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7화 〉1부 13장 14
약속된 시간은 아직도 한참 남아있었다.
결계 밖에서 기다리던 집행관 이하 히어로들은 초조한 마음으로 알람이 울리기를 기다렸다. 템페스트 레이디는 이미 한참 전부터 언제든지 돌입할 수 있도록 마력을 전신에 돌리고 있었고, 끊임없이 몰아치는 투기에 우사가 나서서 진정을 시킬 정도였다.
"춘자야. 거 아직 5분 가까이 남았는데 벌써부터 마력 돌리면 쓰냐...."
"아저씨, 혹시 모르잖아요. 갑자기 결계가 풀릴 수도 있는 거 아녜요?"
템페스트 레이디는 주먹에 마력을 실어 문을 두드렸다. 여전히 문은 결계 때문에 열리지 않았고, 애꿎은 마력만 타들어갔다.
"씨이, 결계 한 번 더럽게 단단하네!"
템페스트 레이디는 침이라도 뱉을 기세로 짜증을 내며 문에서 물러섰다. 빌런에 비해 힘이 부족하다는 것을 스스로 알고 있으면서도, 괜히 짜증이나서 만만한 우사를 건드렸다.
"아저씨! 아저씨는 왜 나한테 춘자라고 불러요? 나 분명 선우라고 개명-"
푸스스.
결계를 이룬 불꽃이 사그라들었다. 꺼지지 않을 것처럼 활활 타오르던 푸른 불꽃은 힘없이 사그라들었고, 청화 전용의 VIP 객실 문이 나타났다. 히어로들은 마력을 몸에서 일으키기 시작했고, 전방에 있던 템페스트 레이디가 주먹을 들어올리며 소리쳤다.
"집행관!"
"......."
집행관은 눈을 한 번 감았다 떴다. 그 짧은 10분 사이에 온갖 불안과 걱정으로 퀭해진 눈은 거무칙칙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예정된 시간보다 결계가 일찍 사라졌다. 집행관은 예정과는 다른 사태에 책임자로서 판단을 내려야 했고, 우선 내부의 상황을 살피기 위해 마력을 끌어올렸다. 결계가 사라짐에따라 피닉스의 객실은 집행관과 동기화 되었고, 집행관은 마력의 흐름을 통해 방 내부의 모습을 훤하게 확인할-
"......절대 지금 들어가지 마세요."
집행관은 사색이 되어 진입하지 말라고 명령을 내렸다. 무언가 안에서 문제가 생겼음을 직감한 히어로들은 집행관의 명령에도 불과하고 문을 향해 다가갔다. 자신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 히어로들의 행동에 집행관은 목청을 높였다.
"지, 지금은 안 된다니까요?!"
"하지만 운사가 위험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집행관. 도대체 왜 그렇게까지 흥분한 겐가? 혹시 무슨 일이 생기기라도 했으면-"
"무, 무슨 일 있으니까 억지로 열지 마시라고요!"
집행관은 그 어느때보다 당황한 목소리로 소리쳤으나, 템페스트 레이디는 문에서 살짝 뒤로 물러서며 다리를 들어올렸다.
"미안해요, 집행관!"
콰--앙!!
템페스트 레이디는 문을 발로 차버렸다. 폭음과 함께 슬라이드로 들어가는 철문이 통째로 구겨져 떨어져나갔고, 템페스트 레이디는 관성을 이용해 방안으로 뛰어들었다.
"이 빌런 놈! 드디어 네가 본색을-"
템페스트 레이디는 방 안의 뜨거운 공기에 그대로 굳어버렸다. 그리고 침대 위의 광경을 보고 정신이 아뜩해졌다.
"......우와.""
침대 끄트머리에 앉아있던 피닉스는 딸기를 입에 문 채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피닉스의 발치에는 구겨진 철문 끝이 닿을락말락 아슬아슬하게 놓여있었다.
"이거 되게 오랜만이네요…."
피닉스는 그 누구도 이해하지 못할 말을 흘리며, 우수에 잠긴 눈빛으로 발치에 구겨진 철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거 부수고 들어오는 건 야황 아니면 아그니였…. 크흠."
피닉스는 헛기침을 하며 문을 부수고 들어온 이-템페스트 레이디에게 물었다.
"숙녀가 조신하지 못하게 문을 부수고 들어오다니."
"어, 이, 이건, 도대체…."
템페스트 레이디는 피닉스의 양 옆에 숨을 헐떡이는 두 여자를 보고 당황해 말이 제대로 나오지 못했다. 거의 나신에 가까운 상태로 몸을 부르르 떠는 모습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
딸기 바구니를 침대 옆에 놓은 피닉스가 손을 들어올렸다. 냉장고에서 갓 꺼낸 딸기를 먹어서 그런지, 피닉스의 손은 물기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오해하지 마요. 이거 절대로 그거 아니니까."
"그, 그럼 도대체."
철퍽.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 치던 템페트스 레이디는 바닥에 흥건한 물을 헛디뎠다. 물이라고 하기에는 어딘가 끈적하고 시큼한 냄새를 풍기는 것이었다.
"......쯧."
피닉스의 시선이 유이신의 입가를 잠시 스쳤다.
"그, 안에서 도대체 무슨-"
템페스트 레이디의 뒤를 이어 화권이 들어오려다 몸을 홱 하고 돌렸다. 아주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화권은 S급 답게 방 안의 상황을 토씨 하나 놓치지 않고 파악했다.
"뭔데? 운사 괴인이라도 됐-"
호들갑을 떨며 당황하던 우사가 화권의 머리를 밀치고 방안의 참상을 눈으로 확인했다. 멀찍이 보고 있던 팬텀은 흐트러진 가면을 고쳐쓰며, 가면 아래에서 혀로 입술을 핥았다.
"드디어 발정이 났나…."
가면 아래의 회색 눈동자는 분명히 피닉스를 맛있는 먹잇감처럼 노려보고 있었다. 풍백은 영혼이 나가있었고, 유일하게 제정신인 집행관만이 혼란을 진정시키기 위해 화권을 비집고 옆으로 들어갔다.
"도대체 10분 사이에 안에서 무슨 일을 하신-"
"아…."
운사가 달뜬 한숨과 함께 몸을 뒤집었다. 피닉스는 귀신같은 속도로 마력을 펼쳐 운사의 위에 푸른 베일을 덮었다.
"크, 크흠!!"
화권을 위시한 남자 히어로들은 눈을 질끈 감거나 고개를 돌려버렸다. 몽롱한 눈빛으로 방안을 훑던 운사는 베시시 웃으며 베일을 끌어안았다.
"어른이 된다는 건 이런 기분이었습니까…?"
모두의 시선이 피닉스에게로 꽂혔다. 피닉스는 고개를 한 번 천장을 향해 들어 한숨을 푹 내쉰뒤, 목을 빳빳히 세우며 당당하게 히어로들에게 선언했다.
"오해인 거예요."
* * *
잠시 뒤.
나는 재판장의 피고인 석에 앉은 것 마냥 브리핑룸 앞에 놓였다. 나에게 걸린 의혹을 해명하기 위해 나는 히어로들의 앞에 섰고, 나는 거리낄 것 없이 당당하게 무죄를 호소했다.
"전 아무 잘못 없어요. 마력 뭉친 거 풀어주다가 느껴서 가버리는 사람들이 잘못이지."
"......."
히어로들은 영 미심쩍다는 얼굴로 나를 보려봤다. 심지어 그 중 가장 눈빛이 이글거리는 이는 문을 부수고 들어왔던 템페스트 레이디도 아닌 팬텀 천가을이었다.
"얘기했잖아요. 마력은 그냥 놔두면 굳어서 쓰기 힘들어진다고. 제 마력을 안에 집어넣어서 전신에 활력을 불어넣은 거예요."
어차피 결계 안에서의 일은 박라온과 유이신 둘 말고는 아무도 모른다. 나는 오히려 뻔뻔하게 나갔고, 그에 히어로들은 긴가민가하는 눈치였다.
"그럼 운사."
집행관이 눈을 날카롭게 빛내며 운사를 추궁했다. 옷을 다시 챙겨입기는 했지만 급하게 입느라 조금 흐트러지기는 했다.
"정말로 청화의 말이 사실인가요? 무언가 엄한 일을 당하고 입막음을 당한 건 아닌가요?"
집행관은 자신의 약지에 끼워진 흑요석같은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운사를 추궁했다. 나는 행여나 운사가 내게 불리한 말을 할까봐 걱정되었다.
"운사,
"정말 기분이 날아갈 것만 같은 마사지였습니다."
운사는 자신이 겪은 상황에 대해 소상히 읊기 시작했다.
"청화 님께서는 마력을 이용해 제 몸속에 뭉친 마력들을 풀어주셨습니다. 마력도 근육같은 것이라고 하셨고, 몸속에 마력까지 불어넣어주셨습니다."
"......그런 거예요."
나는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지만 애써 침착함을 유지했다. 행여나 터뷸러스에 대한 것까지 밝히지는 않을까 노심초사했고, 운사의 설명을 들은 집행관이 고개를 갸웃하며 운사를 추궁했다.
"그뿐입니까?"
"그렇습니다. ...부끄럽게도 마사지라는 걸 처음 받아봐서, 이렇게 피로가 진하게 풀리는 감각은 처음이었습니다. 마치 온천에 몸을 담근 것 같은 기분이었습니다."
"아, 뭔지 알겠구만."
풍백이 손가락을 튕겼다.
"한 마디로 청화 아가씨가 피로를 풀어주는 마사지 실력이 너무 대단해서, 우리 운사 양이 얌전한 고양이가 되셨다는 말인감?"
"......고양이라는 비유가 맞는지는 모르겠지만요."
"그 딱딱하던 아이가 저렇게 흐트러진 모습을 처음 보니까 그런 게지! 껄껄!'
풍백은 무릎을 치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히어로들은 긴가민가하는 얼굴로 운사와 나를 쳐다봤지만, 풍백의 헛다리 덕분에 나는 위기를 모면했다.
"어찌 노인네가 나중에 한 번 마사지라도 받아봐도 되겠나?"
"지금도 가능하죠."
나는 감사한 마음을 담아 풍백에게로 달려가 그의 어깨에 손을 짚었다. 풍백은 소름끼친다는 듯 어깨가 움츠러들었으나, 내 어깨에서 퍼져나가는 마력의 기운에 전신의 긴장이 조금씩 풀려나갔다.
"허어.... 극락이로다."
"지금은 시간상 짧게 해드리는 거예요."
"지금은 이라는 말은 나중도 있다는 게군. 끌끌."
풍백은 너스레를 떨었고, 나는 엄지로 그의 뭉친 근육을 천천히 풀었다. 풍백 덕분에 내 혐의는 점점 한 꺼풀씩 벗겨지고 있었다.
"그럼 궁성은 왜 거기서 셔츠만 입고 있었지?"
"......."
템페스트 레이디의 날카로운 질문에 나는 손이 굳었다.
"어, 음...."
궁성이 있었던 이유에 대해 말하려면 터뷸러스에 대해 언급해야 하는데, 그러면 두 여자가 겪은 상황에 대해 더 상세하게 말해야했다.
"궁성은...그러니까...."
"대련 과정에서 열심히 해주셨다고 얻은 포상입니다."
이번에는 궁성이 직접 구원투수로 나섰다.
"청화 님의 손길을 한 번 받으면 헤어나올 수가 없지요. 안 그렇습니까, 팬텀?"
"......그러네. 음, 음."
팬텀은 가면 아래에서 눈을 찡그렸지만, 당장 내가 처한 난처한 상황을 더 심각하게 만들 생각은 없어보였다. 당장은.
"그리고 제가 셔츠만 입고 있던 것은 코어를 흡수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코어 흡수?"
궁성의 말에 다른 히어로들이 흥미를 보였다. 나는 은근한 궁성의 눈빛에 하는 수 없이 품에서 검은 코어를 꺼냈다.
"괴인의 강화에 대해서는 밝혀도 상관이 없기는 한데.... 괜찮겠어요?"
"이 정도는 괜찮습니다."
궁성은 다시금 자신의 셔츠를 열어젖혔다. 남자들의 시선이 잠시 궁성에게 있다가 번개같이 떨어졌다.
"봐도 괜찮습니다. 닳는 것도 아닌데. 제가 어디 뭐 부족한 것도 아니고."
궁성은 오히려 대범하게 나섰다. 그에 풍백과 우사는 거리낌없이 고개를 돌렸다. 화권은 곁눈질로 보고 있었다.
"......."
오직 집행관만이 평소보다 얼굴이 더 차가워졌을 뿐이었다. 나는 궁성의 가슴을 향해 S급 코어를 뻗으며 입모양으로 속삭였다.
일부러 지금 말했냐?
이 타이밍에 코어를 걸고 넘어진 것은 궁성의 은밀한 거래 제안이었다. 내가 궁성이 터뷸러스에게 잡아먹히게 만든 대신, 궁성은 코어로 입을 싹 닦을 요량같았다.
끄덕.
궁성은 눈을 한 번 길게 닫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나는 속으로 한숨을 쉬며 궁성의 가슴을 향해 코어를 밀어넣었다.
"원래는 인간형이 아닌 상태에서 붙이면 되는데, 이렇게도 가능해요."
"하으...."
궁성은 코어를 품고 몸을 부비적거리기 시작했다. 궁성의 말마따나 마력이 늘어나는 쾌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고, 궁성은 아주 빠르게 코어의 마력을 흡수했다. 흘리는 게 대부분이었지만.
"이런 식으로 괴인은 강화가 가능합니다. 운사 마력 풀어주는 김에 같이 했어요. 됐죠?"
딱.
나는 말이 끝나자마자 손가락을 튕겨 궁성의 가슴에 넘친 마력을 소멸시켰다. 히어로들은 복잡한 시선으로 사라지는 마력을 쳐다보다, 다시 노출된 궁성의 가슴에 고개를 잽싸게 돌렸다.
"이제 제 오해는 풀렸나요?"
"......여러모로 찝찝한 점은 많지만."
집행관은 시계를 확인하며 혀를 찼다.
"아쉽게도 슬슬 인도 영공으로 들어갈 때라, 비행정에서 내릴 준비를 해야합니다. ...전 이능력자들은 각자 방에서 하선 준비를 한 뒤, 지시에 따라 브리핑 룸으로 돌아오시길 바랍니다."
"저런. 참 공교롭네요. 시간이 벌써 그렇게 됐나요? 푸흐흐."
모두의 이목이 내게로 쏠렸다. 나는 괜히 말했나 싶었지만, 후회는 하지 않았다.
"저한테 따로 하고 싶은 말 있으면 이거로 문자해요."
나는 손목의 마도기어를 가리킨 뒤, 부리나케 브리핑룸을 빠져나와 방으로 도망쳤다.
뚜벅, 뚜벅.
누군가가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고, 나는 방 안에 흐트러진 흔적을 치운 뒤 손님을 맞이했다.
"왔어요?"
"뭘 그렇게 겁을 먹어?"
문지방에 선 팬텀-가을은 가면까지 벗고 나를 향해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설마 나한테도 비밀로 하려는 건 아니지?"
"......그거야 당연히 아니죠."
착각일까.
가을의 등 뒤로 분명 몸속에 집어넣었을 아홉 가닥의 촉수가 흐느적거리고 있는 것은.
"궁성도 부를게요. 이참에 청화단 간부들 싹다 모아서 상황 설명할테니까."
나는 간부들을 소집했고, 집행관의 소집한 시각이 되기 전에 설명을 마칠 생각이었다.
"......칫."
가을이 혀를 찼다. 분명 아쉬워하는 눈치였다.
......절대로 가을과 큐브 두 개가 있는 상황에서 단둘이 있으면 안 되겠다고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