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창염의 피닉스-308화 (308/1,497)

〈 308화 〉1부 13장 25

야차의 공략 이후.

원정대는 백나로 호로 귀환해 꼼짝도 하지 않았다. 죽은 야차의 코어나 부산물은 기존 협정대로 모두 인도 측의 것이 되었으나, 야차의 반격기 도발에 당해 전황을 불리하게 만든 마하트마는 크게 빈축을 샀다.

대중들이 원정대를 눈으로 보고싶어하여 축하연을 제안했지만 그마저도 집행관은 거절했다.

"비록 레이드는 성공했다고 하지만, 우선 이번 레이드에 대한 피드백을 해야합니다. 전투에서 실수한 부분은 없었는지, 혹시나 히어로들이 상처를 입었는지부터 확인해야지요."

전투의 과정에 대하여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는 게 첫번째 이유였으며,

"더욱이 아직 모든 괴수들이 잡힌 게 아닙니다. 야차가 죽은 것을 계기로 잠자고 있던 또다른 S급 괴수들이 튀어나올 수도 있지요. 중국만 하더라도 S급이 무려 셋이나 있었지 않습니까. 비록 하나는 괴수들을 양산하는 괴수였지만 말입니다. 인도에도 그런 괴수들이 없다고 확신할 수는 없지요."

혹시나 다른 괴수가 있을 수 있으니, 벌써부터 축배를 들기에는 너무 이르다는 것이 두번째 이유였으며,

"더군다나 타지마할이라는 국가적, 아니 전세계적 문화재가 불타버렸는데 어찌 술잔을 기울일 수 있겠습니까?"

잊고있었지만 문화재 하나가 크게 불탄 것을 구실삼아, 승전 행사라도 술잔을 드는 것을 자제하자는 것이 세번째 이유였으며,

"호의는 정말로 감사하지만 히어로들이 지금 많이 지쳤습니다. 전투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지만 S급을 상대로 레이드를 뛴 만큼, 적어도 내일 아침까지는 푹 쉬어야겠지요. 장시간 비행으로 인해 지친 상태입니다. 다시 뉴델리까지 날아가기보다는 여기서 휴식을 취하고 내일 아침에 움직이도록 하겠습니다."

레이드로 인한 피로가 누적되어 무조건 휴식이 필요하다는 것이 네번째 이유였다.

집행관은 협회를 통해 정식으로 공문을 발송했고, 현장 지휘관의 판단에 따라 백나로 호는 움직이지 않았다. 결국 마하트마는 원정대의 원활한 휴식을 위해 히어로들을 동원해 주변을 통제했다.

대중들은 영웅들을 보고 싶어 했다. 하지만 그 누구도 밖으로 나서지 못했다.

히어로들은 모두 각자의 생각에 잠겨, 오늘 있었던 일에 대해 고뇌하고 있었다.

***

<휴게실.>

"춘자야, 그래서 이제 어떻느냐?"

"......."

템페스트 레이디, 양선우는 캔맥주를 홀짝이며 침묵했다. 무언가 답은 해야할 것 같지만, 아직 마음속에 응어리처럼 남아있는 자존심과 정의감 때문에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거 말 안해도 알지 않겠수? 그 놈 덕분에 이긴 거."

우사, 강하백은 오징어 다리를 질겅거리며 자조했다. 빌런의 도움을 받아 괴수를 공략, 아니 빌런이 차려놓은 밥상에 밥을 떠먹여지다시피 하여 S급 괴수를 쓰러뜨릴 수 있었다.

"역시 내 생각이 맞는 듯 허이. 그 놈도 선가놈에게 크게 당한게 분명해. 그렇지 않고서야 집행관은 이리 애지중지 하면서 선가놈은 그렇게 몰락시킨 이유가 무어 있다는 말인가?"

풍백, 천현택은 목소리를 낮추며 자신의 생각을 펼쳤다. 강하백은 기가 차서 오징어다리를 이로 뜯어버렸다.

"갑자기 선가놈이 왜 나옵니까? 아, 암만 봐도 하는 짓은 히어로 지망인데 빌런이 되기를 자처해서? 그래서 그런 말을 하는 거요, 영감?"

"그런 셈이지. 반대로 한 번 생각해보게. 내가 이 나라의 부국강병을 일으킬 능력과 정보를 알고 있어, 그런데 선가놈같은 위선자가 떡하니 나랏님으로 앉아있으면 어떻게 되겠나? 나같아도 먼저 이렇게 할 걸세. 끌끌."

천현택은 막걸리의 병목을 수도로 날렸다. 플라스틱 병의 목이 말끔히 잘려나갔고, 천현택은 병나발을 입에 불며 막걸이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러니까 선배님들 말씀은 그 자가 세계 평화를 지키기 위해 걸리적거리는 것은 치워버리고 있다는 말인 거잖아요."

양선우는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고 복잡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럼 광검 선배님은 세계 평화에 방해가 됐다는 거나 마찬가지 아니에요?"

"...그 수속성 정령인가 뭔가 하는 거, 언제든지 터질 수 있는 거였잖나. 광검 그 형님도 누구한테 순순히 죽어줄 양반 아니지 않냐. 피닉스 그 놈이 과격한 수를 쓴 건 맞지만, 내 생각에는 광검 형님도 마지막에 안심하고 떠났을 거다. 자기 목숨 바쳐서 지킬 수 있는 것들을 지켰다고 기뻐했을 걸?"

"...적어도 웃으면서 떠났을 게다."

불행히도 셋은 광검이 괴인으로 부활했다는 것 까지는 모르고 있다. 그저 우사만이 '벨로보그가 사실은 괴인이 된 광검 아니냐?'하는 추측을 제기하고 있을 뿐.

"아무튼 나는 정했다네. 그 대학교, 한 번 신청해 볼 생각이야."

"진심이세요?"

"아무렴 어떤가. 교수 자리 하나 정도는 있겠지. 내가 나이는 따지지 않아도, 전직 교수였는데 학생으로 들어가기는 그렇지 않나."

천현택은 껄껄 웃으며 막걸리를 들이켰다. 양선우의 시선이 이제는 강하백에게 꽂혔다.

"선배님은요?"

"...나는 신서울에 있을 거다. 강해지는 길이야 있다고 해도, 이 영감이 서울로 상경해버리면 신서울이 비어버리잖냐. 솔직히 지금 영감 말고도 서울로 올라가고 싶은 사람 많을 걸? 너는 어떠냐, 춘자야."

"자꾸 춘자라고 할래요? 흠흠."

양춘자는 알딸딸해진 상태로 캔맥주를 만지작거렸다.

"......확실히 뭔가 난 놈인 건 알겠어요. 하지만 저는 그래도 마음에 걸려요. 광검 님이 지금까지 쌓아온 업적이 얼마인데. 저도 신서울에 남을 겁니다."

"그래, 그러거라."

풍백, 우사, 템페스트 레이디. 저마다의 시각에서 인도 원정 이후의 행보에 대해 진솔한 마음을 나누었고, 서로에 대해 존중하기로 했다.

"그래서 그 피닉스라는 정령, 도대체 누구를 좋아하는 거요? 나는 화권. 지랄지랄 거리면서 은근슬쩍 다 챙겨주고 있더구만."

"에잉, 눈치없는 놈. 내가 보기에 화권은 그냥 속성이 같아서 그런 게다. 이 세상에 제일 무서운게 혈연, 학연, 지연 아니냐. 마력도 인연이 있다면 혈연 이상으로 더 무서울 걸?"

"그럼 영감은 누구요?"

"나는 집행관일세. 외계인 아닌가. 성별 따위 신경 안 쓸 수도 있지. 이번 야차와의 전투만 하더라도 자기 공을 모두 집행관의 공으로 돌리지 않았는가? 브리핑 룸에서 작전 계획 짤 때 느끼지 못했나? 집행관도 눈에서 아주 꿀 떨어지더구만, 껄껄껄!"

"그렇게 따지면 다른 사람이 제일 유력하지 않아요?"

관망하던 양선우가 은근슬쩍 제 의견을 밝혔다.

"팬텀, 그 여자랑 거의 계속 딱 달라붙어 있던데요? 팬텀이 아주 대놓고 가슴 들이밀면서 꼬리치던데, 그 놈...년인가? 아무튼 걔도 별로 저항 안하고 은근슬쩍 즐기고. 팬텀은 꿀이 떨어지는 게 아니라 거의 잡아먹으려 들던데요."

"그거야 팬텀 입장아닌가. 본인이 어찌 생각할 지 모르지. ......좋아."

천현택이 스마트 워치를 누르며 씩 웃었다.

"내기 함세. 어떤가?"

언제나 남의 연애사는 가장 재미있는 법이었다.

* * *

<훈련장>

"전투 이후에 피곤하지도 않습니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감각이 사라질까봐 두렵습니다."

유이신은 활을 들고 질색을 했고, 박라온은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창을 움켜쥐었다.

"단장님께 같이 지내라는 명령만 아니었어도...."

"모처럼 대련아닙니까. 아직 소등 전까지 시간이 남아있습니다."

"이 시간은 자유롭게 지내는 시간이잖아요."

"예. 자유롭게 지내는 시간에 훈련을 하는 겁니다. 어디까지나 제 개인적인 부탁이니 안 들어주셔도 좋습니다만...."

박라온은 창끝을 유이신에게 겨눴다.

"구로에서의 인연이 있지 않습니까? 대련으로 우애를 다져보도록 합시다."

"......쉬고 싶었는데."

유이신은 활을 들어 시위를 당겼다. 무표정하게 서있던 박라온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그걸 본 유이신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진짜. 누구는 개고생해서 A급으로 올라갔는데, 누구는 이쁨받아가지고 한 번에 SS급으로 올라가고...."

"죄송합니다. 제가 청화 님에게 어떤 이유로 이런 은혜를 입었는 지는 모르겠지만, 저도 아직 S급으로 올라간 것은 아닙니다."

"그 담담한 태도, 엄청 짜증나네. 지금 나를 S급으로 올라가는 발판으로 삼겠다는 거야?"

유이신은 울컥한 마음에 화살을 쏘았다. 터뷸러스의 특성이 담긴 화살은 박라온의 머리칼을 스치고 휘어져 유이신에게 다시 돌아갔다.

"피하지도 않네. 망할 것."

"피할 이유가 없습니다. 위협사격이라는 것 정도는 눈치챘습니다."

"......아, 그 S급 이상들의 특유의 감각 같은 건가? 진짜 빡치네. 아 씨, 아득바득 개처럼 일했더니 누구는 뱃속에 괴수가 들어갔는데!"

유이신이 히스테리를 부리며 활 시위를 당겼다.

"야, 내 뱃속에 네 마력이 있다고 하셨거든? 그냥은 억울해서 못 주겠고, 네가 알아서 가져가."

"......이걸로 말입니까?"

박라온은 창을 겨눴고, 유이신은 시위를 놓는 것으로 답했다.

카--앙!!

화살이 창날에 부딪혀 튕겨나갔다. 박라온은 창날의 주변에 마력의 바람을 둘러 화살을 요격하는 데 성공했다.

"좋습니다. 제 재능이 당신의 속에 있다면, 제가 이 창으로 직접 가져가도록 하겠습니다."

"......하 씨. 진짜 억울하네."

유이신은 울상을 지었다. 기세를 한 껏 끌어올린 박라온의 마력은 A급을 훨씬 상회하는 것이었고, 유이신과의 대련을 통해 왠지 모르게 다음 경지로 성장할 것만 같은 그런 기분이었다.

전직 빌런으로서 확신할 수 있었다. 자신과 대련을 마친 박라온은 분명 지금과는 다른 존재가 되어있을 것이라고.

"재능빨 진짜 더러워!"

유이신은 화살을 난사했고, 박라온은 빠르게 움직이며 화살을 전부 쳐냈다.

남들은 휴식을 취하고 있는 시각. 궁성과 운사는 대련을 하며 전력을 가다듬었다.

전투가 계속될수록 궁성의 마력은 줄어들고 운사의 마력은 늘어만갔지만, 궁성은 이에 대해 토를 달 수 없었다.

그저 박라온이 S급으로 오르게 된다면, 그걸 빌미로 삼아 S급 코어를 달라고 간청한다는 생각 말고는 할 수가 없었다.

잠시 뒤.

둘은 피닉스의 침대에서처럼 지쳐 쓰러졌다.

"하아, 하아. 너, 마력빨만은 아니었네...."

"역시, 강합니다. 당신도...."

훈련장의 불이 꺼질 때 까지, 둘은 바닥에 엎어져 이런저런 이야기꽃을 피웠다.

* * *

<함장실>

배의 기능을 제대로 돌리기 위해, 그리고 행여나 있을 모종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 백희아는 함장실의 자리를 떠날 수 없었다.

"불법 침입자는 없음…. 그래도 인도 히어로들이 염치는 있네. 기를 쓰고 배 보러 오는 사람들 막고."

비행정의 카메라 렌즈와 연동된 백희아의 시야에는 어떻게든 백나로 호의 모습을 찍어가려는 사람들이 보였고, 인도의 히어로들은 그들을 막아서며 통제했다.

"괜히 우리 쉬는데 방해하면 떠나갈까봐 무서운 거지."

야차는 쓰러졌지만 다른 S급이 있을 수 있다.

백희아는 킨나라와 가루라의 존재를 알고 있지만, 마하트마는 전혀 그 존재를 모르고 있다. 그저 백희아가 야차를 잡는 과정에서 코어만 취하겠다는 말에 '혹시나 뭔가 또 있나?'하는 심정으로 걱정하고 있을 뿐이다.

"정보가 곧 무기가 되는 세상이니…."

백희아와 피닉스의 관계에서 백희아는 철저히 을이었다. 행여나 이국으로 가지 않을까 전전긍긍 할 수 밖에 없었고, 심지어 피닉스는 아직 킨나라가 어디서 나오는지도 알려주지 않았다.

"쓰레기라도 우리 쓰레기라서 다행이다, 정말."

백희아는 피닉스가 다른 곳도 아닌 한국에 정착한 것에 연신 감사하고 있었다. 설령 피닉스가 이런 저런 피해를 입히기는 했어도, 최소한 정삼참작은 가능한 수준이었다.

집행유예 기간에 또다른 범죄를 저지른다면 모를까.

'타지마할에 불지른 건 전과라고 해야하나?'

본인 말로는 불을 직접 지르지는 않았다고 했다. 하지만 누가 봐도 타지마할의 불은 실화가 아닌 방화였고, 범인은 피닉스였다.

"......아무도 모르면 범죄가 아니라는 거나 마찬가지네."

정령이라서 그런걸까, 아니면 악의 조직 간부에게 세뇌를 당한 영향이 남아있는 걸까. 국내 정세와 지휘에만 신경을 쓰고 있던 백희아로서는 정령이니 다크 레기온이니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문외한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국적은 한국인이니까."

청화가 브로커를 통해서 만들었던 가짜 신분은 백희아에 의해 진짜 신분이 되었다. 백희아는 거기서 모종의 음모를 꾸몄다.

"청화…. 우리 백씨 가문의 일원으로 들이려면…."

한국인으로도 모자라서, 자신의 가문에 끌어들일 생각을.

"어떻게 일원으로 받아들이지? 아버지 양녀로? 그러면 나랑은 자매가 되는데. 아, 남매인가? 아무튼."

백희아의 고민은 깊어졌다. 과연 어떻게 피닉스를 백가의 일원으로 받아들일 것인가에 대해서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뾰족한 묘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재산? 마음만 먹으면 하루에 S급 코어를 수 개씩 가져온다. 사실상 평양 일대에 생성되는 괴수들은 피닉스가 독점하고 있다.

이능력? 이미 세계 최강임을 인증한 장본인이다. 인간형에 모의전으로도 꺾지 못했는데, 힘으로 굴복시키는 건 어불성설이다.

그렇다면 무슨 방법으로 피닉스를 꼬셔서 백가로 들일 것인가.

"......결혼?"

유레카. 백희아는 손뼉을 치며 자신의 번뜩이는 아이디어에 자화자찬했다.

"하지만 누가?"

결혼을 시킨다고 해도 누구와 시킬 것인가? 백희아는 가문의 모든 일원을 떠올렸으나, 피닉스와 이어질만한 사람을 아무리 생각해도 찾아볼 수 없었다.

"......."

백희아의 얼굴이 붉어졌다. 머리위에 쓴 청색의 베레모를 가슴에 품고 끌어안았다.

"......역시 어쩔 수 없네. 나밖에 없구나."

백희아는 왼손에 끼워진 검은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다짐했다.

"이름이 청화였지? 그러면 백청화로 만들어야겠네."

백희아의 원대한 계획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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