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0화 〉1부 14장 21
책임자를 제외한 히어로들은 자유시간이 주어졌다.
나는 책임자인 백희아와 함께, 인도 히어로들이 직접 모는 방탄 리무진을 타고 인도의 협회로 초대를 받았다.
"......."
백희아는 언제나처럼 제복을 입고 있었지만, 그 눈은 퀭하기 그지 없었다. 내가 준 짜이-피로 회복제 덕분에 그나마 눈에 생기는 돌고 있지만, 정신력으로 버티고 있는 것이다.
"가는 동안 편히 있으세요."
"...어차피 한국 돌아가는 배도 움직여야 합니다. 빨리 끝내고 자면 돼요."
"안 잘 것 같은데."
내가 지정한 때인 오후 4시. 백희아는 협회에서의 일을 처리하고 나서도 절대 잠을 못잘 것이다.
히어로들이 행여나 밖을 돌아다니다가 사고라도 일어나면 어쩌나하는 걱정으로 인한 불면증을 시달리는 건 백희아의 패시브나 다름없었다.
"잠깐 누워볼래요?"
나는 내 허벅지를 팡팡 두드렸다. 백희아는 내 허벅지를 유심히 쳐다보다가 그대로 얼굴이 붉어졌다.
"무릎 베개를 해주시겠다는 말씀...?"
"네. 고생했으니까요. 화권은 비록 30분까지 버티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제법 긴 시간 동안 버텼잖아요? 솔직히 5분은 충분히 남길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카루라와의 대결에서 백희아는 히어로들을 지휘하여 카루라에 맞서 싸웠다.
비록 불합리한 카루라의 힘 때문에 승리는 커녕 압도적으로 패배했지만, 그래도 백희아의 지휘는 정확하고 체계적이었다. 내가 그 지휘를 예상하고 다섯 수는 앞서있었을 뿐.
"그러니까 이건 포상입니다."
"......참 이상한 포상을 주시네요."
백희아는 눈을 흘기며 고개를 떨구었다.
"이런 포상 말고 국익에 도움이 될만한 건 없습니까?"
"음.... 그래서 안 받을래요?"
"아뇨. 잠깐이라도 눈을 붙이겠습니다. ...너무 피곤해서."
백희아는 순순히 내 허벅지에 머리를 놓았다. 차마 나를 정면으로 바라보기는 힘들었는지, 내 무릎을 바라보는 위치로 고개를 두고 머리를 뉘였다.
"엿차."
나는 마력을 동원해 백희아의 몸을 뒤집었다. 백희아는 90도 뒤집혀, 내 허벅지에 머리를 이고 정자세로 누운 자세가 되었다.
"...그림자가 져서 불편합니다만."
"그건 미안하네요."
백희아는 이제 노골적으로 불편함을 드러냈다.
석하랑이나 은유하와 자웅을 겨룰법한 아담한 사이즈기는 했지만, 다른 둘과 비교했을 때 백희아는 유독 작았다.
"그거 알아요? S급으로 오르면 자신이 바라는 이상적인 체형으로 몸이 점점 변하는 거."
"마력이 무슨 성형외과 의사입니까?"
"등급이 올랐을 때 히어로 슈트 사이즈 조정하는 이유가 뭐가 있겠어요? 전투에는 아무 지장이 없지만, 마력이 주인이 가장 바라는 이상적인 체형으로 변하도록 체질이 바뀌는 거죠."
그래서 S급 이상으로는 죄다 현대적인 미인상이 많다.
그 누가 못생긴 얼굴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라겠는가.
그 누가 신체의 컴플렉스를 극복할 수 있기를 바라겠는가.
백희아 빼고.
"...저는 지금의 신체에 만족합니다."
"하지만 미래의 당신은 B컵까지 늘어났는데요."
빠득. 백희아가 이를 갈았다. 머리를 무릎까지 올려, 일부러 나와 시선을 마주했다.
"지금 저를 우롱하시는 겁니까?"
"아뇨. 미래의 당신은 생각이 바뀌었다는 거죠. 당신 지금 몸도 충분히 예쁜데, 당신 연인의 취향이 풍만한 가슴을 좋아해서."
"......."
백희아는 고개를 슬쩍 내리며 얼굴을 붉혔다.
"...템페스트 레이디의 인생을 스포하더니, 이제는 제 인생까지 스포하시는 겁니까? 제 남편이라도 밝히시려고요?"
"아뇨? 푸흐흐. 스포할 생각 없는데요. 제가 왜 스포를 하겠어요?"
"그건 당신이라서 그런 거 아닙니까?"
"......."
나는 행여나 누가 들었을까봐 결계를 다시금 확인했다. 리무진 뒤에 펼쳐진 결계는 이상이 없었고, 안에 도청장치는 일절 없었다.
"미래에서 왔다고 하셨죠. 제게 그렇게 호의를 보인 이유도 있을테고. 뭣보다."
백희아는 왼손을 들어올렸다. 네번째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는 백희아의 손가락 사이즈와 딱 맞아떨어졌다.
"제게 굳이 이런 걸 끼워준 이유야 하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당신 소감은 어때요?"
나는 백희아의 반지를 잡고 물었다. 백희아는 담담히 나를 보며 입을 열었다.
"별 생각 없습니다. 미래에 제가 당신과 이어진다고 해도, 그건 미래의 백희아지 제가 아녜요. 하지만...."
백희아는 손을 뻗어 내 볼을 잡고 씩 웃었다.
"당신을 일단 제 남편이든 아내든 백가의 일원으로 만든 뒤에, 법을 만드는 것도 나쁘진 않겠군요?"
"무슨 법이요?"
"정령과의 혼인에 관한 특별법이요."
"......."
얘는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지. 내가 따지려고 들기 무섭게, 백희아가 진지한 목소리로 설명을 시작했다.
"기존의 혼인에 관한 법은 인간과 인간의 결혼이지, 외계인이나 정령을 대상으로 하는 건 아니잖아요? 청화 님은 호적이 있는 인간 취급이라고 하더라도, 사실은 정령이었다고 언젠가 밝혀지게 되겠죠. 그럼 설령 혼인 신고를 했다고 하더라도 사기 결혼이 되버리는데-"
"잠깐만요? 너무 나가는 거 아녜요?"
"아닌데요. 법적인 문제는 중요하다고요. 그렇다고 중혼을 합법으로 만들기에는 다툴 여지가 있으니 불가능하다고 봐야죠. 하지만 만약 청화 님이 2인 이상의 사람과 결혼을 희망하시면 이국으로 가야할텐데, 분명 특별히 청화 님만 중혼을 하도록 허락하겠다는 나라가 나온단 말이죠? 그럼 국부 유출로 이어지게 되고-"
딱.
나는 백희아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튕겼다. 퀭한 백희아의 눈동자에 서서히 총기가 돌아오기 시작했다.
"얘는 또 별 걱정을 다하네. 잠이나 자요. 어디 안 가니까. 적어도 세계를 구하기 전까지는 한국 뜰 생각 없어요."
"구하고 나면.... 그 뒤에는...."
나는 백희아의 손을 붙잡고 마력을 흘려넣었다. 카페인과 피로감으로 불안하게 날뛰던 마력이 천천히 가라앉기 시작했고, 백희아의 눈꺼풀이 사르르 닫혔다.
"......."
백희아는 잠들었다. 나는 리무진이 도착할 때 까지, 백희아의 몸에 마력을 돌리며 그의 피로를 풀었다.
세계를 구하고 난 다음이라.
생각해보지 않아서 모르겠다.
희망찬 미래를 꿈꾸는 것 보다, 그 미래를 방해하는 장해요인을 제거하는 생각만으로 벅차니까.
차가 협회에 도착하기 까지.
나는 백희아의 아기새같은 숨소리를 백색소음 삼아 일정의 조정을 끝냈다.
잠시 뒤.
차는 협회의 지부에 도착했고, 나는 백희아를 깨웠다.
"......그래서 백청화 하실 생각 있으신지?"
백희아는 집요했다.
* * *
<오전 10시, 인도 협회 지부.>
"...<마하트마>는 어디로 갔습니까?"
백희아는 눈쌀을 찌푸리며 짜증을 부렸다. 불안증세를 보여도 그다지 짜증은 내지 않는 백희아가 사람을 향해 짜증을 내는 건 상당히 이례적이었다.
"......두문불출입니다. 병세가 깊어서 도저히 나올 수 없다고."
A급 히어로, <라마>가 난감한 미소로 고개를 숙였다.
갈색 피부에 흑발인 미청년은 인도 남부-벵갈루루에서 뉴델리까지 한걸음에 달려왔다. 바로 수도에서 협회를 통제해야 했던 히어로 <마하트마>가 자리를 비우는 바람에.
"정말 집에 박혀있는 거예요? 혹시 어디 사라지거나 한 건 아니고요?"
"예. 마력 반응은 집안에 있습니다. 정작 아무도 집에 들어갈 수 없으니 난감할 따름입니다만."
"......염치는 아는 사람이군요. 쳇."
백희아는 입꼬리를 비틀었다. 라마 또한 별다른 반론을 내지 못했다.
"...마하트마 님에 대한 여론이 안 좋으니까요. 이해해주십시오. 제가 대신 사과를 드리겠습니다."
이미 온갖 커뮤니티에는 마하트마의 실책들이 수두룩하게 공개되어 온갖 비난을 받고 있었다.
야차와의 전투에서 약속되지 않은 난입으로 인해 반격기를 발동시켰던 것.
킨나라의 난동에서 우왕좌왕하며 제 때 명령을 내리지 못했고, 결국 단독행동을 벌인 백나로 호가 선행하여 격퇴하는 덕분에 뉴델리를 지킨 것.
카루라와의 전투에서 가장 먼저 나가떨어지는 것도 모자라, 청화의 의식이 끝나기도 전에 청화의 의식이 실패한다고 확신하고 도주하자고 한 것.
S급 셋과의 전투에서 온갖 추태를 부린 마하트마는 다소, 아니 명백히 과격할 정도로 모든 죄를 뒤집어 쓰고 있다.
협회에서는 그의 위치를 철저히 비밀리에 부치고 있지만, 만약 그가 협회의 지부가 아니라 개인의 집에 있다는 사실이 민간에 알려지면 상황이 어떻게 변할 지는 뻔했다.
"마하트마를 규탄하는 사람들이 금방 집에 처들어가겠죠."
"안 봐도 비디오기는 한데.... 꼭 누가 뒤에서 어떻게 하고 있는 것 같지 않아요?"
나는 은근한 눈으로 백희아와 라마를 흘겼다. 백희아는 금방 내 눈빛을 읽었고, 라마는 그저 지긋이 웃으며 어깨를 으쓱일 뿐이였다.
"글쎄요. 대표의 감이 되지 않던 자가 오랫동안 그 자리에 앉아있다가 이제서야 그 실체가 드러났을 뿐입니다."
라마는 노골적으로 제 본색을 드러냈다. 나 또한 그의 성향을 알고 있기에, 더이상 내숭을 떨지 않았다.
"백희아 아가씨."
나는 손가락을 두드렸고, 백희아는 테이블 아래에서 손을 맞잡았다. 나는 마력을 통해 백희아에게 라마에 관한 정보를 빠르게 넘겼다.
[미래에 인도 협회를 대표할 남자다. 광속성 S급으로, 적당히 회색인 남자야.]
지휘관의 재능은 없지만 히어로로서는 손색이 없는 남자. 백희아는 내 말뜻을 이해하고 라마에게 고개를 숙였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예. 그런 의미에서 염치는 없지만, 저도 이번 협의를 통해 면을 세우고싶은데...."
"당신 정말 노골적이네요?"
"숨겨서 무엇을 하겠습니까? 불쌍한 중생 하나 구제한다셈치고 도와주십시오. 저희는 S급 코어를 하나 얻기는 했지만, 여러분은 그보다 더 중한 보물을 가져가시지 않습니까."
라마는 거래를 요청했다. 나도 백희아도 그 말뜻을 금방 깨달았다.
"카르나와 가루라에 대해서는 눈감을테니, 대신 뭔가 하나라도 더 달라?"
"집행관 님과 이리 대화가 잘 통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습니다. 하하."
서로가 통하는 면이 있을 것이다. 백희아가 한국의 이익을 중시한다면, 라마는 인도의 이익을 중시하는 사람이니.
단지 라마가 을의 입장이기에, 스스로 내릴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내린 것이다.
"좋아요."
백희아는 내게서 미리 건네받은 킨나라의 코어를 꺼내놓았다. 선뜻 S급 코어를 꺼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지, 라마는 흠칫 놀라 굳어버렸다.
"이거면 괜찮을까요?"
"...제 플랜에서 딱 목적만 달성하는 정도군요. 이거 뭔가 패가 다 까발려진 상태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 같습니다."
"여러 가지로 듣고 있는 정보가 있거든요."
백희아는 반지를 만지며 입꼬리를 들어올렸다. 내게서 실시간으로 라마의 화법과 약점을 듣고 있으니, 라마에 대한 공략은 너무나도 쉬웠다.
라마와 거래를 트려면 딱 목적만큼 달성하게 하면 되지만, 라마와 장기적인 관계를 구축하려면 그에 상회하는 무언가를 줘야했다.
라마가 예측하지 못하는, 그러면서도 라마가 혹하게 될 무언가를.
"킨나라의 코어를 드리는 대신, 카르나는 인도에 상주하게 될 거예요."
"......저는 한국에 데려가실 줄 알았습니다만."
모두가 그렇게 걱정하고 있었다. 협회에 등록하지 않은 채 숨어있던 S급 이능력자 <개천광>이 혹시라도 한국으로 가버리면 어쩌나.
"잠깐 한국에 있기는 할 거예요. 그 과정에서 아주 약간의 절차가 필요할 뿐."
백희아는 카르나의 신변에 관한 문제에 대하여 라마와 논의를 했다. 라마는 심각한 얼굴로 듣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여러모로 이미지를 챙기고, 결국에는 카르나 님이 인도에 계신다는 말이군요."
"하늘길을 통해서 출퇴근하는 식으로 움직일 거예요. 가루라가 전속력으로 날면 2시간이면 서울에서 뉴델리까지 오다닐 수 있을테니까."
나조차도 평상시에 그와 비슷하게 속도를 낼 수 있는데, 본체를 꺼낸 가루라가 그게 안 될 리 없다. 라마는 가루라의 진면목을 듣고 혀를 내둘렀다.
"......무서운 괴수였, 크흠. 죄송합니다. 아직 명칭에 대해 정해진 바가 없어서."
라마는 내 눈치를 보며 멎쩍은 듯 머리를 긁적였다. 우리들이야 그냥 괴수라고 부르지만, 아무래도 사람들은 괴수가 사람이 된 케이스에 대해 뭔가 특별한 명칭이 있기를 바라는 눈치였다.
"사도(使徒)."
"예?"
"사도라고 하죠."
창염이라는 화신(火神)을 옆에서 지키는 자, 사도 가루라.
높으신 분들이 이상한 명칭을 정하기 전, 내가 먼저 선수를 쳐야했다.
"그 분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나의 사도와 함께 세상의 평화를 지키라고."
"아하."
라마는 손뼉을 치며 싱긋 웃었다.
"청화 님이 모시는 그 분이 존함이 바로 '창염'이시군요! 이야, 이번 영창에서 그 부분만 번역이 어려웠는데 드디어 깨달았습니다! 크흑, 청화 님."
라마는 내게 고개까지 숙이며 기도했다.
"부디 그분께 전해주십시오. 당신의 넓은 아량으로 이 땅에 평화가 찾아올 것이라고. 창염개진."
"방금 뭐라고 한 거예요?"
나는 테이블 아래에서 주먹을 불끈 쥐었다. 라마는 고개를 들며 갸웃거렸다.
"모르셨습니까? 지금 다들 그렇게 기도하고 있습니다. 항상 그렇게 말을 끝맺으셨잖습니까. 다시 한 번 더 감사드립니다. 크흑, 창염개진."
역시, 히어로란 것들은 다 글러먹은 놈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