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7화 〉1부 14장 18
피의 일주일.
1999년 12월 25일, 세뇌된 간부들이 성주에 의해 지구로 넘어오면서 일주일가량을 미쳐 날뛰었다. 그 과정에서 죽은 사람의 수는 이루 말할 수 없었고, 한국도 그 피해를 피해갈 수는 없었다.
아무리 한국에는 직접적인 영향이 미치지 않았더라고 하더라도, 세계 전체에서 6억 하고도 수 억명이 죽었던 대재앙.
폭주한 간부들은 일주일을 날뛴 끝에 잠들었다고는 하나, 그들이 지구로 넘어오면서 열린 일곱 개의 차원문을 통해 괴수는 우후죽순으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로 인해 가족을 잃은 이도 있었다.
그로 인해 가세가 기운 이도 있었다.
그로 인해 기회를 잡고 출세한 이도 있었다.
누구나 그러하겠지만 원정대의 히어로들 또한 피의 일주일 사건은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고, 그 사태의 원흉이라고 할 수 있는 정령은 바로 눈앞에 있었다.
"......."
천현택은 연거푸 수염을 만지작거리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강하백은 당시에 10대 후반의 청년이었으나, 천현택은 그 사태로 인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을 잃은 장본인이었다.
"선배님…."
이승형은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워낙 피닉스가 비장한 각오로 말하는 바람에, 자신도 모르게 입을 놀린 것은 경솔하다 못해 명백한 실수였다.
피닉스가 떠난 브리핑 룸.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은 가운데, 드디어 천현택이 입을 열었다.
"카르나...양이라고 부르면 좋겠나?"
"이명도 괜찮고 이름도 괜찮다."
"그럼 카르나 양, 자네는 간부적으로 1999년생이라고 했지. 그렇다면 피닉스 또한 1999년생인가?"
천현택은 더할 나위 없이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에 다른 히어로들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백희아 조차도 뭐라 말할 수 없어 입을 뻐끔거리고 있는 동안, 그마나 강하백이 헛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영감, 내가 이런 말 하기는 거 이상하지만 원망스럽지 않수?"
"원망? 원망스러운게 뭐 있을까? 벌써 시간도 오래 지났고, 사람이 어찌할 수 있었던게 아니잖느냐. 태풍이나 지진 같은 것에 잃었다고 생각하고 살아왔지. 끌끌."
오히려 천현택은 어깨를 으쓱이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리고 그 당사자도 세뇌를 당했다고 하지 않았느냐. 총알을 탓할까, 아니면 그 총을 당긴 자를 탓할까? 진짜 따져야할 이는 따로 있지 않겠느냐."
"성주."
천가을이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정령들은 성주가 세뇌시켜서 날뛰게 된 거잖아. 그럼 다 성주 탓이네."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일의 원흉은 성주이니, 일단 성주부터 죽이고 봐야한다고."
히어로들은 저마다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피닉스가 요구한 대로, 하나의 잠정적 결론을 도출하는데에 이르렀다.
"다시금 확인하는 거지만…."
"성주를 쓰러뜨릴 때 까지. 그 때까지는 협력하는 걸로 하지. 집행관?"
"...마음같아서는 명령을 내리고 싶지만, 여기서 확언하겠습니다."
백희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원하시면 앞으로의 원정에 참여를 부탁드리지 않겠습니다. 절대로 그 선택에 피해를 입지 않도록 제가 잘-"
"협력 안할 사람 손?"
천가을이 백희아의 말을 끊었다. 그 누구도 손을 들지 않았다.
"그럼 됐네. 뭘 자꾸 신파를 부리고 그러니? 자, 너는 나랑 같이 가자. 언니가 좋은 거 알려줄게."
"자, 잠깐…! 이, 이 인간 눈이 위험해보여요! 카르나 님!"
천가을에게 잡힌 가루라는 몸을 아둥바둥거리며 저항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천가을 또한 S급의 스펙을 가지고 있었고, 가루라는 피닉스로부터 사고를 치지 말라는 취지의 명령을 받았다.
"걱정마. 꼬옥 끌어안고 자기만 할게. 알겠지…?"
"히, 히익?!"
옷속을 파고드는 천가을의 손길에 가루라는 비명을 질렀지만, 창조주인 카르나는 깊은 고민에 빠진 채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면 나는 21살의 여인으로, 그대들에게 존대를 해야하는 건가? 분명 여성이 윗사람을 부르는 호칭은 언니나 오빠라고 들었는데. 그렇다면."
카르나의 손가락이 천현택과 이승형을 가리켰다.
"현택 오빠? 승형 오빠? 이렇게 부르는 것이 맞는가?"
"...아무래도 이 친구는 상식부터 다시 배워야 할 것 같네 그려."
히어로들에게 과거는 더이상 문제가 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현재.
"팬텀 누님! 설마 이상한 짓을 하시려는 건 아니죠! 그래도 스승님 몸이랑 똑같은 몸이라고요!"
"걱정마! 등만 볼 거야, 등만! 커피귀신도 궁금해 하더라니까! 너도 궁금하잖아!"
"제가 그걸 왜 궁금해합니까! 저는 이미-"
"이미 뭐? 너 혹시-"
가루라의 정조에 대한 문제라거나.
"오빠 칭호는 하지말라? 이상하군. 비자야나 바르가바는 무조건 오빠라고 불러야 한다고 했는데…. 아, 그렇군! 현택 오라버니, 하백 오라버니! 나이로 따지면 그대들이 내 윗사람이니 호칭도 높여야 할 터!"
"나는 하백 오빠로 좋다."
"이 정신 나간 머저리 놈이. 이 놈아, 네 나이를 생각해라! 노망 났느냐?!"
"아 어떻소! 외계인인데 거 나이가 좀 다를 수 있지!"
정령의 나이와 호칭에 대한 문제라거나.
"카르나 님에 대한 주소는 저희 집으로 해야겠군요. 백 카르나. 후후…"
"집행관 님, 아무리 그래도 본인 의사도 없이 성씨를 박아넣은 것은 좀 치사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러다가 저희 단장님까지 백 피닉스나 백 청화로 만드실 생각이십니까?"
"......당신은 참 눈치가 빠르단 말이죠."
카르나의 호적에 관한 문제라거나.
어느 대화에도 끼지 않고있던 양선우는 고개를 들어올리며 코를 훌쩍거렸다.
"개판이네. ...응? 너 지금 뭐하니?"
"반성문을 작성하고 있었습니다."
박라온은 장문의 레포트를 쓰고 있었다.
"킨나라와의 싸움부터 시작하여, 카루라와의 싸움까지. 제 실수에 대하여 분석을 해야-"
"아…."
유일하게 정상적인 분위에서 침착함을 유지하던 이는 너무 모범적인 일을 하고 있었다. 양선우는 한 번 더 코를 훌쩍이며 한탄했다.
"방에 들어가서 술이나 마실까…."
함께 마셔줄 사람이 필요했다. 양선우의 머릿속에는 하필이면 피닉스가 양선우의 미래를 스포한 그 남자가 떠올라버렸다.
인도, 백나로 호의 저녁은 그렇게 저물어갔다.
***
"진짜 관리하기 귀찮네…."
여러모로 빌런으로 활동하기 귀찮은 설정이다. 간부들이 아무리 후에 정령으로 각성했다고는 해도, 과거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니까.
'그래도 그대로 간다.'
이미 기호지세인 상황에서 핸들을 꺾거나 돌릴수도 없다. 한 번 잉크가 묻은 도화지는 더러워지면 더 더러워졌지 다시 하얗게 물들지는 않는다.
그래서 나는 청화와 피닉스를 철저히 나누려했다. 온갖 더러움은 피닉스의 것이며, 청화는 순수한 푸른 색으로 남아있어야 했다.
지금은 비록 둘이 하나이나….
"잡생각은 나중에."
지금은 너무나도 중요한 문제를 해결할 때다. 나는 방 안에 결계를 쳤다. 카르나 조차도 들어올 수 없는 불가침의 영역이 만들어졌고, 나는 침대 위에서 내 형태를 바꾸었다.
화륵.
시야가 높아졌다. 침대에 앉은 나는 괴인형이 되어 미리 테이블에 꺼내놓았던 물건, 큐브를 손에 움켜쥐었다.
"데이트 할 시간이다."
내게 남아있던 딱 하나 남은 큐브. 카르나는 각성을 시켰으니, 나는 바로 창염을 불러내고자 했다.
화륵.
"응?"
화륵, 화르륵.
큐브에 아무리 불을 붙여봐도 소멸되지 않는다. 창염이 아니라 내가 불을 지펴서 그런가? 그렇다면 미니 피닉스를 소환해보자. 마음이 급해서 순서가 틀렸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나는 내 손을 들어올려 미니피닉스를 소환했다. 언제나처럼 푸른 불꽃의 날개를 펼치며 모습을 드러낸 미니피닉스는 나를 바라보더니-
콕.
부리로 내 이마를 찔렀다. 갑주 위를 찔렀으나, 부리에서 전해진 마력이 내 속을 진탕 헤집어놓았다.
콕, 콕콕콕!
점점 부리로 찌르는 속도가 딱따구리 수준마냥 빨라졌다. 그 고통은 카르나와의 일전을 펼치는 것보다 아팠고, 나는 미니피닉스의 겨드랑이를 잡고 내 머리에서 떼어냈다.
"......내가 뭐 잘못한 거 있나? 일단 말로 하지."
"말이요?"
화륵.
미니피닉스의 모습이 변했다. 가루라와 똑같은 얼굴의 푸른 여인은 만면에 미소가 가득했다.
아.
좆됐다.
저거 진짜 빡친 얼굴인데.
"무슨 일로 화가 났는지는 알고 계시죠?"
"잠깐. 일단 진정해라."
"변명은 죄악이라는 걸 몰라요?"
창염은 왼쪽 다리를 들어올렸다. 일부러 나한테 시위라도 하는 모양인지, 창염의 왼쪽 다리는 발목 아래가 존재하지 않았다. 창염은 내가 카르나에게 잡혔던 다리를 터뜨린 것에 화를 내고 있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안 아팠을 텐데? 분명 마력을 커트하고 끊어냈었다. 아팠다면 내가 절대로 그 방법을 쓰지 않았겠지. 안 그러냐?"
창염이 아프다고 하는데 내가 어떻게 고통을 수반하는 기술을 쓸 수 있겠는가. 나는 카르나에게 내 발목이 잡힌 순간, 아예 발목을 구성하는 마력을 끊어버렸다.
즉, 나는 내 몸을 구성하는 마력의 일부를 내 몸에서 떼어냈을 뿐이다. 단지 그게 내 왼발이라는 형태였을 뿐이고, 그걸 그냥 버리기는 아까우니 폭발의 매개체로 사용했던 것이다.
창염은 그것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어째서?
"내가 이걸 가르쳐준 이유가 뭐죠?"
창염은 엄지와 검지만 펼친 채 손가락을 흔들었다. 나는 기억을 더듬어 당당히 얘기했다.
"아프지 말라고 가르쳐 준 거지."
"그럼 왜 기껏 가르쳐 준 총을 안 쓰고 또 쌈박질이나 하고 다니는 거예요?"
"그야 이유는 간단하지."
나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카르나가 궁극기를 쓰게 만들려면 서로 창칼을 부딪혀야 하는데, 멀리서 총을 쏴대기만 하면 과연 카르나가 전투에 희열을 느낄 수 있었을까?"
그럴싸한 총기도 없었고, 덕배를 총으로 만들어도 그 파괴력은 고작 B급 수준이었다. 내 논리적인 반박에 창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마 아닐 걸? 원작에서도 원딜들이 나서면 흥이 식는다면서 근접전만 7연전을 하지 않았냐. 아마 총으로 멀리서 쏘기만 했으면 카르나는 절대로 궁극기를 쓰지 않았을 거다."
"빡치게 만들면 궁극기 쓰지 않았을 까요?"
"총으로 빡치게 만들어? 빡칠 때 까지 정수리만 쏠 생각이냐? 차라리 숟가락으로 죽을 때 까지 뒷통수를 후리고 말지."
"......칫."
창염은 혀를 차며 고개를 돌렸다. 거너로서 싸우라고 내게 기술을 가르쳐주기는 했지만, 카르나와의 싸움에서는 거너로서 싸울 환경이 아니었다.
"애초에 개천광도 원래는 원딜 아니냐. 그게 '카르나'라는 상태로 창을 들고 근접전을 하고 있으니, 너도 속이 답답하기야 하겠지. 사수가 거리를 벌리지 않고 앞에서 주먹다짐이나 하고 있으니."
"그걸 아는 사람이 그런 말을 해요? 목소리 되찾았다고 아주 마음대로 지껄이시네, 정말."
"하지만 말이다, 중요한 게 있어."
나는 창염에게 분명히 내 의사를 밝혔다. 나는 창염을 바닥에 내려놓고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미 창염은 불꽃으로 발을 만들어낸 지 오래였다.
"이 몸이 곧 무기인데, 이것보다 더 강한 무기가 어디있겠어?"
"맞는 말이니까 뭐라 말을 할 수가 없네요. 짜증나기는 하지만."
"...너 솔직히 말해보자."
나는 두손으로 창염의 볼을 붙잡았다. 창염은 고개를 돌리려했지만, 그보다 내가 잡는게 더 빨랐다.
"너 그냥 네가 가르쳐준 거 내가 안 썼다고 삐진 거지?"
"아닌데요?"
대답이 칼같이 날아왔다. 삐졌다.
"열심히 가르쳐 준 기술 안 쓰고 주먹질로 싸워서 삐진 거 아니냐."
"허, 누가 삐져요? 제가 지륜인 줄 알아요? 고작 그런 걸로 삐지게? 아니거든요? 제가 얼마나 이해심이 깊은 사람인데."
창염은 눈을 부라리며 따박따박 말대꾸를 했다. 나는 창염의 볼을 손바닥으로 빙글빙글 돌린 뒤, 창염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래, 그래. 다음에는 꼭 거너로 싸우마. 나도 너처럼 화력 좋은 총을 구해서 말이야."
"...돌아가면 총부터 만들어놔요. 쌍권총으로. 알겠어요?"
"알았다. 흑사갈 코어 두 개 구해다가 바로 멋진 걸로 두 정 만들어 놓으마."
일정에 할 일이 추가되었다. 우선순위는 0순위. 큐브 수색이나 간부 수색보다 더 중요한 것은 딸기의 공급과 삐진 창염을 달래는 일이었다.
"나온 김에 딸기 샤베트 좀 먹겠나? 사장님에게 특별히 주문해서 들고 왔다. 시간은 좀 지나기는 했지만, 포장에 석하랑이 직접 만든 얼음이 담겨있어서 만든 순간과 큰 차이는 없을 거야."
"잠깐만요. 내가 후안 사장님이 당신이랑 이유나에게서 영감을 받아 사흘 밤낮을 고민해서 만든 레시피로 만들어진 딸기 샤베트 하나에 지금 이 끓어넘치는 분노를 삭히고 그냥 넘어갈 거라고 생각해요?"
"응."
"맞아요. 얼른 꺼내와요."
창염은 싱글벙글 웃으며 테이블에 앉았다. 나도 냉장고에 넣어둔 아이스박스를 꺼내들었다. 창염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다가 눈을 치켜뜨며 내게 삐죽였다.
"분명히 말하는데 저 안 삐졌어요."
삐진게 아니라 섭섭했던 걸로 하자.
나는 창염의 앞에서 미리 준비한 샤베트를 꺼내고 창염의 맞은 편에 마주 앉았다.
"음…. 혼자 먹기에는 양이 많네요? 뭐지? 나 계속 오랫동안 먹으면서 같이 있어주기를 바라는 개수작? 푸흐흐."
"......."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창염은 헤실거리며 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혼자 먹기 아까우니까 같이 먹죠."
"뭐?"
창염이 손으로 내 얼굴을 쓸어내렸다. 창염의 보드라운 손가락이 내 이마부터 아래까지 쓸었다.
내 얼굴?
"뭐야?"
내가 왜 몸이 있어?
"푸흐흐."
창염은 짖궃은 장난을 친 아이처럼 웃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