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1화 〉1부 13장 8
창염으로부터 대인전의 전투 스타일에 대해 정신개조에 가까운 전직 권유를 받은 이후, 나는 창염의 제안대로 총을 잡았다.
실제 총기를 챙기기에는 여러모로 문제가 되어, 모델건에 덕배탄을 넣어 쏘았으나 모델건이 마력을 견디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덕배를 총으로 쓰기로 마음먹었다. 돌덩이를 총 모양으로 깎아 무게가 상당히 나갔으나, 내게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모든 부품이 바위같은 재질이라는 것만 빼면 내 손에 들린 물건은 분명 총이었다. 내가 덕배트를 총으로 바꾸자마자 히어로들이 당황하는게 한 눈에 들어왔다.
"사격에 주의!"
백희아는 비명을 지르듯 히어로들에게 일갈하여 전열을 재정비했다. 내 접근에 대응하는 밀집 진형에서 산개를 통해 사격에 대응하고자 하는 지휘는 일품이었다.
하지만.
'창염은 총을 들라고 했고, 전투 스타일을 바꾸라고 했지.'
"바꾸죠, 바꿔야죠."
바꾸긴 할 건데, 멀리서 총이나 쏘며 깔짝거리는 건 내 성미에 맞지 않다. 솔직히 말해서 그건 원작 주인공 놈의 전투 스타일과 흡사해서, 너무나도 질렸다.
하지만 창염이 원하는 대로, 나는 내 몸에 상처를 입지 않으면서 총을 들기로 했다.
"회피 극딜 갑니다!"
나는 핸드건(덕배)를 전방으로 투척했다. 돌도끼처럼 날아가는 핸드건에 화권이 당황하며 두 팔을 들어올렸다.
카앙!
핸드건이 화권의 가드에 튕겨올랐다. 이미 달려서 거리를 좁힌 나는 하늘로 뛰어올라 핸드건을 잡았다. 핸드건의 '총열'을 잡았다.
"사수 견제!"
집행관은 급히 명령을 내렸지만, 유감스럽게도 내가 조금 더 빨랐다. 나는 총열을 꽉 움켜쥔 뒤, 탄창 부분을 아래로 뉘여 강하게 내리찍었다.
"다섯 수 앞을 봐야죠!"
퍼----억.
돌덩이같은 탄창이 화권의 정수리를 내리찍었다. 화권의 보호막은 산산조각났다.
"한 뚝배기 격파."
화권은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나는 앞으로 고꾸라지는 화권의 어깨를 짚고 공중제비를 돌아, 그의 등에 발을 디디고 착지했다.
"흠흠. 걱정하지마요. 얘만 이렇게 한 거니까. 안 죽었어요. 그냥 잠깐 의식만 잃은 거지."
"......다친 건 아닙니까?"
"에이, 제가 내기 걸어놓고 그렇게 쉽게 당해줄 것 같아요? 봐봐요."
나는 화권을 발끝으로 툭툭 건드렸다. 화권은 아무런 미동도 없었다.
"...봐봐요. 완벽하게 기절했죠? 고통을 느끼지도 못한다는 말입니다."
"집행관, 저거 절대로 히어로는 안 될 상이야."
"동감일세. 끌끌."
"칭찬으로 받아들일게요. 그러면…."
나는 탄창의 아래를 손으로 툭툭 털고 다음 타깃을 향해 겨눴다.
"다음 뚝빼기, 누구?"
뿅망치 때리는 정도의 타격으로, 나는 집행관까지 모든 이능력자들의 정수리에 덕배를 찍었다.
화권 이승형?
……
화권이 약한 거다.
***
잠시 뒤. 내 세컨드 페이즈를 견뎌내지 못한 이능력자들은 모두 기절했다. 배를 운행해야하는 백희아, 그리고 내 괴인 둘을 제외하고 네 히어로는 의식을 잃은 채 벽에 곱게 뉘여있었다.
"그럼 이제 메인이네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유일하게 전력을 보존한 운사가 기다렸다는 듯 창을 들고 일어났다. 운사는 다른 히어로들이 일방적으로 당하는 것을 내 아래에서 지켜보기만 했다.
"그래서 감상은 어때요?"
"야만적이지만 효율적인 전투였다고 생각합니다."
운사의 감상은 건조하기 그지 없었다. 별다른 미사여구도 없이, 운사는 자신의 감정을 그대로 내비쳤다.
"그쵸? 그럼 여기서 질문. 만약 당신이 이 전투 스타일을 본받는다면 어떨 것 같아요?"
"...저랑은 어울리지 않는 전투 방식입니다. 아실지 모르겠지만, 제 이능력은-"
"알아요. 탐식운. 구름에 닿는 모든 것을 먹어치우는 괴물같은 이능력이죠."
원작에서는 코어가 깨지면서 더이상 사용할 수 없게 되는 기술이지만, 탐식운은 운사에게 있어 성명절기라고 할 수 있는 트레이드 마크였다.
"하지만 그 탐식운이 당신의 성장을 가로막고 있다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저는 도통 모르겠습니다."
운사는 혼란스러워했다. 구로에서 헬하운드 수 십을 먹어치우며 혁혁한 전공을 세웠던 데에는 운사의 탐식운이 큰 영향을 끼쳤다.
"설명을 하면 탐식운을 '버릴 수' 있어요?"
"타당한 이유라면 수용하겠습니다."
"그래요, 좋은 태도에요."
운사는 경건한 자세로 내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고, 나는 탐식운의 가장 큰 문제를 지적했다.
"탐식운이 당신 풍속성 마력을 다 가져가버렸어요. 덕분에 원래 SS급 스펙이었는데 A급으로 전락한 거죠. 탐식운 때문에."
"예?"
운사는 그 특유의 말투까지 잊고 내게 반문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말 그대로의 의미에요. 수속성이야 이 땅에 물기운이 충만해서 B급 끝자락에 닿았다고 치고, 당신의 마력은 풍속성이 메인이었어요."
심지어 질풍객이나 풍백-템페스트 레이디보다도 더 뛰어난 풍술사가 될 수 있었다. 그런데 탐식운이 그 미래를 막아버렸다.
"탐식운을 만드는 데 풍속성 마력을 한 20정도 쓴 거죠. 원래 99언저리였다가, 탐식운 때문에 깎이면서 지금 75 정도 됐을 거예요. 그게 아니면 당신도 SS+가 됐을텐데."
"......믿기 힘든 말씀이십니다."
운사는 창끝에서 탐식운을 꺼냈다. 뭉게뭉게 피어오른 탐식운은 과거 구로에서 화염거인과 맞부딪혔을 때 처럼, 주변의 모든 것을 먹어칠울 기세였다.
"이 이능력 덕분에 제가 A급으로서, 삼사로서 활약할 수 있었습니다."
"예. 대신 당신의 미래 가능성을 앗아간 괴물이죠. 나중에는 목숨까지 빼앗아갈 괴물."
"......괴물?"
박라온의 표정이 굳었고, 나는 손가락으로 심장을 가리켰다.
"혹시 싸우면 싸울수록 마력의 총량이 줄어든다고 느낀 적 없어요? 당신 고질적인 문제가 적은 마력량이었잖아요."
"그거야 제가 탐식운으로 보충을 하니까.... 이런."
운사는 무언가 눈치챈 얼굴로 혀를 찼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두 손바닥을 수직으로 세웠고, 서서히 줄여나갔다.
"마력의 총량이 줄어든 만큼 탐식운의 스펙은 올라가겠죠? 그러면 그만큼 당신의 마력도 갉아먹히는 거예요. 최종적으로 당신이 탐식운을 사용할 마력마저 다 써버린 순간, 탐식운은 당신의 몸에서 떠나버릴 겁니다."
"......저는 무능력자가 되는 겁니까?"
운사는 생각도 해보지 못한 내 미래예언에 오한이 드는 듯 했다.
"아뇨. 지금은 아니죠."
미래에서는 운사가 코어가 깨져서 탐식운이 진작에 도망쳐버렸지만, 지금은 운사의 몸속에 탐식운이라는 '괴수'가 깃들어있다.
"하지만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무능력자가 될 겁니다."
"......제가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운사는 눈을 감으며 고개를 떨구었다. 이능력자로서의 삶을 계속 살아온 히어로로서, 히어로가 아닌 삶을 산다는 건 운사에게 큰 걱정거리로 다가갔을 것이다.
'실제로는 엄청 악착같이 잘 버텨내지만.'
"어떻게 해 주기를 바라요?"
운사는 지금 망설이고 있다.
지금까지 잘 써왔던 탐식운을 계속 사용할 것이냐, 아니면 버릴 것이냐. 그 근거라고는 내가 말하는 미래지식밖에 없었으니, 운사로서는 선택지가 한쪽으로 기울 수 밖에 없었다.
'보통은 안 버리고 버티겠지.'
그럴 것이다. 나는 운사에게 아직 그만큼의 신뢰를 주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운사는 그런 이들과는 상궤가 다른 여자다.
"탐식운을 제거하면 저는 SS급이 될 수 있습니까?"
"네."
"그럼 부탁드립니다."
운사는 시원시원하게 답했다. 이미 운사의 성격을 알고있는 나로서는 바로 행동에 옮기려했지만, 잠자코 듣고있던 집행관이 손을 뻗고 나서서 나를 제지했다.
"잠깐만요. 운사 님의 탐식운이 얼마나 전술적으로 유효한 기술인데, 그걸 지금 없애신다고요?"
"SS급을 만들 수 있는 절호의 찬스인데."
"잠깐만요."
집행관은 운사가 들리지 않게 아주 낮게 속삭였다.
"피닉스 씨, 지금 사기치는 거 아니죠?"
"사기?"
"탐식운이 당신한테 위험할 것 같으니까 제거하고, 이미 당신은 운사에게 '너는 이미 SS급이다'라고 말하려는 거 아니에요?"
"사람을 뭘로 보고.... 그것도 괜찮은데 해도 돼요?"
집행관은 자신이 오히려 무덤을 파는 아이디어를 내게 가르쳐줬다는 것에 사색이 되었다. 나는 집행관의 어깨를 토닥여 그럴 생각이 없음을 밝혔다.
"탐식운은 기술로서의 이름이지, 실제로는 다른 별개의 존재에요. 기생형 괴수죠."
"괴...수요?"
집행관의 표정이 굳었다. 운사는 아예 입을 손으로 막고 경악한 눈초리로 탐식운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자, 봐봐요."
나는 품안에서 흑전갈의 코어 하나를 꺼냈다. 영롱한 검은빛의 코어는 흑사갈이 낳았던 따끈따근한 B급으로, 나는 코어를 들고 탐식운에게 다가갔다.
꾸드득, 꾸득.
탐식운은 내가 코어에서 흘려보내는 마력의 냄새에 나를 향해 피어올랐다. 그건 분명 운사의 의지와 상관없는 탐식운의 본능과도 같은 움직임이었다.
"살아있는 생물같지 않아요?"
"자동요격시스템같은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
탐식운이 괴수를 직접 먹으러 가는 거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인간을 잡아먹는 취향이었다면 진작 알아챘을테지만, 탐식운은 괴수와 괴수의 코어만 집어삼키는 괴물이다. 나는 탐식운에게 코어를 먹인 뒤 운사에게 빈 손을 보였다.
"당신에게 있어서는 일종의 축복이자 저주에요. 세계 최고의 풍속성 자질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바람에 이런 변태가 깃들어버렸으니까."
"변태?"
"......자꾸 이해하지 못할 말을 하지 말고 설명 좀 해줄래?"
잠자코 있던 팬텀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나도 어느정도 설명이 필요하다고 느껴, 헛기침을 하고 이목을 집중시켰다.
"탐식운은 말이에요, 풍마룡의 제 2형태이자 기생형 괴수예요."
* * *
히로인들은 히로인들인 만큼 재능이 아주 넘쳐나는 존재들이다. 인간과 정령이 하나가 되어 서로를 이해한다는 모토에 의해, 히로인과 정령은 주인공을 사랑한다는 감정의 공유로 싱크로를 하게 된다.
10명의 인간 히로인.
7명의 정령 히로인.
이들은 각각 최적의 매치가 이루어지는 조합, 이른바 제작사에서 '이 인간 히로인은 이 정령이랑 제일 궁합이 잘 맞습니다!'라고 대놓고 어필하는 페어가 존재했다.
그리고 그 조합은 인간 히로인이 '그 속성에 인류 최고의 자질을 가지고 있다'는 말로 귀결 되었다.
먼저 화속성. 화속성은 창염의 피닉스가 주인공에게 힘을 넘겨주고 소멸하므로 짝궁인 히로인은 없다. 제법 높은 화속성의 마력을 서브로 가진 히로인이 있기는 하지만, 화속성은 어디까지나 주인공의 속성이었다.
다음으로 수속성.
'석하랑.'
애초에 본인이 반인반령이다. 석하랑 스스로 신화에 이를 수 있고, 히로인과 싱크로를 통해 정령으로서 다른 인간 히로인에게 깃드는 것도 가능하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바로 풍과 수의 복합속성을 각성한 박라온이다.
다음으로 풍속성.
'메인으로는 박라온이지.'
주인공 팀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남아있고, 펜릴과의 상성도 좋다. 박라온은 풍속성의 대표주자였고, 후에 S급 <청운>을 거쳐 SS급 <윈드시어>에 이르게 된다.
'서브로 아르엘이랑 천가을이 있고.'
설령 박라온을 풍속성 정령과 매치시키지 않더라고, 풍속성 정령-절풍의 펜릴은 제작진이 서브로 준비해준 아르엘이나 천가을과 싱크로를 하면 된다.
박라온보다 싱크로에 이르는 난이도는 높으나, 제작진은 정말로 다행히 히로인들이 최소 둘 이상의 정령과 싱크로를 할 수 있도록 안배를 해뒀다.
'그래도 박라온이 펜릴이랑 짝짜꿍하는게 제일 좋아.'
원작 기준으로 사무실 죽돌이였던 두 히로인은 가장 빠르게 친해졌고, 박라온은 후에 펜릴이 아군으로 전향하게 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그리고 정체를 드러낸 펜릴은 박라온에게 걸린 제약에 대해 언급한다.
기체형 괴수 <터뷸런스>. 오슬로 게이트를 통해 나타난 풍마룡이 제 2형태가 되어 소실하였고, 풍마룡은 세계에서 가장 풍속성 마력이 강한 인간에게 깃들어 축복과 저주를 내렸다.
운사가 탐식운이라고 부르는 이능력을 사용하게 해주는 축복 대신, 터뷸런스는 운사의 몸속에서 마력을 좀먹어들어가는 저주까지 함께 깃들게 된 것이다.
그러니 탐식운, 터뷸런스를 제거해야한다. 터뷸런스를 제거하면 다시 박라온은 풍속성 SS급으로서의 마력을 되찾게 된다.
그 방법은 오직 하나.
터뷸런스의 본체라고 할 수 있는 터뷸런스의 코어를 몸속에서 빼내는 것.
여기서 누가 정신나간 성인용 미연시 RPG 아니랄까봐, 하필이면 터뷸런스의 코어는 남사스러운 곳에 자리잡아버렸다.
어디냐고?
그저 이렇게 설명을 할 뿐.
원작 주인공은 섹스를 통해, 뱃속을 가득 채우는 방법으로 터뷸런스를 몰아내어 박라온을 풍속성 SS급으로 만들었다.
그게 내가 박라온을 풍속성 SS가 아닌, 수속성 S-이제는 SS로 만든 이유였다.
언제나 내가 박라온의 속을 가득 채워줬지만, 이제는 그 방법을 사용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