로 이어지는 몸은 세 히어로들 누구도 몰랐다.
"저런, 아쉽겠네. 그걸 못 보다니 말이야, 아하하!"
카르나는 바닥을 손바닥으로 치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강하백과 양선우는 카르나를 잠시 훑었다가 천현택에게 눈치를 보냈다.
"나보고 지금 총대를 메라는 거냐?"
"영감이 우리 중 제일 짬이 낮잖소."
"이 썩을 놈들이? 고작 1년 차이야! 내가 니들 나이 때는 공장에서 밀가루 포대 날랐어, 이것들아!!"
"히어로들 사회에서는 경력이 갑이에요."
"육시럴."
천현택은 수통째 막걸리를 들이켰다.
"...그래, 카르나 양. 그래서 그 '따먹는다'는 말은 무슨 말인가? 덮친다는 것도 그렇고."
결국 천현택이 포문을 열었다. 실실거리며 다른 소주병을 들던 카르나가 뭘 그런 걸 묻냐는 얼굴로 되물었다.
"내가 말하는 의미는 한국에서는 다른 의미인가?"
카르나는 왼손으로 고리를 만들어 오른쪽 엄지손가락을 푹푹 쑤셔넣었다. 머리가 찌끈거리던 양선우는 재빨리 아무말이나 내뱉으며 상황을 수습했다.
"...인도에서는 뭔가 다른 제스쳐가 있나보죠. 그래요, 분명 그럴 거야. 잠시만요."
"내 아이를 낳게 하겠다는 의미였는데."
"이 미친 외계인들이?!"
양선우는 버럭 화를 내며 소리를 질렀다. 강하백은 인상을 찡그렸고, 천현택은 껄껄 웃으며 손으로 바닥을 쳤다.
"으하하! 거 궁금하구만! 그래, 같은 성별끼리 어떻게 낳게 한다는 말인가!"
"이렇게."
짝!
카르나는 합장하듯 손뼉을 쳤다. 카르나의 몸은 금빛으로 번쩍였고, 히어로들은 너무나도 환한 빛에 눈을 찡그렸다.
"말이지."
굵직하고 시원시원한 목소리가 울렸다. 양선우는 귀를 파고드는 목소리에 소름이 끼쳤다.
"아...."
"허허."
금발거유 미인 카르나(女)가 사라지고, 금발금안의 미청년이 모습을 드러냈다. 같은 츄리닝, 같은 자리, 그리고 같은 마력 패턴만 아니었으면 눈앞의 청년이 카르나라고 믿어 의심치 못했을 것이다.
"정령은 기본적으로 성별이 없지만, 이렇게 한쪽 성별을 택할 수 있지. 나도 그렇고 다른 정령들도 그렇고. 간부들은 전부 여성형으로 고정되었지만."
"왜요?"
"성주가 그렇게 했다. 이유는 나도 몰라. 물어보려면 그 놈의 머리에 일단 바샤비 샤크티를 때려놓고 생각하도록 하지."
카르나는 팔짱을 낀 채 으르렁거렸다. 트레이닝 복으로도 숨길 수 없는 탄탄한 근육질에 양선우는 두 남자의 눈치를 보며 헛기침을 했다.
"하, 한 번 만져봐도 돼요?"
"저 저 춘자 저 놈."
"아, 같은 성별이니까 괜찮잖아요!"
"지금은 남자 아니냐?"
"시끄러워요! 외계인이라며! 그럼 됐지! 본인 허락만 받으면 되는 거 아니야?!"
술에 취한 양선우가 빽 소리를 질렀다. 카르나는 눈을 껌뻑거리다 인자한 미소로 양선우에게 손을 뻗었다.
"뭘 만져보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코어만 아니면 상관없다."
"음...."
양선우가 아랫입술을 깨물며 침을 꿀꺽 삼켰다. 시선이 손에서 팔을 타고 내려가, 탄탄한 흉근을 지나 아래로-
"카르나 양, 다시 여자로 변신하시게. 자네는 그 쪽이 더 예쁜 것 같으니."
"그런가? 그럼 그러도록 하지."
"안 돼에에!"
양선우는 절규했다. 하지만 아무 효과도 없었다.
카르나는 다시 허리까지 늘어뜨린 금발의 미녀가 되었고, 양선우는 병나발을 불었다.
"흐어엉, 모처럼 발견한 내 이상형이...흑!"
"춘자야, 너 어차피 그 곰탱이 놈이랑 결혼하잖냐."
"시끄러워요! 흐어엉, 허엉."
서럽게 우는 양선우를 위로하기 위해 한 병. 히어로들은 하나 둘 궤짝을 비워나갔고, 카르나는 아쉬움에 입맛만 다셨다.
"정말로 아쉽군, 아쉬워. 내가 이겼으면 피닉스 처녀를 따먹는 건데."
"청화 양 처녀를 얘기하는 거지, 지금?"
"음? 아니. 정령으로서의 본신. 지금까지 한 번도 안 했으면, 피닉스는 아직도 처녀일 걸? 신도를 한 명도 만든 적 없으니, 정령 중 순수하게 처녀라고 할 수 있겠군."
"뭔가 지금 엄청난 말을 들은 기분인데."
히어로들은 오한이 들었다. 누군가가 지금 이 대화를 엿듣고 있는 것 같아 소름까지 끼쳤다. 카르나는 그저 낄낄거리며 병나발을 불었다.
"흐아아.... 쩝. 시간을 되돌릴 수도 없으니 어쩔 수 없는건가."
"...이기면 청화를 어떻게 해보려 했다고 쳐. 그럼 당신 졌잖아? 그럼 어떻게 하려고?"
"뭘 당연할 걸 묻나?"
카르나는 다리를 좌우로 벌리며 고개를 치켜들었다.
"피닉스의 마력을 잉태하는 거지. 피닉스의 아이를 내가 낳는 것도 나쁘지는 않군."
"......피닉스도 남성형이 되는 게 가능한가?"
히어로들의 물음에 카르나는 한참동안 고개를 갸웃거린 채 기억을 더듬었다.
"...아마도?"
"아마도라니?"
"맨날 여성형으로 살아서 한 번도 본적이 없군. 그래도 한 가지 확실한 건, 남성형이 되면 이것 하나는 아주 확실할 거야. 흐흐흐."
카르나는 음험한 제스쳐를 취했고, 술판은 더욱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자, 마시자. 아까 술 잘 마시는 사람이 형님 누님 하기로 했던가? 그럼 어디 한 번 내기 해보자고. 자네들이 이기면...."
카르나는 콧방귀를 끼며 종이컵을 들어올렸다.
"이기는 자는 내 특별히 피닉스에게 부탁하여, 나를 취할 기회를 주도록 하지."
"......."
히어로들은 힘을 모았으나, 개천광의 압도적인 힘 앞에 패배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개천광을 누님, 언니로 모시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