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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염의 피닉스-332화 (332/1,497)

〈 332화 〉1부 14장 23

짧은 외출을 마친 히어로들은 모두 백나로 호에 승선했다.

다들 가는 곳곳마다 영웅 취급을 받는 통에 원하던 만큼은 돌아다니지 못했지만, 오랜만의 국외 여행이라 다들 원하던 물품 몇몇과 간단한 기념품 정도만 구매했다.

내가 긁었다.

마음껏 긁으라고 했더니 진짜 원없이 긁는 이들도 있었고, 양심껏 적당히 긁는 이도 있었다. 아예 하나도 사지 않고 차만 마시다 돌아온 이도 있었지만, 그는 무수히 많은 선물을 받고 승선했다.

어차피 다 해봐야 S급 코어 하나 값도 나오지 않더라. 나중에 중국에 들려 캘리펠라를 반환할 때, 코어를 하나 받아가면 그만이었다.

인도 시 17:00.

우리는 라마를 위시한 수많은 인도인들의 환호성과 함께 뉴델리를 떠났고, 인천을 향해 귀국길에 올랐다.

* * *

<한국 도착까지 4:33.>

"아무렴 저도 돌아가는 날인데 훈련을 시키지는 않아요. 오늘도 각자 알아서 하세요. 원정대의 일은 카루라 전투를 치르면서 끝났으니까."

내 말에 히어로들은 긴가민가하는 눈치였다. 저게 혹시나 떠보는게 아닐까하는 모습이었고, 나는 다시 한 번 더 확실히 말했다.

"카르나, 당신은 나랑 잠깐 이야기하죠."

"음, 알았다. 여기서 할텐가?"

"아뇨. 제 방에서, 단 둘이. 그리고…."

나는 다른 히어로들-특히 백희아 몰래 마력까지 동원해서 술을 챙긴 히어로 둘에게 시선을 보냈다.

"귀국하면 협회에다가 보고하고 그래야 하니까, 오늘 아침처럼 흐트러진 모습 보이지 마요. 알겠죠?"

일종의 경고였다. 어젯밤 충분히 쉬고 놀만큼 자유시간을 즐겼으니, 인천에 도착하여 배가 정박할 때 까지 조용히 있으라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아무렴?"

"그렇고 말고."

다행히 그들도 귀국하는 날까지 깽판을 칠 생각은 없어보였다. 백희아는 남들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가루라는 도착시간을 보며 전전긍긍했다.

"주인님…?"

"가루라 당신도 내 방으로 와요."

"아. 그러는 게 어디있어?"

가을은 인상을 와락 일그러뜨렸고, 가루라와 이승형은 반색했다.

"저는 그러면 제 방에 들어가겠습니다…."

이승형은 휴식을 원했고, 가을도 딱히 이승형을 붙잡지 않았다. 오히려 가루라를 노리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대계를 위한 실험을 위해, 가루라를 천가을의 촉수에게서 빼내야 했다.

"팬텀, 오늘은 이만 해요. 다음에 서울 돌아가서 하시고."

"에이, 그러지 마. 자꾸 그러면 내가 발정난 것 같잖아?"

내가 가을을 노려봤지만 가을은 너스레를 떨 뿐이었다. SS에 가까워질수록 마스커레이드로서의 성향이 나오는 걸까? 이번 전투를 통해 가을도 조금 성장하기는 했다. 구체적 수치는 서울로 돌아가봐야 알겠지만.

"알았어요. 실언을 했네요. 그럼 가루라 좀 데려갑니다."

"그래. 알았어. 그러면 여자들 나 좀 도와줄래?"

가을은 청화로 변신했다. 나는 가을의 계책을 깨닫고 오한이 들었다.

"몸은 여기빼고 똑같은 거 확인 다 했거든? 그럼 이제 사온 걸로 입혀보면서 테스트 좀 하자."

"그런 거라면 좋습니다."

"흠흠, 건전한 거라면 나도 동참이야."

유이신과 양선우가 패션쇼에 입장했다. 그들은 나와 가을을 번갈아보며 눈을 번뜩이고 있었다. 뭔가 상당히 소름끼쳤다.

"...저는 함장실로 가야해서."

백희아는 바로 자리를 내뺐다. 패션쇼에 참석하고 싶어하지만 책임자로서 눈물을 머금고 함교를 지키려는 모습이 참 대견하기도 하고 애석했다. 다음에 시간이 되면 백희아에게 한복 스킨이라도 선물을 보내야겠다.

한복 스킨이 원래 백희아를 위해서 만들어진 스킨이니까. 종류 벌로 한 벌씩 보내면 집에서도 입고 다닐 것이다.

"...호오."

그리고 여기 자기 의복 따위는 전혀 관심없지만, 남을 귀엽게 입히는 데에는 사족을 못 쓰는 여인네가 한 명. 천가을은 박라온이라는 지옥문을 열었다는 자각이 전혀 없었다.

"왜? 관심있어? 너도 이런 쪽으로 흥미 있니?"

"일단 방으로 들어가서 이야기를 나누지 않겠습니까?"

"어, 으, 응."

천가을은 기시감을 느꼈을 것이다. 그리고 방에서 나오면 가루라의 심정을 십분 이해할 것이다. 청화의 육체를 탐하려는 자들로서 대리 만족을 추구하는 건 천가을 한 명 뿐만이 아니니까.

'아무렴 누구처럼 얼음조각상 만들거나, X로이드 만들거나, 호문클루스 만들려고 하거나 하는 것 보다야 낫지.'

애써 눈감아주고 있지만 누가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다 알고있다. 본인들은 아직 들켰다는 걸 전혀 모르지만.

"끄응. 우리는 뭘…."

"영감. 그냥 평소처럼 독서나 하쇼. 나는 영화나 볼터니."

"영화? 이 상황에 그걸 보겠다는 게냐?"

"거 우리가 싸운 거 밖에서 촬영하는 거 보면 그게 영화지."

"그건 그렇구만, 끌끌."

강하백과 천현택은 브리핑룸에 남기를 원했다. 방의 스크린으로는 화면이 작으니, 브리핑룸의 대형 스크린에다가 영상을 띄워 레이드를 다시 감상할 모양이었다.

히어로들 중에서 가장 건전하고 생산적으로 휴식을 취할 모양이다. 나는 성실한 그들을 위해 특별한 영상을 제공했다.

"저랑 카르나랑 맞다이 뜨는 거 영상으로 찍어놨는데 보실래요? 제 시점으로 나와서 좀 보기는 그럴텐데-"

"패션쇼 취소야."

"......."

딱히 숨길 것도 없었다. 방에 들어갔던 이승형마저도 브리핑룸으로 돌아왔고, 나는 마도기어에서 내 시야로 보이는 영상을 꺼냈-

"아."

"왜요?"

"제가 말하는 건 음소거 할게요."

나는 영상에서 내 목소리를 제거했다. 관객들이 아우성을 쳤지만, 여러모로 그걸 다시 듣는 건 사양이었다.

"나도 같이 보면 안 되겠나? 네가 싸우는 모습을 보고 싶은데."

"당신은 나랑 이야기해야하니까 따라와요."

"음...."

카르나는 침음서을 흘리며 아쉬워했다. 내가 마도기어로 남기고 간 영상의 시작은 가루라가 태어나던 순간부터 가루라가 이승형에게 안기던 그 순간까지. 그 모든 전투의 장면을 담고 있었다.

가루라가 카루라로 변하던 순간, 히어로들이 힘겹게 카루라의 진격을 피하던 순간, 그리고 내가 싸우던 그 모든 순간이 히어로들에게 보이게 될 것이다.

"그런데 말이에요, 다들 쪽팔리는 장면이 하나 둘 씩 있을텐데 괜찮으시겠어요?"

"괜찮아. 원래 다같이 보면 안 쪽팔리는 법이거든."

"누구 하나는 사회적으로 망하게 될 것 같지만 좋으실대로 해요."

"......."

자리를 피하는 자가 범인이다. 이제 그 누구도 빠져나가지 못한다. 마침 영상에는 복좌식 의자에 앉은 가루라가-

딸칵딸칵딸칵딸칵

"......."

에라 모르겠다.

나는 카르나를 데리고 자리를 피했다.

* * *

잠시 뒤, 내 개인실.

나는 카르나와 테이블에 마주앉았다. 굳이 내숭을 떨 필요는 없었고, 결계까지 쳤으니 그 누구도 우리의 대화는 듣지 못할 것이다.

"비쟈야를 결계 밖에 대기시켜놓은 이유는?"

"호법이라고 하지 않았나. 지금부터는 정령들끼리 해야하는 이야기다."

목소리는 여전히 창염의 것이었다. 나는 백청화로서의 몸이나 목소리를 꺼내놓을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다행히 카르나는 내 말투가 변한 것에 대해 딱히 지적은 하지 않았다.

"그래, 무엇이 궁금하지?"

"큐브."

"아하."

카르나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다른 이들이 듣기에는 애매한 이야기군."

"그래. 혹시 가지고 있는 큐브는 있나?"

나는 이미 큐브를 창염을 부르는데 사용했다. 그러니 카르나가 하나만 가지고 있거나, 아예 없기를 바랐다. 두 개 이상 되면 또 이계신의 의지가 야시시한 무드등을 켜며 나와 카르나를 침대위로 인도할 지 몰랐다.

이제 백청화의 몸까지 생겨났으니 더욱 주의해야했다.

"음.... 없다."

카르나는 고개를 저으며 두 손을 쫙 펼쳤다. 아무것도 없다는 제스쳐였고,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거 다행이군. 차라리 없는 편이 나아."

"왜지? 이능을 사용하는 무구로서 사용하면 충분히 이점이 있는 물건인데."

"결국에는 나중에 성주와의 싸움에서 리바운드로 돌아온다. 찝찝한 물건은 안 쓰는게 나아. 차라리 일일이 만들고 말지."

"그런가. 그렇다면 내가 개인적으로 부탁을 하나 하지."

카르나는 품에서 구슬 다섯 개를 꺼냈다. 색이 바랜 금빛의 구슬은 군데군데 망가져있었다.

"나의 호법들이다. 네 표현에 따르면 사도라고 하는 아이들이지."

"괴수였나?"

"괴수도 있고 괴인도 있다. 어느쪽이든 나의 제자들이니, 사도라고 호칭을 통일하는 편이 더 나을 것 같더군."

무기가 되는 사도라. 나쁘지는 않았다. 언젠가 가루라도 카루라처럼 무기가 되는 경우가 생길 수도 있다. 원작에서는 다들 괴인이라고 불렀지만, 이왕 호칭을 바꾸는 거 일괄적으로 바꾸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

기존에 있는 괴인들은 전부 창염에 의해 정화된 사도.

아직 다크 레기온의 영향을 받는 자들이라거나 광기에 오염된 자연 발생 괴인들은 모두 괴인.

일방적인 이분법이지만 키워드는 먼저 선점하는 쪽이 이긴다. 더군다나 괴인이라는 어감보다 사도라는 어감이 더 좋기도 했고.

"어쨌든 큐브는 없다는 말이지. 음."

"그러면 피닉스, 너는 모아둔 큐브는 있나?"

"없다. 모으는 족족 다 태워버리고 있는 중이니."

"과연. 알겠다. 서울에 돌아간 이후,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발견하게 된다면 나도 큐브를 파괴하도록 하지."

카르나는 주먹을 불끈쥐며 의욕을 내비쳤다. 애초에 정령들을 각성시킨 게 내가 찾지 못한 큐브를 찾으려는 의도도 있기는 했지만, 카르나가 큐브를 파괴하는 건 곤란했다.

"큐브를 발견하면 나한테 가져와라. 내가 없앨테니."

"응? 왜? 큐브를 발견하는 즉시 파괴해야할텐데?"

"오직 나만이 파괴할 수 있는 물건이다. 큐브는."

빠득. 카르나가 이를 악물었다.

"그건 나를 얕잡아보는 말 같은데."

"아냐, 내가 누구를 얕잡아 보겠어. 단지 성질의 문제인 거다. 큐브의 오염을 정화할 수 있는 건 오직 내 불꽃 뿐이니."

"......음, 그런 거라면 어쩔 수 없지."

다행히 카르나는 금방 기분을 풀었다. 배경에 대해 하나 둘 설명을 해야하는 다른 이들과는 달리, 카르나는 각성한 정령인 만큼 설명에 군더더기가 필요 없었다.

"그렇다면 우리의 세뇌를 푸는 방법도 어느정도는 네 불꽃이 영향이 있다고 할 수 있군. 우리 중 다른 누구도 아닌 네가 세뇌를 풀어서 다행이다. 마암룡같은 년이었으면 분명 일을 그르쳤을테지."

카르나는 나를 인정하면서도 마암룡 아지다하카를 깎아내렸다.

...상성적으로 둘은 서로를 카운터치기는 하지만, 그 상성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둘의 관계는 최악에 가까웠다.

'지수화풍은 맞물리지만 광암은 서로 맞싸우니까.'

"그런 의미에서 본론을 얘기하려고 하는데-"

화륵.

나는 바깥에서 느껴진 이상에 마력을 거두었다. 결계가 사라지자마자 백나로 호 전체에 경보가 울렸다.

[청화 님, 카르나 님, 함교로 와주십시오.]

"무슨 일이지? ...요?"

[인도 공군이 따라붙었습니다. 전투기 다섯 대입니다.]

"...왠지 그냥 보내줄 것 같지는 않더라니."

나는 카르나를 데리고 방을 나섰다. 그리고 복도를 달렸다.

함교가 아닌 갑판을 향해.

"요격할게요. 카르나, 비쟈야는-"

"이것도 오랜만이군."

카르나는 어느새 비쟈야를 무기로 바꾸어 들고 있었다. 사도의 무기화를 통해 변한 활은 찬란한 금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전투기 다섯 대라고 했나? 일단 쏴서 맞추면 되겠군."

"...잠깐만요. 적어도 의도는 알아야 할 거 아니야."

"의도가 무엇 필요한가? 적의를 가지고 있든 아니든 언제든지 요격할 준비를 해야하는 게야."

"그건 맞기는 하지만 이쪽에서 위협사격을 한다고 생각하게 할 수 있거든요?"

내가 카르나와 티격태격하는 사이, 우리는 갑판에 나섰다.

아직 히어로들은 준비가 덜 된 모양이었고-애초에 내가 카르나와 남들 눈치 안보고 전력으로 뛰어오기는 했지만-, 우리는 불의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 마력을 끌어올렸다.

시간적으로 태양이 지고 있을 때였지만, 나나 카르나나 그 정도에 구애를 받을 만큼 약하지는 않다.

"카르나."

"왜 그러는가."

"나는 못 싸우니까, 문제가 생기면 당신이 다 잡아야해요?"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

카르나는 진심으로 어이없어했고, 나는 찌푸려지는 인상을 겨우 폈다.

"그러니까 내가 '청화' 상태일 때는 아무런 힘도 낼 수 없는 약한 사람이거든요?"

"그러니까 그게 무슨 소리란 말이냐. 손가락만 까딱하면 저 날아오는 전투기도 한 번에 요격할 수 있는 자가."

"아니, 그러니까 그게 내가 지금 청화와 피닉스로서의 삶이-"

쾅!

백나로 호의 날개를 향해 날아오던 전투기가 갑자기 폭발했다.

"쐈어요?!"

"아직. 방금 쏘려고 했는데 알아서 터지더군."

카르나는 혀를 차며 비쟈야를 내려놓았다. 나는 갑자기 터진 비행기에서 무언가가 뛰어내리는 것을 보고 기가 막혔다.

"<마하트마>?"

털썩.

마하트마는 누가봐도 정체를 숨기기 위한 복장으로 우리의 앞에 나타났다. 하지만 내가 그의 정체를 대번에 까발리자, 마하트마는 히어로 랜딩 자세로 일어나려다 엉거주춤 멈췄다.

"...나는 마하트마가 아니다."

"누가봐도 마력이 마하트마인데 무슨, 당신 마력 패턴 눈으로만 훑어도.... 아, 젠장."

아니나 다를까.

"카르나. 아지다하카의 괴인이에요."

"...마암룡 년의?"

카르나는 노골적으로 짜증을 부렸고, 마하트마는 두 손을 합장하며 소리를 질렀다.

"네 이놈! 감히 여신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말거라! 그리고 나는 <살->"

피융.

카르나가 비쟈야의 시위를 당겼다. 금빛의 레이저가 마하트마, 아마도 살법의 정수리를 통과했다.

"마암룡 괴인이라면 죽여야지."

카르나는 나를 향해 싱긋 웃었다. 꼭 '나 잘했지?'하면서 칭찬을 바라는 얼굴이었다.

"...잘했어요. 정보는 얻을 수 없-"

아까부터 느낀건데, 자꾸 말이 끊긴다. 그런데 끊길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고오오오---!

살법의 시체에서 익숙하고 요사스러운 기운이 넘실거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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