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3화 〉1부 14장 24
언제나 그렇듯 차원문은 전 지구에 경보가 울리는 범국가적 재난이다.
대처에 실패하기라도 한다면 수천만명은 사망할 수 있는 만큼, 차원문은 반드시 인류가 필사적으로 막아야 하는 문제였다.
그런 차원문이 백나로 호 상공에 열렸다.
이미 차원문 발생 만으로도 당황스러웠지만, 차원문이 발생하게 된 장소와 그 이전의 상황이 너무나도 당황스러웠다.
차원문 발생 장소, 인도의 다르질링.
해발 2천미터의 고원 도시로 홍차의 품종 중 하나인 다즐링이 유래한 도시이나, 지리적으로 보면 도시를 중심으로 네팔, 티베트, 부탄, 그리고 방글라데시의 국경이 불과 반경 100km 내에 걸쳐진 지역이었다.
하필 차원문은 백나로 호가 그 지점을 지나던 순간에 열려버렸다. 아니, 누군가가 차원문을 그곳에서 열었다고 볼 수 밖에 없었다.
캘커타 인근의 공군 기지에서 특별한 이유도 없이 출격한 전투기 5대.
전투기들에는 두문불출하던 <마하트마>를 위시한 다섯 명의 히어로들이 타고 있었다.
인도 협회는 아노미 상태에 빠졌다.
히어로들이 어떻게 전투기를 탈취했는가?
마하트마는 어떻게 뉴델리에서 캘커타 까지 한 번에 이동하였는가?
왜 인도를 돕고 떠나는 백나로 호를 습격했는가?
그 모든 의혹은 마지막으로 마하트마가 남긴 공군 기지와의 교신을 통해 해결되었다.
- 다크 레기온을 위하여!!
러시아에서 있었던 라스푸틴의 사태가 또다시 일어난 순간이었다.
* * *
<서울 도착까지 3:57, 인도 다르질링 상공.>
"지금 닫을까?"
"아뇨. 적당한 시기에 키워서 잡아먹죠."
나는 카르나와 차원문을 닫을 시간에 대해 논의했다. 비록 카르나가 빛처럼 마하트마의 머리에 레이저를 쐈지만, 일단 열린 차원문을 어떻게 활용할 지 생각해봐야 했다.
"차원문이 터진 곳을 생각하면 아주 골때리는 곳이네요."
지리적으로 상당히 애매한 곳에 걸쳤다. 차원문은 인도 상공에 열렸지만, 그 안에서 쏟아지는 괴수는 국경을 따지지 않는다.
"뭔가 대화를 하기도 전에 죽어버렸으니...."
"괜찮다. 마암룡의 괴인은 그래도 돼."
"어떻게 일말의 망설임도 없을 수 있죠?"
"망설였다. 원래는 전투기가 터지기 전에 내가 터트리려고 했으니."
카르나는 비쟈야를 들고 눈썹을 으쓱였다. 전투광 기질도 기질이었지만, 뭣보다 마암룡과의 사이가 거의 최악을 넘어 원수지간에 가까웠다. 테라에 있을 때 아지다하카에게 당해 개천광에서 카르나로 전락했으니, 엄청 싫을 만도 할 것이다.
"아. 또 터진다."
콰---앙!!
두 번째 전투기가 터졌다. 백나로 호는 전투기를 피해 급히 선회를 하고 있지만, 전투기의 목적은 애초에 백나로 호를 습격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유야 마하트마만 알고 있겠지. 이제는 알 수 없지만. 알 필요도 없다. 피닉스, 딱 한 방만 내가 쏴게 해다오. 전투기고 뭐고 브라흐마스트라 한 발이면 충분하다."
"당신이 쏘면 괴인이고 뭐고 차원문 째로 파괴하니까 진정 좀 해요."
괴인 카르나가 쏘는 브라흐마스트라와 정령 카르나가 쏘는 브라흐마스트라의 위력은 천지차이다. 화살 한 발로 차원문을 닫고 뛰쳐나오려던 마룡까지 제거하게 될 것이다.
"문제는 라마가 협조를 하느냐 하는 건데."
당장 닫을 수 있는 자들이 여기에 있다.
차원문 발생 시각으로부터 각국이 개입 가능한 시각인 1시간, 그 1시간 동안 얼마든지 자원을 뽑아먹을 수 있다. 당장 백나로 호를 정박시켜, 카르나가 한 시간 동안 쉬지않고 활만 쏴도 차원문 두 개, 아니 다섯 개는 손쉽게 틀어막는다.
하지만 어떻게 할까. 내가 고민하는 사이, 새로운 차원문이 터졌다.
[다크 레기온을 위하여!!]
외부 스피커로 아지다하카의 괴인이 외치는 소리가 울려퍼졌다. 그와 동시에 전투기는 폭발했고, 괴인은 자폭과 함께 허공에 차원문을 만들어냈다.
'허공이라는 것도 거슬리네.'
보통 땅에 붙어서 생기기 마련인 차원문이 상공에 생긴 것도 난제였다.
과연 인도의 히어로들이 차원문을 셋이나 제 때 막아낼 수 있을까? 심지어 1시간이 지난 뒤, 국경이 인접한 국가들이 폭주하는 차원문에서 나올 괴수들을 막아낼 수 있을까?
'고민할 필요도 없네.'
남의 땅에 열린 차원문은 닫아주고 가는게 예의다. 설령 라마가 왜 차원문을 키워서 잡아먹지 않느냐고 따지고 들어도, 우리는 '히어로'로서 해야할 일을 응당 해야할 뿐이라며 배를 째면 그만이다.
"카르나."
나는 카르나에게 비쟈야를 들 것을 부탁하려 했다. 하지만 카르나는 묵묵부답이었다.
"...카르나?"
"저 시건방진 년이."
카르나는 허공을 향해 욕지기를 내뱉었다. 비쟈야를 들어 허공을 향해 사격했고, 금빛의 레이저는 애꿎은 밤하늘을 갈랐다. 그에 나도 순간적으로 화딱지가 났다.
"아지다하카?"
"오호호, 배신자들이 여기있네?"
어둠 속에서 아지다하카는 상반신만 드러낸 채 요염히 웃고 있었다. 언제나 처럼 안쓰럽고 빈약한 가슴을 검은 드레스와 어둠으로 가리고 있지만, 정작 당사자는 당당하기 그지 없었다.
"이건 너희들을 위한 선물이야."
딱.
아지다하카가 손가락을 튕겼다. 그와 동시에 또다른 전투기가 폭발했다. 네 번째 차원문이 열렸다.
"지금 이게 뭐하자는 짓이지?"
"별 거 있겠어? 배신자들에게 본 때를 보여주자는 거지. 그보다 얘, 너는 어떻게 결계를 탈출했니?"
"힘으로."
"무식한 년."
저 썅년이. 하늘에서 우리를 내려다보는 그 태도가 영 아니꼽다. 나는 카르나에게 직접 마력까지 건네줬고, 카르나가 당긴 비쟈야의 화살에 푸른 불꽃이 붙었다.
"카르나."
파---앙!!
푸른 불꽃이 일직선으로 날아갔다. 비쟈야라는 활로 시위를 당겼지만 빛을 매개로 하는 화살은 흔들거림 없이 정확히 일직선을 그리며 하늘을 갈랐고, 아지다하카의 정수리를 꿰뚫었다.
푸스스.
화살에 정수리가 꿰뚫린 아지다하카는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카르나는 혀를 찼고, 나도 아쉬움에 입술만 깨물 뿐이었다.
"오호호. 그래서 어디 맞추기야 하겠니?"
아지다하카는 다시 어둠 속에서 상체만 내밀었다. 시건방지게, 나와 카르나의 사이에 나타나 지껄이고 있었다.
"이 망할 창녀가...!"
"진정해요, 카르나. 아지다하카 당신도 빡치지 말고. 대화가 안 됩니다."
나는 아지다하카가 지랄하기 전에 사전에 중재에 나섰다.
카르나가 아지다하카를 싫어하는 이유야 테라에서의 일전 때문이기도 했지만, 아지다하카는 간부적으로나 정령적으로나 원래부터 카르나를 싫어했다.
"그래서 오늘 이렇게 나온 이유는 선전 포고?"
"그런 셈이지. 언제까지 뒤에서 지지고 볶을 수는 없잖니? 호호, 설마 그 사이에 카르나를 찾아서 배신하자고 꼬실 줄은 몰랐어, 얘."
"배신이라니. 멍청한 년, 자신의 근원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당신도 내가 깨워주기 전까지는 마찬가지였으니까 좀 닥쳐요."
대화의 수준이 상스러워지니 나까지 격한 말을 내뱉을 수 밖에 없었다. 카르나는 내가 자신의 편을 들지 않고 중립적인 위치에 서자 울상을 지었다.
"이럴 때는 내 편을 들어서 이 년을 욕해야 하는 거 아닌가?"
"어차피 당신들 다 나한테는 똑같이 소중한 사람들이니까 별 차이 없어요."
"......."
카르나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내 말에 벙찐 모습이었고, 아지다하카 또한 마찬가지였다.
"누, 누누누 누가 소중한 사람이래니! 흥, 너, 남의 몸을 빼앗아 들어간 놈 주제에 이상한 말 지껄이지 마!"
"빼앗아?"
카르나는 아지다하카의 말에 의문을 표했다. 나는 졸지에 오해를 사게 만들어 난감해졌다.
"설야랑 환룡은 알고 있는데, 당신한테 얘기해주려고 하다가 이 사단이 일어난 거예요."
"음, 그렇군. 그럼 이 멍청이 잘못이군."
카르나는 비쟈야의 끝을 잡고 검처럼 휘둘렀다. 아지다하카가 사선으로 반 갈라 흩어졌고, 우리의 정면에서 어둠이 흐물거렸다.
"이 나쁜 년들아! 머리까지 마력으로 가득 차서 싸움밖에 모르지?! 대화라는 걸 좀 하자고! 대화를!"
"대화를 하고 있지 않나? 마력의 대화."
피융.
카르나가 다시 비쟈야를 쐈다. 아지다하카는 벌써 세 번이나 죽었다. 비록 본체가 죽는 건 아니지만, 아지다하카는 카르나 덕분에 벌써 우리에게 네 번째의 분신을 보냈다.
"이것들이!"
짝!
아지다하카가 손뼉을 쳤다. 백나로 호 주변을 빙글빙글 돌던 전투기 하나가 폭발했다.
[우주최강 미소녀 아지다하카님 만세!]
"......."
나와 카르나가 동시에 굳었다. 전투기는 폭발했고, 결국 다섯 번째 차원문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지다하카는 어둠속에서 환하게 웃으며 두 팔을 벌렸다.
"그래! 인간의 모습으로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존재가 바로 나, 아지다하카란다! 오호호!!"
"미쳐도 단단히 미쳤군. 피닉스여, 혹시 저 모습을 나중에 각성하고 나서도 보여줄 수 있는가?"
"실시간으로 녹화중이니까 걱정마요."
마도기어에는 실시간으로 내 주변 상황을 영상으로 저장하는 블랙박스 같은 기능이 내장되어 있다. 아지다하카가 벌이는 흑역사들은 추후 마암룡을 공략하는 좋은 재료들로 사용될 것이며, 카르나가 추후 마암룡을 골려먹는데에도 능히 사용될 것이다.
"스스로 가장 아름답다고 자부하다니, 부끄럽지도 않나?"
"흥! 이 세상의 진리를 말하는 건데 어떻게 부끄럽겠니? 오호호, 꼭 못생긴 것들이 질투하더라."
퓨뷰뷰븅!
카르나는 비쟈야를 눈깜짝할 새 연사했다. 아지다하카는 머리부터 배까지 빛구멍이 다섯 개나 났다.
"흑흑, 너무하네. 그치, 절도범? 저거 분명 못생겨서 질투하는 거야."
"그럴지도 모르는데, 당신은 아주 큰 착각을 하고 있어요."
나는 내 어깨 위에서 모습을 드러낸 아지다하카에게 내 얼굴을 엄지로 가리켰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존재는 이 몸이에요."
"......너 솔직히 말해. 피닉스지?"
"피닉스가 피닉스지 그럼 패니스일까? 아둔한 년."
"야! 배신자 년은 좀 닥쳐봐! 이 년 하는 말 꼬라지가 피닉스랑 똑같잖아!"
그거야 당연하지. 내가 일부러라도 창염과 비슷하게 말하고 행동하고 있으니까. 물론 창염이 세상에서 가장 예쁘다는 것에 대해서는 반론을 받지 않는다. 나는 오른손을 뻗어 아지다하카를 불태워버렸다.
"본론을 얘기해요. 자꾸 분신만 보내지 말고."
"...너 참 사람 아리송하게 만드네. 좋아, 나도 더 여기 있고싶지 않으니까 본론만 얘기하고 떠날게."
아지다하카의 모습이 사라졌다.
"얘, 내가 너 어디서 뭐하는지 다 알아봤거든? 그런데."
그리고 아지다하카는 내 등 뒤에 나타나, 나를 백허그 하며 내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너 서울 비워두고 왔더라?"
화륵.
내 시야가 푸르게 물들었다.
* * *
<그 시각, 서울.>
"맛있어요?"
"영국에서 먹던 맛이랑 똑같다냥."
선글라스로 변장을 한 금발의 여인과 녹색 눈동자의 고양이 한 마리는 민트초코 두 통을 놓고 맛평가를 하고 있었다.
"6민트의 성지라고는 해도 결국 똑같은 US라빈스...."
"공산품이 다 거기서 거기지 뭘 더 바라냥. 애초에 프렌차이즈라는게 전세계 어디를 가더라도 같은 맛을 느낄 수 있도록 하는 거 아니냥."
"가끔보면 당신은 저보다 더 인간답다고 느껴질 때가 있어요. 캐트시 경, 수염에 아이스크림 묻었어요."
"괜찮다냥. 녹으면 입으로 흘러내릴 거다냥."
여인과 고양이는 민트초코를 퍼먹으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눴다. 서울, 그것도 여의도 한복판에서 고양이와 함께 관광 중인 금발 외국인의 존재는 분명 이목을 끌 수 밖에 없었으나, 이상하리 만큼 그들의 존재감은 옅었다.
"그나저나 안타깝네요. 이렇게 잘 복구된 곳을 파괴해야 한다니."
"어차피 한 번 파괴된 곳 아니냥. 두 번 파괴되어도 괜찮을 거다냥. 결국에는 전부 다 성주님에게 멸망할 세상인데."
"......그것도 그렇네요. 후우."
여인은 민트초코를 한 입 크게 베어물며 스푼을 우물거렸다. 고양이도 다시 컵에 든 민트 초코를 핥아먹었다.
"그럼 슬슬 움직이죠? 아지다하카 씨가 부탁한 시각보다 이르기는 하지만, 그래도 30분 정도 차이면 괜찮을 거예요."
"아르엘."
고양이, 펜릴이 진지한 목소리로 시계를 가리켰다.
"아지다하카가 지정한 서울에서의 공작 시각은 정확히 언제였었는지?"
"어...7월 25일 22시 00분?"
"그래. 그러한 시각이었지. 지금 여기가 한국시로 7월 25일 20시 00분. 그렇다면 말이외다…."
펜릴은 송곳니를 번뜩이며 씩 웃었다.
"아지다하카가 언급한 시각은 서울의 시각을 기준으로 하는 시각인겐가, 아니면 아부다비의 시각을 기준으로 하는 시각인겐가?"
"......."
여인, 아르엘은 펜릴의 폭거에 입을 쩍 벌렸다. 펜릴는 꼬리로 수염에 묻은 아이스크림을 닦아내며 그르렁 거렸다.
"나는 영국의 왕실묘일세. 비록 지금은 가웨인 경의 농단으로 인해 신원의 불분명함으로 제적당했으나, 나는 20년을 영국 왕실에서 살아왔다 이 말씀이야. 그렇다면 내 시각의 기준은 그리니치 천문대를 기준으로 하여야 하지 않겠는가?"
"...그게 무슨 억지에요?"
"공주님, 이건 중요한 문제일세. 아지다하카가 장소는 지정했어도 시간은 지정했던가? 아닌 게야. 느히히."
펜릴은 입을 쩍 벌리며 하악질을 했다. 눈을 감고 하는 게 하품을 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니까 우리는 7월 25일 22시가 지나기 전에 서울을 부수면 된다 이 말이네. 어디보자, 공주님이 어제 미국 LA에 가고 싶다고 했었나? 그럼 LA시로 계산하면…."
펜릴는 눈썹을 찌푸리다가 하품을 했다.
"대충 18시간 정도 남았다냥."
"그리고 1시간 정도 남은 시간부터 일하시려고요?"
"당연. 어차피 30분만도 안 되서 해결할 수 있는 일이지 않느냥. 그럼 그 때까지 인생을 즐겨야하지 않겠느냥?"
"맞아요. 공감해요."
아르엘과 펜릴은 서로를 마주보며 킬킬거렸다. 민트초코 하프 갤런 통을 싹 비운 펜릴은 자리에서 일어나 코를 킁킁거렸다.
"......맛있는 냄새가 난다냥."
"냄새요?"
펜릴은 냄새를 쫓기 시작했고, 아르엘은 그 뒤를 종종걸음으로 따랐다. 그것이 한 카페에서 흘러나오는 빵굽는 냄새임을 깨닫는 순간, 펜릴은 바로 변신을 해제하고 녹색 단발의 메이드복 소녀로 변신했다.
"그럼 공주님, 결계 해제한다냥."
"네. ...후."
아르엘은 혹시나 다른 누군가가 자신을 보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펜릴은 가차없이 결계를 해제하고 카페의 문을 열었다.
"민트초코를 내놓으라냥!"
"......."
여의도 유일 카페, Padre Juan의 사장 후안은 카페를 들이닥친 녹색 머리칼의 고양이 귀 메이드를 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쪽으로 앉으시게."
"......? !!!"
운명이었다. 펜릴은 테이블 위에 벌려진 온갖 민트초코 케이크의 향연에 침을 꼴깍 삼켰다.
펜릴에 의한 서울 테러.
앞으로 2시간 30분 하고도 16시간이 훨씬 더 남은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