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5화 〉1부 14장 26
나는 금방 서울에 도착했다.
하지만 서울은 언제나처럼 고요했고, 별다른 특이사항이 없었다. 오히려 평화로움 그 자체였다.
[고객님? 조금 일찍 오신 거 아녜요?]
내가 서울에 온 걸 눈치챈 은유하가 급히 연락을 넣었다. 차원문과 백나로 호를 방치하고 먼저 서울로 온 것에 이상을 느낀 것 같았다.
[혹시 무슨 일 있어요? 좋은 상황은 아닌 것 같은데.]
[혹시 무슨 일 있었나?]
[네? 서울에요? 아뇨? 아무 일도 없었는데요?]
그럴 리가. 그렇다면 아지다하카가 나를 속인 건가?
하지만 거짓 기만으로 적을 속이는 행위는 히드라나 할 법한 일이지, 아지다하카는 순수하게 정공법으로 싸우는 간부다. 이능의 특성 때문에 정정당당에서는 거리가 멀지만.
[서울이라.... 고객님께서 킨나라 사체를 흑염룡으로 가져다 놓으시고, 흑염룡은 한강 둔치에서 명령이 떨어지길 대기하고 있어요. 러시아에서 돌아온 간부들도 가만히 있고.]
[석하랑은?]
[......잠시만요? 한 시간 전까지 통화했거든요?]
은유하는 석하랑과의 통화를 연결했다. 하지만 석하랑은 나타나지 않았다.
[당했군.]
[예?]
[항상 이런 식으로 하나 둘 씩 꼬인단 말이야.]
석하랑과 환룡. 정령간 네트워크를 온전히 구축해놓지 않은게 화근이었다.
카르나까지 네 명이 모이면 완벽한 네트워크를 만들자는 제안 때문에 미뤄뒀는데, 설마 이런 식으로 화살이 되돌아 올 줄이야.
[잠깐만요, 그냥 전화가 잠시 안 되는 걸 수도 있잖아요?]
[내 전화도 안 받아. 본인이 직접 결계를 쳤거나, 아니면 결계 속에 들어가진 상태일 터.]
세 간부가 삼중결계로 나를 가두었 듯이, 석하랑에게도 뭔가 조치가 취해졌을 수도 있다.
아니면 석하랑이 간부들의 기척을 눈치채고 싸움을 걸었다가 결계에 갇혔거나.
[석하랑이 마지막에 있었던 곳은 어디지?]
[그야 부산이죠.]
[그럼 전장은 부산이겠군.]
석하랑이 부산, 정확히는 자기 집을 벗어날 리가 없다. 중국과 러시아는 환룡과 루살카가 터를 꽉 잡고 있으니, 한국으로 들어오는 루트는 부산 뿐.
[은유하, 너는 영종도에 미리 나가있어라.]
[아.... 혹시?]
[그래. 거기서 바로 S급으로 만들어주마.]
[지금 바로 준비할게요.]
은유하와의 연락은 끊어졌다. 나는 다시금 서울 전체에 마력을 흩뿌려 혹시나 모를 적의 반응을 찾았다.
나를 향한 적의를 가진 존재는 많았지만, 그 중에 간부들 특유의 반응-그러니까 테라의 오염된 마력은 흔적도 없었다.
"...끄응."
착각일까? 뭔가 상당히 거슬리는 감각이 느껴지는데. 그것도 한 곳이 아니라 무려 세 군데나.
"일단 석하랑부터 구하고 보자."
만약 석하랑이 펜릴과 히드라를 상대로 동시에 싸우고 있다면, 상성적으로 상당히 불리한 1:2 싸움을 벌이고 있을 것이다.
[광속성이랑 암속성이 붙고 있으니, 나머지 네 속성도 제대로 붙어봐야지.]
아지다하카는 분신으로 왔을 테지만 나머지 둘은 아닐 것이다. 나는 전속력으로 다시 부산으로 날아올랐다.
* * *
<바로 그 시각, Padre Jaun.>
"......"
후안은 눈앞에 펼쳐진 기적같은 광경에 경악했다.
살면서 이런 일을 어디서 본 적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후안은 자신의 가게에서 벌어진 상황에 얼이 나가 있었다.
"......."
녹발의 여인은 쥐죽은 듯이 의자에 쪼그려 앉아 눈치를 보고 있었다. 입에 민트초코 케이크가 묻은 포크를 문 채, 누가 자신을 발견이라도 할까봐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아니, 그."
후안은 당황했다. 진심으로 당황했다.
"지금, 그, 합체...?"
녹색 고양이귀 메이드가 갑자기 의자를 박차고 뛰더니 금발 여인의 몸으로 다이빙을 하고, 곧 녹색의 바람이 몰아침에 하나로 합쳐지더라.
성경의 구절에서 이 광경을 묘사한다면, 아마 후안은 분명 이리 묘사를 할 것이다.
"......쉿."
여인은 근엄한 얼굴로 검지를 입술에 붙였다. 후안은 여인의 카리스마에 침을 꼴깍 삼켰으나, 사방을 경계하며 귀를 쫑긋 세우는 모습은 귀여워 보이기도 했다.
"......휴우."
잠깐 시간이 흐르자, 여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자세를 풀었다. 후안은 어안이 벙벙했지만, 그냥 그러려니 했다.
건물주, 피닉스의 지인은 하나같이 특이한 존재들이 아닌가.
"어, 음...."
녹색의 여인은 후안을 바라보며 상당히 난감한 미소를 지었다. 손톱을 바짝 세워서 손가락을 접었다 펴는 그 행동은 무언가를 진지하게 고민하는 눈치였다.
"음."
후안은 콧수염을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민트초코 쉐이크도 먹어보시겠는가? 이건 내가 개발한 레시피인데...."
움찔.
손톱을 바짝 세웠던 여인은 어깨를 움츠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하, 피닉스의 지인들은 참 특이한 자들이 많군."
"그, 안 놀라시나요...?"
머리칼은 녹색으로 물들고 머리에는 고양이 귀가 쫑긋 솟아났지만, 목소리나 하는 행동은 이전의 금발 여인이었다. 후안은 가판대에 손을 올려 우수에 젖은 눈으로 천장을 올려다봤다.
"2m에 갑주를 입은 거인이 에이프런을 입고 머랭을 치는 모습을 본 적 있는가?"
"네?"
"여긴 그런 곳일세."
카페 Padre Jaun.
여의도 유일의 카페는 서울의 주민들도 감히 방문을 꺼리는 마경 중의 마경이었다.
"찾는 사람이라고는 얼마 없어. 요즘에는 피닉스도 직접 방문하지 않고, 마도 기어로 연락만 하더군. 상당히 바쁘게 사는 모양이야. 자네 혹시 피닉스 만나러 온 건가? 그럼 내가 연락이라도-"
"아뇨, 괜찮아요. 언젠가는 오겠죠. ...여기 자주 안 온다고 하셨죠?"
"그래. 여의도에 살기는 하는데, 거의 일주일에 한 번?"
불행인지 다행인지, 후안은 피닉스가 서울 상공을 날아가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여인은 눈을 굴리며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저, 저 혹시 말예요...."
여인은 부끄러움을 무릎쓰고 말아쥔 주먹을 들어올렸다.
"아, 알바도 혹시 구하냐...앙...?"
"......."
후안은 복잡한 심경으로 여인을 한참동안 내려보다가 손가락을 뻗어 여인을 위아래로 훑었다.
"복장 불량일세."
여인은 메이드복을 입고 있었다.
* * *
<서울, 송파구 인근 폐가.>
"야, 피닉스 떴다!"
경박한 남자의 외침과 함께 검은 머리 외국인들이 황급히 베란다로 모였다. 그중에는 방금 전까지 육포를 질겅질겅 씹고 있던 슈리도 있었다.
"와 씁, 저거 보여?"
63빌딩의 위.
푸른 날개를 펼친 채 서울을 두리번 거리는 피닉스의 모습은 마치 이 땅이 자신의 것임을 과시하는 듯 했다.
"느껴지냐? 패턴 읽혀?"
"아니, 전혀."
"시발. 진짜 다른 놈인가? 청화 지금 인도에서 차원문 닫느라 난리라며?"
이방인들은 자신들에게 떨어진 임무와 실제 상황의 상이함에 갑론을박했다.
"피닉스가 청화라는 증거를 잡아서 협박? 시발, 마력 패턴이 다른데 어떻게 알아보라는 거야!"
그들에게 주어진 임무는 피닉스를 회유하여 자신들의 국가로 끌어모으는 것이었고, 그 수단은 감히 SS급 빌런을 협박한다는 말도 안 되는 방법이었다.
"야, 그냥 배신 때리고 다시 귀화하자니까? 그래도 같은 민족인데 시발 죽이기야 하겠어?"
"석하랑 그 년이 눈 시퍼렇게 뜨고 존나게 싫어하는데, 우리 받아주는 사람 있겠냐? 어? 광검 그 새끼가 없으니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우리들 다 공항에서 모가지였어."
"그래도 정이란게 있잖냐!"
"그 정 다 버리고 먼저 해외로 튄 게 우리잖아, 이 멍청아. 너는 제일 먼저 일본으로 튀어놓고 벌써부터 다른 줄 잡으려고 하니?"
이방인들은 티격태격하며 서로를 욕했고, 슈리는 조용히 난간에서 피닉스를 올려다봤다.
불꽃.
"예쁘다...."
남들에게는 비밀이지만, 오직 자신만이 간직하고 있는 유일한 비밀. 슈리는 그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게 비밀을 숨겼다.
"뭐? 예뻐? 크흐, 너는 저게 예쁘냐? 예 감수성 오지네. 너도 그 태양 교단인가 뭔가 하는 그거지?"
껄렁해보이는 남자가 슈리의 뒷통수를 맥주캔으로 튕기며 낄낄거렸다. 감상에 빠져있던 슈리는 자신의 뒷통수를 때린 남자의 멱살을 잡았다.
"이 좆만한 새끼가...!"
"야, 너 욕 엄청 늘었다? 머리만 염색하면 한국인인줄, 큭큭. 야. 슈리야. 너 혹시 그 청화단인가 뭔가에 들어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냐? 안 돼, 꿈 깨. 거기 A급도 쉽게 안 받아주는 곳이라고."
"특히 나라 한 번 버리고 도망친 A급들은 그렇지. 안 그래?"
이방인들은 서로를 비웃으며 술을 들이켰다. 남자는 슈리가 잡은 멱살을 힘으로 풀었고, 슈리는 손을 놓고 으르렁거렸다.
"좆같이 굴지말고 꺼져."
"킥킥, 야. 너 여기가 서울만 아니었으면 우리한테 뒤졌어. 그냥 뒤졌겠냐? 어?"
"......."
슈리는 대화를 거부했다. 남자들은 응큼한 눈으로 슈리의 몸을 위아래로 훑었고, 여자들도 대놓고 그 추잡한 대화에 동참했다.
"아, 시발. 꼴린다. 오늘 여기 떡집 차려볼까?"
"개떡같은 소리 하지 말고 세우기나 제대로 세워, 깔깔!"
삽시간에 추잡한 교성이 울렸다. 슈리는 어깨동무를 하려는 남자들을 쳐낸 뒤, 옥상으로 기어올라와 귀를 막고 하늘을 올려다봤다.
"아...."
푸른 불꽃은 동남쪽으로 떠나버렸다. 슈리는 망연히 하늘을 올려다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아카데미.'
슈리는 제 브래지어 안쪽에 끼워둔 전단지를 고이 끌어안았다.
'입학 지원 일자까지.... 버티자.'
제발 빨리 개관하기를.
슈리는 하늘에 수놓아진 푸른 불꽃의 궤적에 기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