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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염의 피닉스-304화 (304/1,497)

〈 304화 〉1부 13장 21

내가 장비 제작에 걸린 시간은 총 30분.

A급 코어로 장비 다섯 개를 만드는 데 각각 1분씩 5분이 걸렸다면, 나머지 세 명의 S급 장비를 만드는 데에는 한 명당 8분씩 사용해야 했다.

"너 너무 사람 차별하는 거 아니냐? 집행관은 전투에 나가지도 않는데."

"그래도 혹시나 모르잖아요. 도탄 당해서 데미지를 입을 수 있다고요."

흑사갈 소동에서 자꾸 앞으로 나서서 진두지휘를 하는 게 영 마음에 걸렸다. 나는 예전부터 마음속으로 고민만 하던 것을 드디어 실현할 수 있어서 기쁠 뿐이었다.

"나중에는 무기도 S급으로 다 맞출 거예요. 지금은 방어구 밖에 안 되지만."

나는 여덟 벌의 의복을 각각 주인마다 구분하여 나누었다. 색조는 대부분 검은 바탕에 푸른 색이 포인트로 들어간 디자인이었지만, 옷의 형태는 대부분 달랐다.

전형적인 히어로 슈트 계열이 화권, 몸에 달라붙는 바디슈트 스타일의 궁성과 템페스트 레이디, 군복 계열의 집행관, 술사에 가까운 도인 컨셉의 풍백과 우사, 그리고 화보라도 찍으러 나온 듯한 연예인 옷 스타일의 팬텀.

"아주 코트 중독이야, 아주. 얘 나중에 변신할 때는 어떻게 되냐?"

"글쎄요. 코트는 남녀 공용이니까 위에 걸치지 않을까요?"

"그런가. 솔직히 그건 아무래도 좋은데."

덕배는 테이블 위에 올려진 캘리펠라의 코어를 들어올리며 내게 건넸다.

"자, 이제 내 것도 만들어줘야지."

"뭔 개소리예요?"

"뭐? 나는?! 너 이런 식으로 차별하기 있냐?!"

"무기에다가 장식 달 것도 아닌데, 캘리펠라를 왜 당신 위에다 발라요? 헛소리 마요. 당신은 내 전용 무기니까."

나는 덕배의 등을 선점해 그를 덕배트로 만들어버렸다. 배트가 바닥을 구르며 생난리를 부렸지만, 나는 덕배트의 몸통을 지긋이 밟고 귀걸이를 풀었다.

"집행관은 무기가 필요 없으니까,일단 S급 무기부터 만들어야겠죠?"

S급 광속성의 캘리펠라. 야차에게 일격을 날릴 무기로 가장 안성맞춤이었다. 무기 제작은 조금 있다가 하기로 한 나는 장비를 배부하기 위해 특실의 문을 열었다. 템페스트 레이디가 부서버린 바람에, 나는 문 앞에 결계를 치고 지내야 했다.

"...크흠."

모두가 밖에서 내 작업이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바닥에 구르는 덕배트를 뒷꿈치로 차 벽에 굴린 뒤, 결계를 뜯어내어 방 안을 가리켰다.

"한 명씩 들어와서 가져가요."

히어로들은 새치기 없이 순서를 지켜 장비를 챙겨갔다. 콜커타에 도착하기까지 남은 시간은 30분.

"백나로 호가 도착하면 바로 야차가 있을 법한 곳을 탐색할 거니까, 전부 각자 방에서 방어구 갈아입고 전투 준비 하세요. 30분 동안 방어구에 마력 돌리면서 익숙하게 만들고."

"...너 그러니까 꼭 지휘관 같다?"

마지막으로 옷을 챙기려던 팬텀의 말에 나는 볼을 긁적였다.

"......."

제복을 끌어안고 있던 집행관이 복잡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함장은 저인데."

"미안해요. 옛날 버릇이 나왔...."

나는 말을 삼켰다. 모두가 나를 향해 경악한 눈초리로 보고 있었다.

".....노코멘트."

아니, 나도 모르게 그만.

* * *

잠시 뒤.

히어로들을 물린 나는 캘리펠라와 흑염룡을 무기로 만들었고, 누군가의 부름에 따라 개인실에 초대를 받았다.

"금방 오셨네요."

집행관, 백희아는 베레모를 벗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력으로 스캔한 백희아의 몸과 옷은 딱 맞아 떨어졌고, 딱딱한 군복 스타일의 제복임에도 불구하고 백희아의 맵시는 잘 드러났다.

"역시 스킨."

"네?"

"아무것도 아녜요."

나는 손을 흔들어 말을 흘렸다. 내가 특히 신경쓴 박라온, 천가을, 백희아의 옷은 그들의 전투복 중 하나였다. DLC로 돈을 지불해야 했던 스킨과는 달리, 게임 상에서 착용하던 진짜 장비들이 백희아에게 입혀져 있었다.

"옷은 잘 맞아요?"

"예. 어떻게 이렇게 딱 맞을까 싶을 정도로 말이에요."

백희아는 착 달라붙은 허리 선에 도끼눈을 떴다. 몸의 선이 여과없이 드러나는 것이 어색한지, 백희아는 자꾸만 몸을 움직여 몸에 여유 공간을 만들려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결국에는 한숨을 푹 쉬고 나와 시선을 마주했다.

"추궁하고 싶은 건 많지만, 어차피 대답 안해줄 거 다 아니까 넘어갈 게요. 지금 궁금한 건 그게 아니라 야차를 어떻게 공략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니까."

"역시 백희아. 공과 사가 철저하네요."

"...일단 눈앞의 걱정부터 덜고 나서 보자는 거예요."

"좋아요. 따로 더 하고 싶은 말은 없어요?"

"......."

백희아는 검푸른 베레모를 벗고 내게 허리를 숙였다.

"...히어로들에게 장비를 지급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네?"

이게 그렇게 감사받을 일인가? 나는 어안이 벙벙했지만, 백희아의 표정은 세상 진지했다.

"집정관 유영호 님이 말씀하셨습니다. 히어로들이 다치지 않게 지휘하는 것 때문에 전술의 폭이 워낙에 좁았다고. 피닉스 님께서 은혜를 베풀어주신 덕분에, 저도 사용할 수 있는 전술이 상당히 많이 늘어났습니다. 무엇보다도 히어로들이 임무에서 생환할 가능성이 늘어났죠."

"그거야 당연히 해야할 일이잖아요."

"예. ...하지만 불행히도 그게 지금까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죠. 정신력으로 극복하라고 예산을 주구장창 깎았던 어떤 양아치 때문에."

백희아는 누군가에 대한 반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나는 구치소에 있을 남자에게 잠시 속으로 애도한 뒤, 백희아에게 다가가 어깨를 살포시 두드렸다.

"고생했어요. 당신도 참 뒤에서 여러모로 힘들었겠네요."

"그래서 더욱 감사한 겁니다. 이런 장비들, 어디가서 구하고 싶어도 구할 수 없는 것들이니까요. 피닉스 님 덕분에 국방 예산만 거의 수 천 억 단위의 돈을 절약한 겁니다. ...혹시 임시로 빌려주시거나 하는 건 아니시죠?"

"줬다가 빼앗는 거 이제 안하기로 했어요. 다 가져요. 물론 나한테 뒷통수 때리면 바로 입은 채로 부서버리겠지만."

내가 히어로들에게 지급한 건 나를 돕는 동료를 위한 장비지, 적이 될 자를 위해 강화시켜주는 건 카르나나 할 짓이다. 나는 어디까지나 히어로들이 야차에 이어 킨나라, 가루라, 그리고 혹시나 모를 '카르나'까지 맞상대 할지도 모르는 사태를 대비하고자 할 뿐이었다.

"...절대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제가 그렇게 하겠습니다."

하지만 백희아는 책임감을 가지고 히어로들을 다독이겠다고 내게 말했다. 나에 대한 히어로들의 시선이 참 다양함에도 불구하고, 백희아는 집행관으로서 나를 보듬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언젠가, 당신은 히어로가 될 겁니다. 인류의 평화를 지키는 정의감 넘치는 히어로가."

"......이미 많이 벗어났다고 생각하는데요."

"걱정마십시오. 제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렇게 만들테니."

"무슨 수라...."

턱. 나는 백희아의 어깨를 잡고 벽에 밀쳤다. 화장실에서의 구도와 똑같았지만, 그 때와는 달리 눈높이가 비슷했다. 나는 백희아의 귀에 얼굴을 붙이고 속삭였다.

"내가 이런 걸 원한다고 하면 어쩔 거예요? 네? 어쩌실-"

쪽.

"......."

나는 볼에 닿은 촉촉한 감촉에 얼굴이 굳었다. 절로 뒷걸음질이 쳐졌고, 나는 백희아에게서 물러섰다.

"......제 판단에 따르면, 정령은 성별이 없지만 선택을 할 수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지만."

백희아는 엄지로 자신의 입술을 훔치며 씩 웃었다.

"아무래도 당신은 괴인형의 쪽이 더 '당신답다'고 생각합니다. 집행관 판단입니다."

"......건방지군."

나는 볼을 손으로 닦아내고 몸을 변신시켰다. 다시 시야가 높아져 백희아를 내려다봤지만, 백희아는 나를 향해 고개를 빳빳히 세워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누구 마음대로 이 몸에 입술을 맞춰도 된다고 했지?]

"역시 저는 이쪽이 더 마음에 드는 군요."

백희아는 내 건틀릿을 잡아다 끌어안았다. 긴장과 흥분으로 두근거리는 백희아의 심장박동이 여과없이 전해졌다.

"언제든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분이 되어주시길 바랍니다."

[.......]

"아 참. 그런 의미에서 말이에요."

백희아는 환한 얼굴로 야차가 떡하니 찍힌 스크린을 꺼냈다.

"저희 이제 야차를 공략하는 방법에 대해 심도깊은 논의를 나눠볼까요? 빨리 야차 잡고 다른 S급 잡으러 가자고요. 우리 나라 발전의 씨앗이 될 녀석들 말이에요. 후후."

아, 좆됐다.

설마 S급 방어구 한 방에 백희아 루트가 해금될 줄이야.

은유하가 사익의 추구를 통해 개인 호감도를 올릴 수 있다면, 백희아는 정반대로 공익-나아가 국익을 추구함으로써 개인 호감도를 끌어올릴 수 있었다.

"그리고 당신은 이제 빌런이 아니라, 이 나라의 대들보가 되어주셔야 겠어요. 설화령 님과 쌍벽을 이루는 다크 히어로로서. 후후."

설마 그 애국코인이 쌓이고 쌓여, 이런 식으로 내게 부메랑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 * *

"둘이서 무슨 얘기를 했길래 쟤가 저렇게 싱글벙글이야?"

팬텀은 연신 환한 집행관을 가리키며 내 옆구리를 찔렀다. 손가락이 아니고 은근슬쩍 촉수를 꺼내 찌르는게, 또 투기를 부리는 모양이었다.

"......야차 어떻게 잡을 지 이야기를 나눴어요."

틀린 말은 아니었다. 나와 집행관은 장비가 갖춰져 강해진 전력을 바탕으로 야차를 어떻게 잡을 것인지 긴밀하게 논의를 나눴다.

"당신도 들었을 거 아녜요?"

"그래. 들었지. 둘이서 아주 번갈아가면서 신나게 떠들었잖아."

나와 집행관은 히어로들에게 한 마디씩 번갈아가며 야차의 특성과 약점, 그리고 공략 방법에 대해 읊었다. 전자는 주로 집행관이, 후자는 주로 내가 이야기를 함으로써 우리는 야차를 잡을 준비를 마쳤고, 이제 야차가 있는 곳으로 가기만 하면 끝이었다.

"...그냥 오랜만에 이야기가 통하는 사람이랑 대화를 나눠서 그런 거예요. 저 말고 집행관이."

"너도 꽤나 즐긴 것 같은데?"

"...자꾸 그럴래?"

나는 은근히 옷 안으로 들어오려는 팬텀의 촉수를 붙잡았다. 팬텀은 혀를 차며 도마뱀 꼬리 자르듯 촉수를 끊어냈다.

"칫, 방심이 없어, 방심이."

"방심할 것 같아요? 내가 진짜 어이가 없어서."

"...너 뭐 당했어?"

"몰라요."

인도 협회와 한참 이야기를 나누던 집행관이 나를 보고 입꼬리를 들어올렸다. 나는 괜히 심통이 나서 등뒤에서 촉수를 불태워버렸다.

"칫. 아주 기고만장하기는."

"준비 끝났습니다. 백나로 호는 자율주행 모드로 인근 산기슭에 안착할 겁니다."

집행관은 동기화를 끊었다. 미리 입력된 시스템에 의해 백나로 호는 안전한 곳에 정박할 것이며, 그 주변을 인도 공군과 히어로들이 지키고 있을 것이다.

"그럼 시작하죠."

위이잉.

내 말이 끝남과 동시에 해치가 열렸다. 수 킬로미터 상공에서 몰아치는 바람은 상당히 강했으나, 템페스트 레이디와 풍백에 의해 맞바람이 펼쳐졌다.

"으으...."

나는 귀걸이를 만지작거리며 주변을 훑었다. 히어로들은 나를 향해 기대를 하는 눈빛을 보내고 있었고, 팬텀은 아예 마도기어로 나를 겨누며 촬영까지 하고 있었다. 제일 짜증나는 것은 내가 할 행위에 대해 주먹까지 불끈 쥐고 눈을 빛내는 화권이었다.

저 놈은 이게 진짜로 멋있는 거라고 생각하고 있는 걸까. 나는 속으로 한숨이 나왔다.

"진짜 야차 가만 안 놔둘 거야...."

나는 해치를 향해 달려 비행정 밖으로 몸을 날렸다. 날개를 펼치지 않았기에 중력에 이끌려 내 몸은 지상으로 빠르게 떨어졌고, 뒤이어 히어로들이 하나 둘 스카이 다이빙을 하고 있었다.

확 하지말까 고민도 했지만, 나를 믿고 뛰어내리는 만큼 장난은 절대 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후우."

진짜 하기 싫다. 하지만 내 손은 이미 귀걸이를 꽉 붙잡고 있었다.

"......창염개진!"

화르륵.

캬아아아아아아아악!!

백나로 호가 떠난 아래, 날개를 펼친 흑염룡이 울부짖었다.

* * *

먹잇감의 냄새가 난다.

인간들에 의해 <야차>라고 불리는 짐승은 머리를 들어 주변을 살폈다.

킁킁.

맛있는 냄새가 풍겨오기 시작했는데, 아무리 살펴도 주변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착각인가 싶어 다시금 냄새를 맡아봤지만 확실했다. 뷔페라는 표현이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냄새는 너무나도 향긋하고 강렬했다.

당장에라도 이빨을 박아넣고 뜯어먹고 싶다. 야차는 절뚝거리는 다리를 일으켜 세워 허리를 꼿꼿히 세웠다.

■■■■■....

야차의 눈에서 보랏빛 기운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기형적으로 뒤틀린 팔은 곧게 펼쳐진 갈비뼈 하나를 잡고 툭 뽑더니, 그것을 대검처럼 손에 꼬나쥐어 사방을 경계했다.

크르르.

보이는 즉시 죽여버리라. 야차가 피가 뚝뚝 떨어지는 혀로 입술을 핥던 그 순간.

"창염 개진!"

허공에서 청백의 불꽃이 터졌다. 야차의 시야는 청색과 백색으로 뒤덮였다.

* * *

작전 브리핑이 끝나자마자 이승형이 흑염룡에게서 뛰어내렸고, 창염 개진을 외치며 야차의 대가리에 주먹을 박아넣었다.

그렇게 우리의 야차 공략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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