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2화 〉1부 14장 12
이승형은 눈을 떴다. 일격에 나가떨어지는 굴욕이 생생했고, 자신이 피닉스의 옆으로 날아가는 것을 똑똑히 느꼈다.
'이기면 다른 기술도 가르쳐 준다고 했는데.'
져버렸다. 주먹 한 번 쓰지도 패배했고, 이승형은 결계에 부딪혀 나가떨어졌다. 다행히 죽거나 크게 다치지는 않았지만, 패배의 고통은 언제나 쓰라렸다.
'그런데 이 감촉은-'
"가만히 있어요. 움직이지 말고."
스승과는 다른 목소리가 얼굴 바로 위에서 울렸다. 머리색과 눈동자는 다르지만, 피닉스와 똑같은 얼굴의 가루라는 표독스러운 눈빛으로 이승형의 위에 몸을 겹치고 있었다.
그렇다면 자신의 가슴께에 닿는 이 물컹한 감촉은-
"절대로 일어나지 마요. 일어나는 즉시 우리 죽어요."
"...?"
"위."
둘은 무너진 돌담과 결계의 벽 사이에 기적적으로 떨어졌다. 피닉스가 의도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둘은 전투의 '여파'에서 유일한 안전지대에 놓여있었다.
쿠웅, 쿠---웅!!
엄청난 마력 폭발이 연쇄적으로 터져나갔다. 이승형은 눈을 찡그렸고, 가루라는 착잡한 얼굴로 고개를 묻었다.
"...우리는 끼어들 수 없는 싸움인 거예요."
"아...."
이승형은 고개를 돌렸다. 무너진 돌담의 사이 사이, 흑청과 적금이 쉴 틈 없이 부딪히는 전투는 자신의 눈으로도 따라갈 수 없는 수준이었다.
"무슨 전투가."
아무리 정령이라고 하더라도 이런 표현을 할 수 있을까. 이승형은 가루라의 아래에 깔려, 한 번도 보짐 못한 전투를 두 눈에 담았다.
* * *
주먹을 얼굴을 향해 내지른다. 카르나는 그걸 고개를 돌리는 것으로 피했다.
카르나의 창이 내 얼굴을 찌르려했다. 나도 고개를 돌려 창을 피했다.
카앙!
서로가 같은 생각을 했다. 나와 카르나는 동시에 서로를 향해 발을 차올렸다.
키기긱!!
검은 갑주와 카르나의 황금 갑주가 스파크를 일으켰다. 양쪽다 마력으로 이루어진 무구이지만, 내 쪽은 괴수로서의 잔재이고 카르나의 것은 '괴인의 무기화'로 이루어진 물건이었다.
카앙!
힘겨루기는 내 승리로 끝났다. 카르나는 한 걸음 물러서며 거리를 벌리려했고, 나는 바로 카르나를 쫓아 손톱을 세웠다.
카앙!
카르나는 창대째로 휘둘러서 나를 막으려고 했다. 하지만 거리가 충분하지 않았고, 나는 다리를 앞으로 쭉 뻗어 미끄러지듯 상체를 숙였다.
그리고 손바닥을 들어 창대를 처올렸다.
"큭!"
무기가 튕겨져나가며 카르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간신히 창은 놓치지 않았지만, 창으로 앞을 막고 있던 흉부가 활짝 열렸다.
카앙!
나는 주먹을 말아쥐어 카르나의 복부를 강타했다. 황급갑옷이 또다시 크게 흔들렸고, 카르나는 인상을 찡그렸다. 카르나의 황금갑옷 또한 S급 괴인으로 만들어진 방어구라 그런지, 내 결계처럼 단단했다.
겉이 딱딱하다면 속을 헤집어놓을 뿐.
나는 주먹을 다시 당겨 타격한 지점을 향해 다시 내질렀다.
"어딜!"
카르나는 내 손목을 양손으로 잡아 비틀었다. 나는 카르나의 완력에 의해 몸이 180도 뒤집혔다.
하지만 공중은 나의 영역이다. 나는 몸이 뒤집히자마자 날개를 펼쳐 자리를 이탈했고, 카르나는 수도를 휘둘러 내 잔상을 잘라냈다.
화륵.
나는 횡으로 날아오는 참격을 향해 손날을 세워 내리쳤다. 참격의 면을 때린 덕분에 마력은 반으로 쪼개졌고, 나는 참격을 양옆으로 던지고 날개를 펄럭였다.
불과 2m. 나는 그 짧은 거리를 낙하하여 카르나에게 다리를 뻗었다.
푸욱!
카르나의 어깨에 킥이 작렬했다. 황금갑옷이 다시금 크게 흔들렸고, 내 푸른 불꽃이 카르나의 갑옷 위를 덮었다.
"흠!"
카르나는 이번에는 내 발목을 붙잡았다. 이번에는 놓치지 않겠다는 듯, 카르나는 붙잡은 발목을 손아귀 힘으로 비틀었다.
으지직!
카르나의 황금갑옷과 달리, 내 갑주는 카르나의 손아귀 힘에 의해 구겨졌다. 나는 내 다리까지 타격을 입기전에 카르나의 손을 빠져나와야 했고, 발목으로 연결되는 마력을 끊고 하늘을 날아 이탈했다.
"뭣-"
딱!
내가 손가락을 튕기자마자 카르나가 잡고있던 발목이 폭발했다. 카르나는 창염을 그대로 뒤집어썼고, 나는 폭연이 생기기도 전에 날개를 펄럭여 카르나의 뒤를 점했다.
"크흑!"
나는 카르나의 뒤에서 허리를 꽉 붙잡았다. 허리를 분질러버리기 위한 베어허그였으나, 황금 갑옷은 좀처럼 구겨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중력가속도에 의한 낙하의 충격은 어떨까. 나는 카르나를 잡고 하늘 높이 날아올랐고, 카르나는 수직으로 날아오르면서도 제 허리를 감싼 내 팔을 떼어내려 안간힘을 썼다.
[자이로드롭 좋아하나?]
"그런 거 모른다!"
[그럼 알려주지.]
나는 천장에 닿기 직전 날개를 펄럭여 몸을 180도 뒤집었다. 머리가 땅을 향했고, 한 발로 천장의 결계를 디디고 다리를 쭉 뻗었다.
콰--앙!!
결계를 박차고 뛰어내린 나는 전속력으로 바닥을 향해 날았다. 카르나는 수직으로 꽂히는 걸 직감하고 내게서 이탈하려 했다.
"흥! 어차피 마지막에 나를 내던지려는-"
쿠---웅!!
나는 카르나를 안은 채로 바닥에 떨어졌다. 나와 카르나는 바닥에 정수리부터 박았고, 충격은 고스란히 카르나와 내게로 전해졌다.
"??!?!"
카르나는 내가 나 또한 함께 떨어질지 예상하지 못한 눈치였다. 그 짧은 혼란 덕분에, 나는 카르나에게 연격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
쿵!
나는 카르나의 허리에 손을 올리고 몸을 비틀었다. 카르나 또한 내게서 벗어나기 위해 몸을 비틀었지만, 나는 카르나의 뒤를 점하고 그대로 바닥을 향해 밀어버렸다.
"크윽?!"
카르나는 턱을 흙바닥에 처박고 앞으로 고꾸라졌다. 나는 카르나의 등허리에 올라탔고, 날개의 끝을 날카롭게 세워 카르나의 관절을 짓눌렀다.
"너, 너 설마!"
우드득. 나는 카르나의 뒷덜미 사이로 손을 집어넣은 뒤, 황금갑옷을 안에서부터 비틀었다. 휠 듯 말 듯 갑옷은 내 손 힘을 버티고 있었고, 카르나는 몸부림을 치면서도 나를 비웃었다.
"흥! 아무리 너라도 내 갑옷은-"
[나그네가 왜 옷을 벗었는 지 아나?]
"뭐?"
[더워서다.]
화륵! 나는 갑옷 사이에 밀어넣은 손에서 창염을 뿜어냈다. 카르나의 몸속은 창염으로 불타올랐다.
"흥!"
하지만 카르나는 비명 하나 없었고, 귀걸이 하나가 금빛의 빛을 내며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바로 카르나의 등을 누르고 일어나 수직으로 날아올랐다.
구구구---
폭풍전야. 금빛의 마력이 서서히 카르나의 귀걸이로 모여들더니.
■■■■■■■!!
금빛의 섬광이 폭발했다. 주변을 모두 휩쓰는 막강한 폭발이 나를 덮쳤고, 나는 내 앞에 보호막을 둘러 폭발을 흘려냈다. 카르나의 빛은 원자 단위의 칼날이 되어 내 보호막을 때렸지만, 나 또한 마력을 최대한 불어넣어 막았기에 데미지는 없었다.
대신, 전장이 황폐하되었다. 전장 한가운데에서 터진 '핵폭발'의 여파로 인해, 전장 구석구석에 놓여있던 잔여물들이 모두 결계를 향해 밀려났다.
"후후, 이걸 쓰게 되는 것도 정말 오랜만이군."
카르나는 태양의 모양을 한 귀걸이를 만지작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또한 천장에 발을 디디고 거꾸로 섰다. 카르나는 나를 올려다보고, 나는 카르나를 내려다봤다. 그 거리가 100m 정도였지만 우리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브라흐마스트라'. 역시 너라면 이걸 감당해낼 수 있을 줄 알았다."
[마력으로 유사 핵폭발을 일으키는 기술이라....]
원작의 카르나는 자신의 활-'비자야'에 화살로 실어 쏘았다. 그러나 지금의 카르나는 비자야를 어디에 두고 온 건지, 브라흐마스트라를 방어용 기술로만 사용했다.
[거슬리는군.]
나는 날개를 펄럭여 바람을 일으켰다. 시야를 방해하는 금빛 마력의 잔재가 날개에서 떨어진 깃털의 무게에 짓눌렸고, 카르나는 창을 다시 집어들며 나를 향해 겨눴다.
"하-앗!"
카르나는 나를 향해 수직으로 창을 내질렀다. 금빛의 창날이 창끝에서 쏘아져 수직으로 날아왔으며, 그 마력의 날들은 정확히 내 깃털들을 요격했다.
콰과과광!!
푸른 불곷이 연쇄폭발을 일으켰다. 카르나는 고작 20cm도 되지 않는 작은 깃털들을 정확히 요격하였고, 폭발의 마력을 머금은 깃털들은 카르나에게 닿지도 못하고 공중에서 폭발했다.
하지만 잔불은 남아있다. 애초에 나는 깃털이 바닥에 닿을 거라고 기대도 하지 않았다.
화륵.
대신 그 안에 불씨들을 숨겨놓았고, 잔불은 눈처럼 중력에 이끌려 지면에 살포시 내려앉았다.
딱.
나는 하늘에서 손가락을 튕겼고, 불씨들은 연쇄폭발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마력을 폭발시켜 핵미사일 급의 폭발을 일으키는 건 카르나만의 특기가 아니다.
콰앙, 콰앙--!!
요격한 깃털에서 흘러나온 잔불, 그리고 요격하지 못한 깃털들은 하늘에서 내리는 폭격이었고, 카르나는 푸른 포연 속에서 맨몸으로 폭발을 견뎌냈다.
우우웅--
황금갑옷에서 뿜어져나오는 금빛이 카르나를 감싸고 있었다. 카르나에게 불사성을 부여하는 황금갑옷은 역시 여간 거슬리는 게 아니었다. 나는 날개를 접고 잠시 마력을 갈무리했고, 이번에는 카르나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브라흐마스트라!"
카르나가 호기롭게 외치자, 카르나의 주변에 야구공만한 금빛의 구체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내가 깃털에 폭발을 심었듯, 카르나 또한 수 백의 구체 속에 마력의 폭발을 실었다.
하지만 지상과 천장까지의 높이는 100m. 과연 카르나는 저 구체를 어떻게 내게 쏠 것인가.
씩.
카르나는 자신의 창대를 빙빙 돌리며, 구체를 처올렸다. 창대를 휘두르는 카르나의 회전은 멈추지 않았고, 구체들은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하나 둘 시간차를 두고 내게로 쏘아졌다.
우우웅---!!
구체들은 하나하나가 화살이요, 핵폭탄이었다. 나는 천장을 달려 날개를 펼쳤고, 천장에 딱 붙어 날았다. 직선으로 솟구치면 애꿎은 천장만 두드릴 터.
'그럴 리 없지.'
당연히 카르나도 멍청히 공격을 할 위인은 아니었다. 선두의 구체들은 서서히 방향을 꺾으며 나를 향해 날아들어왔다. 유도탄이라도 되는 듯 수백의 구체들이 내 뒤를 쫓기 시작했고, 나는 카루라를 몰았을 때 처럼 날개를 펄럭이며 원을 그리듯 날았다.
화르륵!
나는 깃털을 플레어처럼 흩뿌리며 구체들을 요격했다. 깃털이 구체에 달라붙자, 구체는 흔들거리며 아주 작게 폭발했다. 깃털에 남은 창염에 의해 폭발을 일으키는 근원인 마력 자체가 불타 사그라든 것이다.
여덟, 예순, 이백. 내 깃털이 허공에 펼쳐질때마다 구체들은 소멸했고, 전장 상공을 한 바퀴 돈 시점에서 구체는 절반 가까이 줄어있었다.
하지만 이래서는 소용이 없었다. 카르나는 아직까지도 팔팔했고, 나를 향해 창을 겨누고 있었다.
"브라흐마스트라!"
카르나의 외침과 함께 창끝에서 날카로운 마력의 창날이 발사되었다. 카르나는 정제한 자신의 마력을 나를 향해 쏘았고, 나는 이대로 계속 거리를 벌리며 유도체 핵폭탄에게 쫓길 수 없었다.
화륵.
나는 날개를 비틀어 접고는 지상을 향해 빠르게 낙하했다. 기하급수적인 궤도를 그리는 내 비행에 카르나는 브라흐마스트라를 쏘아 요격하려들었지만, 나는 그걸 손으로 쳐내며 카르나를 향한 낙하를 멈추지 않았다.
"하아-!"
카르나는 기합과 함께 창에 마력을 모았다. 창 전체가 금빛으로 빛나기 시작했고, 카르나는 정확히 내 미간을 향해 창을 내질렀다.
브라흐마스트라. 이번에 쏘아진 마력의 창날은 엄청 빠르고 강했다. 하지만 내게는 익숙한 패턴이며, 이미 검증된 대처 방안이 있었다.
카---앙!!
나는 다리를 높이 치켜들었고, 카르나가 쏜 창날의 위에 발뒷꿈치를 대고 미끄러졌다.
"뭣?!"
자신의 마력을 내리막길 삼아 낙하하는 나를 보고 카르나가 경악했다. 하지만 경악하기는 이르다. 나는 창날의 끝을 발바닥으로 디뎌 카르나를 향해 뛰었다.
"소용없다!"
카르나는 나를 정확히 겨누고 창을 사선으로 내질렀다. 위치상 정확히 내 터져나간 발목을 노리려는 각도.
화륵.
"에잇."
나는 카르나의 창을 발로 때려 몸을 빙그르르 굴렀다. 인간형으로 몸이 바뀌는 덕분에 카르나의 창끝은 애꿎은 허공만 찔렀다.
콰---앙!!
내 신발과 카르나의 창이 닿으며 폭발했다. 카르나는 내가 갑자기 괴인형에서 인간형으로 바꾼 것에 혼란스러워보였지만 이내 곧 정신을 차렸다.
하지만 늦었다. 나와 카르나의 거리는 고작 2m. 나는 창끝에서 터진 폭발을 타고 카르나의 얼굴을 향해 창끝을 박차고 뛰었다.
덥썩!
나는 카르나의 안면을 붙잡았다. 카르나는 화들짝 놀라며 내 손을 잡았다. 이미 나의 손은 괴인의 건틀릿이 되어 있었고, 나는 카르나의 팔꿈치를 발로 디디며 손아귀를 움켜쥐었다.
"얼굴은 갑옷 없죠?"
화륵.
화력 최대로.
내 손바닥에서 그 어느때보다도 거대하고 강한 불꽃이 터져나왔다. 화마는 카르나의 전신을 휘감아 불태웠다.
"이걸로...끝?"
푸른 불꽃속에서, 카르나는 환하게 웃고있었다.
그에, 나 또한 절로 미소가 나왔다.
"이제 좀 재미있어요?"
"그래. 너무 재미있어. 재미있어서...죽여버리고 싶을 만큼."
할짝. 카르나는 불꽃에 휩싸인 상태로 내 멱살을 쥐었다.
"다크 레기온이고 뭐고.... 정했다."
카르나는 불에 타들어가면서도 만면에 미소가 가득했다.
"싸우다 죽어라. 서로 원망하기 없기다."
"물론이죠, 푸흐흐."
카르나는 알고 있을까.
자신의 안에서 서서히 '개천광'으로서의 본질이 깨어나고 있다는 것을.
"이 전투가 끝나면 카르나, '당신'은 죽을 거예요."
"오오냐!!"
카르나는 나를 향해 주먹을 들어올렸다. 나는 붙잡힌 상태에서 괴인이 되어, 주먹을 들어올렸다. 우리는 서로를 향해 사이좋게 얼굴에 주먹을 박아넣었고, 그것을 시작으로 나의 개천광 각성을 위한 본격적인 전투가 막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