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8화 〉1부 14장 19
눈을 뜨니 눈높이가 변했다. 몸을 감싸던 미묘한 감각마저 사라졌다. 무엇보다도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있는 감각이 생동감있게 느껴졌다.
"윽."
나는 철제 스푼에 비친 내 모습에 짜증이 일었다. 창염은 뭐가 그리 즐거운지 연신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좋냐?"
"저보다는 당신이 좋아해야하는 거 아녜요? 모처럼 바라던 '몸'을 얻었는데."
"내 몸이 아니잖아."
"뭐 어때요. 당신이 쓰면 그게 당신 몸인 거지. 게임 할 때는 잘만 썼잖아요. 안녕하세요, <신관>? 푸흐흐!"
나는 두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가 손을 금방 떼버렸다. 독수리의 발톱을 형상화한 것 같은 검은 건틀릿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병적으로 하얀 피부의 손이 내 눈에 비쳤다.
조금 큰 손은 여리여리하면서도, 손가락 사이사이에 굳은 살이 박혀있다. 백색의 코트로 가려진 몸은 탄탄한 근육질은 아니었지만 실전으로 압축된 잔근육이 탄탄했다.
솔직히 부러운 몸이었고, 게임을 통해 정말로 많은 신세를 졌던 몸이다. 그리고 이 몸으로 16명의 히로인과 정말 많은 역사를 쌓아나갔다.
"하아…."
신관의 목소리, 신관의 몸. 나는 영락없는 신관이 되었다. 창염은 굳이 방안에 비치된 손거울을 가져와 내게 비췄다.
"제 머리카락 색이랑 똑같죠? 눈동자 색도 똑같네요? 누가보면 의남매인줄? 푸흐흐."
"이왕이면 부부로 하는 건 어떠냐."
"원래 오빠가 아빠가 되는 법이죠. 누구누구 아빠. 후훗."
창염은 너스레를 떨며 내 공격을 받아냈다. 원작의 모든 내용을 거쳐서 그런지,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받아내는 솜씨가 아주 일품이다.
"난 이 모습 별로 안 좋은데. 차라리 금발인 상태가 낫지."
"왜요? 금발 선호해요? 그래서 카르나 상대로 배 부딪히며 싸웠나?"
"그게 아니라, 이거 그 상태잖냐."
맑고 푸른 머리칼을 한 주인공은 창염의 피닉스다 소멸하여 그 힘을 이어받은 후의 모습이다. 그러니까 지금의 모습은 창염이 소멸하여 주인공에게 힘만 남겨주고 떠난 흔적이었다.
"네가 소멸했다는 증거인데 웃음이 나오냐?"
"뭐 어때요? 아직 저는 이렇게 살아있는데. 그래서 저 죽일 생각이에요? 원작에서 했던 것처럼?"
"설마 그럴 리가 있겠냐?"
애초애 내가 지금 하고 있는 모든 일의 궁극적인 목표는 '창염을 살리는 것'이 아닌가. 창염을 버린다면 아주 손쉽게 엔딩을 보게 되겠지만, 그건 곧 창염의 소멸을 의미했다.
"내가 너를 왜 버리겠어?"
"......그렇죠? 그 생각, 어디까지가는지 한 번 보자고요. 푸흐흐."
창염은 나를 비웃었다. 하지만 나는 그걸로 창염에게 따지거나 할 생각도 없었다. 대신 궁금증을 해결하기로 했다.
"카르나를 각성시키고 얻은 건 이 몸이냐?"
"그쵸."
석하랑을 각성시킨 대가로 나는 말투의 자율성을 받았다.
환룡을 각성시킨 대사로 나는 주인공의 목소리를 받았다.
그리고 이제 나는 개천광을 각성시킨 대가로 주인공의 몸을 받았다. 이제 나는 인간형을 창염의 모습-청화가 될 수도 있었고, 원작 주인공의 모습-백청화(남)으로도 변할 수 있게 되었다.
"좋은 생각이 났다."
"뭐예요?"
"이 얼굴을 피닉스의 진짜 모습이라고 사기치고 다니면 되겠군."
마침 피닉스의 외형도 남성형에 가까우니, 피닉스가 백청화로 변신을 해제하는 모습을 보이기만 하면 아마 세상이 뒤집힐-
"아니지. 그랬다가는 내가 난리가 나겠어."
"왜요?"
"주변에서 건드리려고 하는 것들의 마지막 브레이크가 성의 문제 아니였냐. 그런데 이 모습을 보여봐. 일단 천가을한테나 석하랑한테 무조건 쥐여짜인다."
"당신 몸 아니니까 함부로 굴려도 되잖아요. 그건 백청화의 몸이니까."
"그걸 움직이는 게 나잖냐."
이게 어디서 함정을. 나는 손을 뻗어 손가락을 튕기려했고, 창염은 샤베르를 휘휘 젓다가 고개를 뒤로 슥 빼버렸다.
"아주 그냥 못하는 말이 없어. 너 나중에 내가 행여나 다른 여자랑 놀아나면 그거 빌미로 나 없애려고 각보는 거지? 누가 모를 줄 알고?"
"음…. 만약에 내가 진심으로 허락한다면?"
창염은 샤베트를 퍼올린 스푼까지 내려놓으며 내게 질문했다. 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만약에 제가 당신한테 하렘을 허락해준다면, 그 때는 어쩌실 거예요?"
"그럼 이렇게 하면 되지."
나는 내 몫의 스푼으로 샤베트를 퍼올려 창염에게 건넸다.
"어제도 너, 오늘도 너, 내일도 너. 과거 현재 미래 모두 너로 하렘을 차리면 되겠네. 완벽하군."
"그게 무슨 개떡같은 소리예요? 미쳤어요?"
"네가 먼저 이상한 소리를 하니까 그러지. 분명히 말하지만, 내 사랑은 너 하나만으로도 벅차. 내가 사랑을 조금 무겁게 하는 편이거든."
"그러세요? 그렇게 생각해드릴게요."
창염은 어깨를 으쓱이며 나를 한 번 더 비웃었다. 나는 얼척이 없었지만, 이어지는 창염의 행동에 더 얼척이 없었다.
"하음."
창염은 내가 당기려던 스푼을 입에 물며 눈웃음을 쳤다. 언제나 거울로 보던 얼굴이지만, 역시 내가 짓는 표정과는 확연히 다른 마성이 있었다. 창염은 입술까지 붙이며 샤베트를 흔적도 남김없이 쓸어버렸다.
"너 이거 간접키스인데."
"몸도 공유하는 사이인데 새삼스럽게 무슨."
"그것도 그렇…. 이제는 아닌가? 내가 백청화 몸을 돌려받았으니."
"아뇨? 그거 엄밀히 따지면 마력으로 실체화한 거니까 진짜 백청화 몸은 아녜요. 당신의 인간 남성형으로 가장 적절한 게 뭐 있을까 암만 찾아봤지만, 유감스럽게도 백청화 몸 말고는 쓸 방법이 없더라고요."
창염은 샤베트를 스푼으로 휘휘 저으며 설명을 이어나갔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중간중간 추임새를 넣으며, 속으로는 설명을 요약했다.
창염의 기운이 너무나도 강해 남자의 모습을 하려면 그만큼 내가 익숙한 몸이어야 하는데, 나는 지난 1년을 나보다 백청화로 더 오래 살았다고 하더라. 그래서 백청화의 몸이 되었다고 한다.
"...이해했어요?"
"그래."
시간만 따지면 거의 10분 정도 흐른 것 같았다. 창염이 샤베트를 흡입하는 사이, 나는 우선 다음 데이트의 약속을 잡기로 마음먹었다.
"다음은 그리스로 갈 거다."
"...지륜? 그리스에 있다는 보장이라도 있어요?"
"글쎄. 하지만 이번처럼 도발하면 오지 않겠어? 운명력이라는 걸 한 번 믿어보려고."
"아하, 정령 각성 전투가 일어났던 장소에서 어그로를 끌어보시겠다? 좋은 생각이네요. 한 번 해봐요."
"......?"
창염은 상당히 순했다. 뭐라고 해야할까, 조금 해탈한 것 같기도 했다.
"갑자기 왜 이러냐? 예전처럼 틱틱대면서 '그게 가능할 것 같아요? 푸흐흐, 어디 한 번 자-알 해보시라고요.' 라고 했을 거면서."
"......."
창염은 코를 찡그리며 불쾌감을 내비쳤다. 하지만 나는 창염의 변화가 이해가-
"야. 너 설마 내가 이 몸으로 얘기하고 있어서 그러는 거 아니지?"
"...지금 백청화 몸한테 질투하는 거예요? 세상에. 좀 깬다. 그거 이제 당신 몸이에요, 당신 몸."
"질투는 무슨. 너랑 이렇게 대화하는 곳 말고는 어차피 두 군데 말고는 쓰지도 않을 몸인데 무슨."
"두군데?"
나는 손가락을 두 개 펼쳤다. 창염은 스푼을 입에 문 채 귀를 쫑긋 세웠다.
"하나는 아까 말했던대로 빌런 피닉스의 변신해제. 언젠가 누가 그러는 거지. '정체를 드러내라, 피닉스!'. 그러면 이 모습으로 변신을 해제하는 거다."
"청화에 대한 혐의를 벗으려고 아주 작정을 하셨네요."
"그래. 그러니까 이건 모르는 사람이 많을수록, 아니 아예 사람들이 전부 몰라야 해. 어차피 청화의 몸으로도 잘만 지내고 있지 않냐."
"하지만 서울에 이제 사람들이 늘어나면 어쩌시려고요?"
"낮에는 햇빛에 숨어다니고 밤에는 마음껏 움직여야지. 그러려고 생활 패턴도 그리 만들어뒀으니."
청화는 야행성이니까. 나는 손가락을 하나 접었다.
"또 하나는 말이지."
나는 창염에게 은근한 메세지를 보냈다. 창염은 코웃음을 치며 스푼으로 테이블을 툭툭 건드렸다.
"정말 한결같으시네요? 푸흐흐."
"내가 애초에 왜 이 세계에 떨어졌는지 잊었냐?"
"그래요. 그건 그렇다 쳐. 근데 그거 당신 몸 아닌데 괜찮아요?"
"어차피 게임에서도 이 몸으로 썼는데 뭘. 네가 얘기했잖냐. 이제 내 몸이라고."
창염은 이미 샤베트를 전부 먹어치웠다.
"식후 운동, 필요하지 않겠어?"
"......그렇네요, 식후 운동."
창염은 군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종종걸음으로 침대로 달려가 몸을 던지듯 누웠다.
드디어. 드디어 새로운 역사가 쓰여지는 건가.
나는 정말로 오랜만에 아랫도리가 불끈 달아오르는 느낌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금방이라도 쌀 것 같았다.
"아, 잠깐만 눈 돌리고 있을래요?"
"뭐?"
"벗는 거 보여주는 거 좀 그러니까."
눈만 돌리겠는가. 나는 몸까지 돌렸다. 사락, 사락 하는 소리와 함께 창염의 옷이 스치는 소리가 났고, 나는 달아오른 내 아랫도리를 손으로 슬쩍 가늠했다.
'주인공 거 그대로네.'
미칠듯한 대물은 아니더라도 평균보다는 훨씬 큰 정도. 루트나 아이템으로 크기나 길이, 형태등을 커스터마이징 할 수 있기야 하지만, 그래도 디폴트 형태가 16명 히로인들 모두에게 통용될 정도로 딱 적당했다.
'난, 오늘을 위해 그 많고 많은 시간을....'
"다됐어요. 이제 돌아도 돼요."
나는 바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곳에는-
"여름이니까 수영복 입어봤어요. ...어? 뭘 그렇게 기대한 거예요? 먹는 건 내가 먹었지 당신이 먹은 게 아니잖아요. 그럼 식후 운동이 성립하지 않지."
"......."
창염은 하얀 와이셔츠 차림으로 엎드린 채 나를 향해 게슴츠레 웃고 있었다. 수영복이라고 안 했나? 라고 생각하는 순간, 창염은 와이셔츠를 슬쩍 들어올리며 안을 비췄다.
"안에 입었으니까 걱정마요."
"...그런데 속옷이 아니라 굳이 수영복인 이유는 뭐지?"
"속옷은 부끄러운거고, 수영복은 당당한 거니까?"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나는 허리띠를 풀려고 했고, 창염은 손가락으로 X자를 그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샤베트 내가 거의 다 먹었잖아요? 그럼 나만 식후운동하면 되는 거죠. 당신은 이쪽으로 와서 마사지나 하세요. 오랜만에 당신 마사지 좀 받고 싶으니까."
"......지금 나 화난 거 안 보이냐?"
"시끄러워요. 아니면 저 그냥 들어갑니다? 몸도 줬으니 저 할 일 끝났거든요?"
"......."
어쩔 수 없다. 창염과의 데이트는 에스컬레이트처럼 단계적으로 올라가는 이상, 지금의 스킨십이 창염이 허락하는 수준이었다. 나는 창염의 허벅지 위에 올라타, 와이셔츠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흐흥."
창염은 내게 몸을 맡긴 채 긴장을 완전히 풀고 있었다. 라온과 유이신이 누워있었고, 가을이 누워있었던 침대를 마치 제 색으로 물들이는 것 마냥 창염은 침대에 엎드려있었다.
스윽.
나는 창염의 등허리를 손으로 밀어올렸다. 잘록한 허리를 따라 올라가는 엄지손가락에 창염은 간지러운 듯 웃음을 실실 흘리고 있었다.
"닿는데요."
"...불가항력이다."
"변명은. 쯧. 알았어요. 오랜만에 좀 받아보려 했더니, 아무래도 당신을 진정시킬 필요가 있겠네요."
번쩍!
창염은 아래에 누운 상태로 손을 뻗어, 내 몸을 잡고 침대에 눕혔다. 나와 창염이 딱 옆으로 달라붙어있을만한 너비였고, 창염은 나를 정자세로 눕힌 뒤 상체를 들어올렸다. 카디건처럼 입은 와이셔츠 사이로 볼륨감 있는 가슴을 흰색 비키니가 감싸고 있었다.
"흠, 잠시만요."
창염은 흘러내리는 자신의 머리칼을 하나로 묶어 들어올렸다. 등허리까지 닿는 긴 머리칼을 하나로 묶어 말총머리로 가지런히 정리한 창염은 내 가슴 위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손 쓰면 저 들어갈 거예요."
나는 바로 뻗으려던 손을 허공에서 멈춰세웠다. 창염은 다리를 내 옆구리에 딱 붙인 채 자세를 고정했다. 이 빌어먹을 코트 때문에 감촉이 직접 닿지는 않았다.
"가만히 있어요. 움직이지 마시고."
창염의 손이 내 허리띠를 잡았다. 능숙한 손길로 허리띠의 버클을 풀고, 한 번에 풀어낸 창염은 지퍼를 내리고 바지를 슥 내려버렸다.
"......."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드디어 거사가 이루어지는구나. 나는 괜시리 눈물까지 핑 돌았-
우웅, 우웅.
창염의 마력이 내 성기 주변에 움직이기 시작했다. 잔뜩 팽창한 혈기는 창염의 마력에 의해 픽 가라앉았고, 나는 사정도 못한 채 고개가 꺾였다.
"자, 진정했죠?"
고개를 돌린 창염은 나를 향해 짓궃게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설마 마력을 통해 강제로 진정시킬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무슨 망상을 하는 거예요? 설마 엄한 생각 하신 거 아니죠? 손으로? 입으로? 발로? 그도 아니면...푸흐흐!"
창염은 죽어버린 내 분신에 검지를 튕겼다. 따가운 고통이 하반신을 맴돌았지만, 나는 그보다 마음의 상처가 더 컸다.
"오늘까지 고생했는데 설마 그걸 할 체력이랑 정신이 있겠어요? 오늘은 그만 자요."
아니다.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심지어 행위를 하고 나서 펜릴-아지다하카-히드라와의 3연전을 치르라고 해도 나는 할 수 있다. 불꽃처럼 내 모든 걸 불태우더라도 창염과-
"잘 자요. 오늘은 이만 수고 했어요. 괜히 일정 짠다고 밤 샐 생각하지 말고."
내 위에서 몸을 돌린 창염은 나를 향해 손을 뻗었고, 나는 몰려우는 수마에 더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
그 날, 꿈을 꿨다.
나를 등지고 앉은 창염이 내 아래에서 허리를 흔드는 꿈을.
하나로 묶은 머리칼이 풀려 나풀거리는 모습은 활활 타오르는 불꽃과도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