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1화 〉1부 14장 22
"그러면 여기, 킨나라의 코어입니다. 부디 발표 잘 해주세요."
"여부가 있겠습니까. 안심하십시오."
적당히 회색인 라마답게 백희아가 주도하는 거래를 받아들였다.
협회의 대표인 <마하트마>에 대한 불신으로 자신은 인도 협회에 등록할 수 없다는 것.
인도 협회가 쇄신할 때 까지는 이국에 떠나 있을 것이며, 극동에서부터 서쪽으로 전진하며 순례길에 오를 것이라는 것.
그 준비를 위해 한국 원정대를 따라 서울에 잠시 들어갈 것.
"그럼 카르나 님은 낮에는 순례길을 가시다가, 밤에는 서울이나 인도에서 하룻밤을 머무르신다는 얘기지요?"
"예. 상황봐서. 주로 인도가 될 겁니다. 서울은 이미 SS급이 있으니까요."
"......그렇군요. 전세계에 전력을 분산하는 건, 흐음. 아무렴 이유가 있겠지요."
라마는 더이상 뒷배경을 캐지 않았다. 그저 인도에 자주 들린다는 것 만으로도 감지덕지할 것이다.
"그럼 저는 카르나 님이 충분한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집을 알아보겠습니다."
"딱히 집은 신경쓰지 않겠지만, 너무 호화로운 집은 카르나의 반감을 살 거예요. 재산에 초탈한 사람이니까요."
"<라크샤사> 때부터 청빈함은 유명했습니다. 더군다나 가지고 계신 찬란한 무구를 일부러 숨기고 계시기까지 했으니, 더욱 그 뜻을 받들 뿐입니다."
재산에 대해서 특별히 소유욕이 없는 건 맞지만, 기본적으로 카르나는 '주거'에 대한 개념이 없는 간부이자 정령이다.
어차피 지구는 파괴될 곳.
그러니 부동산을 구해도 2025년이면 전부 물거품이 될 재산이니, 굳이 구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 아무렇게나 등을 붙이고 자는 것이다.
'비쟈야가 붙었으니 이제 그럴 일은 없겠지.'
카르나의 괴인들, 그러니까 라크샤사의 여섯 제자들은 모두 '사도'가 되었다. 여섯 제자 모두 S급 광속성 괴수이며, 그들 모두가 카르나의 무구가 되었다.
비록 가루라와의 싸움에서 다섯 무구가 모두 봉인당하고 비쟈야만 남았지만, 시간이 지나면 회복될 것이다.
그럼 옆에서 사도들의 잔소리도 여섯 배로 늘어나고, 카르나는 어쩔 수 없이 적당히 지구를 돌아다닐 것이다.
가루라라는 이동수단이 갖춰진 이상, 카르나는 전 세계 곳곳을 누비며 돌아다닐테니.
"그럼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라마."
"제가 더 부탁드리고 싶군요. 혹시 나중에 인도에 S급이 출몰하면, 그 때도 도움을 요청해도 되겠습니까?"
"글쎄요. S급 히어로가 출몰해도 도움을 요청하시겠어요?"
"...흐음?"
라마는 자신이 S급이 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잠시 뒤.
두문불출하는 마하트마를 대신하여, 라마는 기자들의 앞에 서서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개천광> 카르나.
서울을 시작으로 하여 전세계에 자리잡은 '악의 씨앗'의 뿌리를 뽑겠다.
지극히 영웅적인 행보를 보이는 카르나의 움직임은 일종의 경고이며 도발이었다.
- 이제 4 : 3이다.
펜릴, 아지다하카, 히드라.
적어도 셋 중 하나는 돌출행동을 보일 것이며, 그런 행동을 보이는 즉시 흑염룡을 몰고 가서 다 날려버리리라.
서울로 돌아가기 전.
내게는 휴식이 주어졌다.
"그럼 청화 님, 그리고 집행관 님. 가시기 전에 저희 총리 님과도 인사를-"
"죄송해요. 저는 낮에 졸려서.... 하음."
내게만 휴식이 주어졌다. 백희아는 스스로 판단하에 쉬러 갈 수는 있지만.
"......그럼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인도 정계에 밉보일 수 없다는 요상한 책임감 때문에 굳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피로감은 이미 내가 한 번 풀어줬지만, 휴식을 취하지 못하는 것은 분명 아쉬우리라.
"총리 님은 집행관 님의 열렬한 팬입니다. 특히 지난번 흑사갈 공략전에서의 모습에 정말 큰 감동을 받으신 것도 모자라...."
아무래도 백희아의 휴식은 제대로 그른 모양이다.
나는 히어로들의 안내에 따라 먼저 백나로 호로 돌아왔다.
백나로 호에는 아무도 없었다. 저마다 인도를 떠나기 전에 삼삼오오 모여 외출을 나간 것 같았고, 나는 내 방으로 들어와 침대에 몸을 눕혔다.
"아.... 왜 이렇게 몸이 뻐근하지."
특히 허리랑 다리 안쪽이 땡긴다. 이런 일은 없었는데. 걸을 때마다 욱씬거려서 걷는데 아주 혼이 났다. 아마 걸음걸이가 이상했던게 다른 사람들의 눈에도 다 드러났으리라.
'다음부터는 그냥 적당히 피하면서 싸워야겠다.'
역시 개천광과의 전투로 인해 코어에 무리가 온 게 분명하다. 나는 침대에 누워 그리스로 가기 전에 서울에서 해야할 일들을 간단히 조정했다.
최우선 과제. 창염이 말한 대로 총을 만들 것.
호신용 무기가 되겠지만, 일단 구색은 갖춰놔야했다.
다음 과제. 서울의 은하대학교 아카데미의 개관을 준비할 것.
이거야 이미 은유하가 알아서 다 해결하고 있을테니 굳이 신경은 쓰지 않아도 될 일이었다.
다음 과제. 은유하 C컵, 아니 S급 만들기.
한국에 있는 광속성은 은유하 말고는 다 고만고만하니, 은유하와 개천광을 만나게 하여 S급으로 각성시키면 된다.
본인의 성장 한계치가 A급으로 끝이라서 그렇지, 은유하는 이능력의 활용 덕분에 진작에 S급으로 올라도 이상하지 않을 사람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과제.
"후우."
피닉스.
석하랑.
샤오린-에 깃든 환룡.
그리고 카르나.
SS급 이능력자, 그것도 정령으로만 넷이 모였다.
이제 드디어 '아무 피해 없이' 공략할 수 있다.
뉴클리언(NUCLEAON).
지구에서 태어난 괴수이면서 유일하게 99레벨로 괴수화로 폭주한 간부들과 맞다이를 뜰 수 있는 세계 최강의 괴수.
코어를 수급할 수 있는 인프라도 갖춰졌으니, 이제 살려둘 이유가 없다.
뭣보다도 아시아 전체를 날려버릴 폭발물을 언제까지 평양에 방치하고 있을수도 없는 노릇.
'결계 네 개 치고 잡으면 되겠지.'
싸우다가 방사능 유출이라도 일어나면 기껏 구축해둔 서울의 인프라가 전부 의미가 없어질 것이다.
나는 완전히 비워놓은 8월달의 달력에 일정들을 정리하여 빼곡히 정리했다.
"아."
그게 있었다.
"8월 중에 원탁이 서울에서 회담 열기로 했는데."
원탁 13명이 전부 필참하는 초유의 소집.
그것이 한국, 여의도에서 진행될 예정이었다.
* * *
예정된 시각이 되었다.
나는 집합 시간보다 한 시간 일찍 돌아온 백희아와 함께 귀환하는 히어로들을 맞이했다.
"히잉, 인형이 된 것 같은 것이에요...."
가루라는 중세시대 공주님같은 복장을 한 채 가을에게 손을 붙잡혀왔다. 그들의 뒤에는 정신적으로 기가 많이 빨린 듯한 이승형이 온갖 옷가방을 들고 뒤를 따르고 있었다.
"가루라 옷 사준 거예요?"
"그냥 속옷이랑 평상복만 사려고 했는데, 지나가던 사람들이 전부 다 입혀보자고 하더라. 오늘 입은 옷만 거의 50벌 될 걸?"
"......."
나로는 안 되니 이제는 가루라를 입혀서 대리만족을 시키는 건가. 내가 눈을 흘기자 가을은 어깨를 으쓱였다.
"왜? 하지 말까?"
"......좋으실대로 하세요."
가루라는 내가 아니다. 외형이야 똑같기는 하지만, 가루라는 마력적으로나 정령적으로나 내 딸같은 느낌이 강했다.
카르나가 낳고 내가 마력이라는 정을 불어넣은 존재. 갸루 모습을 한 창염이라 외형은 조금 끌리기는 했지만, 왠지 모르게 딸같은 느낌이라 건드리기가 좀 그랬다.
"가루라."
"네."
"나중에 필승의 테크닉을 가르쳐드릴까요?"
"......."
가루라는 가을과 이승형의 눈치를 슬쩍 보다가, 내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가루라의 어깨를 두드리고 안으로 들였다.
"흐음...."
"왜요?"
"아니, 뭔가 너 어제부터 느낌이...."
가을은 자꾸만 나를 위아래로 훑었다. 뭔가 기시감이라도 느끼는 모양이지만, 오히려 내가 더 기시감의 정체를 알고 싶었다.
"또 중국 병실에서처럼 혼자서 해결한 거 아니지? 혹시 원하면 불러. 내 열 한 손이 대기중이야."
"그럴리가요. 적어도 여기서는 그럴 생각 없어요. 아, 아니 다른 곳에서도 그럴 생각 없지만."
가감없는 나와 가을의 대화에 백희아는 얼굴이 삽시간에 붉어졌다. 가을은 백희아에게 양해를 구한 뒤, 내게 귓속말로 속삭였다.
"내가 앞으로 하고, 쟤가 뒤로 했어."
"......미친."
뭔가 알아선 안 될 것을 알아버린 느낌이다. 나는 갑자기 가을의 마스크에서 마스커레이드의 모습이 느껴지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 육식계의 성향은 환경의 산물이 아니라 본성이었구나. 새삼 천가을이 다시 보였다.
"......."
옷가방을 한아름 든 이승형은 나를 정면으로 바라보지 못했다. 나는 그에 코웃음이 나왔다.
"왜요? 내 딸 뒤를 뚫으니까 좋았어요? 이러다 나중에 자라면 건방지게 스승도 뚫으려 하시겠네."
"......그럴 일은 평생 없을 겁니다.... 하아. 저도 당한 거라고요. ㄱ.... 팬텀 누님이 정말로 자기 편이라면 그 의지를 보이라면서, 하아."
이승형은 진심으로 억울함을 보였다. 하지만 그가 가루라를 건드렸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음.... 가는 길에 실험을 좀 해보고 싶은데."
"실험이요?"
"네. 합체요 합체."
나는 손으로 고리를 만들어 그 안에 엄지를 쑤셔넣었다. 이승형은 불쾌감과 부끄러움을 동시에 내비쳤지만, 나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왜요? 가루라 외형만큼은 진짜 예쁜데. 혹시 탄 피부는 싫어해요? 그도 아니면."
"청화 님. 화권이 곤란해합니다. 뒤에 또 사람이 오니 적당히 하시지요."
"...알았어요. 이만 들어가요."
이승형은 부리나케 안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나의 실험에 대한 욕구는 폭발하기 직전의 활화산처럼 들끓고 있다.
"무슨 장난을 치시려는 거예요?"
"장난이라뇨. 세계 평화를 한 걸음 더 앞당길 찬스가 될지도 모르는 실험인데."
"예?"
"농담이 아녜요. 어쩌면 진짜 성주를 쓰러뜨릴 실마리가 될 수도 있으니까."
어쩌면, 성주가 아닌 이계신까지 건드려 볼 수 있을지도 모르는 조커 카드.
그 조커 카드의 완성을 위해, 나는 연구원에게 협조를-
"아."
히카리 이승형 빠순이인데.
좆됐다.
* * *
[어, 진짜요?! 대박! 우리 오빠 그러면 단장님 따님이랑 결혼하는 거예요?]
"......."
이런 반응이 나올 거라고는 예상 못했다. 나는 눈을 반짝이는 히카리의 모습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히카리. 이승형 좋아하던 거 아니었어요?"
[...? 좋아하긴 하는데, 혹시 이성관계로 또 물으시는 거예요? 에이, 저 아직 미성년자예요. 나이 차가 얼만데.]
"......."
세상에는 스무 살 가까이 차이나는데도 신혼 살림을 두 번이나 차린 부부가 있다. 히카리는 손사레를 치다가 헛기침을 하며 진지하게 말했다.
[저는 그냥 제 목숨을 구해준 분이 잘 되기를 바랄 뿐이에요. 그보다 가루라라고 했죠? 괴수가 인간이 되는 매커니즘에 대해 오시면 자세하게 설명해 주실 거죠? 저 기다리고 있을 게요.]
"예. 카르나까지 같이 갈 거니까, 더 자세하게 알 수 있을 거예요."
[흐흐, 괴수의 인간화-사도에 대한 이론 정립이라.... 아, 저 궁금한 거 있어요.]
히카리는 사진을 두 장 보내왔다. 서울에 무사히 킨나라의 사체를 수송하고 한강 둔치에 휴식을 취하고 있는 흑염룡이었다.
[곽용우 아저씨도 그러면 단장님처럼 변하는 거예요? 이게 그 말로만 듣던 TS?]
"......S급에 올라봐야 알 수 있을 것 같은데요."
흑염룡이 인간의 모습을 되찾으면 흑발 흑안의 청화가 된다?
"3P 컬러까지는 조금...."
[이참에 다른 컬러도 만드시는 건 어때요? 팔레트 스왑이라고 하잖아요! 이제 그린이랑 핑크만 있으면 청화 전대를 만들 수 있어요!]
"색깔적으로 얘기하면 그린이랑 옐로우에요. 그리고 그러면 레드인 가루라가 대장이 되는 거 아녜요?"
풍속성 괴수와 지속성 괴수가 베이스가 되었던 애들이니 그린이랑 옐로우다. 히카리는 어깨를 으쓱였다.
[꼭 단장님이 안 들어가셔도 되잖아요? 가루라를 대장으로 하는 피닉스 분대를 만드셔도 될 것 같은데. 히히. 제가 연구해볼까요? 재료만 좀 더 보내주시면 루살카 님 호문클루스 만들면서 더 만들어 볼게요.]
"...하여튼 말이라도 못하면."
[히히.]
히카리는 진짜로 만들 녀석이다. 내가 허락만 하면 분명히.
"내일 아침에 은유하랑 같이 만나요. 한 번에 같이 소개해드릴테니."
[알겠습니다. 그러면 오늘 연구 적당히 하고 잘게요.]
"그래요. ...아참."
제일 중요한 걸 잊어버릴 뻔했다. 나는 히카리에게 내가 미리 준비한 데이터를 넘겼다.
"이거, 만들 수 있어요?"
[......단장님.]
"네."
[지금 랩에 있는 재료 다 써도 돼요?]
히카리가 붉은 눈을 번뜩이며 활짝 웃었다.
"......킨나라 사체도 같이 쓰세요. 다 쓰지는 말고, 일부만."
[사랑해요, 단장님!]
뚝.
연결이 끊어졌다. 나는 배게에 머리를 이고 천장을 바라보며 한숨이 나왔다.
레드 가루라.
블랙 흑염룡.
"흑염룡은 진짜 어떻게 되는거지?"
과연 그는 곽용우로서의 자신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새 호적을 파서 조금 다른 이름으로, 곽아영이 될 것인가.
"......알게 뭐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